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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통신망의 중심을 세우다

문서에서 R&D 성공실패사례 에세이 (페이지 54-60)

디지털 통신망의 중심을 세우다

ReSEAT 전문연구위원

조광윤

물결’

1980년대,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미래 정보화 사회가 펼쳐지는 것을 두고 했던 말이다. 앨빈 토플러는 우리 나라에도 초빙되어 머지않은 미래에 정보화 사회가 도래하니 이에 대비 하여야 한다고 조언한 적도 있다.

미국, 유럽 등 선진국들은 일찌감치 정보화 사회 구축을 위해 시동을 걸고, 근간이 되는 통신망 디지털화 작업에 들어갔다. 하지만 우리 나라는 통신기술이 미흡하고 아날로그 통신시설도 부족하여 미군통신 시설의 일부를 빌려 민간통신에 사용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날로그 통신망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나라에서 어찌 디지털 통신망을 구축할 것인가, 암울했지만 먼 곳으로부터 희망의 빛이 찾아오고 있었다.

디지털 통신망의 중심을 세우다 51 1970년대 말엽까지 우리나라의 통신장치는 후지쯔, NEC와 같은 일본 기업과 주문자생산(OEM) 방식으로 생산되고 있었으며, 완성된 제품은 모두 국가에서 관납으로 구매해 주었다. 그러나 일본 기업들은 장치의 핵심이 되는 알맹이 기술은 철저히 보안을 유지하고, 껍데기 기술만 알려주면서 OEM 생산 이득은 철저히 챙겨갔다.

그러다 1980년대에 들어서며 정부의 통신정책이 바뀌었다. 이제껏 일본 OEM 방식으로 공급되던 아날로그 통신장치는 미국, 유럽 기업의 디지털 전송장치로 대체되기 시작하였다. 통신로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면서 한층 더 향상된 고품질의 신호를 전송할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더해 마치 2차선 도로가 8차선 도로로 확장된 것처럼 통신용량도 훨씬 배가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디지털 통신망에서 화룡점정의 눈이 빠져 있다. 그것은 바로 전화를 연결해주는 교환기의 디지털화다. 우리나라의 교환기는 기계식에서 전자식을 거쳐 디지털 방식으로 발전 되어왔다. 기계식과 전자식 교환기는 전량 외국에서 들여왔지만, 디지털 교환기부터는 직접 우리 손으로 연구개발한 시분할교환기(TDX)가 사용되었다.

한창 디지털 교환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무렵, 나는 ‘디지털 통신망 동기 방식에 관한 연구’라는 과제에 참여했다. 디지털화 된 교환기와 통신망이 도입되어 전체 통신망이 디지털화 될 때 가장 대두 되는 문제가 네트워크 동기를 맞추는 일이다. 이때 어떻게 네트워크 동기를 맞춰야 좋을지 최선의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과제의 주된 목표

였다. 군사작전을 수행하는 특공대 요원이 하나의 시계에 시간을 맞추고 일사분란하게 작전을 수행하는 것처럼, 디지털 통신망의 중심축인 디지털 교환기의 시계도 특정한 표준시간에 맞춰 동기 되어야 정확한 정보 전달이 가능하다.

유난히 추웠던 긴 겨울이 지나고, 제법 아침 햇살이 따스하게 느껴 지는 봄이 찾아왔다. 나는 교통 혼잡을 피하기 위해 평소에 일찍 출근 하는 편이다. 그런데 하루는 누적된 피로 때문에 컨디션 난조로 평소 보다 늦게 출근길에 올랐다. 책상에 앉아 뻐근한 몸을 풀기 위해 기지개를 켰다. 그때 책상 위에 정리해 쌓아둔 논문 더미 맨 위에 있는 논문 한편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연구해야 하는 ‘네트워크 동기’ 라는 단어만 보이면 무조건 복사해서 모아둔 논문들이라 아직 세세히 읽어 보진 못한 상태였다. 당시는 디지털 시대로 넘어온 지 얼마 안 되던 때였기 때문에, 네트워크 동기라는 용어가 아직 낯설게 느껴지던 시기 였다. 일찍이 통신장치를 만들어왔기 때문에 시간 동기 맞추는 정도의 지식은 기본이다. 하지만 네트워크 동기를 맞춘다는 말은 생소한 개념 이었기 때문에, 통신 대가들을 만나 물어보았지만 속 시원한 답을 얻을 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국의 ‘네트워크 동기 BSRC(Bell System Reference Clock) 체계’라는 제목의 논문이 내 눈에 띈 것이다. 기지개를 멈추고 이내 논문을 정독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어떻게 하고 있을지 궁금해서 논문의 글을 따라가 보니 내가 해야 할 일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혹시나 해서 다른 논문들을 연이어 읽었지만, 네트워크 동기에 대한 내용은 오직 이 논문 한편

