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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시대의 유적

문서에서 2011년도 자원봉사 교육생 일정 (페이지 104-113)

1) 궁궐과 성곽

고종 19년(1232) 강화도로 천도가 결정된 후 궁궐과 관아, 성곽이 조영 되기 시작했다. 강도가 세워진 곳은 오늘날 강화읍이 자리한 일대로 강화 도의 동북쪽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북쪽으로는 강화 북산(송악산)이, 남 쪽과 동쪽은 각각 남산과 견자산, 서쪽에는 고려산 자리 잡고 있어 사방 이 산지로 둘러싸인 분지를 이루고 있어 방어에 유리한 지형조건을 갖추 고 있다. 또한 강화읍 서북쪽에 있었던 승천포를 통해 개경과, 동쪽의 갑 곶을 통해 내륙지역과 연결될 수 있는 교통상의 요지이기도 하다. 이렇듯 강화읍 지역의 지리적 이점은 고려가 도읍을 건설한 주요한 원인이 되었 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강도가 오늘날 강화읍 지역이 가지는 방어와 교통에 유리한 지리적인 이점이 주요한 원인이지만 개경과 입지조건이 매 우 유사한 풍수적인 조건도 주요한 검토대상이었을 가능성도 높다.

강도의 궁궐은 고종 19년(1232) 강화천도가 결정되자 군대를 동원해 궁 궐을 조영하기 시작했다. 궁궐의 완성이 언제 일어났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234년 고종이 내전에서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진행하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1233년 말에는 궁궐의 틀이 어느 정도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 정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부분적인 보수나 개창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도의 궁궐과 관청 등은 개경을 모델로 하여 건립되었고, 그에 따라 명칭과 구조, 배치 역시 개경의 그것과 같았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지금까지 연구결과나 개경 만월대의 위치와 구조 등을 고려할 때 현재 의 고려궁지가 자리한 주변지역을 궁궐위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 다. 다만 지금의 고려궁터에 대한 여러 차례의 발굴조사에서도 관련된 유

구나 유물이 발견되고 있지 않아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강도의 궁궐 이외에 이궁과 별궁도 건립되었다. 이궁 내지 가궐을 창건 하면 나라나 왕의 운수를 연장할 수 있다는 연기설의 영향으로 고종 46년 (1259) 2월 마니산에 이궁을 창건하였고, 같은 해 4월 삼랑성과 신니동 가궐이 지어져 1264년 완공되었다. 마니산 이궁은 지금 흥왕리에 있으며, 삼랑성 가궐은 전등산 경내, 신니동 가궐은 선원면 지산리로 비정된다.

이 가운데 마니산 이궁은 현재 그 터가 남아 있으나 삼랑성과 신니동 가 궐은 구체적인 흔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궁궐과 함께 강도가 도읍으로서 위상을 갖추기 위해서는 성곽이 설치되 어야 했다. 강도의 성곽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이어서 자세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내성, 중성, 외성의 3개의 성곽이 축조되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고려사』에서 내성의 축조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내성을 허물었다 는 기사와 함께『新增東國輿地勝覽』,『江都誌』,『與地圖書』등 자료를 종합할 때 강도가 3성 체제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개경의 성곽체제가 궁성(宮城), 황성(皇城), 나성(羅城)의 3성체계 로 구성되어 있는데, 강도가 개경을 모델로 조영되었다는 점에서 성곽도 개경의 그것과 같은 체제를 갖추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성곽의 구체적인 형태와 위치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는 실 정으로 지금으로서는 3개의 성곽이 모두 토축(土築)으로 조성되었다는 정 도만 알 수 있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내성은 주위가 3,874척(약 1,240m) 이며, 외성은 37,076척(약 11,860m)으로 전한다.

