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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결정권과 비범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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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범죄화의 한계

개인의 자기결정권 행사로 인한 보편적․사회적 법익의 침해를 제재하기 위하여 규정된 범죄는 대부분 행위자 자신 외에는 구체적인 이익 침해를 받는 피해자가 없다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성격의 범죄를 유형화하여 ‘피해자 없는 범죄’라 일컫 기도 한다. 일반론적인 의미로 피해자 없는 범죄란 오로지 종교 내지 도덕을 보호 하기 위한 것으로서 개인의 생활이익과 무관계한 범죄를 말한다.105) 일상적 의미에 서 피해자가 없다는 것은 “형법에 의한 보호를 요청하려는 고소인이 없다”는 의미 로서 피해자가 결여되어 있는 경우이다.106) 즉 구체적으로 자유이익이 침해되는 특 정된 피해자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유형의 범죄에서 대표적으로 도박, 마약 류 자기사용, 자발적 성매매가 그 논란의 중심에 있으며, 이 행위들은 일반적으로 104) 박진실, 앞의 논문, 74면.

105) 김용우/최재천, 앞의 책, 256면.

106) 최종일, 형사정책 , 법지사, 2000, 248면.

일탈행위에 해당된다.

사회학에서는 형법상의 범죄에 해당되는 것을 일탈행위(逸脫行爲, deviant behavior)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공동체나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규범에 의해 승인되지 않는 비정상적인 행위 또는 일반적으로 기대되는 행위와 모범적 행 위에서 벗어나는 행위를 뜻한다. 범죄학에서는 이러한 일탈행위 가운데 법규범을 위반한 유형을 범죄라고 지칭한다. 그러나 법규범을 기준으로 하는 범죄개념은 입 법의지에 종속하므로 일탈행위와 범죄를 구별하는 실질적 기준이 되기는 어렵다.

또한 일탈행위의 개념은 법규범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실질적 범죄개념과 동일하므로 일탈행위도 형사정책적 의미의 범죄와 다를 바가 없다. 일정한 일탈행 위를 형식적 의미의 범죄로 법률에 규정할 것인가는 형사정책의 핵심적 문제에 속 하기 때문이다.107)

같은 맥락에서 일탈행위에 관한 범죄의 실질성은 사회질서와 관련하여 판단된다.

범죄는 특정한 세계관이나 도덕관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생활의 실존조건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침해한다는 데에 그 본질적 특징이 있다고 한다.

이때 침해의 대상은 법익이라는 구체적 개념으로 설정되며, 이는 형법이 보호해야 할 이익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법익은 정당한 사회질서의 근간이 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108)

이처럼 형법의 임무는 법익을 보호하는 데에 있다. 근대형법은 모든 개인이 자유 를 공평하게 누릴 수 있게 하는 권리의 체계를 구축하는 제도로서, 생명, 신체, 명 예, 재산, 사생활 등 개인의 권리를 법익으로 하며, 책임의 의미를 개인적으로 귀 속시킬 수 있는 행위에 의해 권리의 실질인 자유를 남용한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 서 개인의 자유이익을 최대한으로 보장하기 위해 사회문제해결의 최후수단(ultima ratio)으로서 기능하게 된다. 반면에 현대사회의 형법은 사회체계의 기능을 위태롭 게 하는 위험을 예방하는 정책의 수단으로 변화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목적의 통 제는 보편적 법익을 근거로 범죄화하며, 대개 ‘추상적 위험범’의 형태를 취하기 때 문에 처벌을 조기화하게 된다. 이때 보편적 법익의 내용이 특정한 도덕관을 기초 로 하고 있다면, 구체적인 침해가 발생하지 않았음에도 형법은 개인의 기본권을 107) 진계호, 앞의 책, 64-65면.

108) 배종대, 형사정책 제11판, 앞의 책, 14/8-9면.

