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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인천, 7代御鄕

문서에서 2011년도 자원봉사 교육생 일정 (페이지 118-128)

근본적인 차이가 있어 몰주관적인 자격에 의하여 선발되는 것이 아니라 군주와의 개인적인 성실관계에 따라 그가 자의 적으로 선택하였고, 또 그 지배도 가산제적이었다.

※과거 급제자라고 무조건 과거집단 혹은 과거관료로 묶어 동일시 할 수는 없다. 관리 등용을 위한 국가고시제는 귀족제나 관료제 사회에서나 모두 시행될 수 있다. 요컨대 과거는 정치․경제․사회 적으로 유리한 지위에 있는 자들이 그들의 특권을 배타적으로 공유 하는 하나의 방법(과거제도 귀족제적 운영방식으로 치러졌음을 의미).

④ 貴族制社會說의 보강과 고려사회성격의 이해 방향

▸귀족제설의 비판과 재검토: 귀족의 범위문제/ 귀족가문/ 귀족의 경제기반 등(“일반인과 구별되는 신분적, 정치적 특권이 주어진 가족에서 태어난 인간”, 또는 “신분제 사회에서의 지배 신분층 등”으로 폭넓게 규정)

⇒이런 성격과 특징을 지닌 귀족층이 대부분 국가 요직을 점유하고, 정책의 결정이나 가치의 배분을 귀족제적으로 운영하여 갈 때 그 사회는 귀족제사회. 다각적 검토 요망

▸貴族官人社會: 절충적 입장. 고려 전기는 귀족제성 성격이 강한 사회, 고려 후기는 관료제적 성격의 사회로 규정.

착세력과 규합하여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이 해상호족(海上豪族)이다. 이 들 해상호족은 신라의 통제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자적인 사무역을 행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였을 뿐 아니라 군사력까지 겸비하게 되었다. 이 시기 대표적인 해상호족으로는 송악에 기반을 두고 예성강유 역과 강화도에 이르는 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왕건(王建) 일가를 들 수 있다.

왕건의 선대(先代)는 고구려 유민으로서 송악을 근거지로 세력을 규합하 여 발전하였고, 왕건의 부친인 왕융(王隆)의 시대에는 이미 예성강유역의 호족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왕건의 집안이 예성강을 통해 해상으로 드 나들며 무역에 종사했다면 출입구에 해당하는 강화도에도 어느정도 세력 기반이 형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왕건은 송악에 기반을 둔 호족으로 위로는 패강진과 아래로는 예성강하구의 토착세력을 규합하면서, 신왕조 를 건국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나갔던 것이다.

이렇듯 나말여초(羅末麗初)는 새로운 사회세력인 호족에 의해 지배되던 호족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기에 호족출신인 왕건에 의해 많 은 호족이 결속되면서 고려가 건국되었다. 나말여초의 호족세력은 인천지 역에서도 대두하는데, 그 중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인주 이씨(仁州 李氏), 부평 이씨(富平李氏) 그리고 강화 위씨(江華韋氏)의 경우이다.

인주 이씨는 그 시조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아찬의 벼슬에 있던 이허기 (李許奇)로 전해내려오는데,『고려사』에는 인주 이씨의 선조에 대하여 명확한 시대적 족적 배경을 밝히지 않고 있지만, 그 선조가 신라의 대관 (大官)이라는 점, 사신으로 입당(入唐)하였다는 점, 당의 천자가 이를 가 상히 여겨 이씨성을 내려주었다는 것은『이씨가록』과 일치를 보이고 있다.

왕건이 해상무역을 통해 성장한 기반을 바탕으로 고려를 성립할 수 있었 듯이, 인주 이씨 역시 해상무역을 통해 축적한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하여 고려의 대표적인 문벌로 성장할 수 있었다.『인천이씨세보(仁川李氏 世譜)』에는 이허겸의 아들 눌(訥)과 손자 성간(成幹)이 있다. 그런데 성 간의 부인이 개성왕씨로서 그 아버지가 고려 태조 왕건이라 하였다. 당시 태조가 혼인관계를 통하여 강력한 호족세력을 통합하고자 하였으니 고려 초 인주 이씨는 왕실과의 혼인이 이루어질 정도의 강력한 호족세력이었음 을 알 수 있다.