현재 강도의 성곽 가운데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은 강화읍 외곽을 둘러 싸고 있는 토축성이 유일하다. 이 성은 중성으로 불리 우고 있는데 기록 상의 내, 중, 외성 가운데 어느 것에 해당하는지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 다. 그러나 강화읍을 중심으로 환축한 성곽의 구조로 미루어 보아 지금의 중성이 강도를 최 외곽에서 둘러싼 도성(都城)으로 파악하는 것은 무리가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처럼 궁궐과 성곽의 모습을 정리해 보면 강도는 송악산, 견자산, 남 산, 그리고 그 사이를 동서로 흐르는 동락천 일대가 중심 지역이었던 것 으로 보인다. 강도는 고종 21년 궐남리에 대풍으로 화재가 발생해 수천채 의 집이 불탔다고 하며 고종 32년에도 견자산 북리에서 민가 800여 채가 불에 탔다는 기록으로 보아 많은 인구가 밀집해 살고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강도의 중심지역은 이미 도시화가 이루어진 상태로 그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이 밖에 아직 그 성격이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고려산과 하음 산, 교동의 화개산 등지에서도 고려시대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성곽들이 남아있다.

2)무덤

지금까지 조사된 바로 강화에는 왕릉을 비롯해 대략 23개소 이상의 고 려시대 고분(군)이 분포한다. 무덤은 후대의 생활공간과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후대의 생활터전에 자리해 훼손되거나 멸실되기 쉬 운 건물과 집자리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존이 잘 되어 있어, 관련 유적이 많지 않은 강도시대 강화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강화도는 강도시대 사망한 고려희종의 석릉(碩陵)과 고종의 홍릉(洪陵) 등 왕릉 2기와 가릉(嘉陵)과 곤릉(坤陵)등 왕비릉 2기가 자리하고 있어 남한지역에서는 유일하게 고려 최상위 묘제를 살펴 볼 수 있는 곳이다.

최근 몇 년간 석릉과 가릉, 곤릉 등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왕(비) 릉의 구조가 밝혀진 바 있다.

왕릉이외에도 정확한 피장자는 알 수 없지만 능내리와 인산리, 연리에 서 왕릉과 비슷한 규모와 구조를 가진 석실묘가 분포하고 있고, 다른 지 역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판석으로 된 석곽묘 등 상위계층의 무덤들 이 군집을 이루고 있는 등 고려 상위계층 묘제에 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 밖에 강화 곳곳에서 석곽묘와 토광묘 등 고려시대에 나타나는 거의 모든 묘제가 확인되고 있는데 고분군의 분포 밀도 또한 다른 내륙 지역과 비교했을 때 매우 높다. 하지만 현재까지 강화 고려고분에 대한 조사는 시작 단계로서 대부분의 고분군들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조사가 이 루어지지 않고 있어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향후 조사결과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한편 강화지역 고려시대 고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고분의 유형과 구조에 대한 내용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 묘제를 간략하 게나마 살펴봄으로서 강화도 고려고분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고려시대 고분은 여러 가지 유형이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것은 고분은 석실묘(石室墓)와 석곽묘(石槨墓), 토광묘(土壙墓) 등이다. 석실묘는 고 려시대 최 상위계층의 묘제로 왕실의 무덤으로 이용되었다. 석실묘의 구 조는 크게 묘역과 석실구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산지의 사면에 장 방형 묘역을 조성한 뒤 석축 또는 석단을 이용해 3~4단으로 묘역을 구분 한다. 묘역의 최 상단에는 曲墻을 두르고 그 안에 봉분이 위치해 묘역의 중심을 이룬다. 봉분의 하단에는 장식과 봉분보호의 기능을 하는 병풍돌 을 설치하며, 그 바깥으로 난간석을 두른다. 묘역의 2~3단에는 석인상과 석물을 배치하고 하단에 정자각을 설치한다. 석실은 판석 또는 할석을 이 용 벽체를 축조하고 판석 수 매로 천장을 구성한 방이다. 평면형태는 대 부분 장방형으로 가로 세로가 각각 2~3m 내외이며 높이 또한 2m 정도다.

입구의 바닥에는 문지방석을 깔고, 양쪽 장벽에 기둥돌을 세운 뒤 판석 1 매로 마감한다. 입구에서는 나무문으로 이중문을 설치한다. 석실 바닥의 가운데에는 보통 관대가 설치되고, 석실바닥은 석비례층을 그대로 사용하 기도 하지만 판돌 또는 벽돌을 시설하는 예가 많다. 벽과 천장에는 벽화 가 그려진다.

