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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산성의 현황

문서에서 2011년도 자원봉사 교육생 일정 (페이지 65-71)

〈삽도 1〉문학산성 위치 및 성곽 분포도

〈삽도 2〉문학산성 위치도(1917)

典 資料 內容

世宗實錄地理志 “南山古城은 군 남쪽 2里에 있다. 둘레는 1백60보이며, 사면이 높고 험하다. 안에 작은 샘이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남산고성은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430척이다.”

東史綱目

“문학산 정상에 비류 성터가 있고 성문의 扉板이 아직도 남아있 고 성내에는 沸流井이란 우물이 있는데 물맛이 맑다. 勝覽에서 기록하지 않은 것이 개탄스럽다.”

輿地圖書 “彌鄒王의 옛 도읍지이며, 石城의 터가 있고, 임진왜란시 부사 金善敏이 古城을 增修하여 성을 지키면서 여러 차례 무찔렀다.”

大東地志 “古城은 文鶴山에 있으며 둘레 430척이다.”

京畿誌 “彌鄒忽古城 혹은 南山古城이라고도 한다. 부의 남쪽 1리 문학 산에 있으며 둘레는 사백삼십척이다.”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성벽은 동문 부근 석축으로서 높이 7~8척, 길이 7~8칸, 둘레 약600칸의 토루의 자취를 보인다.”

仁川鄕土史料

“문학산성 동문으로부터 서북으로 약 150m 되는 한층 얕은 곳에 석축의 우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석축이 倒壞되어 태반이 매몰되 었고 몇 십년 전까지도 맑은 물이 항시 넘쳐흐르고 있었다 한다.

표고 280m 가까운 높은 산상에 이 같은 우물이 있는 것은 지질 학적으로 보아 그리 이상한 것은 아니다. 이 우물을 판 것은 산 성의 축조와 때를 같이하였으리라고 본다.”

文化遺蹟總攬

“성은 內․外城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외성은 석축의 성벽으로 둘 레 약 200m로 되어있고, 내성은 토축의 성벽으로 둘레 약 100m 로 되어 있다. 자연의 험지를 이용하여 문학산정에 이룩한 성벽 은 5m 이상의 높이를 가지고 있으며 성중에는 우물이 있고 성벽 은 현재 대부분 붕괴되어 그 석조물이 산기슭에 흩어져 있으며 동북면이 다소 완전하게 남아있다.”

1. 문헌검토

문학산성에 관한 기록은 조선시대 각종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봉수 에 대한 기록을 제외한 문학산성과 관련된 문헌기록 및 이전 조사보고 내 용을 정리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표 1〉문학산성 관련 자료16)

위 <표 1>을 보면 18세기에 편찬된 안정복의 󰡔동사강목󰡕에서 백제 비류 성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

에서 토축 내성이 있음을 보고하고 있어 이 토축성이 백제에 의해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현재까지 내성은 지표상에서 확인되지 않아 단정하 기가 어렵다. 조선 초기 󰡔세종실록지리지󰡕의 기사에서는 성벽이 석성(石 城)으로 축조되었으며 성내에 봉수(烽燧)가 있다는 기록이 있어 이미 봉 수가 건립되었으며 당시까지 성곽의 기능을 유지하고 있던 것으로 여겨진 다. 다음으로 1531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고성(古城)’으 로 칭하고 있어 16세기에는 이미 성곽이 퇴락하여 폐성(廢城)된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에 임진왜란시 성벽을 증수 (增修)하여 이곳에서 왜적과의 전투가 있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산성의 명칭에 대해서는 남산석성(南山石城), 남산고성(南山古城), 비 류성(沸流城), 문학산성(文鶴山城), 미추홀고성(彌鄒忽古城) 등으로 불리 고 있다. 성의 둘레는 󰡔세종실록지리지󰡕에서만 160보(步)이며 나머지 기 사에서는 모두 430척(尺)으로 기록하고 있다.

2. 구조 및 축조방법

문학산성은 문학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축조된 테뫼식의 석축성이다. 토 축의 내성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 확인되지 않는다.4) 성곽의 규모는 둘레

3) ① 󰡔世宗實錄󰡕卷148, 地理志 仁川郡條.

② 󰡔新增東國輿地勝覽󰡕卷9, 仁川都護府 山川條.

③ 󰡔東史綱目󰡕.

④ 󰡔輿地圖書󰡕, 仁川都護府 古跡條.

⑤ 󰡔大東地志󰡕卷4, 仁川 城池條.

⑥ 󰡔京畿誌󰡕, 仁川府邑誌 城池條.

