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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법과 일반문법의 관계

IV. 시 텍스트의 교육원리

1) 시문법과 일반문법의 관계

시에는 보통 문법 규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는 시에 일반문법 또 는 e-언어(externalized language)를 적용시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i-언 어(internalized language)의 측면에서 보면 시가 일정한 원리에 의해 생산되고 또한 소통된다는 것은 일정한 규칙으로서 시문법이 개별문법으로서 존재한다는 것 을 말하는 것이다.

시 텍스트가 일상 언어 현실에 놓인 시적 체계라는 것은 시가 일반문법의 현실 에 놓인 시문법의 구현체임을 말하는 것으로 시 문법 속에는 일반문법도 포함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문법과 일반문법은 모두 각각의 개별문법으로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지닐 수밖에 없다. 시문법의 특징이기도 한 시문법과 일반문법 의 차이점은 공시적 입장에서 보면 일반문법의 파괴이고 통시적인 입장에서 보면 일반문법의 확장이라 할 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문법은 일반문법의 기표를 대부분 공유한다. 그러나 기표를 공유한다고 해서 시를 일반문법의 체계로 이해하려고 한다면 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시 텍스트의 기표에 관련된 기의는 사전적 체계를 벗어나는 경우 가 더 많기 때문이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기표와 기의만이 아니라 여기에 작용하는 원리 도 동시에 수행한다는 뜻이다. 이는 외국어의 기표를 알더라도 기표와 관련된 의 미 체계를 모르면 외국인과 소통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기표를 바탕으로 하더라도 기의 체계가 다르면 역시 소통 을 이룰 수 없다. 한국어의 기표 체계를 영어의 알파벳을 통해 드러낼 수는 있지 만, 그 기의 체계를 알지 못하면 소통은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을

‘saram’이라는 기표로 사용했다고 해서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소통이 이루어지 는 것은 아니다.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표와 기의에 따른 관계를 이해해 야 한다.

비어드슬리, 헤세, 레빈, 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시 텍스트의 본래의 의미 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즉, 한 발화체를 은유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먼저 수신

자가 그것의 불합리성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한다.117) 은유적 표현이 일상적 의미 로 이해된다면 전달되는 것은 의미론적 파격, 자체 모순 또는 화용론적 규범의 위 반과 이에 따르는 그릇된 서술에 불과하다. 여기서 말하는 일상적 의미는 텍스트 상에 진술된 기표와 그에 따른 사전적 의미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는 시 텍스트의 기표에 관련된 시적 의미와 사전적 의미 사이에는 괴리가 있음을 말하며 동시에 일반적 문법 규칙으로는 시적 정보를 확인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시 텍스트에서 진술된 기표들이 시적 의미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일상의 소통 체계처럼 사전적이거나 사회적 용례만으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전적 의미로 연 결하는 것은 불합리한 의미 체계이거나 정보처리를 할 수 없는 잘못된 진술에 불 과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둘째, 시문법은 일반 문법의 문장성분의 순서인 어순을 대부분 공유한다. 물론 아주 특수한 경우 그림이나 형태를 사용하는 경우가 존재할 수 있으나 이 역시 소 통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한 어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이다.

물론 어순이나 통사적 구조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러나 독자 와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면 어순이나 통사를 공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아 야 한다. 왜냐하면 일반문법에서 사용하는 어순이나 통사구조를 공유하지 않을 경 우, 독자는 이 기표의 체계를 이해하는 데에도 엄청난 에너지를 쏟아 부어야 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독자는 새롭게 창조된 기표의 나열에서 기표의 체계와 기 의를 이해하고 이를 일반 기표 체계로 다시 환원시키고 거기에 부여되는 시적 의 미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시문법은 일반문법에 비해 소통의 과정에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더 많은 에너지라는 것은 일상 언어의 정보처리 수준보다는 많되 과도하게 뛰어넘 지 않는 적당한 에너지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적당한 에너지의 사용은 독자 로 하여금 깨달음의 효과를 동반하게 되지만 과도하게 많아지면 깨달음의 효과를 동반하기 전에 독서과정을 수행하고자 하는 의욕을 상실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117) 움베르토 에코 김광현 역, 해석의 한계 , (열린책들, 1995), p.180

재현적인 양식들은 인위적 의식(consciousness)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심리적인 법칙을 갖고 있다118)는 루돌프 아른하임의 주장과도 일치한다.

시를 수용하는 데 너무 과도한 에너지를 사용하게 되면 텍스트를 객관적으로 수용했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의 효과를 동반하기가 어렵다. 물론 깨달음의 효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획득된 시적 기의에 비해 자신이 사용한 에너지가 과도하 게 되어 깨달음의 효과가 반감되는 결과를 낳아 경제성이 문제가 된다. 과도한 에 너지를 사용하여 시적 기의를 획득하더라도 가치가 전혀 없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의미라면 독자는 허탈해지고 텍스트와의 간극이 멀어지게 되는 것이 다.119)

