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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토불이 국방색 염료를 찾아서

문서에서 R&D 성공실패사례 에세이 (페이지 95-104)

신토불이 국방색 염료를 찾아서

ReSEAT 전문연구위원

조남숙

월을 거슬러 올라가 1969년 내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이수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풀어 보려한다. 나의 지도교수님은 과학기술처의 연구 과제로 국방색 염료의 합성에 관 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것은 나의 석사학위 실험 주제임과 동시에 우리 실험실의 연구 과제이기도 했다.

나의 대학원 생활은 아침 아홉시가 되기 전에 등교하여, 실험실 바닥과 지도교수 연구실을 마포걸레로 닦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니 나의 옷차림은 늘 운동화에 청바지 차림이었고, 그 위에 실험으로 더럽게 얼룩진 흰 실험복을 걸치고 있었다. 부푼 꿈을 안고 감사한 마음과 하면 된다는 일념으로 청소도 즐겁게 하였고, 열약한 환경의

유기화학 실험실에서 풍겨오는 고약한 냄새도 좋은 냄새라 생각하고 맡으려 노력했다.

어느 날, 지도교수님은 나에게 국방색 염료 합성의 의의와 중요성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그때는 5.16 혁명 후 새로운 정부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였다. 이런 정책의 효과로 우리 나라의 경제력이 서서히 튼튼해지면서 국민들 사이에 우리 것에 대한 관심과 자존감이 높아지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우리나라 군인들의 군복 색깔이었던 국방색은 우리나라의 자연에 적합한 색이 아니라 단지 외국의 군복을 모방한 색이었다.

국방색의 목적은 위장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국방색은 동물들이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해 보호색으로 탈바꿈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보호색이다.

따라서 국방색은 우리 주변의 산천에 어울리도록 색깔의 채도와 명도를 맞추어야 함은 물론이고, 군인이나 무기, 군 시설물 등을 철저히 보호할 수 있도록 우리만의 독특한 색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당시 국방색은 일관된 색으로 통일되어 있지도 않았다. 군인 들의 군복 색깔을 보면 유난히 노란색이 감도는 국방색도 있고, 파란 색이 비쳐 나오는 국방색도 있었다. 이런 군복들은 시간이 흐르면 빛이 바래서 낡은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이유는 노란색과 파란색을 주로 사용한 혼합염료로 천을 염색했기 때문이다. 노란색 염료와 파란색 염료는 물리적인 성질 차이가 존재한다. 그래서 세탁을 할 때 특정

신토불이 국방색 염료를 찾아서 93 색깔이 물에 더 잘 빠진다거나 햇빛에 색깔이 더 잘 바래는 등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혼합물이 아닌 단일 화합물 염료를 개발해 염색을 해야 한다는 것이 지도교수님의 생각이었다. 염료가 단일 화합물이면 빛에 바래는 현상과 물에 빠지는 현상이 동일하여, 시간이 지나 천이 낡아도 색상이 동일하게 남을 것이다. 이것이 국방색 염료 합성의 학문적·기술적 중요성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염료 개발의 가치와 의의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성공적인 결과를 얻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게 되었다. 이 연구를 통해 나라를 위하여 무엇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나의 대학원 생활은 이 연구 과제를 수행하면서 실험에 푹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게 지나갔다.

실험 환경이 쾌적한 건 아니었다. 40년이 훌쩍 지난 이야기라 지금과는 격세지감이 있어 그 당시 실험실 사정을 되뇌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날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지 않은가?

흄 후드(fume hood)는 냄새를 빨아들이는 화학 실험실의 중요한 설비다. 요즘은 옥상에 설치된 강력한 펌프들이 냄새를 빨아 올려 웬만한 용매 냄새는 건물 안에서 쉽게 느낄 수 없다. 그러나 그때는 흄 후드가 있어도 복도에 들어서기만 하면 어느 실험실에서 무슨 용매를 사용하고 있는지 금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코가 아주 성능

좋은 탐지기 노릇을 했다. 복도 끝 학부 실험에서 아세트산(식초)을 사용한다면, 반대편의 복도 끝까지 코가 찡할 정도로 냄새가 풍겼다.

그런 환경에서 진행한 나의 실험은 새로운 화합물을 합성하는 것이 었다. 지금은 반응만 시키고 나면 핵자기공명(NMR, nuclear magnetic resonance spectroscopy, 1HNMR, 13CNMR)분석법으로 제대로 합성이 되었는지 아닌지를 명백하게 판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기기는 자외선흡수분광기(UV, ultraviolet spectroscopy), 적외선흡수분광기(IR, infrared spectroscopy)가 고작이었다. IR로 작용기의 변화를 알아내 화합물의 구조를 짐작할 뿐이었다.

얇은 막 크로마토그래피(thin layer chromatography, TLC)1)로 화학반응을 추적하여 반응의 종료시간을 측정하는 것은 지금과 다르지 않았다. 지금도 학부 실험에서 가르치고 실험실에서 자주 쓰이고 있는데, 현재는 정교한 TLC 제품을 구입해 사용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TLC 판을 내가 직접 만들어 써야 했다. 그래서 실험 시간도 많이 걸리고 복잡했다. TLC 판의 제작 기술을 터득하기까지는 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가?