부평 이씨의 시조는 이희목(李希穆)으로『부평이씨대동보(富平李氏大同

譜)』에 의하면 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삼한공신으로 책봉 되었으며 관계(官階)가 삼중대광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려를 건국한 태조 는 940년 삼한공신(三韓功臣)의 책정, 토성(土姓) 분정, 군현(郡縣)의 개 칭 등의 조치를 취하게 된다. 삼한공신 책정과 함께 이루어진 토성분정은 토착성씨집단을 국가차원에서 확정하는 조치로서 고려정부의 집권력 확립 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말여초 호족세력의 지역적 기반을 인정하는 방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희목이 삼한공신이었다는 것 은 그가 호족출신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군진세력과 서해의 해상세력을 겸비한 기반 위에서 성장한 강화․교동․통 진지역의 호족들도 지리적인 여건과 해상세력이라는 특성상 강력한 호족 으로 성장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강화 위씨이다. 목 종․현종대에 크게 등용되어 문하시중에까지 이르게 되는 위수여(韋壽餘) 는 『고려사』에 강화현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가 강화현인이었다는 것 은 그 지방 호족출신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강화위씨는 『세종실 록 지리지』 강화현의 성씨조에 토성 최(崔)․위(韋)․황(黃)․고(高) 중 두 번째 성씨로 나타나고 있다. 위수여는 중앙으로 진출하여 문하시중에까지 올라 번성하게 됨에 따라 그에 관한 기록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외 대부 분의 호족들은 강화의 최․황․고씨의 경우처럼『세종실록 지리지』의 인천 지역 성씨조를 통하여 그 성씨만을 파악할 수 있을 뿐 구체적인 기록을 찾아보기 어렵다.

2)7代御鄕인천 : 고려의 지방제도는 호족세력에 대한 통제책과 중 앙정부의 행정력 침투과정과 함께 정비되어 갔다. 태조대는 후삼국을 통 일하기 이전은 물론이고 통일한 이후에도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호족들이 지방행정은 물론 지방 농민들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고려시대에 지방관이 처음으로 파견되는 것은 6대 성종대 일이다. 성 종대에는 3성(省)․6부(部) 등 정치제도의 기반이 확립되었을 뿐 아니라 지방관이 파견되어 호족세력의 지배 하에 놓여 있던 지방의 행정력과 군 사력이 중앙으로 흡수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현종대에 이르러 지방관제는 대폭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현종 9 년(1018)에 각 도의 안무사를 파하고 전국에 4도호(都護)․8목(牧)과 56지 주군사(知州郡事)․28진장(鎭將)․20현령(縣令)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고려

의 지방제도는 4도호부․8목을 중심으로 그 밑에 중앙정부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여 상주시키는 56개 주와 군, 28개의 진, 그리고 20개의 현으로 편 성되었다.

이러한 지방제도의 정비과정에 인천지역도 몇 차례 변화를 겪게 되었지 만 그 의미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고려사』지리지에 의하면 인천(인 주)은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買召忽縣)으로 통일신라시대인 경덕왕 16 년(757)에 소성현이 되어 율진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1018) 에는 다시 수주에 속하였다. 그러다가 숙종조(1096~1105)에 이르러서 경 원군으로 승격되어 지군사가 설치되었다. 이것은 숙종의 모후인 인예태후 이씨의 내향이기 때문이었다.

이어 인천은 다시 인종조(1123~1146)에 인주로 가호(加號)되었는데 이는 인천이 인종의 모후인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이었기 때문이었다. 인주 이 씨는 문종대에서 인종대에 이르는 7대 80여 년 동안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동안 왕실과 중첩되는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당시 고려 왕실의 왕자․

궁주 가운데 인주 이씨 외손 또는 생질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이 러한 왕실과의 혼인관계를 통하여 인주 이씨는 외척으로서의 권세와 벌족 으로서의 지위를 굳혔을 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해주 최씨․경주 김씨․평 산 박씨․파평 윤씨․강릉 김씨 등 거족들과도 혼인관계를 맺어 일대 벌족세 력을 형성할 수 있었다.

한편 헌종대에 누이동생 원신궁주가 낳은 한산후(漢山侯)를 옹립하려고 음모를 꾸몄던 이자의의 난으로 인주 이씨가 큰 타격을 받았으나 숙종이 왕위에 오르자 태자비를 인주 이씨 문중에서 간택하여 순덕왕후(이자겸의 2녀)가 예종비가 됨으로써 예종대에 다시 인주 이씨가 외척의 권세를 회 복하게 되었다. 순덕왕후는 예종비가 된 후 인종과 두 궁주를 낳았는데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문경태후로 추존되고 경원군을 인주로 가호하여 지 주사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인종 4년(1126)에 인종을 몰아내고 왕권을 차지하려던 이자겸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의 딸들인 두 인종비가 모두 폐비되었다. 그리고 새로이 중서령 임원후(中書令 任元厚)의 딸을 맞이하여 왕비로 삼으니 이 가 곧 공예태후(恭睿太后) 임씨이다. 공예태후는 부평 이씨인 문하시중 이위(李瑋)의 외손녀이다. 공예태후는 의종․명종․신종 등 3왕과 2왕자․4궁 주를 낳았다. 인주 이씨가 몰락한 후에는 김부식(金富軾)․김부의(金富儀)

등의 경주 김씨가 귀족사회의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그 권세는 인주 이씨 에 미치지 못하였다.