⑦ 朝鮮總督府, 1942,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⑧ 史料收集委員會, 1956, 󰡔仁川鄕土史料󰡕.

⑨ 文化公報國 文化財管理局, 1977, 󰡔文化遺蹟總攬󰡕.

4) 문학산성의 내성은 1949년 기록을 통하여 처음 확인되는데 둘레 약 100m의 토축 성벽으로 1950년대 초까지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李慶成, 1949,「文鶴山城」,『仁川의 名所古蹟』, 32쪽.) 그러나 1959년 이후 군부대를 지으면서 山頂을 削平하고 후미진 곳은 覆土하였으므로 현재는 확인되지 않는다.(인하대학교 박물관, 1999, 앞의 책, 88~89쪽.) 이 내성은 봉수대가 운

577m이며, 면적은 20,800㎡(6,300평)이다. 평면형태는 동서방향을 장축 으로 하는 마름모꼴로 북벽이 길고 남벽이 짧다. 각 성벽의 현황5)은 다 음의 <표 2>와 같다.

북벽 동벽 남벽 서벽

길 이 227m 110m 112m 128m 577m

(잔존 339m) 구 간 NO.19~246 NO.246~355 NO.356~467 NO.468~0~NO.18

시 설 동문지, 수구 서문지

〈표 5〉성벽 현황

성내고도는 북서쪽이 높고 남동쪽이 낮은 지형을 이루고 있다. 산의 8~9부 능선을 이용하여 축조하였는데 동․서벽 쪽으로 능선이 이어지고 있 으며 남․북벽 아래로는 가파른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성벽은 동벽과 남벽의 잔존상태가 양호하며 북벽과 서벽은 군사시설로 인해 현상파괴가 이루어졌다. 잔존성벽의 길이는 339m이다. 성돌은 다듬 은 장방형 석재를 이용하여 단과 열을 맞추어 맞물리게 축조하여 평면모 습이 ‘품(品)’자형을 이루고 있다. 성돌의 크기는 높이 12~30cm, 너비 25~80cm, 뒷심 길이 30~60cm 내외이다. 간간히 뒷심이 긴 심석(深石)을 이용하여 뒷채움 석재들과 맞물리게 하였다. 성벽 하단에 지대석은 보이 지 않으며 아래에서 위로 오르면서 석재의 크기가 작아지고 있다. 일부 구간에서는 돌출된 자연 암반을 그대로 체성벽으로 이용한 것이 확인된 다. 성벽 기저부는 암반층을 정지하여 그대로 성벽을 쌓거나 기초부에 석 재 다짐층을 조성한 후 성벽을 축조하였다. 석재 다짐층이 확인된 구간의 높이는 1.3m이다. 암반층을 기저부로 이용한 경우에는 성벽 하부에서 보 강석축시설이 일부 확인된다. 성벽의 단면형태는 하단은 거의 수직을 이

영되면서 조성한 방호벽일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여겨진다.

5) 구간은『文鶴山城 地表調査報告書』를 참조하였으며, 이를 중심으로 四方 성벽의 기준을 설정하 였다.

〈삽도 3〉장미산성 북서벽 <삽도 4〉장미산성 북벽

루고 있으며 상단으로 가면서 약간 안으로 들여쌓기하여 규형(圭形)을 이 루고 있다.

문학산성의 성벽을 구성하는 성돌의 경우, 가로와 세로 비율이 2:1, 3:1의 장방형 석재를 사용함과 동시에 판석형 석재를 일정비율 혼용하여 축조하였다.19) 그리고 문학산성 성벽은 웅진․사비기 충남지역에서 확인되 고 있는 백제석성의 성돌의 장방형 석재의 가로와 세로 비율이 동일하다.

그렇다면 웅진․사비기 정착된 석성의 성돌 규격이 한성기 어느 한 시기에 정립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근한 예로 장미산성과 설봉산성의 발굴결 과에서도 판석형 석재를 일정비율 혼용하여 축조한 양상이 관찰된다. 이 러한 축조양식은 백제 한성기 석축산성의 중요한 특징으로 파악된다. 또 성벽 하부에 석재 다짐층을 조성한 후 성벽을 축조 하였고 보강석축을 하 부에 조성하였는데 이는 앞에서 예를 든 두 산성에서도 공히 나타나는 축 조양상이다.20) 따라서 이와 같은 자료들은 고대 성곽의 축조주체 문제를

