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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선 평창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

차미숙|국토연구원 연구위원(인터뷰)

김진선(金振兟)

동국대학교 행정학 학사(1974) / 관동대학교 행정학 명예박사(2001) / 강원대학교 정치학 명예박사(2005)

강원도 홍천군 수습행정관(1975) / 영월군수(1983) / 강릉시장(1991) / 부천시장(1994) / 강원도 행정부지사(1995) / 제32, 33, 34대 강원 도지사(1998~2010) / 2018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공동유치위원장(2009) / 2018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특임대사(2010) / 청 와대 지방행정특별보좌관(2011) / 현 2018 평창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조직위원장,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중국 길림대학교 고문교수 주요 상훈

황조근정훈장(1997) 주요 저서

「자장면과 2851원」(2010), 「김진선의 이야기국가론」(2010), 「소」(2008), 「새농어촌 건설운동」(2006)

2011. 11. 18, 평창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접견실

이 · 슈 · 와 · 사 · 람 · 85

지난 7월 6일 제123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 현 장. 치열한 경쟁을 펼쳐온 평창과 독일의 뮌헨, 프랑스 안시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숨막히는 정적이 흐른 후 이어진 자크 로게 위원장의 ‘평창’이라는 한마 디는 온 국민을 열광하게 했다. 평창이 강조했던 ‘새로 운 지평(New Horizons)’이 드디어 열리게 된 것이다.

두 번의 실패를 겪은 후 찾아온 성공인 데다 전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열망했던 만큼 평창동계올림픽에 거는 기대는 클 수밖에 없다. 벌써부터 세계인이 주목하고 있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세계 스포츠 역사에 길이 남을 성공적 대회로 만들고 싶다는 김진선 평창동계올 림픽대회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만나보았다.

차미숙(이하 ‘차’):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2018년 동계올림픽 개최도시로 평창이 발표된 순간 위 원장님의 감회가 매우 깊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소감 이 어떠셨습니까?

김진선(이하 ): 17년 전부터 구상했던 동계 올림픽을 드디어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강원도민

에 쌓였던 한을 드디어 푼 것 같습니다.

강원도는 북쪽에는 DMZ, 동쪽에는 바다, 서 쪽에는 산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산수 덕분에 자 연경관이 뛰어난 반면, 개발과 발전이라는 측면에 서는 열세에 있습니다. 실제 거리는 얼마 되지 않 지만 강원도를 오가려면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어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는 지난 60여 년 간 강원도가 겪어온 실정입니다. 그렇다보니 강원 도민들에게는 소외의식과 패배의식이 있습니다.

저는 17년 전인 1994년, 강원도 기획관리실장을 맡았다가 잠시 보직대기를 하면서 강원도의 발전 을 위한 방안으로 국제관광엑스포와 동계올림픽 을 구상하게 되었습니다. 강원도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 다. 그 뒤 강원도를 전국화·세계화하기 위한 국 제관광엑스포는 1999년에 개최하였고, 동계올림 픽 또한 긴 기다림 끝에 올해 7월 유치하였습니다.

오랜 세월이 걸렸지만 모두의 노력이 성과를 거둬 보람을 느낍니다.

차: 두 번의 실패 후 세 번째 도전에서 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유치과정을 설명해주십 시오.

김: 동계올림픽을 유치할 수 있다는 확신에는 늘 변함이 없었습니다. 나름대로 정밀하게 분석을 했습니다. 1996년 일본이 나가노동계올림픽을 유 치하는 것을 보고 우리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습니다. 1999년 강원도 동계체전 폐막식 때 대외적으로 유치를 선언한 후 2010년 개회를 목 표로 잡았습니다. 2003년 7월 첫 번째 도전했을 김진선

때 평창은 완전한 무명의 도시였습니다. 한국에서 도 동계스포츠를 하느냐는 질문도 받아봤고 평창 을 평양으로 오인하는 사람들도 만나볼 정도였습 니다. 한국은 동계스포츠의 불모지였던 셈입니다.

두 번째 도전했던 2007년에는 1차투표에서 선두 로 나섰지만 2차투표에서 고배를 마셨습니다. 평 창은 실패했던 두 번 모두 열악한 상황에서도 많은 사람들의 예상을 뒤엎고 선전했지만 유치에는 성 공하지 못했습니다. 오랜 꿈이 좌절되어 상실감에 빠져 있던 제게 IOC 위원들은 모든 게 삼세번이 라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용기가 생겼습니다. 대 한민국과 강원도의 차원에서 반드시 유치해야 한 다는 당위성이 있다면 삼세번이든, 네 번, 다섯 번 이든 계속 도전해야 한다는 결심이 섰습니다. 세 번째 도전에서 매우 겸손한 자세로 여러분의 지 지를 간청한다는 메시지 발표는 IOC 위원들에게 아시아 특유의 겸손으로 비추어졌습니다. 실패로 부터 교훈을 배우고 이를 보완하면서 이전 유치노 력에서 약속했던 내용을 철저히 이행하는 한국인 특유의 성실함은 IOC 위원들을 감동시켰습니다.

