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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와 정서의 유형에 따른 시 텍스트 유형

II. 시 텍스트의 창작과정

3) 사고와 정서의 유형에 따른 시 텍스트 유형

시 텍스트에서 사고와 정서의 교융(交融, Interfusion)은 강약의 문제로서 사 고에 비해 정서가 약할 경우 사전적 체계가 강화되는 시가 되고 정서가 강해질수 록 사전적 체계가 파괴되는 시가 된다. 그렇지만 이는 지향성의 문제를 간과하게 되어 사고와 정서의 교융 양상 즉 의미적 국면의 특징들을 잘 드러내지 못하는 문 제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시인의 사고와 정서는 지향성과 운동의 크기에 따라 네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으며 이는 시 텍스트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시 텍스트를 통해 사고와 정서를 확인할 수 있는 이유는 사고와 정서의 궁극의 목적은 소통과 반응이지만 문학에서의 1차적 목표는 텍스트에 현현되어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고와 정서가 기표를 매개로 결합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사고와 정서가 어떤 기표와도 무방하게 결합한다는 것은 아니다. 기표 는 사고와 정서의 교융 양상에 따라 달리 선택될 수밖에 없다. 만약 사고와 정서 의 교융 양상에 따라 기표의 선택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문학이 함의하고 있는 사 고와 정서를 변별할 수 있는 여지를 상실하게 되면서, 자족적 실체로서의 문학의 독자성 역시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고와 정서가 교융 관계를 유지하지 않는 분리적이고 독자적인 관계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매우 극단적인 경우에 한정되어 있는 본능의 문제이거나 인간이 사고와 정서를 동시에 갖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할 때만 가능하다.

문학에 작용하는 사고와 정서는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 면 <시인-텍스트>의 창작과정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절차를 동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본능적인 자극이나 정보를 문학에서 아 예 다루지 않는 것은 아니다. 문학에서는 본능 자체가 아니고 본능에 대한 화자의 사고와 정서로 환기된 절차와 의미를 다룬다고 보아야 한다.

시인의 사고와 정서의 플롯은 교융 양상의 기본적인 특징인 지향성과 강약에 따라 네 가지로 유형화 할 수 있다. 첫째, 지향성이 다르고 사고가 강한 경우, 둘

째, 지향성이 다른 가운데 정서가 강한 경우, 셋째, 지향성이 동일하고 정서가 강 한 경우, 넷째, 지향성이 동일하지만 사고가 강한 경우로 유형화하여 나눌 수 있 다.

여기서 지향성은 시인이 갖고 있는 사고와 정서의 방향이 서로 같은가 아니면 서로 다른가의 문제라기보다는 대상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니는가 하는 문제이며 크기는 시인의 사고가 얼마나 깊은가 또는 정서가 얼마나 강하게 운동하는가 하는 깊이와 강도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지향성은 물리적 개념이 아니라 심리 적 개념이며 크기 역시 사고와 정서 사이에 작용하는 상대적 개념이다.

정서와 사고가 서로 다른 지향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대상에 대해 긍정/부정, 지 향/역지향, 찬양/조롱, 거부/수용의 대립을 유발한다. 왜냐하면 정서의 방향을 유 지하고 싶은 개인적 반응과 사고의 방향을 유지하고자 하는 관념이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태도를 드러내 충돌하기 때문이다.

충돌한다는 것은 시인의 사고나 정서 중 한쪽은 이에 대한 지향을 드러내고 다 른 한쪽은 이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 다른 방향을 취하는 것만으로 텍 스트의 유형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지향이 같을지라도 정서의 강도와 사고의 폭에 따라서 텍스트의 특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 같은 방향 을 취하더라도 시인의 사고가 우월한지 정서가 우월한지에 따라 텍스트의 지배력 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때 사고가 우월하면 정서의 의미를 거부하고 싶지만 사고의 폭은 이를 수용하게 되어 시는 전체적으로 사고의 지향을 따르게 된다.

사고와 정서의 지향성이 다른 가운데 사고가 강한 경우는 윤동주의 시에서 쉽 게 확인할 수 있다. 정서의 계열에서는 불안이나 공포가 나타나고 사고의 계열에 서는 의지와 희망이 나타나게 되는데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은 희망/불안의 대 립구조를 보이면서도 사고가 우월적인 특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를 구체적으 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

어두운 방은 우주로 통하고

하늘에선가 소리처럼 바람이 불어온다.

어둠 속에서 곱게 풍화작용하는 백골을 들여다보며

눈물짓는 것이 내가 우는 것이냐 백골이 우는 것이냐

아름다운 혼이 우는 것이냐 지조 높은 개는

밤을 새워 어둠을 짖는다.

어둠을 짖는 개는 나를 쫓는 것일 게다.

가자 가자

쫓기우는 사람처럼 가자 백골 몰래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에 가자.

