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감리서와 각국 영사관의 설치

문서에서 2011년도 자원봉사 교육생 일정 (페이지 139-146)

(이하는 2003년 인천시에서 발간한『인천시사』권2에서 발췌)

74)『續大典』권 5, 刑典 推斷, 縣令以上降縣監 縣監勿革而序諸縣之末 限十年復舊. 그런데 이러 한 규정은 조선 전시기에 걸쳐 시행되었다고는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조 48년에 영의정 金 致仁이 瑞興은 본래 都護府였는데, 趙大立의 사건이 있은 후 특별히 1백 년 동안 縣으로 강등 했었습니다. 이제 1백 년의 한정이 이미 지났으니, 도로 도호부로 승격시킴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여 100여 년 만에 복구된 사례도 보이기 때문이다(『영조실록』권118, 영조 48년 1월 14일).

75) 인천이 도호부로 복구된 년도는『여지도서』에는 丁丑년 2월이라 하였고,『대동지지』에는 숙 종 23년이라 하였으며,『증보문헌비고』에는 숙종 24년이라 하였다. 여기서는『여지도서』에 년 도의 간지와 월이 기록되어 있기에 이를 따랐다.『숙종실록』에는 이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 않 는다.

인천항의 개항이 확정되고 1883년 4월 13일 최초로 상업종사 목적의 일 본인이 내항하였으나 그 수가 아주 적었고 본격적인 개항은 같은 해 6월 경에야 이루어 졌다. 그러므로 인천항에서 통상사무를 취급할 필요성이 생긴 것 역시 6월 이후의 일이었다.

고종 20년(1883) 8월 19일에 조선은 통상사무를 취급하기 위한 기구로 감리서를 설치하였다. 감리서는 인천, 부산, 원산 등 3개항장에 두었으며 개항장의 해관(통상) 사무를 관장하였다.

인천감리서의 위치는 내동의 구법원 자리로 지금은 한진아파트가 있는 곳이다.대개 감리는 지방행정장관직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고 때로는 지방 행정장관이 감리직을 겸하는 경우도 있었을 뿐 아니라 개항 초기에는 통 상사무가 그다지 번잡하지 않았으므로 부아에서 그 지방의 행정사무와 함 께 통상사무도 처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감리서는 갑오개혁의 지방제 개편에 따라 고종 32년(1895) 5월 26일에 폐지되었다. 이 지방제 개혁의 내용은 8도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의 행 정구역으로 나눈 것이었다. 각부에는 관찰사 1명, 참사관 1명, 주사 약간 인, 경무관 1인씩을 두어 지방행정을 담당하게 하였다. 개항장인 제물포 에는 인천부가 설치되었는데 이때 감리서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일반지방 행정 관서에서 관장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개항장과 개시장의 사무적인 분량이 증가하고 타기관과의 연관성 이 증대하였기 때문에 이 업무를 일반행정과 함께 처리하기란 불가능하였 다. 따라서 감리서가 폐지된 지 1년 4개월 만인 건양 원년(1896) 8월 7일 에 다시 감리서를 복설하고 대외통상사무를 일원화해야만 했다.

1895년 지방제도개정으로 새롭게 설치된 인천부는 12개 군을 관할하였는 데, 인천군·김포군·부평군·양천군·시흥군·안산군·과천군·수원군·

남양군·강화군·통진군·교동군(뒤에 교동은 강화에 병합)으로 관찰부는 제물포에 두었다.

1895년 지방제도 개정에 의해 이전까지 지방행정기관으로 유지되던 부·

목·군·현의 명칭이 군으로 통일되면서, 군정(軍政) 성격을 지녔던 강화 유수부(江華留守府)도 폐지되고 새롭게 일반행정기관인 강화군이 설치되 었다.

1895년 5월 26(음력)일자로 실시된 23부제 지방행정구역은 불과 1년 2개 월 여의 짧은 기간만에 급격한 개혁에 대한 반발로 폐지되고, 1896년 8월

4일자로 13도제도가 실시되었다.

그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조선시대 실시되었던 8도인 경기·충청·

경상·전라·황해·강원·함경·평안도에서, 충청·경상·전라·함경·평 안도를 남북으로 나뉘어 13도 체제로 전환하였다. 또한 수도인 한성부를 제외하고 광주·개성·강화·인천·동래 5곳을 부로 지정하고, 지방장관 으로 부윤(府尹)을 두었다. 경기도를 구성하고 있는 군은 모두 38개로, 종전과 마찬가지로 군의 등급은 면의 수와 결호수에 따라 5등급으로 나누 어졌고, 관등(官等)·관질(官秩)에 적합한 인물들을 군수로 배치하였는 데, 인천과 강화에는 부윤이 파견되었고 부평과 교동은 1895년과 마찬가 지로 4등군이 되었지만, 구획상의 별다른 변동은 없었다. 그리고 1895년 지방제도개정 때 강화군에 통합되었던 교동을 다시 군으로 독립시켰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서론

1. 조선의 교육기관 - 성균관, 사학, 서원, 향교 2. 조선시대 인천의 교육기관 - 서원, 향교 3. 조선시대의 교육과 인천지역의 관계

조선시대 인천의 교육기관

- 향교, 서원을 중심으로

연창호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서론

우리나라의 교육열이 높은 이유 중의 하나가 유교 때문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조선시대에 고을의 모든 군현에는 오늘날의 초중등교육기관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고을의 가장 중심지에 향교를 두었고 경치 좋은 명당 자리에는 서원을 두었다. 지금 전국 어느 곳의 도시를 가도 ‘교동’이란 동네이름과 ‘교동초등학교’는 거의 다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우리나라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의 대학과 같은 것이 있어왔다. 삼국 시대, 고려, 조선을 거치며 오늘날의 국립대학과 비슷한 국학, 국자감, 성균관 등이 시대를 달리해 면면히 계승되어왔고, 사립대학과 비슷한 서 원창설은 서양이나 미국에 뒤지지 않는다. 시대는 앞설 수 있으나 현재 남아있는 전통교육기관은 과거의 유물로 박제되어 교육 기능은 사라져 버 렸다. 서구의 물결이 조선에 들어와 근대교육이 시작되면서 근대적인 학 교가 설립되어 서구적인 교육 내용이 소개되어 전파되었다. 이 과정에서

목 차

서당, 향교, 서원의 모습은 흔적과 건물은 남아 있으나 학생들의 모습은 자취를 감추었다.

조선시대의 유교 교육기관에서는 제향(祭享)과 교육(敎育)을 동시에 강 조하였다. 교육의 공간은 단순한 교육만이 아니라 선현에 대한 제사를 중 시해 지역공동체의 통합과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유교 이데올로기를 지역 민들에게 주입시키고 확대 재생산하는 효율적인 통치 수단이었다. 조선시 대의 교육기관은 모두 유학과 관련 있고, 특히 성리학 중심의 교육기관이 었다. 조선시대 교육기관에서 제향하는 것은 유교의 제사 중시에서 기원 한다.

인천은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해 개항 이후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민족의 고난과 희망, 오욕과 영광의 모든 모습을 압축적으로 보여준 보기드문 장 소이다. 개항이전에도 인천은 중요한 지역이었다. 현재 인천광역시 관할 내에 있는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 서원2곳, 향교 4곳이 있다. 인천의 교육기관을 이해하려면 먼저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을 이해한 바탕위에서 가능하므로 먼저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을 살펴 본 후 인천의 교육기관을 다루고자 한다.

문서에서 2011년도 자원봉사 교육생 일정 (페이지 139-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