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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지원분야의 남북 교류협력사업 현황

Ⅱ. 연구의 배경

3. 육아지원분야의 남북 교류협력사업 현황

가. 대북 영유아지원사업 추진 현황

대북지원사업은 북한의 계속되는 수해와 가뭄으로 경제와 식량사정이 극도로 악화되면서, 1995년 8월 23일 UN 북한 대표부가 유엔인도지원국(UNDHA)에 긴급구호를 요청하면서, 인도주의의 실현과 동포애적 차원에서 시작되었다(이윤 진, 2012: 184).

북한의 영유아와 임산부는 ‘가장 취약한 집단’으로 분류되면서 대북 지원사업 에 있어서 영유아지원사업9)은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서, 지난 5·24조치 속에서도 중단되지 않고 추진되었다.

대북지원사업은 지원성격에 따라 ‘긴급구호기’와 ‘개발지원사업기’로 크게 구 분할 수 있다. ‘긴급구호’는 인도주의 차원에서 식량, 의료품, 물품 등 긴급시에 일시적 또는 단기적 지원이라면 ‘개발지원사업’은 궁극적으로 북한 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북한 지역의 자립역량을 강화하고 지속가능한 사회·경제시스템 을 구축하는 등 중장기적 관점의 지원을 목적으로 한다.

1999년부터 대북지원을 위한 창구 단일화가 폐지되고10) NGO단체들이 독자 적으로 대북지원을 할 수 있게 되면서 개발지원 성격을 갖는 지원사업이 본격 화되었다. 지원단체의 입장에서는 수혜대상이 분명해야 지원효과를 검증할 수 있고, 또 후원자들로부터 지속적인 모금이 가능하기 때문에 북한과의 협의를 통 해 지원대상의 명료화, 지원효과의 지속성, 이를 위해 물자지원 중심에서 프로 젝트 중심으로 종전의 긴급구호에서 개발지원으로 대북사업의 성격이 전환되어 갔다(이윤진, 2012: 196-197). 즉, 구호물자를 전달하는 수준에서 취약계층을 위 한 급식시설의 건립과 운영지원, 시설에 대한 개보수 및 탁아소, 유치원, 애육원 등의 아동시설에 대한 급식지원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예를 들어 어린이어깨동무에서 2001년부터 콩우유 생산과 급식사업을 위해

9) 여기서는 구분이 모호한 모자보건지원사업까지를 포함한 개념임.

10) 1999년 2월 10일 대북지원사업으로 인정된 NGO단체는 적십자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독자창 구로서 지원이 가능한 대북지원 창구다원화를 발표함(통일부, 2001통일백서).

날짜 주요 경과 부문 상세내용 2004.12.

2005.1.27

⦁북한 어린이 및 산모 영양 지원사업안 마련 제안

⦁남북한 인구 및 건강수준 관련 대통령 보고

-통일부중심 대책마련 지시

정부 ⦁대통령자문 고령화 및 미래사 회위원회

2005.3.8 ⦁대북지원사업자 지정요건

완화 정부 ⦁대북지원 경험 1년 이상 조항 폐지

평양과 원산에 2개소의 생산공장을 설립하여 각 공장에서 1일 2,000ℓ의 콩우유 를 생산하고 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에서는 2001년부터 20004년까지 평상시 만경대 구역, 사리원시, 정주시, 남포 등의 어린이 60,000명에게 점심용 국수생 산을 지원하는 사업을 실시하였으나, 동 기간에 3개 지역의 국수 공장에 급식용 재로를 지원하였다(이금순 외, 2005: 156). 급식지원 사업뿐 아니라 보건의료분 야에서도 2001년부터 의약품 생산설비 지원 및 의약품의 원료를 지원하기 시작 했으며 북한의 낙후된 병원을 현대화를 위하여 2004년 평양어깨동무어린이병원 의 완공을 시작으로 2006년 장교리 인민병원, 2008년 평양의학대학병원 어깨동 무소아병동까지 모두 3개의 병원을 신축하였다.