19) 고대 석축산성으로 보고된 유적은 설봉산성, 설성산성, 망이산성, 자미산성, 반월산성, 장미산성 등이 있다. 이러한 유적에서 확인된 축조방법 중 먼저 성벽의 면석을 살펴보면 세장방형 석재와 장방형 석재를 사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웅진․사비기 석축산성에서 보이는 가로:세로 비 가 2:1 또는 3:2의 장방형 석재의 사용 예와 대조를 보인다.(서정석, 2002,『百濟의 城郭』, 학 연문화사, 233~240쪽.) 설봉산성의 경우 2차 서문지구간 외벽은 쐐기돌 없이 장방형 석재를 2~3단 쌓고 그 위에 세장방형 석재를 1단 올리거나 세장방형 석재 위에 장방형 석재를 1단 쌓 는 방법이 확인된다. 특히 장방형 석재는 사각추 형태로 다듬어 사용하였다. 이러한 축조기법은 고대 산성의 축조기법으로 알려져 있다.(金虎俊, 2004,「利川 雪峰山城 築城技法 考察」『文化 史學』21, 韓國文化史學會. )

20) 한성기 석축성의 축조기법은 지형에 따라 계곡부와 능선 상면의 2가지 경우에서 볼 수 있다.

〈삽도 5〉설봉산성 북벽

살필 수 있는 한 자료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외 성곽 관련 시설물로는 봉수대 와 문지, 우물 등이 있다.

① 봉수대는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한 각종 지지(地誌)와 읍지(邑 誌)에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대 부분 ‘성산봉수(城山烽燧)’로 표기되어 있다. 대응노선은 남으로 안산 정 왕산봉수(正往山烽燧)와 북으로는 부평 축곶봉수(杻串烽燧)를 연결하는 연변봉수이다. 1942년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 는 지름 2칸의 만두형(饅頭形)의 봉수대가 남아있고 이를 미추왕릉(彌鄒 王陵)으로 보는 전승이 있다고 한다.21) 1949년의 조사에서는 봉돈이 토 축(土築)의 원루(圓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22) 군부대 건설시 완전히 멸실되었다.

② 문지는 성벽 파괴가 심하여 지표상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성 내로 진입하는 도로가 서벽에 개설되어 있는데 원래 주출입문이 이곳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문지는 1958년 인천시에 의해 개수(改修)되었

계곡부의 성벽은 성 안쪽을 성벽 상면까지 점토다짐으로 채우는 특징이 있다. 이 토축부는 외벽 까지 이어지며 초축시기를 가늠하는 자료로 이용된다. 이러한 토축부는 성벽 상면으로의 접근을 용이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성내부에 평탄지 확보와 빗물 등의 성내 用水가 성벽으로 침투하는 것 을 막고 원활한 배출을 위한 용도로 쓰였으며 뒷채움석을 고정시켜 성벽이 밀려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도 하였다. 능선 상면은 편축법에 의해 성벽이 축조되었는데 능선의 경사가 심한 경우에는 암반을 ‘ㄴ’자로 깎아낸 후 기저부를 계단식으로 조성하였다. 이러한 계단식 기저부는 성벽이 성밖으로 밀려나가는 것을 방지할 목적으로 굴착한 것으로 성벽 하중의 분산과 마찰면의 확보를 위해 계단식으로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연약지반과 지하수의 침투가 예상되는 구간에서는 암반층까지 퇴적토를 걷어내고 점토와 잔돌, 대형석재를 이용하여 1m 정도를 다진 후 성벽을 축조하기도 하였고, 계곡부에는 외벽의 기저부를 점토로 덧 데고 기단석을 올리는 경 우도 있다.(白種伍, 2007,「仁川沿岸의 古代城郭에 대하여」『文化史學』27, 韓國文化史學會, 177~178쪽.)

21) 朝鮮總督府, 1942,『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5쪽.

22) 봉수대가 산 정상에 볼록하게 솟아있는 관계로 문학산을 일명 배꼽산으로 불리웠다.(李慶成, 1949, 「烽燧」,『文鶴山方面古蹟傳說調査報告書』, 仁川市立博物館, 42쪽.)

으나 이후 다시 파괴되었다. 이전 자료23)에 소개된 당시 사진을 보면 개 구부 형태의 암문으로 규모는 높이 2.2m, 너비 1.8m로 추정된다.

③ 우물지는 ‘비류정(沸流井)’이라 하여 조선시대 각종 지리지에 언급되 어 있다. 이곳은 전 동문지에서 서북쪽으로 약 150m 지점에 위치하고 있 었으며 광복 직후까지 식수로 사용할 수 있는 20m 깊이의 맑은 물이 흘렀 다고 전한다. 하지만 1970년대까지도 현상이 남아있었으나 이후 군사시설 이 건립되면서 매몰된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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