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중반까지 인터넷에 대한 국가기구의 역할은 네트워크 관련 기술자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나 네트워크 아키텍처 개발에 대한 지원을 관리하는 정도에 그쳤다.
형성기의 사이버스페이스는 무제한의 자유를 누리는 듯했다. 초기 사이버스페이스의 이러한 조건은 네트 사용자들의 규범과 인터넷의 기술적 아키텍처 자체가 국가기구의 법률적인 규제에 대항하는 토대로 활용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1996년 미국에 서는 통신품위법(CDA) 제정을 둘러싸고 자유주의자와 규제주의자간에 대립이 이 루어진 적이 있다. 결과는 자유주의의 판정승이었고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국가기구 의 규제와 개입은 일단 멈칫하는 듯이 보였다.
자유주의자들은 사이버스페이스가 물질로 구성된 현실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정신 과 마음의 나라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규제는 원천적으로 부당하다는 주장을 펼쳤다(Barlow, 1996). 제퍼슨의 자유주의 철학과 가치관을 신봉하는 이들은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최소한의 규제도 반대하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사이버스페이 스에서 생겨나는 모든 문제들이 자율적으로 해결될 것이라는 믿음은 자유방임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가치관에 기반하고 있었고 이러한 신념의 밑바탕에는 인터넷이 채택 하고 있던 기술적 구조가 자리잡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이 사이 버스페이스의 자유와 개방성의 자연스런 질서를 유지해 줄 것이라 믿었다. 자유주의 자들의 이러한 기대는 인터넷이 채용하고 있던 기술적 구조에 힘입은 바 크다. 인터넷 이 채택한 상호호환적이며 탈중심적인 구조는 위계화된 조직을 수평화하고 닫힌 체제 를 열린 체제로 전환하는 기술적인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근거로 찬양되었다(Kapor, 1993). 인터넷은 전세계적인 컴퓨터 네트워크의 네트워크였기 때문에 사이버스페이스 에서 국민국가의 주권을 상당정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2)
초기의 기술유토피아주의자들은 인터넷이 가져온 혁명적 변화로 흔히 ‘권능강화
2) ‘전지구화(globalization)’는 1970년대 중후반의 세계경제 위기 이후 1980년대 레이건 정권이 국내외 적으로 강력하게 시행한 탈규제, 자유화, 사유화 정책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후 1990년대 클린턴 정권과 IMF는 강력하게 글로벌라이제이션을 추진하였다. 인터넷을 필두로 한 정보통신기술이 강력 한 매개역할을 담당하면서 전지구화가 가속화되면서 국민국가의 주권과 영향력은 상당히 약화되었 다(백욱인, 200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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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powerment’와 ‘수평화decentralization’, 그리고 ‘민주주의와 조화democracy and harmony’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Negroponte, 1995). 인터넷의 양방향성은 개인의 적극적인 참여를 가능하게 하고 이러한 기술적 구조와 수평적인 연대를 기반으로 하는 직접민 주주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평가되었다.3) 인터넷의 기술적인 아키 텍처는 자유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를 더욱 강화시켰다. 초기의 네티즌들은 사이버스 페이스의 분권적인 구조architecture와 열린 체제open system라는 특성에 주목하여 정부의 규제 불가능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통신품위법 을 비롯한 법률적 규제가 실패한 이유는 인터넷의 이러한 기술 적 구조 때문이라기보다는 네트 사용자들의 가치관과 규범이 이를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기 네티즌들은 제퍼슨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에 입각하여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의 근거로 삼았다. 네트즌 사이에 조성된 여론과 규제에 항의하는 집합행동 또한 정부의 직접적인 규제를 저지한 주요한 요인으로 꼽을 수 있 다. 그러나 1990년대 중후반 이후에 들어와서 제퍼스니안 자유주의의 사이버스페이스 완전독립론은 정부의 개입 및 인터넷의 본격적인 상업화에 직면하여 그 입지가 약화 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던 1990년대 초중반의 정 부개입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지만 1990년대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상업화를 통한 사이버스페이스의 재구조화에는 그다지 확 실한 대응책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유주의자들은 인터넷의 기술적 구조 자체가 변화할 수 있고 변화하고 있다는 점 을 간과했다. 자유주의자들의 기술환원론과 기술결정론은 사이버스페이스 절대독립 론으로 연결되었지만 현실은 사이버스페이스가 독립되어 있지 않고 현실사회의 한 구 성부분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었다. 인터넷의 개방성을 보장했던 기술은 언제든지 변화되고 조절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술의 성격에서 미디어의 사회적 기능과 위상을 도출하는 기술환원론이 아니라 행위자의 사회적 실천을 중시하는 사회
3) 초기 네티즌 사이에서는 기술유토피아주의의 낙관적 전망이 주류를 이루었다. 특히 와이어드 (Wired) 지를 통해 전파된 캘리포니아 이데올로기와 네그로폰테(1995)의 디지털 신화가 이런 역할 을 담당했다. 이러한 사이버스페이스 자유주의는 존 페리 발로우의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언’과 통신품위법 의 위헌판정이 이루어지던 1990년대 중반까지 네트에서 우세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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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약주의적인 기술관이 요구되는 것이다.