디지털 통신망의 중심을 세우다 53 뿐이었다. 이 논문을 통해 알게 된 건 미국의 네트워크 동기는 최상위 계층에 BSRC(Bell System Reference Clock)라는 표준시계를 두고, 이를 이용해 하위 계층의 동기를 잡는다는 것이었다. 이 논문의 저자는

만나 원자시계 사용에 관한 협의를 했다. 관계자도 고가의 원자시계를 활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했는지 흔쾌히 허락을 구할 수 있었다. 물론 사용료는 지불해야 했고, 6개월간의 사용료는 연구비에 포함시킨다는 공동연구계약을 맺고 루비디움 원자시계를 표준시계로 사용할 수 있었다.

이제 확보된 표준시계를 통신선로에 붙이고, 네트워크 동기에 필요한 통신선로의 특성 데이터만 마련하면 된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던가, 절반의 일은 이미 끝난 셈이다. 이른 봄부터 겨울 초입까지 밤낮으로 시험 장비를 가동하면서 표준시계로 보낸 통신신호의 오류 정도를 나타내는 슬립율을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기나긴 시험을 끝내고, 이제 까지 모아온 특성 데이터가 국제기구 ITU-T 권고치에 얼마나 근접 하는지 파악해보는 일만 남았다.

디지털 네트워크 동기 작업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아진다.’는 자연의 섭리와 같았다. 상위 계층에 있는 디지털 교환기의 시계 안정도가 좋아야 이에 연동되어 자신의 시계를 동기 맞추는 하위 계층 디지털 교환기의 시계 안정도도 좋아진다. 이때 전제조건은 통신로의 품질 특성이 일정 수준이 될 때 가능한 것이다. 지금까지 모아 온 시험 데이터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전화통신에 요구되는 오류 확률은 1/10,000이다. 그런데 우리의 분석 결과, 전화통신뿐만 아니라 데이터 통신에 요구되는 1/1,000,000 오류 확률 조건까지 만족시킨다는 결론이 나왔다.

디지털 통신망의 중심을 세우다 55 이제 상위 계층 교환기의 시간은 KRC(Korea Reference Clock) 표준시계에 동기 맞추고, 하위 통신망 계층으로 동기를 맞춰나가는 마스터 슬래브 방식으로 동기 망을 구성하기만 하면 된다. 이로 인해 미국, 유럽 선진국 수준은 물론 국제기구가 권고하는 수준의 디지털 통신망을 구축해 나갈 수 있다는 희망적인 결론이 내려졌다. 처음 연구 개발의 목표였던 네트워크 동기 방안을 성공적으로 제시한 것이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었다. 그간 애쓴 결과가 잘 나왔다는 기쁨보다 이제 우리나라도 선진국 수준의 디지털 통신망을 구축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기뻤다. 당시 정보화 사회의 화두로 예견한 ISDN이라는 디지털종합정보통신망을 실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다행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라의 성공이 나의 성공이란 사명감으로 열정 으로 한밤에도 연구실의 불을 밝혔던 우리 연구팀 동료들의 노력과 열정에 박수를 보낸다. 앞날이 잘 보이지 않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절대로 희망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그런 상황일수록 긍정의 힘을 믿고 더욱 냉정하게 사고하고 열정적으로 일해야 한다. 그러다보면, 마치 어둠 속에 여명이 찾아오듯 부정의 문이 열리고 실타래 같이 얽히고설킨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일을 할 때 성공하기를 염원하기 보다는 자신이 맡은 일에 정열을 불태워 최선을 다하다보면 성공은 자연스레 뒤따르게 될 것이다. 열정과 노력보다 앞서는 성공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마이크로 실험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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