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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와 상황의 미술로서 ‘리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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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비평가 이일은 이승택의 작업에 대해 “조각작품 그 자체가 아무 것에 의해 서도 대치될 수 없는 새로운 태어난 ‘장(場)’, 열려진 ‘장’이어야하는 것이다. […] 영 원히 미완(未完)으로 남아 있을 이 ‘자연의 장’으로서의 조각의 실현이다.”191)라고 평하였다. 이일의 비평처럼 ‘형체 없는 조각’ 작품은 당시 행위예술가들의 작업과 차별성을 띠면서 대치될 수 없는 새로운 ‘장’을 여는 데 기여했다. 또한 자연현상을 작업의 소재한 한 작업의 특성상 ‘미완’으로 남아 있을 이승택 작업의 특징을 특정 모델을 복제하는 사본이 아니라 길을 창조해나가는 과정인 리좀의 ‘지도 그리기’로 해석해 볼 수 있다.

비물질 재료, 즉 자연 현상을 소재로 한 ‘형체 없는 작품’은 1969년 야외에서 처 음 시도한 <바람>이후, 1970년 홍익대학교 건물 사이에 푸른색 천을 매달아 바람 에 날리게 한 작품<바람>(1970)(도11)을 제작하며 본격적으로 구체화 된다.192) <바 람> 연작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불연속적이고 돌발적인 바람의 상황이 작품 속에 개입된다.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상황이 재연되지 않는 일회적인 상황의 끝없는 연 속이라는 점에서193) 우발적인 상태의 연속성을 가진다. 따라서 작품<바람>은 동일 한 반복이 아닌 차이의 반복으로 존재한다. 즉 그의 작품은 고정된 형태로서 동일 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항상 다른 모습을 가지는 가변적 인 성격을 띤다. 따라서 이것은 가타리가 말하는 리좀의 ‘지도그리기’의 원리와 상 통한다. 가타리는 지도를 사본의 개념과 대립하여 설명하였는데 지도는 “사본과 달 리 리좀은 생산되고 구성되어야 하며, 항상 분해될 수 있고 연결접속 될 수 있고 역전될 수 있고 수정될 수 있는 지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다양한 출입구들과 관련 되어 있으며, 나름의 도주선들을 갖고 있다.”194) “지도는 자기 폐쇄적인 무의식을 복제하지 않는다.” “지도는 다양한 입구를 갖고 있는 반면, 사본은 항상 ‘동일한 것 으로’ 회귀한다.”195) 라고 설명한다. 가타리가 말하는 지도는 우리가 길을 찾아나가 는 여정의 실패의 속에서 만들어 나가는 일종의 지침서를 시각화한 개념이다. 따라 서 <바람> 작품은 복제가 아닌 비정형성을 특징으로 가지며, 작품이 존재하는 방 향성이 매우 다양하게 분기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상황’과 ‘상태’의 미술은 ‘형체 없는 조각’과 더불어 행해왔던 ‘퍼포먼스’를 191) 이일, 「이승택의 ‘비조각' 또는 '형체 없는 조각'」, 『이일 미술비평일지』, 미진사, 1998, p. 91.

192) 배명지, 「‘이승택-거꾸로 비미술'의 세계」, 『이승택-거꾸로, 비미술』, 국립현대미술관, 2021, p. 13.

193) 김미경, 『한국의 실험미술』, 시공아트, 2003, p. 169.

194)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옮김), 새물결, 2001, p. 48.

195)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위의 책, p. 30.

통해서도 보인다. 퍼포먼스는 작가가 어떤 행위를 수행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 로 신체성과 수행성을 내포한다. 그리고 신체성과 수행성은 주변의 공간 및 관람객 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특성을 가진다.

이승택의 퍼포먼스 작업의 시초는 <하천에 떠내려가는 불타는 화판>(1964년 원 안, 1988년경 실행)에서 보여 진다. 미술 평론가 윤진섭은 이 작품이 “세 개의 나무 판이 불에 타오르면서 한강을 떠내려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일종의 프로세스 (Process Art)와도 연관되는 작업”196)이라고 설명한다. 이를 통해 이승택의 작품이 과정을 작업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명료히 알 수 있다.

