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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보(半步)만 앞으로 : 철암세상의 철암회생사업

(1) 사례 개요

철암은 강원도 태백시 철암동 일원으로 수도권에서 자동차로 4~5시간 소요되 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태백시에서도 변방 산골짜기에 자리하고 있는 폐광촌34) 이다. 1930년대 말 장성탄광에서 채굴이 시작되면서 조성된 탄광도시인 철암은 1980년대 중반까지 호황을 누렸지만,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이 단행되면서 대표적 인 폐광촌으로 전락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철암의 역사적 변천과정에 대하여 채수홍(2004)은 다음과 같이 3단계로 정리 하고 있다. 제1기(1932~1966년)는 탄광촌 형성시기로서, 철암이 탄광촌으로 변모 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1940년 철암에서 묵호항까지 삼척탄광(지금의 대한석탄 공사 장성광업소)에서 채굴된 석탄을 운송하기 위해 개설한 철도의 개통이었다.

철암이 태백의 중심지로 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 대한석탄공사의 설립과 1955년 강원남부 및 경북의 철도 중심지인 영주와 철암을 잇는 영암선이 개통되 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주유종탄(主由從炭; 주연료 석유, 부연료 석탄) 정책으로 전환되기 직전인 1966년까지를 철암 석탄산업의 「제1전성기」라 부르고 있다.

제2기는 연탄파동 직후인 1967년부터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이 추진되기 전인 1986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1966년 연탄파동과 이에 따른 정부의 주유종탄 정 책(1967~1973년)으로 잠시 위기를 맞는다. 하지만 1973년과 1978년 등 2차에 걸 친 국제석유파동으로 정부의 에너지 정책은 주탄종유로 회귀하게 된다. 이 시기

34) 철암에는 대한석탄공사 장성광업소의 철암분소가 남아있기 때문에 완전한 폐광촌은 아니다. 하지만, 철암은 지난 9월 개막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2개상 수상과 최근 해외 국제영화제에 공식초청이 쇄도하고 있는 전수일 감독의 「검은 땅의 소녀와」를 비롯해 「권순분여사 납치사건」, 「포도나무를 베어라」,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 수 많은 영화를 촬영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철암역에서 수송된 무연탄은 전국 최고(연간 300~350량)를 자랑했다. 인구도 지 속적으로 증가하여 1980년대 철암만 1.5만명, 철암을 포함한 상철암, 돌꾸지, 남 동, 동점동의 철암권은 2만명을 웃돌았다(심재만, 2004).

제3기는 석탄산업합리화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87년부터의 기간을 말한 다. 80년대로 접어들면서 아파트가 늘어나고 LPG와 석유 등 청정에너지에 대한 선호가 늘어나면서 석탄소비량이 급격히 줄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 속에서 1980 년 초반부터 석탄산업은 구조조정 대상으로 고려되기 시작했다. 1980년 후반 석 탄산업합리화사업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철암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 작하였다. 철암이 본격적으로 쇠퇴하게 된 계기는 1993년 강원탄광의 폐광이었 다. 이때 약 6천여 명(철암권 8천여 명)의 주민만이 철암에 남게 되었다.

연도 태백시 전체 인구 철암인구

1987 120,208 13,508

1990 89,770 9,740

1995 64,877 5,898

2001 56,254 4,607

2004 56,193 4,037

주: 철암인구에는 현 철암 1‧2동의 인구만 포함 출처: 철암동 인구통계자료(채수홍(2004)에서 재인용)

<표 4-8> 폐광기의 인구변화: 태백시 전체와 철암

정부는 이러한 탄광지역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90년대 이후 정부 주 도하에 각종 지역개발사업을 추진하였다35). 특히 1995년 12월에는 폐광지역개발 을 위해 2005년을 기한36)으로 하는 「폐광지역개발지원에관한법률(이하 폐특

35) 실제로 정부는 1989~1994년간 이직근로자, 광업자 및 산림복구비 등 폐광대책비로 이 지역에만 약 1,978억원(전국 3,504억원)을 지급하였고, 1989년 이래 연탄 및 석탄판매가격을 동결하고 임금인상과 채탄여건 악화에 따른 탄가보전지원으로 1조 3,400억원을 재특과 석유사업기금 등에서 지원하였다 (이영연, 1995). 그러나 홍원표(1997, pp.50-51)는 정부의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은 대부분 탄광노동자와 광업주에 대한 보상이었기 때문에, 자본과 노동력의 이동성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고, 이는 곧 지역의 급격한 인구유출이란 문제를 야기하였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림 4-16> 철암마을

자료: 철암세상(http://cholam.org/about.html)

법)37)」을 제정하여 지금까지 각종 개발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해 오고 있다. 하지 만, 이러한 정부의 지원에도 불구하고 철암의 인구는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상황이다(채수홍, 2004).

(2) 추진 배경

이러한 지역의 어려운 상황을 해결 하기 위해 지역주민 스스로도 다양한 지역 활성화를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 다. 예를 들어, 1993년에는 주민주도의 지역개발을 목표로 태백시민들의 푼돈 을 자본금으로 하는 태백시민주식회사 가 설립되었다. 이 조직은 지방자치단 체와 지역주민이 주체가 되어 외지자 본을 영입하여 개발하는 방식을 선호 하고 있었다(홍원표, 1997; p.76). 즉, 이 들은 기존의 지역주민들이 대개 정부 의 지원만을 바라거나 민간대자본의 투자만을 바라고 있던 상황을 비판적 으로 바라보면서, 주민이 주체가 되는

지역개발을 추구하고자 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 역주민들의 자구 노력에도 불구하고 앞서 설명한 대로 지역경제는 날로 쇠퇴해

36) 폐특법은 2006년부터 오는 2015년까지 10년간 연장되었다. 이에 따라 탄광지역2차종합개발계획이 강원도에 의해 수립되었다.