공양왕 2년에 ‘인주를 올려 경원부로 삼았다’고 하여 인주가 경원부로 승격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승격된 사유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런데 그 사유를 『동국여지승람』에는‘칠대 어향(七代御鄕)’,『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강희맹(姜希孟)의「승호기(陞號記)」에서는 ‘칠대향(七代鄕)’

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인천부읍지』에는『동국여지승람』의 기 록과 같이 ‘칠대향(七代鄕)’이기 때문이라고 했고,『여지도서』에는 ‘칠대 향(七代鄕)’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로 보면 ‘칠대향’ ‘칠대 어향’ ‘칠대 지향’이라는 말은 같은 뜻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문종대에서 인종대에 이르는 7대 동안 인주 이씨는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인천은 순종․선종․헌종․숙종․인종 5대 왕의 외향(외가)이 되고 문종․순종․선종․예종․인종 5대 왕비의 내향(친정)이 된다. 따라서 이 7대 동안 인천은 왕의 외향이거나 왕비의 내향이 되고 특히 순종․선종․인 종 3대는 왕의 외향인 동시에 왕비의 내향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순 종․선종․인종은 인주 이씨 왕비의 소생이면서 인주 이씨를 왕비로 맞이하 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御)자는 엄밀하게 왕에게만 사용되는 글자로서 어향이라고 할 때 ‘왕의 고향’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 뜻을 확대하여 7 대 동안 인천이 왕실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칠대 어향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공양왕은 왕위에 오르자 왕 2년(1390)에 그의 조상을 높혀서 4 친(親)에게 작시(爵諡)를 추가하였다. 그리고 그의 7대조인 신종의 선대 7대왕(문종~인종, 인종 다음의 의종은 인종의 장자이고, 의종 다음의 명 종은 인종의 3자이며, 명종 다음의 신종은 인종의 5자이니 신종의 선대는 인종이 됨) 중 5대왕이 인천을 외향으로 하고 5대 왕비가 인천을 내향으 로 하고 있기 때문에 조상을 높이고 알리려는 뜻에서 인주를 부(府)로 승 격시키는 동시에 읍호를 환원시켰던 것이다.

3) 해상교통과 자연도 및 강화․교동도 : 고려의 전반기에 걸쳐 예성 항을 중심으로 한 해상활동은 매우 활발하였다. 그 중에서도 송나라와의 교류가 두드러지는데, 두 나라 사이의 문물 교류는 양국 사이의 외교적 형식을 통한 공적(公的) 교역보다도 사적(私的)인 민간 교역으로 말미암 아 크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실은 양국 사절의 왕래한 횟수와 송상의

내항(來航)한 횟수를 비교하여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고려 광종 13년으 로부터 인종․의종 시대에 걸쳐 고려의 사신이 송나라에 건너간 것이 약 57회이며, 송나라 사신이 고려에 건너온 것이 약 30회임에 대하여 송상이 건너온 횟수는 현종 3년으로부터 충렬왕 4년까지 약 260여 년 동안 약 120여 회에 달하였으며 내항한 송상의 총인원도 최소한도로 약 5,000명을 헤아릴 수가 있는 것으로도 그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가 있다.

이렇듯 예성항을 중심으로 활발한 해상활동에 전개되는 시기에 자연도 (영종도)와 강화 및 교동은 예성강의 관문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삼 남(三南)의 물자들이 거의 대부분 서해를 통하여 예성강을 거슬러 개경으 로 수송되었고, 또한 아라비아나 송나라 상선들 또는 고려의 상선들이 모 두 서해에서 강을 거슬러 수도 개경까지 직접 무역활동을 하였다. 그러므 로 자연도는 대중국무역의 무역항으로 또 강화와 교동은 해상교통의 중심 지로 그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당시 송은 고려의 사신과 상인들이 통과하는 연로에 고려관(高麗館, 亭) 이라는 객관(客館)을 세우고 숙식을 제공하는 등 극진한 대우를 하였는데 (북송의 서울은 開京이었고 남송의 서울은 杭州였다). 고려에서도 송나라 사신과 상인이 통과하는 항로상에 객관을 설치하여 내왕하는 그들을 극진 히 대우하였다. 『고려도경』에 의하면, 흑산도(黑山島)에는 관사(館舍, 흑산도에는 宋使가 기착하지 않아 객관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음)가 있었 으며 군산도에는 군산정(群山亭), 마도(馬島)에는 안흥정(安興亭), 자연 도(紫燕島)에는 경원정(慶源亭), 예성강에는 벽란정(碧瀾亭)이라는 객관 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때 자연도는 인천의 속도이며, 지금의 영종도이다.

