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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 반응을 통한 깨달음

III. 시 텍스트의 수용과정

2) 정서 반응을 통한 깨달음

독자-작품 사이에서 텍스트에 대한 수용이 부분적으로 이루어지는가, 전체적으 로 이루어지는가에 따라 작품의 양상은 달라진다. 왜냐하면 부분적 수용은 기의의 계열성을 획득하기 어렵지만 전체적 수용은 기의의 계열성을 획득함으로써 이루어 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독자-작품> 사이에서 발생하는 두 번째 반응은 시적 체 계에서 온전하게 의미를 수용함으로써 나타나는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독자 의 심리 속에 시인의 사고와 정서가 재현되었다는 뜻으로 시인의 창작과정에 가졌 던 사고와 정서를 독자도 느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때 갖게 되는 독자의 심리적 생리적 반응은 정서 반응을 통한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104) 정귀영, 초현실주의 , (나래원, 1983), pp. 246

105) 하나의 기표에 따른 기의를 통사처리하기 위해서는 기의들이 일정한 관계가 유지되어야 한다. 기의들이 일정한 관계를 설정하지 못하면 관련성을 상실한 두개의 개념이 고립적으로 표상됨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많은 문예이론들이 작가나 텍스트에 중심을 둔 논의들을 전개해왔 다. 그러나 언어학의 실용론적 전환의 영향은 작품의 개념을 수용자 중심으로 확 대시켰다. 그렇지만 작가, 텍스트, 수용자 중심으로 확대된 결과는 작가나 독자와 상관없이 텍스트 자체의 구조가 의미를 결정하거나 또는 작가나 텍스트와 상관없 이 독자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논의로 빠져들게 함으로써 분리적이며 동시에 고 립적인 성격을 강화시켰을 뿐이다.

분리적이고 고립적 성격이 강화될 수밖에 없었던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정서와 사고의 플롯들이 교융작용에 의해 역동적으로 정보를 만들어냄을 간과했기 때문이 며 동시에 문학적 제요소의 특성에 매몰되어 시 텍스트의 의미화 과정과 수용의 절차라는 요소간의 관계 망을 놓친 결과라 할 수 있다.

시인과 텍스트 사이에는 사고와 정서를 부여하는 규칙이 작용한다. 또 텍스트는 그러한 규칙의 실현이고 정서와 사고를 산출할 수 있는 규칙을 가지고 있다. 더욱 이 문학이 소통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생산과정에 개입된 작가의 규칙과 독자가 작품을 통해 산출하는 규칙 사이의 동일성이 전제되어야 한다.106) 이렇게 작품의 생산과 수용 사이에 작용하는 규칙의 동일성을 인정할 때 시인과 텍스트 그리고 독자와 작품으로 이어지는 문학의 소통은 완성될 수 있다. 이는 지금까지 분열적 이고 고립적이던 문예이론의 한계를 극복하여 생산과 수용의 상생론적 관계를 회 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정서반응을 통한 깨달음은 기표에 부여되는 기의의 통사처리 과정과 그 결과에 의해 나타난다. 기의가 통사처리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단절적이고 분리적으로 존 재했던 기의 체계를 일목요연하게 통합함을 말한다. 이는 일련의 기표 체계가 일 련의 기의 체계로 전환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표들의 이면에 숨 106) 생산과 수용 사이에 작용하는 규칙의 동일성은 시인의 사고와 정서가 기표에 부여되는

원리와 독자가 기표를 통해 시인의 부여한 사고와 정서를 재현하는 과정에 작용하는 문법이 동일을 말한다. 이 문법은 하나의 개별문법을 습득하는 과정처럼 꾸준한 학습의 과정을 필 요로 하며 이 과정을 통해 소통을 이룸으로써 동일성이 유지된다. 즉 인지과정의 동일성을 의미한다. 인지 과정이 동일성이 유지된다고 해서 그것이 의미의 완전한 동일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의미는 중심의미(core meaning)를 중심으로 주변의미(network meaning )가 계속 떠돌기 때문에 유사성을 지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있던 의미가 일관된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