37) 이 특별법에 의거 「탄광지역진흥종합개발계획(1997-2005)」이 수립되었으나, 도로와 농공단지 등 공 공부문의 사업은 그나마 원활히 추진되고 있으나, 대규모 민간부문의 투자는 내국인카지노인 강원 랜드가 유일한 성과로 나타나고 있을 뿐 답보상태에 있는 실정이다. 특별법 제정으로 희망을 걸었던 철암주민들은 철암에 생겨난 것은 도로확장과 자신과 무관한 아파트뿐이라고 피부로 느끼는 주민이 많다고 한다(채수홍, 2004)

가고 있었다.

한편, 1996년 여름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철암지역을 들른 건축가 주대관((사) 문화도시연구소 대표)은 철암에서 만난 빈집들을 보고 깊은 충격에 빠진다38). 이 러한 충격은 1997년 동료들과 철암을 다시 찾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철암지역건 축도시작업팀, 2003; p.6). 이윽고 1999년 그는 철암의 석탄산업유산이라는 부정 적인 자원을 활용한 종합적인 마을회생 전략을 구상한다. 주대관(2004)은 철암 회생전략의 특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철암회생전략은 철암이라는 소지역에 대한 집중적이며 실험적인 활동을 통하여 자본 과 하드웨어 위주의 기존 개발방식과는 다른, 지역성과 문화라는 소프트웨어 위주의 새로운 지역회생 방식을 통해 소지역의 회생대안을 찾는데 특징이 있다

(3) 주민참여 및 공론화 과정과 방법

철암사례의 전개과정은 크게 마을회생 계획의 수립과 집행, 그리고 좌절 등 3 개 유형으로 정리할 수 있다. 마을회생 전략을 실천하기 위해 1999년 11월 주대 관 대표를 중심으로 12인의 건축가들이 참여하는 철암지역건축도시작업팀(이하 작업팀)39)이 구성되었다. 이들은 「태백생태마을만들기시민연대」에 참여하고 있 었던 시민활동가들과 함께 지역의 인적‧물적 자원에 기반하는 지역재활성화의 필요성을 공유함으로서 2000년부터 다양한 활동들을 전개해 왔다(심재만, 2004).

작업팀은 현황조사와 주민의식조사, 건물현황 조사 등을 실시하였고, 이윽고 도 시계획의 조정을 포함한 도시구조개편안을 작성하였다40).

여기서 작업팀은 철암회생은 단지 공장유치41)와 같은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38) 석탄이라고 하는 산업적 요인에 의해 도시가 형성되고, 산업의 패러다임이 바뀌자 그 효용가치를 다하고 도시가 개발된지 50년이 채 되지 않아서 소멸하고 있는 것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고 주대 관은 회고하고 있다.

39) 이들은 서울지역에서 대안적 건축을 지향하는 「건축지평」의 멤버이기도 하다.

40) 그 결과로서 만들어진 책이 「철암세상」이다.

41) 공공부문의 철암지역 대체산업육성을 위한 중심 전략은 기존의 농공단지와 신규 산업단지를 통한 외부자본 유치에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강원산업의 사택들이 밀집해 있었던 27.8만㎡의 부지에 신산

접근만으로 달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지역성과 문화, 교육문제에 대하여 종

<그림 4-17> 집짓기사업으로 재단장된 주택 <그림 4-18> 신축 중인 철암어린이공부방

아울러, 생기를 잃은 철암주민들에게 희망을 불어넣기 위해 문화환경개선사업 의 일환으로 각종 이벤트를 개최하였다. 2002년 2월에는 철암역 일부 공간을 이 용하여 전시공간인 철암역 갤러리가 개관되어, 다양한 사진전시회 등이 개최되 고 있다. 그리고 2002년과 2003년에는 지역축제를 통한 마을회생을 위해 “철암 콜(coal) 페스티벌”45)이 개최되었다. 이외에도 2002년에는 철암역 선탄장이 등록 문화재(21호)로 등록되었고, 강원산업 합숙소 건물이 지역주민의 손에 인수되었 으며, 철암로를 제외한 불요불급한 도로계획이 폐지되는 등의 성과를 달성하였 다(주대관, 2004).

하지만, 이러한 마을회생에 전략에 찬성하는 지역주민과 시민단체, 작업팀의 활동은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2002년과 2003년의 잇따른 태풍으로 빌리 지움구상의 핵심지역인 철암로 주변 상가와 주택이 수해를 입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태백시는 그동안 미루어 왔던 철암로 확장공사와 하천정비사업을 집행하 여, 더 이상의 피해를 방지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이 수해방지사업 에는 마을회생 계획의 핵심자원이라 할 수 있는 철암로 주변의 대부분이 상점들

하지만, 이러한 마을회생에 전략에 찬성하는 지역주민과 시민단체, 작업팀의 활동은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2002년과 2003년의 잇따른 태풍으로 빌리 지움구상의 핵심지역인 철암로 주변 상가와 주택이 수해를 입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태백시는 그동안 미루어 왔던 철암로 확장공사와 하천정비사업을 집행하 여, 더 이상의 피해를 방지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이 수해방지사업 에는 마을회생 계획의 핵심자원이라 할 수 있는 철암로 주변의 대부분이 상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