석곽묘는 4벽을 판석이나 할석을 이용해 축조하고 내부에 목관을 안치 하는 형태이다. 석곽묘는 축조방식에 따라 다듬어진 판석(板石)으로 사방 벽면과 덮개를 구성하는 판석조석곽묘(板石造石槨墓)와 치석된 할석(割 石) 또는 자연석을 이용해 벽체를 축조하는 할석조석곽묘(割石造石槨墓) 로 구분된다. 판석조석곽묘의 구조는 대략 길이 2~3m, 너비 1m내외 높이, 0.9~1.2m의 장방형 형태로 석실묘보다 규모가 축소되고 너비에 비해 길이 가 길어진 형태이다. 벽면과 천정에는 벽화가 그려진 경우가 있으며, 석 실묘에서 나타나는 석단 등 외부 묘역시설이 설치되는 예도 많아 상류계 층의 무덤으로 파악된다. 할석조석곽묘는 길이 2~3m, 너비 40~80cm정도로 판석조석곽묘에 비해 규모가 작고, 축조수준 또한 상대적으로 조악하다.

매장주체부 이외에 별도의 시설이 설치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토광묘는 구덩이를 파고 목관 또는 시신을 직접 안치하는 단순한 형태 로 할석조석곽묘와 더불어 가장 널리 확인되는 고려고분의 유형이다. 토 광묘는 길이2m, 너비 0.5~0.7m 내외의 크기로, 별도의 시설 없이 매장주 체부만 조성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석곽묘와 토광묘는 보통 2~3기에서 많 게는 수백기가 모여 고분군을 형성한다. 이 밖에 석관이나 토기에 유골을

안치하는 화장묘도 널리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발굴을 통해 확인된 예는 매우 적다.

이상과 같은 고려고분의 각 유형은 被葬者의 계층에 따른 차이를 반영 하고 있는데, 석실묘는 왕실의 묘제, 석곽묘 중 판석조석곽묘는 고위 관 료층, 할석조석곽묘와 토광묘는 그 이하의 무덤으로 구분될 수 있다.

강화도 고려고분은 섬 전체에 걸쳐 고르게 분포하고 있는데, 홍릉을 제 외한 나머지 능은 모두 진강산에 소재하고 있다. 진강산은 강화도의 중앙 부에 자리한 산으로 이 곳은 본래 강화현의 속현인 진강현의 진산으로 알 려져 있는 곳이다. 진강산에는 석릉과 가릉, 곤릉이 자리하고 있으며 가 릉에 인접해 능내리 석실묘가 위치하고 있어 강도시대 왕실의 묘지로 활 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홍릉의 경우 강화읍 서쪽의 고려산 기슭에 홀로 위치하고 있다. 진강산은 왕실의 묘지뿐만 아니라 당시 지배층의 묘지로 도 활용되었다. 고려시대 묘지명 가운데 강화에 매장된 인물은 7명으로 모두 강도시대 관료들이다. 이들 가운데 김취려와 유경현, 최항, 이규보 등 4명이 진강산 일대에 묻힌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당시 왕릉과 관료의 묘지로 진강산 일원이 선택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알려진 바 없다.

한편 왕릉을 제외한 지금까지 파악된 강화도의 고려시대 고분들은 아직 정확한 피장자를 알 수 없어 모두 강도시대의 것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강도시대 이전에 강화에는 강화현 과 하음현, 진강현 등의 토착세력이 존 재했으며 이들도 분명히 무덤을 조성했을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확인된 고려시대 고분(군)들 가운데 강도시대에 조성된 무덤의 비율은 현재로서 는 알 수 없지만 개경으로부터 10만호의 인구가 급속하게 유입되면서 인 구가 급격히 팽창한 강도시대에 조성된 고분의 수가 적지는 않았을 것으 로 보인다.

3)절터

지금까지 강화에는 문헌상으로 63개의 사찰이 전해지고 있어 여타 지역 이 비해 유적이 유난히 많다. 삼국시대부터 강화에 불교사찰이 건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강도시대 부터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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