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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열강의 침략

문서에서 2011년도 자원봉사 교육생 일정 (페이지 195-200)

광동을 비롯한 5개 항구를 개방하였다. 그러나 무역선들이 점증하게 되 자, 1757년에 무역제한령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항장은 광동하나 로 제한되고, 무역의 방법도 관허무역(공행)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아 편전쟁(1840~42)과 애로우호전쟁(1856~60)의 패전과 그 처리 결과로 맺 은 조약에 따라 양자강 유역 및 북부지역에도 추가로 항구를 개항하고 공 행을 폐지하며, 열강에 대해 치외법권 및 최혜국대우, 토지임차 등을 인 정하고 관세도 마음대로 매길 수 없게 되었다.

일본 역시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강제 개항하여 시모다, 하코 다테의 두 항구를 개항하고 이후 1858년 요코하마 등 5개항의 통상을 허 용하고 치외법권 및 관세자주권을 잃게 되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었 다. 이러한 서구열강에 대한 굴욕적인 조약체결은 당시 막부 반대운동과 함께 천왕중심의 정치체제로의 복귀 및 근대화를 골자로 하는 메이지유신 으로 귀결되었다.

2. 조선의 개항

19세기 들어 서양 배들이 한반도 연안에 자주 나타났다. 당시 사람들은 배 모양이 이상하다 하여 ‘이양선(異樣船)’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러한 이양선의 출몰은 이미 인조 때 시작되었는데 네덜란드의 상인 하멜 일행 이 표류하다가 제주에 도착한 일이 있었지만 당시의 사건은 풍랑에 휘말 려 표류한 사건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반해 19세기 한반도 연근해에 출 몰한 이양선들은 제주도, 울릉도 등의 여러 섬을 측량하거나 우리 근해에 접근하여 정탐하고 해도(海圖)를 작성하기도 하는 등 조선과의 통상 및 침략을 위한 물밑 작업이 목적이었다. 이양선의 출몰이 빈번해지면서 조 선과 서구열강과의 충돌은 불가피할 수 밖에 없었다.

1) 병인양요

1866년 1월 일어난 병인사옥에서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조선인 신도 8,000여명이 학살당하자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같은 해 9월 18일,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이 이끄는 3척의 군함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함대는 1866년 10월 13일 인천 앞바다의 작약도에

정박한 뒤, 다음날인 10월 14일 강화도 갑곶진을 통해 강화도에 상륙하였 다. 강화도는 삼남지방과 양서지방의 조운선이 서울로 향하는 조운수로의 길목에 위치하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고, 프랑스 군은 강화도를 근거로 하여 조선정부에 압박을 가함으로써 병인박해에 대한 보복과 보상을 관철 시키고 나아가 양국간에 조약을 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별다른 저항 없이 강화도 갑곶나루에 상륙한 프랑스군은 10월 16일 강화부를 함락시켰 다. 강화부 관아와 외규장각 등 국가시설을 장악한 프랑스군은 강화부 외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던 각종 의궤 등 왕실도서 340권과 은괴 19상자를 전리품으로 약탈하였다.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했다는 소식을 접한 조선 정부는 순무영을 설치하고 순무사에 이경하, 순무중군에 이용희 등을 임명하여 전투 지휘 부를 구성한 뒤 통진의 문수산성에 군사를 주둔시키면서 전투를 대비하였 다. 프랑스군은 조선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10월 24일 새벽 정찰대 70여명을 문수산성으로 파견하여 조선군과 치열한 전투가 벌 였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화력에 밀린 조선군이 퇴각하면서 문수산성마저 프랑스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한편 통진의 덕포나루에 주둔하고 있던 순무 천총 양헌수는 11월 8일 약 50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프랑스 군 몰래 강을 건너 강화도에 잠입 하여 정족산성에 주둔하였다. 조선군이 정족산성에 잠입했다는 정보를 입 수한 프랑스군은 대령 올리비에에게 병사 150명을 주어 조선군을 섬멸하 도록 지시하였고, 11월 9일 오전 정족산성 인근에 도착하여 조선군의 동 태를 살피고 있었습니다.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은 주력부대를 동문과 남문에 배치한 뒤에 프랑스 군이 가까이 근접하기를 기다리다 프랑스 군 이 산성밖 100여m 지점에 이르렀을 때 공격을 개시하였다. 비록 재래식 무기의 성능이 떨어지긴 했지만, 조선군의 화력이 집중되자 노출된 지역 에 위치하였던 프랑스군의 피해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전투가 시작된지 30여분 만에 150여명의 병사 중 3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고, 결 국 프랑스군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정족산성 전투는 병인양요 당시 조선군이 거두었던 유일한 승리였으며, 이 전투의 승리로 당시 전황은 역 전되어 결국 프랑스군의 철병을 가져오게 되었다.

2) 신미양요

미국도 오래 전부터 조선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자 그동안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이 강경한 외교정책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866년 미국 상선 제너럴셔어먼 호의 격침소식이 전해지자, 미국은 이 사건이 조선을 새로 운 교역상대국으로 확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강경한 대 응 조치를 취하게 된다.

1871년 5월 미국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제독이 이끄는 미군 1,200여 명이 군함 5척에 나누어 타고 조선 원정에 나섰다. 5월 30일 인천 앞바다 작약도 북쪽에 정박한 미 해군은 한강 수로의 탐사를 이유로 정찰대를 실 은 소형선박을 손돌목 쪽으로 출발시켰고, 광성보를 수비하고 있던 조선 과 전투가 발발하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의 피해도 막대하였지만 미국 의 포함 모노카시호가 크게 파손되었고, 미국측은 이에 대한 보상과 사과 를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러한 미국의 요구가 터무니 없다고 판단하 여 대응하지 않는 한편, 하루 빨리 철병할 것을 요구하였다.

