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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문학산성의 현황과 시기별 변천과정에 대하여 제한된 범위와 자료를 가지고 살펴보았다. 이러한 한계는 문학산성에 대 한 시굴조사나 발굴조사가 전무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비단 문학 산성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인천지역의 고대성곽에 전반적으로 해당하 는 문제이다. 따라서 문학산성의 구체적인 축조기법과 축성시기 등을 밝 히고 나아가 상호 비교 연구를 진행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드러나는 실

67) 邵城陣中日誌는 1871년 4월 6일부터 5월 23일까지 48일간 강화도 앞바다에 나타난 미국 함선과 인천도호부가 교전한 내용을 상세히 기술하였다. 당시 인천부사인 具完植의 조카가 숙부 의 방어 준비과정과 내외 사정을 소상히 묘사하여 신미양요 때 조선군의 움직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68) 邵城陣中日誌 4月 20日條.

69) 邵城陣中日誌 仁川府射砲契節目條.

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발굴조사를 진행하기에도 커다란 문제점이 따른다. 여기에서는 다소 논의에서 벗어나지만 향후 인천지역 성곽의 조 사연구에 있어 반드시 고려할 사항을 몇 가지 제시하며 맺는말을 대신하 고자 한다.

첫째, 조사연구 방법의 체계화가 필요하다. 이미 수많은 학자들에 의해 성곽연구가 진행되고 있으나 성곽 조사 과정에서 혹은 출토 유구의 해석 등에 대한 표준적인 절차나 방법론적인 접근이 이루어지 못하고 있다. 즉 성곽 조사․연구에 있어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문제가 무엇인가에 대한 학계의 공감대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성곽 조사의 전문성 확보 는 물론 지역간 성곽의 상호 비교, 시기별 변천과정 분석을 통한 국가별 공유관계의 검토 등 연구의 다양화와 수준 제고의 기폭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둘째, 성곽 조사 과정에서 향후 정비 복원과 관련된 제 사항이 포함되 어야 한다. 예컨대 인천지역의 많은 성곽들이 정비 복원 되었으나 그 결 과에 대해 누구나 만족하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보수 복원 과정에 비전문 가 집단이 깊숙이 개입하거나 복원을 위한 조사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들 이 오랫동안 시정되지 못하고 단순히 답습하는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섣부 른 유적 정비가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은 무엇보다도 유 적의 원형 훼손이라는 심각한 문화적 손실을 가져왔다. 앞으로 다양한 분 야의 연구자들의 참여와 연구를 보장하여 정비 복원에 대한 신뢰를 회복 하여야 할 것이다.

셋째, 올바른 역사교육의 장이 되어야 한다. 모든 조사 자료와 연구 성과 를 집대성하고 종합화하는 최종 목표는 국민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전달하는 데 있어야 한다. 종래의 성곽 조사연구는 성곽의 외형에만 치중하였기 때문 에 지극히 단조로운 정보만을 제공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성곽 유적에 대한 흥미 상실을 가져왔다. 성곽의 외형에 대한 치중은 성 내부에 체육시설, 군 사시설 등의 난립을 수반하게 함으로써 되돌릴 수 없는 유적 훼손을 초래하

였다. 앞으로 성곽 조사연구에 있어서 성곽과 관련된 인물들의 이야기나 사 건, 지역민의 삶과 전승, 성곽 주변의 경관 보존 등에 초점을 맞추고 역사 의 원형을 찾으려는 시각의 변화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70)

우리나라에는 남한지역에만 2,100여 개소의 성곽이 남아있다. 이러한 성곽은 우리 곁을 지키면서 우리를 이어주는 수호자의 역할을 하였다. 이 점만으로도 성곽은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장인 동시에 관광자원으로서도 매우 높은 매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이제부터는 성곽의 올바른 가치 를 찾는데 함께 노력할 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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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문서에서 2011년도 자원봉사 교육생 일정 (페이지 8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