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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술의 정착을 위해서는 온 몸으로 부딪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문서에서 R&D 성공실패사례 에세이 (페이지 88-95)

신기술의 정착을 위해서는 온 몸으로 부딪히는 용기가 필요하다

ReSEAT 전문연구위원

신영오

랜 기간 인류를 바이러스 침입에서 구제한 백신은 대부 분 송아지나 토끼 같은 동물을 거쳐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광견병 백신은 광견병 종균 바이러스를 토끼의 뇌에 접종하고 일 정 시간이 지난 후에 감염된 뇌를 채취하여 백신을 만들었다. 따라 서 이렇게 만든 백신은 토끼의 뇌 성분으로 인하여 부작용이 상당 히 높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심지어 백신을 접종한 다음 부작용으 로 죽는 사례들도 종종 발생했다.

이러한 문제점을 획기적으로 바꾼 연구자가 미국의 엔더스(Enders) 라는 바이러스학자이다. 그는 1940년대 초 백신의 원료라고 할 수 있는

신기술의 정착을 위해서는 온 몸으로 부딪히는 용기가 필요하다 85 바이러스를 동물 대신 세포배양으로부터 확보하였다. 그는 인위적으로 만든 동물 세포배양 체계에서 자라나는 바이러스가 동물에서 자라나는 형태와 같다는 것을 발견하여 노벨상을 받았다. 1955년에는 이글 (Eagle)이란 과학자가 세균배지와 같은 인공적인 세포배양 용액을 개발 하면서 세포를 대량으로 만드는 길을 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세포 배양 용액은 송아지 혈청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포의 생산량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의 전염병 담당 기관인 국립방역연구소는 구한말 무관학교 터인 삼청동의 청와대 건너편의 옛터에서 1950년대 말에 불광동으로 이전했다. 이 기관의 바이러스 담당 과장으로 재직하던 김 박사님이 미국 월터 리드 육군연구소에서 연수 후 갖고 온 세포주(株)로 국내에서 처음으로 세포배양을 시작하였다. 물론 이 무렵 국내에서 연구용으로 세포배양이 시도 되었을 가능성은 있으나, 국내의 열악한 실험 여건 탓에 세균 오염 등으로 대부분 포기하는 상태였다.

필자는 1966년 보건원 바이러스(병독)과에 무급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월급일로 추정되는 날에 아무 연락이 없자 같이 들어간 동료들은 미련 없이 보건원을 떠났다. 필자는 마땅히 갈 곳도 없고 우연히 읽은 일본의 유명한 세균학자 노구찌 박사의 일생도 떠올라서 정문에서 몸을 돌려 다시 건물로 향했다. 대학 생활 4년 동안 해오고 있는 입주 아르바이트가 있었기 때문에 생계는 이어갈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 무렵 바이러스과의 업무 수행에서 세포배양은 그때까지 사용되어

온 실험동물을 대신해 주된 연장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의 상당 부분은 일정 수준의 기술만 있으면, 단순 노동에 가까울 정도로 땀과 정성으로 이어가는 작업이었다. 따라서 실험실의 3, 4년차에게 주어지는 업무였다. 7, 8년차가 되면 이 일에서 벗어나 다음 단계를 진행할 수 있다. 하지만 3, 4년차에 주어지는 초기의 과제를 성공적 으로 수행했는지 담당자의 평가에 따라 다음 단계의 과제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어쨌든 실험실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주된 업무임과 동시에 평가의 잣대이기도 한 세포배양 업무가 필자에게 주어졌다. 당시 실험실 에서는 세포와 조직 배양을 이어나가기 위해 다음과 같이 난관들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첫째, 그 당시 보건원이 갖추고 있던 무균 시설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무균 시설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1960년대 초 보건원의 무균 시설이란 실험실 한 구석에 전용 공간을 확보하고 알코올램프를 킨 상태에서 모든 문을 닫는 것이 전부였다. 이 정도의 실험 시설에서 오염 없이 세균 실험을 수행한 배경에는 국내 미생물학 종주기관이 전통적 으로 갖고 있는 오랜 노하우가 도움이 되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무균 실험을 수행할 때에는 세균 오염의 주된 원인이 되는 머리카락으로부터 오염을 차단하기 위해 포마드 머릿기름을 바른 후 작업을 시작했다.

또,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알코올램프의 화염이 흔들리지 않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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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에는 요즘처럼 튼튼한 파이렉스나 코닝과 같은 유명한 유리 시험관이 아닌, 아주 얇게 제작된 국산 시험관이 대부분이었다. 세포 배양을 위해 시험관 입구를 화염 멸균하는 과정에서 깨지기 쉬울뿐더러, 크기가 다른 멸균 고무마개를 닫는 과정에서도 수시로 깨지곤 했다.

프로판 가스 사고를 겪고 몇 달이 지났을까? 시험관으로 작업 도중 갑자기 시험관이 두 동강 나면서 왼손 집게손가락을 깊이 찔렀다. 그 때의 상처로 인해 손가락이 휘어버렸는데,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그 날의 상처가 남아있다. 이런 상처를 입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의 직상급자, 미국의 대학원 지도 교수님 등 실험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연구원들의 손가락에는 대부분 크고 작은 상처가 있었다.

세 번째 과제는 배양액의 핵심인 소(牛)혈청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판매용 혈청이 없던 시절에 이를 확보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체적으로 제조하는 일이었다. 혈청 확보를 위해서 본관 건물에서 멀리 떨어진 불광천의 징검다리를 건너 송아지가 있는 동물사로 향했다. 그리고 송아지의 경동맥을 찔러 다량의 혈액을 채취하였다. 혈구가 응고된 이후에 채혈된 무거운 혈액병을 용혈1)이 일어나지 않도록 느릿느릿 실험실로 옮겨온 뒤 여과과정을 거쳐 세균을 제거하였다. 말하자면 이 과정은 하나의 완전한 우혈청 제품 생산 공정인 셈이다.

세포 배양을 이어가는 사람은 긴장감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출근하면

1) 혈액 내에 있는 적혈구가 파괴되어 세포 내의 적혈구가 나오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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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백신 검정들이 세포배양 방법으로 대체되면서 동물권리보호 에도 약간이나마 기여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젊은 날에 세포배양 업무를 하면서 나름대로 느낌 바가 있다. 첫째, 목표가 설정 되면 장애물은 자체적으로 해결하면서 돌파한다. 두 번째, 실험 업무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머리와 팔·다리 그리고 정성이 중요하다.

세 번째는 실험의 기본을 철저히 익히라는 것이다. 내가 다닌 피츠버그 대학교 미생물학과의 첫 학기는 미생물 시험에 필요한 주요 장비 원리와 작동 실기에만 한 학기를 보낸다. 정확한 실험기법 위에서 신뢰성 있는 데이터가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필자가 세포배양을 이어가는 과정을 자세히 기술한 것은 우리 세대가 흔히 진부하게 끄집어내는 젊은 날의 고생담을 되풀이 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주변의 여건이 부족해도 자체적인 노력으로 새로운 기술을 정착시킨 사례를 통해, 젊은 연구자들도 어려운 개발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문제 해결에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 몇 자 적어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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