6월 10일 미국함대는 조선 정부의 적절한 사과가 없었다는 것을 구실로 강화도에 대한 대대적인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같은 날 초지진을 함락 시킨 미군은 6월 11일 새벽 덕진진을 점령하고 곧이어 광성보로 향하여 진무중군 어재연이 이끄는 500여명의 조선군과 치열한 전투를 별였다. 이 전투에서 350명의 조선군은 미군에 끝까지 저항하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 하였다. 당시 미 해군의 슐레이 소령은 신식병기 한 자루 없이 끝까지 진 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저항하다 최후를 맞이한 조선군의 용맹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병기 를 가지고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하여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 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하여 그토록 장렬하게 싸우 다가 죽은 병사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W.S.Schley, 기함에서의 45년 (1904) 중에서

광성보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은 게양되어 있던 ‘수(帥)’자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하였다. 그러나 미군으로서는 조선군의 완강한 저항 앞에 그들의 목표, 목적을 수정해야만 했다. 미군의 예상과 달리 조선 정부의 강경한 자세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미군은 7월 2일 다시 한 번 자신들의 군사 행위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서신을 보내고 다음날 본국 으로 철병하게 되었다.

3) 운요오호 사건

앞의 두 사건과는 달리 운요오호 사건은 단기간에 일어난 사건이면서 조선의 개항을 가져오게 되는, 사건의 당사자인 일본 측의 입장에서 보자 면 성공적인 무력행사였다. 1875년 4월 부산과 동해안에서 무력시위를 벌 인 운요오호는 그 해 9월 서해안에 다시 출현하여 무력침공을 자행하였 다. 9월 21일 운요오호는 초지진 앞바다에 정박한 뒤 신선한 물을 얻는다 는 구실로 보트를 내려 초지진에 무단으로 상륙하였다. 초지진에 주둔하 고 있던 조선군이 포격을 가하자 운요오호에서도 응사하여 초지진을 파괴 하였다. 간조 때문에 상륙이 어렵다고 판단한 운요오호의 함장은 배를 돌 려 남하하여 영종진을 포격하고 일시 점령하였다. 당시 영종진은 일본군 의 포격에 완전히 파괴되었으며, 35명의 병사가 전사하였다.

운요오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과의 국교를 일거에 타결하고자 했던 일본 은 안팎으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1875년 12월 쿠로다 키요타카[黑田淸 隆]를 전권변리대신으로 삼아 부산으로 보내어 조선과의 통상교섭을 책임 지게 하였다. 부산에 도착한 그는 보다 깊이 있는 협의를 위해 강화도로 갈 것이며, 이에 조선이 응하지 않으면 그대로 서울로 직향할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일본 대표단을 태운 전함이 인천 앞바다 에 정박하자 조정에는 위기감이 확산되었다.76) 결국 조선의 개국을 권장 하기 위한 청의 사절이 도착하고 좌의정 이최응이 건의한 완화책에 국왕 이 찬성하여 접견대신에 신헌(申櫶), 부관에 윤자승(尹滋丞)을 임명, 강 화로 파송하였다.

조선과 일본의 통상교섭은 신속히 진행되었다. 회담장소와 절차 등을 결정하기 위한 예비교섭에서 조선 측은 일본대표단의 강화부 진입을 반대 하여 초지진에서 회담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일본 측은 강화부 관아

76) 承政院日記 고종 13년 1월 4일.

에서 회담할 것을 요구하여 결국 일본 대표단은 호위병 400명을 이끌고 강화부에 들어와 부내 연무당에서 정식 회담을 진행하였다. 일본은 먼저 일본정부가 왕정복고 이후 수차례에 걸쳐 사신과 서계를 보내어 양국간의 국교를 조정하려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이를 거절한 이유가 무 엇이며, 운요오호에 대한 불법포격까지 가한 사실을 집중 추구하면서 사 과를 요구하였다. 이에 신헌은 일본의 사신이나 서계에는 예의에 어긋나 는 것이 많아 수납을 거절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대응하였다.

또 운요오호가 예고 없이 근기해역을 침범하였으니 변방의 장수가 이에 발포한 것도 정당한 조치였다고 강변하여 일본 측의 요구를 거절하였다.

공식적으로 3차례에 걸쳐 진행된 회담에서 의견의 격차를 좁힌 양국은 결 국 2월 3일 통상조약을 조인하게 되었다.

강화도조약은 근본적으로는 모든 독립국가는 평등한 주권을 향유한다는 서구적 이념과 원칙에 입각하여 한·일관계를 재규정함으로써 동아사아적 국교체제를 거부한 것이다(제1조). 그러나 간접적으로 중국의 종주권을 부정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침략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 격은 8월에 조인된 조일수호조규부록 및 통상장정 등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불평등조약으로서 부산과 동해, 서해에서 각각 한 곳 씩 항구를 개방하여 일본의 경제 군사적 침투를 보장하였으며, 영사재판 권에 의한 치외법권이 인정되고 조계에 해당하는 거류지가 설정된 것 등 이다. 무관세 무역 역시 국내시장 보호와 국가재정확보를 위해 불가결한 관세권을 상실한 것으로, 이 때문에 밀려드는 자본제 공산품으로부터 국 내산업을 보호할 길을 잃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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