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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불모지를 개척하다

문서에서 R&D 성공실패사례 에세이 (페이지 7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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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의 불모지를 개척하다

ReSEAT 전문연구위원

홍종준

년도 국내 경제 실정은 독일에 간호사 및 광부를 파 견하여 외화 획득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던 시기였다.

정부에서는 산업체에 수출을 장려할 목적으로 수출실적 금탑, 은 탑, 동탑 상을 만들어 각종 혜택을 주었다.

그 당시 국내 수출품으로는 유일하게 합판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수출용 주재료인 원목은 주로 인도네시아로부터 수입되었으며, 합판 제조용 접착제는 요소와 포르말린으로 합성한 요소수지가 사용 되었다.

요소는 우리나라 비료공장에서 생산되었지만 포르말린은 드럼으로 수입해 사용하였다. 합판 수출량이 증가하면서 가장 시급한 문제로 대두된 것이 포르말린 생산 플랜트 건설이었다. 그러나 당시 일반

기업체들은 자동화 플랜트 기술도입에 대한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기계를 구입할 때처럼 수출국이 제시하는 가격에 상담을 거쳐 거래하는 형식이었다. 창업 기업주들은 대부분 수준이 비슷하였다. 계약 당시 본인은 이화산업(주) 엔지니어로 근무하던 중 포르말린 플랜트 설치 운전을 위해 부산 소재의 동명목재로 옮겨갔다.

1년 후, Nippon Gas Chemical Co.로부터 파견된 엔지니어와 2주에 걸쳐 장치 배치도, 도입하는 설비항목, 국내 제작에서 제작하는 기기 목록 및 제작도면에 대한 상세내역을 확인했다. 도면으로 처음 접하는 프로세스이기 때문에 일방적인 설명과 검토로 끝났다. 일본과는 국교 정상화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공장 견학도 불가능해 아무런 확인도 할 수 없었다. 도면 검토 작업 후 출국을 위해 여권 신청을 했다. 일본의 경우 조총련 활동이 활발하였기 때문에 신원조회를 하는데 6개월이 소요 되었다. 이후 신입사원 2명과 반공교육까지 받고 나서야 출국길에 오를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 국교 정상화가 되지 않았던 시기 였기 때문에, 오사카로 가는 항공편은 서울에서 일주일에 한 번 운항 되었다. 당시 해외에 기술연수를 간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일본 연수는 포르말린 플랜트가 있는 오사카에서 1개월, 니카타에서 1개월, 그리고 자동제어장치 연수를 위해 도쿄에 있는 요코가와 전기(주)에서 2주간 연수를 진행했다.

오사카 포르말린 플랜트는 50T/day 생산규모의 낡은 공장으로 보수한 부분들이 눈에 보였다. 4주간의 실습 중 우리에게 제시한 도면과 비교해보니 증류탑이 없는 게 확인되었다. 생산 프로세스는

기술의 불모지를 개척하다 69 자동화 되어 있어 운전 중에는 계측기 작동만 확인할 뿐 다른 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문제는 증류탑이 없는 상태의 운전이 생산 제품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하여 보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담당 엔지니어와 지속적인 논의 끝에, 참고용으로 볼 수 있는 낡은 도면을 하나 입수했다.

이것이 바로 기술 수출국의 횡포라는 생각이 들면서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니카타 포르말린 플랜트는 100T/day 생산규모로 일본에서 가장 큰 최신 플랜트였다. 니카타 플랜트 실습 중 폭우로 정전이 발생해 운전이 중지되었다. 일본의 경우, 1년에 1~2회 정도 정전이 된다고 한다. 정전 시에는 촉매 활성 저하로 인한 생산 수율 저하를 방지하기 위해 재가동 하지 않았다. 대신 반응기 내부 촉매를 전량 교체하는 작업을 하게 된다.

공교롭게도 실습 중 정전으로 인해 반응기 내부의 상세구조를 관찰할 기회와 촉매의 충진 작업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스템 가동을 시작하는 작동 조작도 볼 수 있었다.

포르말린 플랜트 실습이 끝난 다음, 도쿄에 있는 요코가와 전기(주)에서 프로세스에 설치되는 자동제어장치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처음 접해보는 자동제어기기였기 때문에 설명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며, 교육 내용에는 프로세스 제어와 관련된 사항은 전혀 없었다. 결국 레이아웃에 표시된 제어기기를 찾아 자체에서 해결하는 방법을 도출하기로 하였다.