넷째, 시문법이 함의하고 있는 정보의 양은 일반 문법이 함의하고 있는 정보의 양보다 훨씬 많고 넓다. 이는 양의 문제만이 아니라 규칙의 문제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일반 텍스트에서는 기표에 관련된 기의를 사전적 지식 또는 사회적 용례에 따라 부여하는 것이 규칙이라면 시 텍스트에서는 학습되지 않은 새로운 기의인 시 적 의미를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의 의미 구성이 시적 기의 체계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의미만으로 구성되거나 단편적이고 고립적이라면 이를 확인하기 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구성된 정보들이 일정한 계열을 이루어 야 하고 동시에 정보와 기표 간에 어떤 관계망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 텍스트의 시적 기의 구성에 일정한 계열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는 수많은 시적 기 의의 구성일지라도 전체의 체계가 드러날 수 있도록 기표가 기능해야 한다는 의미 다. 따라서 계열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의미와 정서가 일정한 원리에 따라 서로 유 기적으로 작용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섯째, 일반문법에서 사고와 정서의 관계는 정서가 사고의 틀 속에 갇혀 큰 영 향력을 행사하지 못하지만 시 문법에서는 사고에 의해 정서가 환기되기도 하고 정 서에 의해 사고가 환기되기도 하는 매우 역동적인 관계가 된다. 이는 일반문법처

118) 루돌프 아른하임, 김춘일 역, 미술과 시지각 , (미진사, 2000). p.107.

119) 루돌프 아른하임, 오용록 옮김, 엔트로피와 예술 , (전파과학사, 1996), p. 80.

럼 정서가 사고의 틀 속에만 갇혀 있지 않음을 말한다. 정서가 사고의 틀 속에만 갇혀 있지 않다는 것은 사고와의 관련성을 상실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고보다 더 강력한 운동을 한다는 뜻이다.

여섯째, 시 문법이나 일반 문법 모두 텍스트에 부여되는 정보 체계를 통해 작 가와 텍스트 그리고 독자와의 소통을 완성하려 한다. 소통은 모호한 결과를 방치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호한 결과란 소통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소통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시 문법 체계를 일반문법 체계로 전환시켜야 한다. 일반문법 체계는 발화되는 즉시 수용자가 바로 정보처리를 할 수 있기 때문 이다.

물론 일반문법 체계에서도 소통상의 오류는 발생할 수 있다. 특정한 어휘에 대 한 지식의 부재, 일시적 혼란에 의한 소통규칙의 잘못된 적용, 시청각 상의 혼란 으로 인한 생산이나 수용의 오류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일반문법 체계에서 발생 하는 오류를 수정하는 것은 시문법보다 훨씬 용이하다.

일반 문법에서도 언어의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이는 언 어의 의미를 설명하는 이론적 틀을 모색하는 것이지 없는 의미를 새롭게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아니다. 왜냐하면 의미는 사회화와 학습의 과정을 통해 언어 사용자 에게 이미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는 정서와 사고의 결과물이지만 특히 정서를 중시하는 장르이다. 정서를 강조 하게 되면 시 텍스트는 기본적으로 일반문법을 파괴하고 확장하려는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일상 언어에서도 이러한 파괴와 확장의 원리가 나타난다.120)하지만 범주의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시 텍스트가 일반문법을 파괴하고 확장하는 이유는 시가 정서를 효과적으로 드 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데 그 근본 원인이 있다. 이때 정서가 극단적으로 강화되면 사고는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지극히 개인적인 정서가 두드러지고 사회성이 강조되

120) Lakoff & Johnson,1980, Metaphors We Live By. Chicago/London:

University of Chicago Press. 노양진․나익주 역, 삶으로서의 은유 , (서광사, 1995), p.103.

는 합리주의나 이성주의의 사고는 약화되거나 파괴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왜냐하 면 합리주의와 이성주의는 사고체계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는 가치관이나 철 학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적 반응을 중시하게 되면 사고보다 정서가 중시되어 합리주의적인 태도를 벗어나게 된다.

정서를 중시한다는 것은 시가 사고 작용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베른슈타인은 예술의 운명 에서 예술이 진리로부터 소외되는 것을 미적 소외(aesthetic alienation)라고 하였다. 하지만 이 미적 소외의 문제는 예술과 진리 사이의 헤게모니는 언제나 진리에 있다고 생각되었던 현대 이전의 서구적 사 고에 기인한 결과이다. 그러므로 예술의 소외는 정서의 소외로서, 정서의 강화로 예술의 자율성이 심화되어 사고 체계로는 예술을 설명할 없는 결과에 기인한 것이 라 할 수 있다.121)

예술의 자율성이 심화되었다는 것은 사고와 정서의 상호 작용에서 정서가 사고 의 폭을 뛰어넘기 시작하였음을 말한다. 이는 사고의 작용을 뛰어넘는 정서가 발 현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되면 사고의 종합으로서의 진리는 드러나지 않는 형태가 되고 추방된 형태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진리도 서구의 합리주의와 이성주의에 근거한 사고일 뿐 으로 온전한 진리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 외계 세계는 물질적인 세계이며 어떤 영혼이나 신령이 깃들여 있는 것이라고 보지 않는 플라톤 이후 이데아를 상 실한 서구의 진리관에 따른 것이다. 이는 정서를 사고의 부수적인 것으로 인식한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서구의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는 사고 작용으로서 의미를 확대 심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는 일반문법을 바탕으로 하는 언어를 확대 발전시켰으며 필연적 으로 정서를 사고의 부속적인 것으로 전락시켜 시를 가장 열등한 장르로 취급122) 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시 문법은 정서의 운동과 필연적인 관련을 맺고 있으므

121) Derrida, Writing and Difference, tr. Alan Bass, Chicago & London :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78, p.212

122) 윤석산, 「동양시학과 서양시학의 접점 찾기」, <다층>(2000. 여름호), p.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