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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와 정서의 조직 절차

II. 시 텍스트의 창작과정

2) 사고와 정서의 조직 절차

시인이 갖고 있는 의미인 사고와 정서만으로 텍스트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텍스트로 조직하기 위해서는 소여된 내재문법인 <음운구조↔어휘구조↔통사구조>

를 거쳐야 하고 유한의 질서인 일상 언어로 조직돼야 하기 때문이다.57)

여기서 시인의 사고와 정서가 순차적으로 기표에 작용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 는다. 왜냐하면 각각의 방식으로 순차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정서와 사고가 결합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거나, 사고와 정서가 서로 독립적이고 고립적이어 서 교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어떤 기표는 정서만을 나타내고 어떤 기표는 사고만을 나타내기 때문에 사고중심의 일상적 담화에서는 정서를 환기하기가 어렵게 된다. 그렇지만 일상적 담화에서도 정서를 환기할 수 있다. 이는 사고와 정서가 순차적으로 기표에 작용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사고와 정서는 각각의 처리절차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자극-반 응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외부 자극을 일정한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는 소리나 빛, 압력, 맛, 냄새와 같은 외부자극만이 아니 라 언어로 수행되는 감정이나 정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능력은 언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원초적으로 인간에게 소여(所與)된 보편문법과 비슷하다.

그러나 언어 환경에 따라 개별 문법이 존재하듯 외부 환경에 따라 일정한 자극-반응의 차이도 존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한국인이 마늘냄새를 구수하게 처리하는 반면 외국인은 역겹게 처리하는 현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러 한 차이는 인간에게 기본적으로 주어진 능력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능력 을 바탕으로 환경에 적응해 나간 결과로 보아야 한다.

이는 정서와 사고가 자아와 세계 사이의 단일한 과정만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 님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 과정은 다섯 가지 감각양식에서 독립적으로 일어나며 동시에 서로 연결되면서 통합되는 과정을 거친다. 물론 이 과정에는 언어의 생산 이나 수용과정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57) 레이재켄도프, 이정민 ․ 김정란 역, 마음의 구조 .(인간사랑, 2000), p.39.

이와 같은 사실은 정서가 언어의 처리절차를 포함한 일정한 조직절차를 갖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특히 문학작품이 언어를 매개로 한다는 점에서 정서와 사 고는 모두 언어의 처리 절차를 이용한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정서가 대뇌처 리과정을 거치고 사고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언어적으로 구성된 지식과도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58)

사고와 정서가 언어의 내재된 처리절차를 이용한다고 해서 일반문법 체계가 그 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고를 중심으로 하느냐 정서를 중심으로 하느냐에 따라 기의가 달라지고, 기의가 달라지면 문법체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일반문법은 <개념-이미지-기표>가 강력하게 결합된 것으로 사전적 체계이거나 사회적 용례를 바탕으로 하는 사고 작용으로서의 체계이다.59) 이 과정에서 기표 와 관련된 이미지와 개념이 하나인 것은 아니다. 기표와 관련된 개념이나 이미지 는 사회적 용례에 따라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사회적 용례로 정해 진 약속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이다.60) 이러한 사고중심의 일상적 언어체계와 정서 중심의 시적 체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이는 다음 그림과 같이 구체화될 수 있다.

개념

대상

개념

대상

화자 기표 청자

개념

대상

개념

대상 사전적 체계

시적 체계

<그림4> 시적 언어 체계와 일상적 언어 체계의 범주

동일한 언어 사용자가 갖고 있는 일반문법은 사전적 체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 58) 구인환 외, 문학 교수 학습 방법론 , (삼지원, 1998), p. 124.

59) 김영택 외, 자연언어처리 , (생능출판사, 2001), p. 181.

60) 이종열, 국어 비유적 의미의 인지과정에 대한 연구 , (경북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2), p.59.

다. 이 사전적 체계는 사회적 용례로 허용된 개념, 이미지, 기표 사이의 관계 규 칙이다. 그러나 시의 경우에서처럼 사회적 용례를 벗어난 개인적 의미를 기표에 부여하게 되면 개념, 이미지, 기표 사이에 존재했던 기존의 관계는 파괴되어 버린 다. 그리하여 시는 일반 문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거나 소통되지 않는 심각한 장애 를 겪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인의 사고나 정서 자체도 불합리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인 간의 정서와 사고는 무한한 데 비해 이를 드러내는 실제 언어의 음운이나 어휘, 그리고 통사는 유한하기 때문이며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무한의 사고나 정서가 아니라 유한의 질서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수용미학에서도 인정하듯이 사고나 정서는 화자와 독자의 정신이나 심리 속에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표를 통해 사고와 정서를 부여하거나 산출할 수 있는 것은 기표가 사고와 정서를 대신 드러내는 매개물이기 때문이다. 시인의 입장에서는 기표에 정서와 사고를 ‘부여할 수 있는 조건’을 지니고 있는 것이며 독 자의 입장에서는 정서와 사고를 ‘환기할 수 있는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측 면에서 시는 정서의 자극을 위한 매개물이며 대뇌의 처리 과정을 거친 어떤 반응 으로서 정서나 사고를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시인이 갖고 있는 무한의 정서를 유한의 언어질서로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극과 내재문법 그리고 이를 현현할 수 있는 구현물로서의 기표 체계가 있어야 한다. 인간은 정서를 처리할 수 있도록 소여된 내재능력으로 <자극>→<자율신경 계>→<반응>, 또는 <자극>→<신경계>→<두뇌>→<신경계>→<반응>의 처리구조와 절 차를 갖고 있다. 여기에는 <음운구조↔어휘구조↔통사구조>도 포함되어 있다고 보 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고 처리를 위한 내재문법도 정서와 같이 <두뇌>→ <반응>