귀국 후 곧바로 포르말린 공장 건설에 들어갔다. 합판 수출물량 확보를 위해 더 이상 지연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10개월 간 철야 작업

끝에 시운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때 4주간의 보증운전을 위해 일본 에서 기술자가 파견되었다. 전반적인 프로세스 라인 확인과 제어장치 작동을 확인 후 본격적인 시운전에 돌입했다.

시운전 7일차에 정전이 발생해 자체 발전기로 즉시 재가동 시키는 일이 발생했다. 그러나 촉매활성 저하로 연속운전이 불가능하게 되면서 결국 운전을 정지시켰다. 촉매를 교체하기 위해 반응기를 해체했는데, 촉매 사이에 많은 카본이 생성되어 이미 활성을 잃은 상태였다. 정전이 되면 촉매 재생을 위한 카본 세척 및 열처리 작업을 해야 했다. 그리고 반응기에 재충전해 운전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뒤따랐다. 세척으로 인한 촉매 손실도 심각한 문제였으며, 전기 분해에 의한 촉매 재생기술도 자체적으로 해결해야 될 과제였다.

운전 중 또 다른 어려움에 봉착했다. 가장 중요한 원료인 공기와 메탄증기 2개의 메인 공급 라인에 자동조절 밸브가 아닌 값싼 수동 밸브를 부착한 것이다. 이는 일본 측의 비양심적인 상술이었다. 수동 밸브 사용으로는 도저히 균일한 반응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추가로 자동 밸브를 수입해 대체하면서 막대한 손실을 보았다.

수동으로 운전하는 동안 유량 변화를 지켜보면서 매순간마다 세밀한 조절을 해야 하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었다.

반응기에서 합성된 포르말린은 흡수탑에서 순환 흡수 과정을 거치고, 최종 제품의 메탄올 함량을 균일하게 맞추기 위해서는 증류탑에서 메탄올을 회수해 마지막으로 농도 조절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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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기술적으로 연속운전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출하는 것이다. 연속운전을 위해서는 반응기 내부 구조 개선에 의한 안정적 운전이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개선하는 것이 시급했다. 개선 방안으로 반응기 내부 지지대 개선, 촉매지지 격판 개선, 촉매 층 개선, 스프레이 노즐 팁 및 노즐 방향개선 등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 검토한 결과, 노즐 방향이 중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수차례 개선을 거듭한 결과,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정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최적의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한국형 시스템의 핵심 기술인 셈이다.

포르말린 공장 준공 후 기술 수출국의 횡포에서 벗어나 우리 기술로 자립하는데 약 2년이 소요됐다. 1966년에는 합판 수출 물량 증가로 국내 최대 생산규모인 100T/day 포르말린 플랜트를 증설하였다. 이때 일본 기술을 능가하는 전천후 한국형 완전 자동 제어시스템을 갖춘 플랜트를 건설할 수 있었다.

기술 수출국은 일반적으로 또 다른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기술 수입국이 단번에 만족할 수 있는 기술을 제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본은 우리 측에 촉매를 지속적으로 수출하기 위해 시도 하였지만, 단 한번 수입한 이후로 연구 끝에 자체적인 전기분해 방법 으로 촉매 재생을 하게 되었다.

공장 준공 1년 후, 운전 현황을 점검하기 위해 일본 측이 우리 공장을 방문했다. 공교롭게도 순간 정전이 발생했는데, 가동은 멈추지

기술의 불모지를 개척하다 73 않고 연속운전을 하고 있으니 어떻게 된 거냐며 질문 세례가 쏟아졌다.

그러나 가르쳐 줄 이유가 없었다. 그저 승자의 기분을 만끽할 뿐.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원목 수출국인 인도네시아는 자원보호 정책의 일환으로 수출용 원목을 활용해 자국에서 합판생산을 하도록 독려 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의 합판생산 수출은 사양화되기 시작했다. 그 후 한국의 많은 합판 제조기술자들이 인도네시아로 진출해 인도네시아의 합판산업을 부흥시켰다. 여기에 발 맞춰 경쟁력 있는 한국형 포르말린 플랜트도 성공적으로 수출할 수 있게 되었다.

기술의 불모지에서 선진기술을 도입하면서 불만족스러운 경험을 하며 서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그 아픔을 딛고 피나는 노력 끝에, 국내 실정에 맞는 시스템을 자체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기술 공유보다 이익을 먼저 추구하는 기술 수출국을 상대해 이기는 방법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자체개발에 성공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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