과도하게 침해함으로써 그 정당성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이런 윤리화된 형법은 책임귀속도 느낌과 직관에 의존하기 쉽고, 여론이나 법감정에 좌우되기 쉽다는 지 적이 있다.109)

사회적 위험성이 있다고 간주되는 일탈행위란 독자적으로 다른 개인의 자유이익 을 침해하거나 현실적으로 위태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인에 의해 그 일탈행위가 무수히 반복될 때 모든 개인의 생존을 위협할 개연성이 추상적으로 추 정되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개인의 일탈행위와 모든 사람의 생존을 위협하는 현실적 위험 사이의 구체적 관련성은 입증되기가 어렵다. 설령 입증된다 고 해도 모든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위험창출에 기여한 ‘한 개인의 몫’이 산출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감지되는 사회적 위험성을 토대로 하여 어느 한 개인의 행위 탓으로 위험의 내용을 확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110)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법은 피해자 없는 범죄를 존치시켜 왔으며, 이와 관련된 문 제로 형법법규 그 자체의 준엄성을 의심 받고 있다. 같은 견지에서 이것은 피해자 없는 범죄의 비범죄화 주장의 근거가 되기도 한다.

나. 자기결정권과 보호법익의 충돌

피해자 없는 범죄는 대부분 행위자 자신 외에는 구체적인 법익 침해를 받는 피 해자가 없다는 점에서 자기결정권과 관련이 깊다. 헌법재판소에서도 마약류 자기 사용에 대한 일반적 행동자유권,111) 낙태에 대한 임부의 자기결정권,112) 단순성매 매 및 간통에 대한 성적 자기결정권113) 등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있음을 인정하고

109) 이상돈, 형법강론 제2판, 박영사, 2017, 6-7면.

110) 이상돈, 형법의 근대성과 대화이론 , 앞의 책, 42-43면.

111)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하여서는 누구나 자유로이 의사 를 결정하고 그에 기하여 자율적인 생활을 형성할 수 있어야 하므로, 행복추구권은 그의 구 체적인 표현으로서 일반적인 행동자유권을 포함한다. …… 개인의 대마를 자유롭게 수수하 고 흡연할 자유도 헌법 제10조의 행복추구권에서 나오는 일반적 행동자유권의 보호영역에 속한다(헌법재판소 2005. 11. 24. 2005헌바46 전원재판부 결정).

112) 자기운명결정권에는 임신과 출산에 관한 결정, 즉 임신과 출산의 과정에 내재하는 특별한 희생을 강요당하지 않을 자유가 포함되어 있다. …… 태아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태아 의 발달단계나 독자적 생존능력과 무관하게 임부의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이를 형사 처벌하고 있으므로, 헌법 제10조에서 도출되는 임부의 자기결정권, 즉 낙태의 자유를 제한 하고 있다(헌법재판소 2012. 8. 23. 2010헌바402 결정).

있다. 그렇다면 도박에 대해서는 일반적 행동자유권이 인정될 수 있을 것이고, 군 형법상의 추행죄가 동의에 의한 성적 행위까지도 처벌 대상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군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양심 의 자유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정신적 기본권으로서, 양 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를 규정하지 않은 현행 병역법은 양심에 반하는 행동 을 강요당하지 아니할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114)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개인이 향유할 수 있는 자유의 가치와 이에 대한 권리의 식은 성숙되어 있고, 이와 같은 시대적 요청에서 비롯된 사생활에 대한 비범죄화 경향이 현대 형법의 추세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형법이 행위금지규범이라는 속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즉 형법은 개인의 자유를 직접적으로 제한하는 형태 를 취하고 있으므로 형법 규정의 개폐 또는 해석에 따라 개인의 자유 영역이 축소 되거나 확대될 수 있는 것이다.115) 더욱이 형법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억지의 수단으로서 형벌을 사용하고 있다. “형벌은 강제수단에 의한 인간 자유의 심각한 제약”을116) 부과하는 것이므로, 법률 중에서 도 특히 형법은 요건과 효과가 모두 개인의 자유를 강력하게 제한하는 성격을 가 진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를 이념으로 하는 자기결정권에 대한 논쟁이 가장 치열 하게 벌어지는 주요한 영역은 형법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형법은 개인의 주관적 권리인 생명․신체․명예․재산 등의 개인적 법익 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국가적 법익과 사회적 법익도 함께 보호하고 있다. 국가와 사회의 존립은 인간의 실존을 위한 전제조건이 되고, 국가와 사회가 안전해야만 113) 자기운명결정권에는 성행위 여부 및 그 상대방을 결정할 수 있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포함 되어 있고(헌법재판소 2015. 2. 26. 2009헌바17 205, 2010헌바194, 2011헌바4, 2012헌바57 255 411, 2013헌바139 161 267 276 342 365, 2014헌바53 464, 2011헌가31, 2014헌가4(병합) 결정), 경제적 대가를 매개로 하여 성행위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것 또한 성적 자기결정권과 관 련되어 있다 볼 것이므로 심판대상조항은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한한다(헌법재판소 2 016. 3. 31. 2013헌가2 결정).