우리 어머니들은 옛날에 장작불이나 연탄불에 밥을 지으셨다. 요즈음 전기 압력밥솥에 손쉽게 뚝딱 밥을 짓는 것과 같다. 장작불이나 연탄불에

1) TLC(thin layer chromatography, 얇은 막 크로마토그래피) - 시료가 정지상(thin layer)에 첨가 되면, 용매와 함께 모세관 현상에 의해 정지상을 타고 전개되고 그 속도의 차이에 따라 혼합물을 분리하는 분석방법.

신토불이 국방색 염료를 찾아서 95 밥을 하면 밥 짓는 사람의 솜씨에 따라 잘된 밥, 선 밥, 탄 밥이 나올 수 있다. 마찬가지로 당시 TLC도 연구자의 숙련도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

TLC 판은 유리판에 전분이 포함된 알루미나나 실리카겔을 도포하여 만든다. 유리판을 증류수 용매로 걸쭉한 알루미나나 실리카겔 죽 상태를 만들어 담갔다가 서서히 수직으로 들어 올리는 방법으로 제작하였다.

이것은 알루미나나 실리카겔 죽을 균일하고 얇게 입히는 기술이 필요한 작업이다. 작업과정도 철저하게 청결해야 했다. 분석용으로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작업이 깔끔함을 넘어서 완전무결한 청결 그 자체를 유지해야 했다. 유리판도 재사용했기 때문에 청결관리는 필수적 이었다.

모든 과정은 반복연습이 필요하다. 후배가 선배에게 기술을 전수받는 가운데, 선후배 간의 배려와 협동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내는 실험실 분위기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는 대학원 학생 수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한 분의 교수님이 지도하는 대학원생은 그저 한둘에서 많아봐야 서너 명이 고작이었다.

TLC판에 시료를 채취하기 위한 모세관도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프로판 가스 토치 버너를 사용해 굵은 유리봉을 가늘게 뽑는 세공작업을 거쳐야 했다. 그러니 무수히 많은 실패를 거듭하며 점점 손재주를 더해 알맞은 모세관을 만들어내는 고달픈 숙련과정을 거쳐야 했다. 뿐만 아니라 플라스크, 비커, 삼각 플라스크 등 유리 실험기구

들은 대부분 경질 유리였으니 그 질이 약하여 실험 중 불상사가 일어나 깨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파이렉스 유리 실험기구 제품들은 이런 불상사를 피할 수는 있었으나, 미국에서 수입한 것들이니 당연히 고가 였고, 구입하기도 쉽지 않았다.

대학원생들은 요즘처럼 각자 실험 기구를 가지고 실험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 선후배들이 공용으로 사용했다. 실험 후엔 깨끗하게 세척하고 건조까지 해두어야 했다. 이것이 다음에 사용할 동료를 위한 준비이자 배려였다. 이러한 미덕과 질서 유지는 열약한 환경에서도 배움의 과정에서 얻은 정신적인 자산이 되었다.

나의 실험은 파란색과 노란색의 발색단을 가진 화합물을 각각 합성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들을 한분자 내로 결합시키는 것이 었다. 파란색과 노란색 발색단을 가진 화합물의 합성은 선배들의 연구 결과들을 참조하여 따라갔으니 그리 어렵지 않게 얻어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이미 실험실을 떠난 선배들의 실험 노하우와 비밀을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힘들게 만든 중간 생성물들을 반응기 안에서 반응시키면 국방색이 나타났다. 그런데 시료를 찍어 TLC판에 전개하면 선명한 노란색 점과 파란색 점만 나타나는 것이다. 그토록 고대하는 국방색 점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실패는 많은 나날을 지나 수개월 동안 되풀이 되었다.

실패를 거듭하는 동안, 이런 게 진짜 실험이고 연구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각인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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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이었다. 그러나 같은 염료라 하더라도 염색의 방법이나 매염제에 따라 색상이 변하는 것이 염색이라서 색상을 검색하는 것은 사실상 우리들 능력 밖의 일이기도 했다.

여하튼 여러 가지 국방색 염료의 후보 화합물들을 합성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였다. 시간이 촉박했다. 단일 화합물로 합성하는 것도 중요 했지만 그 다음 관건은 합성 수율이다. 이를 위해 시간을 다투며 열심히 실험에 몰두했다. 늦은 밤까지 연구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지만 통행금지가 걸림돌이었다. 늦으면 시내버스가 끊기기 때문에, 집에 가는 막차를 타기 위해 긴 백양로를 달리며 땀을 흘린 날들이 허다

여하튼 여러 가지 국방색 염료의 후보 화합물들을 합성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였다. 시간이 촉박했다. 단일 화합물로 합성하는 것도 중요 했지만 그 다음 관건은 합성 수율이다. 이를 위해 시간을 다투며 열심히 실험에 몰두했다. 늦은 밤까지 연구하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지만 통행금지가 걸림돌이었다. 늦으면 시내버스가 끊기기 때문에, 집에 가는 막차를 타기 위해 긴 백양로를 달리며 땀을 흘린 날들이 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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