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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역사재단 교육연수원 교수실장

1) Homer B. Hulbert, 신복룡 역, 집문당, 1999

재미한국학교협의회 (NAKS) 89 헐버트의 이러한 생각도 이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인식하면서 헐버트의 120년전 생각이 오늘날에도 유효 하다고 생각한다. 한글에 대한 헐버트의 가치 인식은 당시 동료 선교사였던 아펜젤러와 언더우드에도 영향을 미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일본에 의해 강압적으로 폐지되는 1905년 말 고종의 특사(special messenger)자격으 로서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대한제국의 황제 고종이“1905년 11월 17일의 을사늑약이 적법하지 않다”라고 주 장을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미국 국무부와 공식적 문서의 마지막 문서(1905년 12월 14일 미국 국무부 접수 날 자)로써 남기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National Archive에 남아 있는 주미대한제국공사관과 미국무부와 공식적 으로 오고 간 문서의 맨 마지막을“을사늑약이 적법하지 않다”란 고종의 항변을 헐버트가 전한 기록은 주미대 한제국공사관의 복원과 보수를 진행하는 필자에게는 매우 큰 울림으로 남아있다. 고종과 할버트의 처절한 항변 은 대한민국독립에 대한 염원의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고 생각한다. 결국 미국의 교포들을 중심으로 공사관 구 입운동을 일으키게 되었고, 이를 기반으로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공사관건물을 구입하여 원래의 모습으로 회 복할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쓰고 있는 4월 공사관의 보수 및 복원 공사는 우선적으로 페인트를 벗겨내고 덧씌어진 여러 시설물들을 철 거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12켜에서 13켜의 페인트를 벗겨내면서 나타난 원목의 모습에서 덧씌워진 역사의 켜 를 벗겨내는 듯한 느낌에 큰 감동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워싱턴 소재 대한제국공사관은 한국정부가 최초로 건 물 전체를 구입한 최초의 외교공관임과 동시에 원래 구입한 당시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건물로서 그 의미 가 자못 크다. 또한 이 공사관 건물은 1889년 조선시대에서부터 1897년 대한제국기를 거쳐, 을사늑약에 의해 공사관 기능이 폐지된 1905년, 그리고 1910년 한일병탄에 의해 일본에 의해 강탈당했다가 2012년 재구입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 점에서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의 복원 및 보수 공사는 단순히 한 건물의 원형을 찾는 노력이 아니라 19세기 후반에서 21세기 현재에 이르는 과정에서 그 동안 가려져 있거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한국과 미국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역사를 회복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주미대한제국공사관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프랑스 건축가 랑팡(Pierre Charles L'Enfant; 1754-1825)에 의한 워싱턴 D.C의 초기 계획 속에서‘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위치하고 있는 로간 서클의 장소적 의 미와 로간 서클의 변화과정을 우선적으로 추적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사관은 미국에 있지만 한국을 상징하는 건 물이고, 한국인들이 생활하고 있었지만 미국의 역사적 변화와 문화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 미국 사회에서 한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고, 한국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 갔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이후 미국 에서 일본의 활동, 특히 1904년 러일전쟁 이후의 미일 관계는 공사관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한국근대사를 풀 어내는 점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작업은 매우 방대한 작업이고 시간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본인이 파악한 단편적인 지식과 당시 미국의 현지 신문과 사진 등 각종 자료를 통해 주미대한제국공 사관을 중심으로 역사적 해석에 대한 가능성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1889년 한글본으로 초판이 나왔고, 1895년 학부에서 백남규, 이명상 등에게 명하여 한문본 『사민필지』를 간행하도록 하였다. (한국민족문화재백과사전 참조)

목요역사특강 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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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워싱턴 D.C.와 로건서클

‘주미대한제국공사관’가 위치하고 있는 로간서클(Logan Circle)의 중요성은 워싱턴 D.C를 설계한 프랑스 건축가 랑팡(Pierre Charles L'Enfant; 1754-1825)의 1791년 도면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백악관을 정 점으로 서쪽면에는 듀퐁서클(Dupont Circle), 동쪽 면에는 로간서클(Logan Circle)을 두고 삼각형의 꼭지점 을 형성하고 있다. 랑팡(L'Enfant)의 워싱턴 D.C. 계획은 도로를 격자형으로 만들어 놓고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등 중요건물을 중심으로 사선의 도로를 만들면서 중요건물들이 도로가 만나는 결절점에 위치하게 하여 ‘특별 한 장소(special places)’로서의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로간서클은 ‘특별한 장소’로서 의미를 갖는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 지어질 무렵인 1870년대에 이르러서도 랑팡(L'Enfant)의 이러한 개념을 부 분적으로라도 구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 워싱턴 D.C.의 커미셔너임과 동시에 위원장을 지낸 세쓰 리야드 펠프스(Seth Ledyard Phelps ; 1824 〜 1885)는 자신이 평생 살 집을 로간서클에 지었다. 이 집이 바 로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다. 이후 공사관 주변에는 10여 년간 집중적으로 집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워싱턴 D.C에서 역사적 건물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로간서클의 집들은 주로 이때 지어졌다.