1990년대까지는 주로 민간단체 주도로 대북지원사업이 진행되었다면, 2000년 정상회담을 계기로 대북지원사업에서 정부의 역할이 눈에 띄게 강화되어갔다. 정부는 북한의 농업생산성 회복을 위한 비료 30만톤과 태국산 쌀 30만톤, 중국 산 옥수수 20만톤을 차관형태로 지원했으며 정부의 남북협력기금 지원액수도 점점 증가하여 2000년 33.8억원, 2001년 75.3억원, 2002년 54.5억원, 2004년 88.7 억원 등 5년간 290억원을 지원했다(통일부, 2005: 164). 2000년 이후 국제기구를 통한 대북지원사업이 활발히 추진되었고 이 과정에서 영유아 지원사업이 특화 되면서 지원내용이 구체화되고 지원액수도 증가하였다(이윤진, 2012: 198).

그러나 2008년 이후 금강산 피격사건, 천안함 사건, 연평도 피격사건이 연달 아 발생하면서 남북관계는 급속도로 악화되어 갔고 이 시기의 대북지원 규모와 액수는 급감하고 식량차관도 전무하였다. 마침내 2010년 5월에 남북간 모든 교 역을 중단하는 5·24조치가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대북 유아지원사업은 제한적이나마 남북한 교류를 지속시키는 사업으로 남게 되면서, UNICEF를 통 한 북한 영유아 지원 등은 계속되었다.

〈표 Ⅱ-3-1〉대북 영유아지원사업 경과(2004~2008)

(표 Ⅱ-3-1 계속)

(표 Ⅱ-3-1 계속)

날짜 주요 경과 부문 상세내용

2010.3.25 ⦁천안함 사건 -

-2010.5.24 ⦁5.24 조치

-대북지원은 원칙적으로 보류한 다. 다만, 영유아 등 취약계층에 대한 순수 인도적 지원은 유지한 다(각주 13 참조)

2010.8.15 ⦁8.15 대통령 경축사 - 어린이와 자연재해에 대한 인도 적 지원 계속……

2010.11.23 ⦁연평도 피격 -

-자료: 1) 신영전(2012). 북한 모자보건프로그램에서 WHO, UNICEF, 한국정부, 한국 NGOs의 협력 경험. p. 12.

2) 2005년 3월 8일과 7월은 이금순 외(2005). 대북지원 10년 백서. p. 67.

나. 영유아 관련 남북 교류협력 현황과 분석

1) 남북 인적왕래 현황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본격화된 남북 교류협력은 2006년 북한의 미 사일 발사와 핵실험 등으로 인해 지체된 것을 제외하고는 2007년까지 매년 큰 폭의 성장세를 보여 왔다(통일부, 2008).

남북 간의 교류협력사업은 1990년 제정된「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에 따 라 이루어지고 있다. 이 법은 남북 간 상호교류와 협력을 촉진하기 위하여 필요 한 사항을 규정한 것으로, 이 법의 2009년 개정안에 의하면 협력사업이란 남한 과 북한의 주민(법인·단체 포함)이 공동으로 하는 문화, 관광, 보건의료, 체육, 학술, 경제 등에 관한 모든 활동을 말한다. 1989년부터 집계한 사회분야의 남북 인적 왕래를 보면, 방북인원은 총 42,107명 방남인원은 4,641명으로 방북인원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방북인원을 분야별로 세분하면, 종교분야가 8,275명으로 가 장 많으며(약 19.7% 차지) 다음으로 체육분야 4,890명 교육학술분야 2,783명 언 론출판 2,630명 순이다. 방남인원은 체육분야가 1,988명으로 가장 많고(약 42.8%) 문화예술, 교육학술 순이다.