비록 3수에서 성공했지만, 변함 없이 성원해준 국 민 여러분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차: 평창동계올림픽의 유치는 강원도민을 포함한 전 국민의 절대적 지지가 큰 힘이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 제까지 90% 이상의 국내 지지를 얻은 후보지는 평창뿐 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전 국민적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 동계올림픽 유치를 선언한 후 막상 유치하 기까지 12년 동안 전 국민이 절대적인 지지를 지 속적으로 보여준 나라는 우리나라뿐입니다. 동계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3수를 넘어 4, 5수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만 우리처럼 90% 이상의 국민이 성원하는 나라는 없습니다.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12년을 기다려왔고, 유치열기는 오히려 점점 강해 졌습니다. 평창이 올림픽 개최도시로 선언되자 강 원도에 연고가 없는 사람들도 감동의 눈물을 흘렸 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러한 열정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우선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는 한번 하자고 마음을 먹으면 힘을 모으는 국민 성이 있습니다. 또 동계올림픽도 한번 개최해보자 는 도전의식이 확산되었고, 셋째는 강원도에서 한 번 큰 행사를 하자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 에 모두 공감했던 것 같습니다.

차: 평창동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위원장 님께서 현재 중점적으로 구상하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 까? 그리고 단계별 로드맵이나 추진계획·구상을 설 명해주십시오.

▶ ▶ 김: 2018년 개최까지 6년 반 정도 남았습니 다. 실질적인 준비기간을 따지만 5년 반으로 생각

이 · 슈 · 와 · 사 · 람

차미숙

별법」을 제정해야 합니다. 당장 올해 안에 마무리

계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주요 교통망 확충을 위한

캄보디아의 수도 프놈펜(Phnom Penh)은 메콩 (Mekong)강과 톤레삽(Tonle Sap), 그리고 바싹 (Bassac)강의 세 줄기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캄보 디아 제1의 도시이자 경제·문화·행정의 중심지 다. 프놈펜은 세계문화유산인 앙코르 와트를 건설 한 앙코르 왕국이 쇠퇴한 이후 15세기경부터 캄보 디아의 새로운 수도로 완전히 자리매김하였으며,

인도차이나의 파리, 아시아의 진주 외에 킬링필 드(Killing Fields), 죽음의 땅이라는 극단적인 이름으로 불리었던 곳이기도 하다.

내전 등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20세기를 보냈으

며 현재까지 극심한 빈부격차와 부정부패로 신음 하고 있지만, 과거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던 대 제국 앙코르의 세계유산, 그리고 중국과 인도, 동 남아 지역을 잇는 중요한 지리적 이점 등으로 인해 결코 간과할 수 없는 곳으로 주목받고 있다.

프놈펜의 역사와 유산

프놈펜은 킬링필드로 대표되는 끔찍한 비극으로 얼룩진 땅이지만, 과거 번영했던 앙코르 왕국이 남 긴 유적들이 산재해 있어 전 세계 수많은 관광객

들이 찾는 동남아 문화의 중심지다. 1372년경, 펜

람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그 흔적은 강제수용소 투올슬렝(Tuol Sleng)에 서 확인할 수 있다. 프놈펜에서 남서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곳은 과거 학교였던 곳을 비 밀감옥으로 개조하여 이용되었고, 고문을 견디다 못해 반동분자나 미국의 스파이라고 거짓 자백을 한 사람들은 근처의 초웅엑(Choeung Ek), 즉 킬 링필드로 끌려가 참살을 당했다. 이 현장에서 살아 남은 사람은 2만 명 중 단 6명이었다고 한다. 동명 의 영화로도 잘 알려진 이곳에는 현재 유골로 만들 어진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투올슬렝 박물관에는 처형당하기 직전에 찍은 희생자들의 사진이나 당 시 고문에 사용했던 철제 침대와 피 묻은 쇠사슬 등이 그대로 놓여 있어 더운 날씨에도 한기를 느 끼게 한다. 이 피의 역사는 1978년 베트남이 쳐들 어 옴으로써 정권 실각으로 끝나는 듯했으나 동시 에 심각한 기근이 몰아닥쳐 62만 5천 명의 국민들 이 굶어 죽었다.

198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에서 모든 군대를 철 수하면서, 여러 세력들이 이곳의 지배권을 놓고 싸 움을 벌였다. 1991년 파리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서 캄보디아에 유엔이 개입해 입헌 군주제를 결정 하는 선거가 진행되었으며, 크메르 루즈군은 거의 투항했고, 주동자였던 폴 포트는 1998년 자택연금 상태에서 심장발작으로 사망하였다.

현재 캄보디아 총리는 크메르 루즈의 게릴라였 던 훈 센이며, 4대 국회와 정부(2008~2013)가 구 성되어 있다. 그 이후 표면적으로 정치와 사회적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기는 하지만 국민들은 이어 지는 부정부패와 빈곤 등으로 여전히 힘겨운 삶을 꾸려가고 있다.

많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거리로 내몰린다.

▲ 악명 높은 킬링필드의 흔적을 전시해놓은 투올슬렝 박물관 팸플릿.

▼ 폴 포트 정권의 예술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로 지정된 크메르의 궁중무용.

도시재건 과정과 주요 산업

비극적인 역사는 이들의 발전을 저해하는 트라우 마로 남았지만, 캄보디아는 최근 적극적인 외자유 치에 힘을 쏟으며 몇 년 동안 두 자릿수에 가까운

비극적인 역사는 이들의 발전을 저해하는 트라우 마로 남았지만, 캄보디아는 최근 적극적인 외자유 치에 힘을 쏟으며 몇 년 동안 두 자릿수에 가까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