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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표와 기의 관계 파괴를 통한 자유 연상

III. 시 텍스트의 수용과정

1) 기표와 기의 관계 파괴를 통한 자유 연상

재창조로 나타나는 반응의 양상은 수용된 의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왜냐하 면 수용된 의미가 사전적 체계에서 수용된 표층적 의미인지 시적 체계에서 수용된 심층적 의미인지에 따라 반응의 양상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는 부분적으로 수용 된 의미와 전체적으로 수용된 의미로도 볼 수 있다. 이때 사전적 체계에서 수용되

거나 부분적으로 수용된 의미가 독자의 사고와 정서를 자극하여 나타나는 반응이 기표/기의의 파괴를 통한 자유 연상이라 할 수 있다.

시 텍스트에 진술된 기표는 언어 사용자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기표이기도 하 다. 그러므로 독자가 기표를 통해서 먼저 수용하는 것은 사전적 의미이거나 통사 처리를 생각하지 않는 고립적 의미이다. 고립적이라는 것은 독자가 시적 기의와 기의의 연결 관계를 처리하지 못하는 것으로 텍스트의 측면에서 보면 기표와 텍스 트 구조와의 상관성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고립적 의미들도 독자 를 자극하는 매개물이기는 마찬가지다.

이 자극은 시 텍스트 전체에서 환기하고자 하는 의미와 상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전적 체계만으로도 이루어진 시 텍스트가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전적 체계를 벗어나면 이 고립적 의미들은 시 텍스 트가 환기하고자 하는 의미와는 상관이 없어진다. 이렇게 되면 이 자극은 외부환 경의 다양한 자극에서 나타나는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시 텍스트에 나타난 기표 자체의 문제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이 러한 문제를 야기하는 것은 대부분 독자에게 그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 하면 기표는 <사전적 기의-백과사전적 명세사항-시적 기의>를 환기하도록 하는 매 개물이지만 사전적 기의에 머물거나 아니면 시적 기의로 확장시키는 것은 독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통사처리가 불가능한 사전적 체계에서 독자가 과도하게 의미나 정서를 부여하게 되면 이는 시 텍스트의 전체적인 정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의미나 정 서에 몰입할 수밖에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 즉 부분적 이해에 따른 독자의 반응이 다. 이러한 현상은 일상대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화자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청자에게 “밥 드셨어요”라는 말을 한 상황을 생각해 보자. 이 때 청자가 어른에게 ‘밥’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화를 내는 것 은 청자가 기표에 과도하게 개인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다. 물론 밥이라는 기표의 사전적 개념에 높임의 뜻이 들어 있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 지만 화자가 친교적인 목적으로 사용한 발화에서 ‘밥’이라는 하나의 용어에만 집착

하는 것은 화자가 전달하고자 했던 전체적인 정서와 사고에 일치하는 반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위 상황과 마찬가지로 시 텍스트의 전체적인 사고나 정서와 상관없이 수용된 특정 의미에 과도하게 의미나 정서를 부여하는 것 역시 정당한 문학적 반응이라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시 텍스트의 전체적 정서나 의미와 관련이 없다는 것은 작 품이 아닌 경우에도 발생할 수 있는 비문학적 반응양상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뇌의 처리를 거치지 않고 오감각 기관에서 자동적으로 처리되는 감정같 이 즉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반응이 즉각적인 이유는 대부분의 인간의 언 어가 거의 자동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일상적 소통에서 정서가 교류 되는 것은 발화와 동시에 청자가 기표를 사고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일상 언 어는 자동화되어 있고 즉각적임을 말하는 것이다.

독자는 각각의 기표들을 통해 사전적 의미나 사회적 용례를 환기한다. 기표는 독자의 수많은 감정들을 환기하는 매개물이다. 그러나 이 감정들은 기표에 의해 환기된 것들이며 동시에 사전적 체계나 백과사전적 명세사항에서 즉각적으로 나타 난 것들이다.

형식적으로만 보면 시의 문장성분은 일상적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다 고 해서 사고나 정서의 측면도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시 텍스 트는 내용적 측면보다 형식적 측면이 사전적 틀을 훨씬 잘 지키고 있다. 내용에 상관없이 문장성분의 특성을 보면 대부분의 시 텍스트는 한국어의 어순을 지키고 있다. 어순을 지키지 않고 파괴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모순 형용과 같은 특수한 경 우에 한정될 뿐이며 대부분은 사회적 용례인 관습적 수준을 넘어서지 않는다.