― 윤동주 「또 다른 故鄕」 전문

이 작품은 화자가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 나와 백골이 갈등하면서 아름다운 또 다른 고향으로 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화자의 내면적 갈등은 정서와 사고의 갈등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1연의 “고향에 돌아온 날 밤에/내 백골이 따라와 한방에 누웠다.”는 ‘고향에 내가 돌아와 방에 누웠다’와 ‘고향에 내 백골이 방에 누웠다’라는 두 진술의 결합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돌아와 방에 누 웠다’는 일반문법 체계를 파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고의 계열에 따른 진술이라 면 ‘고향에 내 백골이 방에 누웠다’는 일반문법 체계가 파괴되었다는 점에서 정서 의 계열에 따른 진술이라고 할 수 있다.

방은 피곤한 육체를 쉬게 하는 휴식의 공간이며 동시에 내일을 준비하는 공간 이다. 그러나 백골이 자는 방은 내일에 대한 준비가 없는 방이다. 그러므로 이는

고향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싶다는 정서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고의 충돌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정서와 사고가 다른 방향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도 사고의 우월적인 지위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정서의 계열에 속하는 백골이라 는 시어를 통해 잘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백골은 화자의 죽은 자아를 표상한다.

화자는 고향에 찾아와 편안하게 방에 누웠다. 하지만 화자는 밤으로 표상되는 암 울한 현실에 편안함을 위해 방에 누운 자신을 백골이라고 표현한다. 백골은 안락 함을 추구하는 화자의 정서이다. 그러므로 백골은 기본적으로 죽음의 정서를 동반 하면서 불안이나 공포를 환기하고 있기도 하다.

보통 불안과 공포는 외부환경이나 이 환경이 만들어 내는 자극이 주체의 정서 를 넘어서는 경우에 발생한다. 그렇다고 해서 주체의 정서로 처리할 수 없는 모든 자극이 불안과 공포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불안과 공포로 이어지려면 주체의 정서를 뛰어넘는 자극이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주체의 입장에서 부정적 자극이어 야 한다. 여기서 부정적이란 생존이나 심리에 위협적이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 제이다. 다시 말해 주체의 정서를 약화 소멸시킬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자 극은 기본적으로 간섭의 성질을 지니고 있으며, 이 간섭은 물질이나 주체가 갖고 있는 고유한 반응의 범위를 훨씬 뛰어넘는 정서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외부환경의 자극이 주체가 처리할 수 있는 반응의 한계를 넘어서더라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면 이는 불안이라는 반응양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인식 하지 못한다는 것은 사고적 의미만이 아니라 감각기관의 인식까지를 포함한다. 가 령 지구가 자전하거나 공전하는 과정에는 엄청난 소리의 자극이 존재하고 있으나 감각기관 어느 곳에서도 이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지구 위에 살고 있다는 것 때문에 불안을 느끼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주체를 뛰어넘는 부정적인 자극의 극단적인 결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경우 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사고 작용으로서 부여되는 의미에 의해 유발되기 도 한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것은 외부환경의 자극과 인간이 가지고 있는 정서와 의 관계에서 결정된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외부환경이 만들어내는 자극이 인 간이 가지는 정서의 처리범주를 넘어서게 되면 인간의 정서는 매우 약해지고 미미

해지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감정은 자극과 반응의 관계에서 결정되지만 외부환경의 자극이 지 속적으로 주어지면 사고는 이를 인지한다. 인지한다는 것은 일정한 방식으로 의미 화하는 것이며 동시에 용례화하는 것이다. 의미화 또는 용례화된다는 것은 정서가 일정한 흐름을 가짐으로써 플롯을 형성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자극 자체를 의미화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의미화를 이룰 수 있는 다양한 기표를 갖고 있으며 언어도 그러한 기표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소리의 자극이 처리 범주를 넘어서고 또 이를 인식하게 되면 인간은 소리를 나 타내는 기표만으로도 불안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처리 한계를 넘어서는 자극이 끊임없이 반복되면 사회화되면서 기표만으로도 불안을 느끼게 하는 자동화가 이루 어지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이 삶의 경험과 문화의 양식들을 통해 끊임없이 의미 를 구성하고 사회화해 왔음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불안은 실존적이고 상징적이다.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무나 비 존재가 불안의 기본적 원천을 제공하는 것은 사실이라 여겨진다. 이는 육체적 죽 음의 의미만이 아니라 일종의 심리적 죽음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신체 적이고 심리적인 종말을 가져오는 죽음의 불가피성은 불안의 궁극적 기초라 할 수 있다.67)

외부환경의 자극이 처리 한계를 넘어선다고 해서 모두 불안이나 공포와 같은 부정적 정서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사고가 이를 극복할 수 있다는 방향 으로 개입되면 이는 희망의 플롯이 된다. 즉 불안을 사고로 극복하고 수용하는 현 상이다.

외부자극이 화자의 처리 한계를 넘어선다는 것은 생존이나 심리적 측면에서 보 면 힘겨운 일이다. 희망을 만들어내는 자극은 부정적일 수 있으나 희망은 자극을 긍정적인 사고로 극복할 때 발생한다. 현재의 상황이 지금은 아무리 절망적이어도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 희망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희망의 플롯은 최악을 두려워하지만 나아질 것을 갈망하는 것으로 삶의 나쁜 조건에 대한 역전의 67) 리처드 래저러스, 버니스 레저러스, 앞의 책, p.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