114) 헌법재판소 2018. 6. 28. 2011헌바379, 383, 2012헌바15, 32, 86, 129, 181, 182, 193, 227, 22 8, 250, 271, 281, 282, 283, 287, 324, 2013헌바273, 2015헌바73, 2016헌바360, 2017헌바225(병 합); 2012헌가17, 2013헌가5, 23, 27, 2014헌가8, 2015헌가5(병합) 결정.

115) 이얼, “자기결정권 법리의 체계화를 위한 형법학의 과제”, 법학연구 제54권 제4호, 부산 대학교 법학연구소, 2013, 262면.

116) 이영록, “유해성원칙․후견주의․자유주의”, 비교형사법연구 제4권 제2호, 한국비교형사 법학회, 2002, 23면.

이로부터 개개인의 주관적 이익 보호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국가와 사 회의 기능 유지를 위한 인간의 공존조건이 되는 보편적 법익의 보호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러한 보호를 위하여 개인의 자유가 제한되는 경우에 양 법익이 충돌하 게 되는 것이다. 피해자 없는 범죄의 대부분이 바로 이 경우에 속한다. 따라서 피 해자 없는 범죄의 보호법익으로 설정된 보편적․사회적 법익이 헌법상의 기본권인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제한하면서까지 보호할 가치가 있는가의 평가적 관점이 중요 한 문제가 된다. 이와 관련하여 제4장에서 살펴볼 위헌소원에서도 양 법익간의 이 익을 비교형량하여 택일하는 형태의 결정이 다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형법 또한 대한민국의 법률로서 그 상위법인 헌법 정신에 따라 개인의 기본권을 최대한 보장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필요 불가피하게 기본권을 제한해야 하는 경우에도 헌법 제37조 제2항에 의하여 기본권 제한의 한계를 가진다. 즉 형 법이 자기결정권을 제한하기 위해서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 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는 것이다.117) 나아가 이하 제3절에서 살펴볼 형법의 자기구속법리에 관한 엄격한 심사를 통하여 정당성이 인정되지 않 는 규정에 대해서는 비범죄화의 노력이 필요하다.

제2절 법과 도덕에 관한 논쟁

형법의 기능은 법익보호에 있다. 특히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 이라는 점에서 정당성을 갖는다. 그러나 형법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강력한 법률효과인 형벌을 그 수단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형법으로서 제재 할 수 있는 행위의 기준’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관점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역사적 으로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어 왔는데, 크게 자유주의, 법적 도덕주의, 후견주의로 나누어볼 수 있다. 피해자 없는 범죄는 대부분 타인에게 직접적으로 해악을 주는 행위가 아니며, 건전한 도덕법칙을 그 보호법익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각 관점에 대한 논의를 분석해보는 것은 피해자 없는 범죄의 비범죄화 기준을 도 117) 이얼, “자기결정권 법리의 체계화를 위한 형법학의 과제”, 앞의 논문, 1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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