의 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서가 문학으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모든 자극에 대해 동일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서 의 내재능력과 개별반응 사이, 또는 개별반응과 개별반응 사이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인간의 감각기관이 처리할 수 있는 자극의 세기나 크기, 속도는 문화나 자

연환경의 차이에 의해 변별성을 보인 반면 동일한 문화나 자연환경 속에서는 반응 의 양상이 일정한 범주 내에서 동일하거나 유사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자신의 속한 동일한 자연적 환경이나 문화적 환경에 따라 지속적으로 습득된 방식은 권역 에 따라 달라지는 개별언어와 같은 개별적 성격을 지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자극을 처리하기 위해 내재된 능력이 존재함을 말하는 것으로 일정한 처리과 정이나 절차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자극에 대한 반응의 경로, 즉 처리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대뇌의 처리과정을 거치지 않고 즉각적이며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경우와 즉각적이지 않고 대뇌를 거쳐 반응이 이루어지는 경우이다. 즉각적이지 않다는 것은 사고라는 정신 과정을 통해 외부적 자극과 감각기관이 결합․충돌한 내용을 처리하는 방식을 의 미한다.

이때 사고 과정에는 독자가 갖고 있는 문화적 배경이나 지식 등도 작용하고 있 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고 과정에 작용하는 정보는 주체가 받아들이거나 획득한 모든 사회적, 문화적, 환경적 정보이며, 동시에 배경지식이기 때문이다.

이 사고 과정은 감각기관에 의해 처리된 감정의 결과를 수용할 수도 있으며 뒤집 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감각기관에 의해 처리되는 감정보다도 더 복잡한 결과로 서 정서를 창출한다. 이때 감각기관에서 즉각적으로 처리되는 결과를 감정으로, 대뇌를 거쳐 처리되는 결과를 정서로 구분할 수 있다.61) 따라서 시인의 정서를 부여하는 과정은 기본적으로 대뇌의 처리과정을 거친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정서는 매우 자동화되어 있어 의식을 거치는지에 대한 지각도 없이 환기된다. 이는 자동화된 언어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텍스트는 기표를 매개로 하고 있으며, 이 기표에 따른 기의는 사회적 용례

61) 감정과 정서는 보통 feeling과 emotion으로 구분되나 대뇌처리과정을 거치느냐의 여부에 따라 대뇌처리를 거치는 경우는 정서로, 대뇌처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처리되는 경우는 감 정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정서도 그 이전 단계인 신경계처리 과정을 감정과 동일하게 갖는다. 그러므로 감정은 정서 생산의 원동력이며 동시에 선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 서 감정과 정서는 넓은 의미에서 동일하게 취급될 수도 있으므로 이 논의에서는 구별할 필 요가 없는 한 정서로 혼용해서 사용하고자 한다.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 사용하게 되면 자동화된다. 자동화된다는 것은 기표와 관 련해서 환기되는 사고와 그 사고에 따른 정서까지도 자동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자동화되는 정서를 문학의 정서에서 굳이 제외할 필요는 없다. 다만, 시 텍스트를 사전적이고 사회적 용례의 관점에서 보면 결합성(結合性)이 파괴된 텍스 트가 되어 버리듯이 시 텍스트 속에서 자동화된 정서 역시 어떤 일련의 흐름을 유 지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를 문학의 정서에서 제외할 필요는 없지만 본격적인 문학의 정서, 즉 텍스트가 환기시키고자 하는 본격적인 문학의 정서와는 다르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시인이 부여하는 사고와 정서는 텍스트 상에 일정한 원리와 방법으로 조직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독자가 사고와 정서를 산출하는 과정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된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시인은 자신의 정서가 어떻게 작 용하는지 논리적인 사고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독자는 이 체계를 사고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시인의 경우, 자신의 정서가 어떻게 작용하는 가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창작한다면 정서보다 사고의 작용을 강화시켜 정서를 사고에 복속시키게 되므로, 정서를 중시해야 하는 문학에 스스로 한계를 짓는 결 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독자가 사고로서 텍스트를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은 일상적 소통방 식을 벗어난 시를 객관적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사고 작용을 통해 정서 속에 잠재된 사고를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독자의 정서가 사고보 다 강력하게 작용한다면 이는 시가 함의하고 있는 사고와 정서와는 달리 독자가 갖고 있는 임의적인 정서에 빠지게 되어 객관적 수용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렇다고 독자에게 정서가 불필요하다는 것은 아니다. 독자의 정서는 재창조를 위해 필요하며 그렇게 될 때 소통이 완성될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텍스트의 생산과정에서 의미적 국면이 전략적 국면을 지배하고 전략적 국면이 조직적 국면을 지배한다면62) 정보와 자극은 의미적 국면을, 내재 62) 윤석산, 현대시학 , (새미,1996),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