그의 대표적인 퍼포먼스로 1989년, 장흥 토탈미술관과 난지도에서 개최된 《이승 택 분신행위예술전》을 들 수 있다. 여기서 이승택은 본인이 그린 회화와 조각을 비롯하여 자소상, 그리고 장소에 이미 설치되어 있던 구조물, 석상, 담벼락 등의 공 간을 불태우는 행위를 무려 열흘 동안 지속하는 작업을 선보였다.197) 또 다른 사례 로 1995년《정림건축 구사옥 해체이벤트》(도12)가 있다. 이 행사는 창립 30주년을 기념하여 신사옥을 건립한 정림건축이 구사옥을 철거하기 위해 개최된 것이었다.

여기에서 이승택은 구사옥의 빈 창틀에서 긴 캔버스를 바닥까지 깔아놓은 후 물감 주머니를 창틀에 매달아 캔버스 위로 물감이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게 하는 퍼포먼 스를 수행하였다. 그 결과 캔버스 위에는 작가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완결된 회화 대신, 물감이 그려놓은 그림이 남았다. 이 그림에서 중요한 건 결과로서의 예술보 다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의 행위와 그 과정이다. 이 외에도 그가 파도 이미지를 그 린 후 산으로 들고 가서 산의 배경과 그림이 합을 이루게 한 <산정의 바 다>(1983)(도13) 또한 그의 화화의 지향점이 과정의 미술에 있음을 말해준다.198)

이런 점에서 이승택은 작품을 만드는 행위, 그 자체를 작품으로 선보이며 미술에 서 비미술로, 조각에서 비조각으로의 이행을 충실히 실현하였다. 그리고 작가의 행 위를 개입하면서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완결, 완성된 형태만이 작품으로 전 시장에 설 수 있다는 기존의 관념들을 깨트렸다.

또한 리좀의 연결접속의 원리로서 이승택이 《정림건축 구사옥 해체이벤트》에 서 보여준 퍼포먼스나 <산정의 바다>는 작가가 개입한 수행성이나 물리적 형태가

196) 윤진섭,「영원한 이단아의 실험과 도전, 그리고 전위의식의 확산」, 『이승택-거꾸로, 비미술』, 국립현 대미술관, 2021, p. 367.

197) 배명지, 「‘이승택-거꾸로 비미술'의 세계」, 『이승택-거꾸로, 비미술』, 국립현대미술관, 2021, p. 14.

198) 배명지, 위의 책, p. 15.

다른 주변적인 것들과 만나는 관계성 속에서 제시된 작품들이다.《정림건축 구사옥 해체이벤트》에서는 작가의 개념과 행위, 물감이 캔버스 위로 자연스럽게 떨어져 만들어지는 형태들,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는 관객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작품 이 만들어진다. <산정의 바다> 역시 작가가 본인이 그린 파도 이미지와 이를 들고 산으로 가는 행위, 그리고 이 행위에 담긴 파도이미지가 산이라는 공간에 연결 접 속되어야만 비로소 <산정의 바다> 라고 이름 지은 작품이 탄생한다는 점에서 그 의 작업은 언제나 타자성, 외부와의 관계 맺기의 가능성을 담지 한다. 이는 주변의 상황을 작품의 일부로 끌고 오면서 외부의 상황에 따라 작품의 본질이 달라지는 내재성을 가진 리좀적 사유방식이다.199) 따라서 이승택이 추구한 신체성과 수행성 에 대한 탐구는 가타리가 창안한 ‘리좀’의 개념에서 보면, 어디로든 접속될 수 있는 상황성을 바탕으로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 열려있는 관계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연결, 접속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제이 에멀링은 가타리와 들뢰즈의 철학에 대해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은 본질 보다는 정황circumstances과 상황situations-사건 events에 연관되어 있는 개념으로 만들어진 하나의 개방된 체계이다. 개념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고 발명되 어야 한다.”200)라고 말한다. 개방된 체계라는 것은 고정된 관념, 기표, 중심, 모델화 를 떠나 탈기표화, 탈중심화, 메타 모델화의 지향이다. 하나의 개방된 체계라는 것 은 어떤 것과도 접속해 새로움을 생성하고 이 과정에서 변용역능이 발휘되어 전체 의 배치에 변형을 가할 수 있는 체계이다. 이승택이 제시하는 상황과 상태의 미술 은 언제나 여지를 가지고 바깥과의 접속, 즉 외부성이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가능태 로 존재한다.

제2절 가타리 생태철학의 예술적 실천으로서 이승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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