이는 시인이 느끼고 생각하는 사고와 정서가 독자에게서 재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다고 이를 시인의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시인에 의해 부여된 것이기 는 하지만 독자에게 재현되는 순간 나타나는 사고와 정서는 독자 자신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객관적 수용의 과정, 즉 기표를 통해 시적 기의의 체계를 발견하는 해석의 과정은 철저하게 독자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독자에 의해서 해석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독자에 의해 사고와 정서가 부여되는 순간 나열된 기표의 체계가 비로소 시로 인식된다는 것이다. 의미가 없거나 파편 적이고 단절적으로 보이던 모든 기표들이 일련의 시적 기의 체계로 모습을 드러내 는 것은 기표에 숨어 있는 정서와 사고를 스스로 깨닫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든 시가 시적 기의 체계를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시는 사 전적 기의 체계를 지니고 있다. 이는 사전적 체계와 시적 체계가 분리되어 존재하 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시적 체계는 사전적 체계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체계인 점에서 사전적 체계 역시 시적 체계의 하나인 것이다.

이는 사전적 체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이 현실적으로 다수 존재하고 있 다는 사실로 확인된다. 이는 다음 작품에서도 확인된다.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구름에 달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박목월의 「나그네」 전문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기표/기의의 관계가 사전적 체계 내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서가 환기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기의 체계 가 대부분 시적 체계로 확장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서는 환기되고 있다. 이는 사전적 체계의 기의들에 의해 구성된 의미일지라도 독자의 정서를 손쉽게 자극할 수 있는 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의의 체 계가 일상적으로 흔히 경험하지 않는 특별한 상황에 대한 정보나 특정한 감정을 유발시킬 수 있는 상황을 담지(擔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사전적 체계를 벗어나 시적 체계를 갖고 있는 작품과 비교할 때 나타나지 않는 것이 있다. 기표를 통해 정서와 사고를 환기하기가 쉽다는 것이 다. 이는 사고와 정서가 사전적 기의 속에도 복속되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서가 사전적 기의 속에 들어 있으며 사고가 자동화 되는 것처럼 정서도 자동화 되어 독자는 절차에 의한 깨달음을 가질 수 없게 된다.107)

깨달음에는 절차에 의한 깨달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은 시적 기의 간 관 계를 획득해 정보를 처리하게 되는 효과만이 아니라 수용된 정보가 가지는 교훈적 의미나 철학적 의미가 만들어내는 심미적 태도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즉 절차에 의한 깨달음만이 아니라 내용에 의한 깨달음도 있다는 뜻이다.

단절적이고 분리적으로 존재해 정보처리를 쉽게 할 수 없도록 파괴된 기의들이 통사처리 과정을 거쳐 일목요연한 체계를 지닌 기의로 변화하는 과정 자체에서 획 득되는 심리적 효과를 절차에 의한 깨달음이라 한다. 이는 알지 못하는 텍스트에 서 알 수 있는 텍스트로의 전환이다. 절차에 의한 깨달음은 정서가 강화되어 일반 문법이 파괴가 심한 시 텍스트일수록 강화되고 일반문법의 파괴가 적을수록 약해 진다고 할 수 있다.

107) 루돌프 아른하임, 김춘일 역, 미술과 시지각 , (미진사, 2000), p.130.

내용에 의한 깨달음은 시 텍스트에 대한 객관적 이해로 나타나는 결과이다. 시 텍스트에는 작가가 내밀하게 포착한 유의미한 세계와 인생에 대한 사고와 주의할 만한 자극이 들어 있다. 이는 독자가 생각하지 않았던 인생이나 세계에 대한 교훈 과 철학이다. 따라서 내용에 의한 깨달음은 시 텍스트가 지니는 정보의 가치와 관 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작품이 내용에 대한 깨달음을 함의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지 적 능력에 따라 어떤 독자는 내용에 대한 깨달음을 획득하지만 어떤 독자는 이미 알고 있어 식상하게 처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용에 의한 깨달음은 작 품이 함의하고 있는 사고와 정서의 가치, 그리고 이에 대한 독자의 지적 수준에 의해 결정되는 심미적 결과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