레식(Lessig, 1999)은 1990년대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시기를 검토하면서 인터넷 아키텍처를 포함한 기술적 통제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는 현실에 주목하였다. 그는 인터넷의 열린 체제가 국가와 자본의 개입을 통해 닫힌 체제로 전환될 수 있다는 인식 에 이르게 되었다. 그는 사이버스페이스의 독립을 보장했던 인터넷의 구조가 반대로 소프트웨어 기술(코드code)과 그의 결과적 축조물인 구조(아키텍처architecture)에 의하여 통제될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레식은 이러한 추세에 대한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을 경우 사이버스페이스는 초기 네트 사용자들의 가치와 규범이 완전히 부정되는 완벽한 규제의 공간으로 전환할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하였다.
<표 1>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규제와 입장
규제주의 자유주의 협약주의(형성주의)
규제에 대한
입장 규제 찬성 규제 반대
사이버스페이스는 새로 운 협약을 통해 잘 다듬 어져야 한다.
현실/사이버 스페이스간의
관계
현실의 연장으로서의 사 이버스페이스
정부의 규제와 통제로 부터 자유로운 공간
새로운 규약에 따라 공 동체가 형성되는 공간
대표적 주장자 초기 네티즌, Barlow Lessig
특징
정부주도의 규제 통신관련품위법 등급제
Jeffersonian Liberalism 사이버스페이스 독립선 언문
사이버스페이스는 협약 에 입각한 새로운 규제 가 필요함
누가 어떻게 협약을 만 드냐가 중요함
<표 1>은 자유주의와 규제주의, 협약주의의 특징을 정리한 것이다. 현실세계와 사 이버스페이스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규제를 바라보는 입장이 달라진다. 정부의 규제와 개입을 정당화하는 규제주의자는 사이버스 페이스를 현실세계의 확장으로 본다. 이에 반해 자유주의자들은 사이버스페이스를 정 부의 규제와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독립된 공간으로 본다. 자유주의와 규제주의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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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 차이는 사이버스페이스의 주권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서 비롯된다. 자유주의자 들은 천부인권처럼 사이버스페이스의 주권은 네트 사용자들 자신에게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규제주의자들은 현실세계의 주권이 사이버스페이스에서도 관철 되며 현실세계에 대한 부작용 때문에 현실세계의 권력이 개입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규제주의자들의 입장과 자유주의자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지만 사이버 스페이스 완전독립론이나 사이버스페이스 현실종속론은 둘 다 무리한 주장이다. 현실 세계와 사이버스페이스는 모두 현실을 구성하는 요소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레식 은 사이버스페이스가 현실세계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있다는 자유주의자들의 주장 에 동의하지 않는다. 인터넷 아키텍처의 수평적인 구조와 보이지 않는 손에 의지하는 자유주의자와는 달리 그는 사이버스페이스가 규제될 수 있고, 이미 규제되고 있다고 본다. 그는 사이버스페이스에 대한 기술적 통제가 실제로 가능하고 그것이 사이버스 페이스에 대한 규제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자유주의자와 규제주의자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갖고 있지만 양자 모두 사이버스페이스를 가능하게 만든 기술의 구조가 각각 독립과 통제의 근거 를 제공한다고 본다. 기술 자체가 갖는 속성에 입각하여 자율과 통제의 근거를 설명하 는 방식은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설득력을 상실한다. 왜냐하면 기술환원주의적인 설명 에서는 같은 기술이 통제의 근거도 되고 자율의 기반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이버 스페이스 자유주의자와 규제주의자 모두 기술결정론적 시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면 제3의 길은 어디에 있을까?
협약주의는 기술과 사회적 실천간의 관계에 주목하게 된다. 이런 경우 당연히 누가 어떻게 협약을 만드느냐가 중요한 이슈로 부각되고, 사이버스페이스의 가치와 규범을 만들고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는 당사자들간의 사회적 실천이 중요한 고려대상으로 떠오른다. 본 논문에서는 이런 제3의 입장을 ‘협약주의(형성주의)’로 구분하였다(<표 1> 참조). 레식은 정치적 개입과 집합적인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참여만이 사이버스페 이스의 가치들을 지켜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Lessig, 1999, pp.87-94).4) 만약 사이버
4) 한편 포스트(Post, 2000)는 자유주의의 입장을 고수하면서 집합행동과 참여를 바탕으로 하는 레식의 협약주의를 반대한다. 그는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으로 보장되는 불개입을 우선시한다. 역설적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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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에 대한 규제가 필요하다면 그것은 내부 사용자들의 공동체적인 합의와 약속 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는 새로운 협약에 의해 공동체가 형성되는 과정 중에 있으며, 협약에 입각한 새로운 규제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협약 주의의 입장에서 볼 때 사이버스페이스의 독립은 사용자들의 ‘독립전쟁’을 통해 쟁취 되는 것이지 자유주의자들의 ‘독립선언’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마 찬가지로 국가기구의 법률을 통한 개입과 통제도 그것이 사용자들과의 협약이라는 절 차를 거치지 않는 한 사이버스페이스의 주권이라는 영역에서 저항에 봉착할 것임을 예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