자연도에 설치되어 있던 객관명이 경원정이다. 경원정은 자연도의 태평 암(太平巖, 구읍동)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고려도경』에 의하면 경원정 은 산을 의지하여 건립되어 있고 객관 옆에는 막옥(幕屋) 수십 칸이 있으 며 그 주변에는 주민들의 토옥(土屋)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자연도란 명칭은 경원정 동편에 많은 제비가 날아다녔다고 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당시 송사(宋使) 일행이 자연도에 도착하여 접반(接伴) 윤언식과 지광주 (知廣州)의 서찰을 가지고 마중나온 역관(譯官) 탁안의 영접을 받았는데 병장의례(兵仗儀禮)가 더욱 후했으며 정사․부사․삼절 등이 경원정에 도착 하여 접반 지광주와 상견례를 가졌는데 그 음식과 상견이 전주례(全州禮) 와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고려에서는 송나라 사신과 상인들에 대한 대우가 극진하였다. 예를 들어 문종 32년(1078)에 송나라 신종이「능허치원안제신주(凌虛致遠安濟 神州)」․「영비순제(靈飛順濟)」라고 하는 큰 배 두 척을 만들게 하여 모 두신주(神舟)라고 명명하고 사신 안수와 진목 등으로 하여금 신주 두 척에 막대한 예물을 싣게 하여 고려로 파견하였는데, 이들이 예성강에 도착하자 고려에서는 병부상서 노단을 연반(筵伴)으로 삼아 서교정(西郊 亭)에 이르게 하고 또 형부상서 김제를 연반으로 파견하였으며 사신이 순 천관(順天館)에 들 때 호부상서 김양감과 예부시랑 이양신을 관반(館伴) 으로 삼았다. 그런데 송선(宋船)이 흑산도에 들어선 후부터 예성강에 이 르기까지 서해연안의 여러 항구에서는 관리들로 하여금 그들을 영송하게 하고 밤에는 배가 통과하는 항로 주변의 산마루에 봉화를 올려 그들을 인 도하게 하였는데, 이것이 그 후에도 항례(恒例)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고려 상인들의 송나라와의 무역은 송상의 대(對) 고려무역만큼 활 발하지는 못하였으나 이들도 매년 여름에 무역품을 싣고 주로 명주(明州) 에 가서 송나라 시박사(市舶司)의 감독과 보호하에 교역을 행하였다.

고려시대의 해로(海路)에 관한 구체적인 기술을 남긴 사적으로 인종 원 년(1123) 2월에 고려 견사(遣使)를 수행한 서긍의 견문록『고려도경(高麗 圖經)』이 있다. 서긍은 변경(薦京;현 開封)에서 출발해 고려 수도 개경 (開京;현 개성)에 이르기까지의 항로를 해로(海路) 1부터 6까지로 나누어 일지식(日誌式)으로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당시의 지명을 오늘의 지명에 비정하여 서긍 일행의 항로를 정리해 보면 영파(寧波)에서 출범해 정해 (定海)를 지나 남방연해로를 따라 북상하여 양자강 하구의 사미(沙尾)에 서 동북방향으로 항진하다가 황해 남부에서 바다를 횡단한다. 한반도 서 남단인 전라남도의 흑산도에 도착한 후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여 군산․인 천․강화도를 지나 예성강 하구에 이르러 정박하고 있다.

그러므로 서긍 일행은 3월 14일 변경을 출발해 6월 13일 고려 수도 개경 에 이르렀으므로 총 여정이 약 90일간이었다. 또 5월 16일 명주(明州;현 寧波)에서 출범해 6월 12일 예성강에 도착했으니 순 항해 일정이 26일간 이었고, 그 중 정해(定海)에서 흑산도까지 9일이 걸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송대(宋代) 이전의 한․중간의 교통로는 주로 세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육로로 한반도의 서북경(西北境)에서 요동지방을 거쳐서 북중국에 이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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