2008년 이후 금강산 관광과 개성관광의 중단조치 및 천안함과 연평도 피격사 건과 같이 북한의 호전적 행위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강경 대북정책 기조가 계 속되면서 사회문화의 모든 분야는 크게 줄어들었으며, 특히 방남인원이 가장 많 았던 문화예술분야의 인적왕래는 2009년 이후 단 한명의 인적왕래가 없었다(박

구분 분야 `89-`97 `98 `99 `00 `01 `02 `03 `04 `05 `06 `07

기타 446 1 1 476 2,215 1,308 923 1,367 7,066 2,266 4,720 20,789 방북 소계 701 239 330 1,150 2,916 2,501 3,395 3,557 10,777 4,324 12,217 42,107

방남 합계 1,235 239 392 1,554 2,948 3,438 4,336 3,837 11,452 4,617 12,700 46,748

명규 외, 2011: 89).

학교기자재 지원 등을 내용으로 하는 남북 간 학술교류협력이 다양한 형태로 전문화되고 활성화되었다.

하지만 아동을 주제로 영유아 관련 보육·교육 전문가들이 모인 학술회의는 2002년의 중국 연길에서 개최한 “21세기를 열어 갈 아동교육”이 유일하다. 2008년 이후 남북 학술교류협력은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 개성 만월대 남북공동 발굴조사사업 등 남북 공동의 장기 프로젝트 외에 대부분의 교류사업이 중단된 상 태이다.

3) 영유아(어린이) 관련 분야의 교류협력 현황

가) 학술행사

영유아 관련 보육·교육 전문가들이 모인 학술회의는 2002년 한국아동학회와 조선사회과학자협회·연변대학민족연구원이 공동주최해서 “21세기를 열어 갈 아 동교육”의 주제로 중국 연길에서 1회 개최한 것이 유일하다.

2002년 5월 30일부터 6월 1일까지 2박 3일 동안 중국 연길시의 신교호텔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북한에서 총 4명의 전문가가 나왔다. 조선사회과학자협회의 정철 국장이 ‘백두산 3대 장군의 불멸의 교육업적’ 김형직사범대학의 리명호 교 수의 ‘우리나라에서 어린이 보육정책과 실태’와 김혜란 교수의 ‘조선민주주의인 민공화국에서의 유치원교육’ 평양산원의 주임인 안월순 교수의 ‘평양산원에서 갓난 보육’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북한에서 출산부터 탁아소, 유치원에 이르는 육아지원정책의 추진배경, 연혁, 전개과정, 현황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비록 북한의 정치사상이 강하게 내포되 어 있고 그 내용도 대동소이한 한계점은 있으나, 북한의 탁아소와 유치원, 산원 의 운영실태를 알 수 있었던 성과도 있었다.

남북의 교육·보육 학자들이 처음으로 한 자리에서 남북의 육아지원정책을 주 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2002년 이후의 남북관계가 상당히 진전된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추가 개최가 가 능했었음에도 불구하고 1회로 그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부록 표 1-1 참조).

나) 어린이 행사 교류

대북 어린이사업을 활발하게 추진하고 있는 (사)어린이어깨동무는 1998년 북 한 어린이들과의 ‘우정의 그림 교환’을 실시하여 2005년까지 총 6차례 남북 어

그림교환 방북행사

어린이의 범위를 청소년까지 확장해서 보면 남북 청소년 교류사업은 좀 더 일찍이 실시되었다. 1991년 제6회 세계 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 출전을 위한 남북 단일팀 구성이 최초의 남북 청소년교류라 하겠다.

문화·예술 분야의 최초의 남북 청소년 교류는 ‘리틀엔젤스 예술단’의 평양공 연으로 조선아세아태평양평양위원회의 초청으로 1998년 5월 2일부터 18일까지 방북하였다. 평양봉화예술극장과 만경대학생소년궁정에서 총 3회의 공연을 실시 하였으며 북한 조선중앙 TV에서도 공연 실황을 중계하였다(오덕렬, 2012: 162).

2000년에는 북한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이 서울에서 공연을 가졌다. ‘평양학생소 년예술단’은 5월 24일 평양을 떠나 중국 베이징을 경유하여 김포공하에 도착했

2000년에는 북한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이 서울에서 공연을 가졌다. ‘평양학생소 년예술단’은 5월 24일 평양을 떠나 중국 베이징을 경유하여 김포공하에 도착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