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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서의 모든 신학적 진술의 중심축은 기독론이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기독론은 요한신학을 결정짓는 최대 결정요소이다.114)

요한이 기독론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의 공동체가 처한 정 황에 기인한다. 요한공동체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등 기독론115)으로

114) 성종현,『신약총론』(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출판부, 1991), 719.

115) 하등 기독론(a low christology)이 과거 전승으로부터 전해져온 지상 인물 에 관한 기독론으로 예수를 인간으로 소개하는 특징이 있는 반면 고등 기독론(a high christology)는 예수를 신적인 존재로 증거하는 형태를 띄고 있다. 하등 기독론의 대표적

인해 유일신 사상의 유대교로부터 회당에서 축출을 당하였다(요 9:22). 그래서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에 대한 정체성과 본질 그리고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밝히는 데 총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요한복음은 서론에서 예수를 로고스라고 정 의한다. “태초에 말씀(로고스)이 계시니라”(요 1:1) “말씀(로고스)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로고스는 당시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에게 통용 되던 용어로 비록 학자들마다 로고스의 어원을 달리 설명하지만 선교적 측면에 서 로고스 단어의 선택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모든 자에게 예수를 소개하여 생명을 얻도록 하려는 요한복음의 의도로 볼 수 있다. 이는 공관복음과 비교해볼 때 요한복음이 특정 인종이나 종파, 민족을 건너뛰어 모든 인류에게 다가가려는 우주적인 의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로고스의 사역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는데 요한복음 1장에서 제시되는 로고스의 중요한 사역은 창조사역(요 1:3)과 구원사역(요 1:4)이다. 모든 만물은 로고스로 인해 생성되었기에 로고스는 모든 만물의 주재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모든 인류도 포함된다. 인종이나 민족, 종파를 뛰어넘어 로고스는 모든 것의 주인이다. 그에게는 편애나 편견이 없다. 이 로고스가 어둠 속에서 생명을 잃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고자 육신이 되었다. 누구든지 그를 받아 들이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서였다(요 1:12).

그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 거기에는 유대인들이 상종하지 않았던 사마리 아인들도 포함된다(요 4장). 그래서 예수는 사마리아에도 간다. 그것은 예수가 자의로 간 것이 아니라 그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보내심을 받은 것이 다. 그것은 사마리아를 찾아간 그의 당위성에서도 엿볼 수 있다. “사마리아로 통 행하여야 하겠는지라”(요 4:4) 의무적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가도록 보냄을 받았 기 때문이다.

인 명칭은 메시야이고 고등기독론의 대표적 명칭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초기 요한공동체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메시야)로 고백되었다. 이는 예수 의 제자들과 모세의 제자들, 기독교인과 유대교인들을 구분하는 시금석이었다.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요 4:29). 하지만 ‘그리스도 기 독론’은 유대적 색채가 강하기에 헬라인을 비롯한 모든 인류에게 예수를 소개하 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요한복음은 로고스의 도입으로 우주적인 기독론을 담고자 했다. 유대적

‘그리스도’보다 우주적이며 모든 인류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했 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이다.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을 통해 요한공동 체는 더 많은 사람들과 종파들을 끌어들이고 그들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기독 론으로 발전시켜 공동체의 사상적 통일을 이룬다.

‘하나님의 아들’ 기독론은 ‘아버지-아들’ 기독론으로도 표현할 수 있는데

‘아버지-아들’ 기독론은 요한복음의 독특한 기독론으로 여기에는 아버지가 아들 을 보내셨다는 개념이 강조되게 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자신을 ‘보냄받은 자’로 소개하곤 한다.116) 요한복 음에서 보내심을 나타내는 원어는 주로 ‘아포스텔로’(apostellw)와 ‘펨 포’(pempw)이다. 요한복음에서 두 단어는 단순히 예수님의 보내심이 사명을 띠 고 보내졌는지, 아니면 아무 의미없는 파송인지에 대하여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이것은 두 단어가 이미 어떤 사명과 위임을 받고 보내졌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것이 결국 아들이 아버지에 의해 파송을 받았다는 ‘파송된 자로써 기 독론’117)을 강조하게 만들었다.

이 ‘파송’의 주제는 요한복음의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고 있다. 먼저는 세례요한의 보내심, 그 다음 아들을 보내심, 그리고 아들은 성령을 보내심, 마지

116) 요 3:17; 4:34; 5:24, 30, 37; 6:38-39, 44; 10:36; 17:18.

117) 베커(J. Berker)는 요한기독론의 특징을 ‘로고스 기독론’ 혹은 ‘성육신 기 독론’에 있지 않고 아들의 ‘파송 기독론’(Gesandten-Christologie)에 있다고 말한다. 성 종현,『신약총론』, 708.

막에는 제자들(성도 혹은 교회)을 세상에 보내심으로 이어진다. 이 네 가지 보내 심은 같은 특징을 지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위하여 그들을 보내셨다 는 것이다.118)

보내심의 궁극적 이유는 증거를 통한 추수이다. 증거를 통해 추수가 이 루어진다. 세상은 하나님과 아들을 알게 됨으로 영생을 얻게 되고(요 17:3), 생 명을 얻으며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선교는 그렇게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고(11:52), 다른 양들을 한 우리로 불러모으는(10:16) 것이다. 이를 위해 제자들도 보냄을 받은 것이다. “내 가 너희로... 거두러 보내었노니”(요 4:38)

보내심과 추수,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요한복음이 예수를 육신이 된 ‘로고스’, ‘아버지-아들’ 혹은 ‘보내심을 받은 자’로 소개할 때 이는 예 수가 추수하는 자임을 밝히는 것으로 요한의 기독론이 이미 선교적 의미를 지니 고 있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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