형식적으로 문장성분이 일상적 틀을 지키고 있는 이러한 현상은 독자로 하여금 진술된 기표 자체에서 사전적 정보를 환기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독자는 진술된 사전적 기표 체계를 완결된 형식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러나 형식적으로 완결되었다고 하더라도 의미가 완결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 면 사전적 기표 체계가 형식적으로 완결되었다고 하더라도 사고나 정서의 흐름은 일관성이나 플롯을 반드시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

가 형식적 측면에만 주목하여 일관된 플롯을 가진 의미로 구성하려고 하면, 사고 나 정서의 단절을 가져오는 부분에서 텍스트의 시적 기의와 관련 없는 억측을 하 고 의미부여를 하게 된다.

이런 식으로 시 텍스트를 사전적 체계와 백과사전적 명세사항을 바탕으로 하여 형식과 의미가 완결한 형식으로 보게 되면, 독자는 표층적 진술에 따른 반응의 범 주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시 텍스트의 기표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정보와 관련 을 맺는다. 하나는 명세사항을 포함하는 사전적인 범주에 속하는 의미이며 다른 하나는 시적 범주에 속하는 의미이다. 명세사항을 포함하는 사전적 범주에 속하는 의미는 일상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시적 정보는 문학과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많은 비평문에서 기표에 명세사항을 포함하는 사 전적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하여 왔다. 이는 문학 텍스트를 일반 텍스트와 같이 지 각하고 처리하는 오류이며 오독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시인의 사고와 정서에 의해 텍스트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일정한 조건으로 기표 화됨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부여될 수 있는 ‘조건이 있다(konditioniert)’는 것102)이며 동시에 산출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103) 따라서 오 독이 발생했다는 것은 독자가 이러한 조건을 제대로 산출하지 않고 임의적인 사고 나 정서로 기표의 의미를 부여했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독자가 이러한 조건을 찾기가 쉬운 것만은 아니다. 독자와 텍스트 모 두 사전적 체계의 현실에 놓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기표에 따른 하나의 사전적 기의는 친숙하거나 생경한 것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친숙 하다는 것은 용례가 많아 자동화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며 생경하다는 것은 용례 의 수준이 낮아 사전적 의미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때 사전적 의미를 잘 파악할 수 있게 되면 첫 번째 반응양상은 긍정적 반응이거나 부정적 반응이다. 이 는 시 텍스트에 나타난 기의가 자신이 좋아하는가 아니면 싫어하는가와 관련을 맺

102) Umberto Eco, Lector in fabula, 1979, 김운찬 역, 소설 속의 독자 , (열린책들, 1996), p. 47.

103) W. Iser:Die Appelstruktur der Texte, S.248f

고 있는 양상이다. 좋아하거나 싫어한다는 것은 기표에 부여되는 의미나 정서가 독자와의 관계에서 호(好) 불호(不好)의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시각, 청각, 촉각, 등 인간의 감각적 기관과 외부환경의 관계에서 긍정적 또 는 부정적 반응으로 나타나는 현상과 같다.

독자가 의미를 산출하는 조건을 찾기 어려운 또 하나의 이유는 이 기의들의 연 결망을 확인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기의들의 연결망을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친숙한 경우도 하나하나의 의미들은 확인할 수 있지만 의미와 의미의 관계나 전체 적인 일관성, 즉 의미처리 과정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독자는 하나의 기표에서 무수히 많은 새로운 기의를 환기하면서 의미처리를 수행하려 한 다.

이때 독자가 사전적 체계에 서 있는 한 하나의 기표에 따른 많은 기의들이 전 체적인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독자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전적 기의에 의해 자극된 사고와 정서는 수많은 독자의 개인적, 문화적 기의들을 계열 성에 상관없이 독자가 부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정서가 강화되어 시적 기의가 부여된 텍스트를 사전적 체계에만 독자가 고정되어 있다면 통사처리의 일 관성을 유지하기는 어려워진다.

통사적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면 독자가 기존에 갖고 있던 기의와 기의 의 연결 관계는 완전히 박탈되어 버린다. 기의 간의 연결 관계가 박탈되면 나열된 기표 체계에서 발생하는 기의를 고립적 형태로 만들게 된다. 그렇게 되면 기표/기 의만이 아니라 개념과 대상의 연결 관계도 박탈되어 버린다. 이는 사물의 현실적 인 관계를 박탈하는 것이며 동시에 언어의 오브제화를 필연적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기의는 기본적으로 처리과정을 동반하는 것으로서 낱말의 의미를 환기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통사처리를 거쳐 텍스트 전체의 의미처리를 지향하 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독자에게서 기의를 박탈하는 것은 사전적 체계를 버리도록 하며 새로 운 창조적 관계를 맺어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이는 기표와 관련된 기의를 끊임 없이 추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끊임없는 기의의 추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