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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기와 감기를 통한 ‘기호적 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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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기와 감기’는 ‘비조각’의 실현을 위해 사용한 방법론이다. 묶기에 대해 작가는 1977년 『공간』지에 아래와 같이 말한 바 있다.

1959년 <시간과 역사>란 제목으로 졸업 전에 출품한 작품이 유(U)자 몸에다 철조망을 둘 둘 감은 것이 나의 첫 추상작품. 그 후에는 오지 작품을 쇠줄로 매어 달아 놓았고 비닐작품 때는 노끈으로 매어 조이면서 어떤 세계를 조작하였다. 다시 바람작품에는 빨래줄 같은, 혹 은 밧줄이나 쇠줄로 열을 올렸다. 70년에는 여체에다 묶었고 화판, 책, 암석, 도자기 등에도 묶었다. 이렇게 실재 물체에다 줄을 묶음으로써 생기는 독특한 수축과 팽창의 변화에 매혹 되었기 때문이다.178)

작가는 195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고드랫돌을 비롯하여 ‘묶 기’ 작업을 지속적으로 행해온다. 1958년 <역사와 시간>(도8)에서 오브제에 철조망 을 묶는 작업을 시작으로 1960년대에는 줄로 비닐을 감거나 각목을 천으로 묶었고, 178) 이승택, 「무엇이든지 묶고 싶다」, 『공간』, 126호, 1977, p 11.

1970년대에는 주로 돌, 도자기, 여성, 토르소, 책, 지폐, 캔버스 등의 사물을 줄로 묶었다.

그는 2014년 한국의 행위예술에 대한 사료 수집을 목적으로 진행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생각했던 그런 물질이 노끈을 감는다든가 뭐 이렇게 되 니까 변형이 되는거야, 바뀌어져요.”179)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그는 묶기의 방법론을 통해 사물의 인식을 다르게 바꾸고자 하였다. 그에게 있어 ‘묶기’는 줄로 묶어 만들어낸 가상의 흔적을 통해 착시 효과를 줌으로써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 내거나 사물의 이면을 유추하게 만드는, 이승택 특유의 ‘역설 어법’이다.180) 이것은 사물을 의미화 된 기표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새로운 맥락으로 재배치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묶기’는 사물을 상징화하고 문법화하고 규범화된 표상화의 방 식에서 벗어나, 비표상적이고 비형상적인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다양한 잠재적 가능태들을 열어둘 수 있도록 한다. 이에 대해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의 양식화 되고 정체된 미술 풍토에서 “이러 저러한 것이 미술이다”라고 정의된 고정관 념에 대한 반동과 거부는 나의 작품세계에서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작품다운 것 보다 작품이 될 수 없는 것, 고정관념과 선입견보다 비현실적이고 초월적인 세계에 대해 관 심을 가지게 되었고, 탈(脫)개념이나 반(反)예술적인 것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181)

그의 작업은 비평가들에 의해 저항, 이단아, 반골 기질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 았을 만큼, 고정된 관념에 대한 저항적 기질이 작업의 근간에 깔려있다. 이러한 맥 락은 가타리가 우리의 삶이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기표 독재 체제의 자본주의 작동 방식에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182)한 지점과 연결 지을 수 있다.

가타리는 ‘기표’에 의해 의미가 고정화되어 우리 삶이 기표의 틀 안에서 움직이 도록 하는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기표를 파괴할 것을 주장한다. 기표는 “‘A’는 ‘B’이 다”라고 고정된 의미를 부여하는 질서이다. 이는 또한 들뢰즈가 정리한 연접 (conjunction)으로 ‘그러므로 나는~이다’로서 정체를 분명히 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승택은 사물을 묶고 감는 행위를 통해 의미의 흐름이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선들

179) 윤진섭, 「한국의 행위예술_1년차: 60-70년대 한국 행위예술 결과보고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아시 아문화정보원 라이브러리파크 아카이브 프로젝트, 2015, p. 37.

180) 배명지, 「'이승택-거꾸로 비미술'의 세계」, 『이승택-거꾸로, 비미술』, 국립현대미술관, 2021, p. 12.

181) 이승택, 「이승택 작품세계의 미학과 방법론적 담론」,『이승택:거꾸로』(제17회 개인전 카탈로그), 갤 러리 현대, 2014, p. 80.

182) 신승철, 『모두의 혁명법』, 알렙, 2019, p. 142.

을 만들어 낸다. 작가에게 사물은 묶거나 감음으로서 A는 B일 수도 C일 수도 있 는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것들이었다. 이러한 시도는 그가 “이러 저러한 것이 미술 이다. 라고 정의된 고정관념에 대한 반동과 거부는 나의 작품세계에서 일관되게 나 타나고 있다.”183)라고 말한 부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고정된 미술의 정의에 대한 문제제기뿐만 아니라 고정된 의미권력에 대한 거부에서 비롯된 작가의 ‘묶고 감는’

행위는 의미화된 기표로서의 사물을 무력화 시킨다.

물체를 묶는다는 발상으로부터, 돌멩이나 암석(巖石)을 묶어 놓으면 딱딱한 물체라도 물렁물 렁한 연체의 형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유추(類推)적 사고 (思考)는 모든 사물이나 관념에 대해 뒤집어서 생각하는 반(反)개념적 발상으로, 미술에 대 한 인식과 모티브, 방법적 요소들이 전환(轉換)되면서 어렵지 않게 여러 사물들을 묶을 수 있다는 개념으로 발전하였다.184)

‘묶는’ 발상을 통해 그는 고정된 것에 대한 저항과 의미권력으로서의 군림한 기 표를 자신의 언어로 코드화 하면서 ‘돌’이라는 글자가 주는 딱딱한 물성을 부드러 운 물성으로 전환한다. 매어진 돌 <무제>(1974)(도9), <매어진 백자>(1975)(도10) 은 이러한 묶기의 어법을 통해 돌의 물성에 변화를 준 작품들이다. 이런 점에서 이 승택이 시도하는 묶기의 어법은 고정과는 반대되는 흐름의 사유에 기반한 것이라 고 볼 수 있다. 이 흐름의 사유는 가타리가 제시한 유목적 사유로 연결된다.

따라서 가타리의 관점에서 보면 이승택의 이러한 ‘묶기’ 기법은 자본주의의 아카 데미에 의해 떠받들어지는 ‘정의(definition)’ 즉, 의미권력에 대한 반기로서, 예술적 으로 의미를 변주해나간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묶기’와 유사한 맥락으로서 작가는 ‘해체’ 행위를 ‘묶기’와 병치시켰다. 캔버 스 틀을 해체하고 그 위에 종이를 붙이거나 로프나 지폐묶음을 풀어헤치는 등, 묶 기와 정반대인 방법론이지만 익숙한 사물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집는 역설법이라는 점에서 이는 동일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185)

183) 이승택, 「이승택 작품세계의 미학과 방법론적 담론」,『이승택:거꾸로』(제17회 개인전 카탈로그), 갤 러리 현대, 2014, p. 80.

184) 이승택, 위의 책, 2014, p. 77.

185) 배명지, 「‘이승택-거꾸로 비미술'의 세계」, 『이승택-거꾸로, 비미술』, 국립현대미술관, 2021, p.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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