그러나 1870년대 후반, 남북전쟁에서 북군으로 도망쳐온 흑인 노예들과 남북전쟁 이후 해방된 노예들 소위

‘contrabands’들이 로간서클 주변의 골목에서 살게 되었다. 예기치 않았던 이러한 상황은 도시개발의 방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점차 도시발전축이 로간서클지역에서 듀퐁서클(Dupont Circle)쪽으로 변 하기 시작하였다. 윌리엄 스트워트(William M. Stewart)상원의원이 1857년 듀퐁서클에 집을 세웠을 때만해도 사람들은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집을 짓는 것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차 부유한 사람들이 듀퐁 서클 근처에 큰 저택들을 짓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점차 워싱턴 D.C.의 북서쪽이 선호되면서Massachusetts Avenue가 확장되었다. 결국 포트맥 강(Portmac Liver)의 지류인 락 크릭강(Rock Creek Liver)에 다리가 놓 였다. 이후 시내로의 통근을 위한 시내전차가 부설되면서 비즈니스맨들이 워싱턴 D.C.의 북서쪽 교외지역으로 옮겨가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변화로 말미암아 로간서클 동쪽으로부터 도시 쇠락에 대한 압박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 다. 이에 따라 로간서클에 남아있던 흑인 전문가들이 도심 외곽으로 이전해가기 시작하였다. 결국 로간서클의 집들은 한 건물에서 각 단위 세대가 살아가던 방식에서 각 방(room)을 중심으로 사는 사람들이 살게 되었고, 한 건물 내에서 여러 세대가 같이 사는 아파트먼트형으로 바뀌게 되었다. 집주인들이 더 이상 자신의 집에서 살지 않게 됨으로써 집들은 물리적으로도 더욱 더 쇄락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로간서클의 슬럼화는 더욱 더 가파르 게 진행되었다. 이와 함께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 로간서클 일대는 매춘과 마약 그리고 각종 범죄로 유명 한 지역이 되었다. 다른 지역이 도시개발이 되어 워싱턴 일대가 변화가 되어갈 때 로간서클은 오히려 슬럼화로 인하여 오히려 워싱턴의 옛 모습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로간서클은 워싱턴 D.C 일대에서 가장 오 래된 모습을 지닌 역사보존지구로 지정되어 공사관은 다행스럽게도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게 되었 다. 1890년 당시 있었던 30개국의 외교공관이 거의 모두 철거되거나 사라져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주미대한제국 공사관은 다행스럽게도 원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는 로간서클도 14번 도로의 발 전으로 인하여 주거환경과 생활환경이 급격하게 개선되고 있다. 최근에는 워싱턴 D.C에서 가장 주목 받는 지역 중 하나가 되었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있는 로간서클 일대가 다시 살아나면서 워싱턴 D.C를 설계했던 랑팡 의 기본 개념이 225년이 지난 지금 점차 시도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3.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의 건축적 특성

13번가와 로간서클(Logan Circle)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는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은 테네시강의 헨 리 요새를 탈환하는 등 남북전쟁에서 탁월한 공적을 남긴 세쓰 리야드 펠프스(Seth Ledyard Phelps ; 1824

~ 1885)의 집으로 1877년 세워졌다. 펠프스는 건축가 토마스 M. 플로우맨(Thomas M. Plowman)과 건설업 자 요셉 윌리엄스(Joseph Williams)를 고용하여 13번가 1500번지(현주소: Logan Circle 15번지)에 5500 달러를 들여 은퇴 후에 살 집으로 지었다. 이 집의 원래 주인이었던 펠프스는 1875년에서 1878년까지 워싱턴 D.C.의 커미셔너를 위원이었고, 1878년에서 1879년까지는 커미셔너 위원장을 맡았었다.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은 지하1층 지상3층의 벽돌조 건축으로 대지면적은 381.10 m2, 건축면적은 152.43 m2, 연면적은 584.54 m2으로 최고높이는 15.14 m에 달한다. 이 건물은 로간서클 쪽으로 거실 겸 응 접실로 사용하고 있는 공간이 타원형으로 동그랗게 돌출되어 있다. 이 돌출된 타원형 중앙에는 벽난로로 활용

재미한국학교협의회 (NAKS) 91 3) 주미대한제국공사관이 처음 개설할 때의 원래 명칭, 공사관의 이름을 개설한 조선에 둘 것인지 혹은 폐지된 대한제국 에 둘 것인지에 따라 명칭이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집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진입을 위한 포치(porch)이다. 이 포치는 이 건물을 공사관으로 사

그러나 이 집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은 진입을 위한 포치(porch)이다. 이 포치는 이 건물을 공사관으로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