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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앞 인디음악씬의 등장 배경

II. 홍대앞 인디음악씬의 형성기: 1990년대 중~후반

1) 홍대앞 인디음악씬의 등장 배경

1990년 중반 홍대앞이 한국 인디음악의 메카로 등장하면서 형성되기 시작

한 ‘홍대 인디’라는 정체성의 구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홍대 인디음악씬이

만들어지고 알려지기 시작하던 당시 한국사회에서의 대중음악의 위치와 정 치사회적 맥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디라는 것을 매우 단순하게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규제자의 제재에 구애되지 않고 마음대로 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한국사회에는 홍대앞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그것이 자유로이 가 능한 장(場)은 없었다고 봐야 한다. 1990년대 초 문민정부가 들어서기까지 한국에서 모든 대중음악은 심의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대중가요 43곡 금지

예윤(藝倫)(위원장 조연현)은 21일 문화공보부가 마련한 「공연활동 정화방침」에 따 라 국내 대중가요를 재심, 1차로 43곡을 골라 공연⋅방송⋅판매를 금지키로 결정했다.

예윤은 이미 보급된 대중가요를 놓고 2차에 걸친 예심과 특별심의위원회의 본심을 거 쳐 모두 141장의 음반에 수록된 1392곡 중 43곡을 금지곡으로 결정했다.

이번 심의는 예윤 규정과 공연활동 정화대책에 따라

국가안보와 국민총화에 악영향을 주는 것

외래풍조의 무분별한 도입과 모방

패배⋅자학⋅비관적인 것

선정적이고 퇴폐적인 사항

을 엄격히 적용, 1975년도 분부터 거꾸로 국내 대중가요를 재심했다.

금지곡 중에는 「거짓말이야」(신중현 곡, 김추자 노래)⋅「댄서의 순정」(박춘석 곡, 박신자 외 다수 노래)⋅「무정한 밤배」(홍현걸 곡, 패티 김 노래)⋅「기러기아빠」(박 춘석 곡, 이미자 노래)⋅「잘있거라, 부산항」(김용만 곡, 노래)⋅「일요일의 손님들」

(박석호 곡, 이승연 노래) 등 일반에 널리 불렸던 히트곡도 끼여 있다 (조선일보 1975

6월 22일자).

위의 기사에 나타난 바와 같이 당시 금지되었던 대상은 국가안보와 총화

에 악영향을 줄 수 있는 것, 외래 풍조의 무분별한 도입과 모방, 패배, 자학, 비관적인 것, 선정적이거나 퇴폐적인 사항 등이었다. 이러한 기준은 곧 허용 될 수 있는 대중음악의 경계가 공권력에 의해 강제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며, 표현의 자유와 다양성을 억압하는 것이었다. 외래적인 것의 도입이나 모방을 제한하는 것은 일종의 ‘쇄국정책’으로, 한국의 대중음악이 외국과의 자유로운 교류를 통하여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해 버리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다. 또한 음악을 검열의 대상으로 여긴다는 것은 음악 혹은 보다넓게 예술작품이 정치적인 매체로 중요한 기능을 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었 다.

심사 기준 자체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그 적용이 심사자의 성향에 따라 매우 자의적이었으므로 많은 반발과 저항을 불러왔다. 예를 들어 ‘고래사냥’

이란 노래에 대해 고래사냥의 한자어가 포경(捕鯨)인데 그것은 남성의 성기 를 의미하는 포경(包莖)과 같은 음이므로 선정적이라거나 하는 평가가 그러 한 예에 해당한다. 또한 ‘아침 이슬’에 대해서는 ‘어두운 밤’이 정치적인 표 현으로 반사회적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규제 속에서 음악 활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종사자들은 가사를 완전히 바꾸어 버리거나 완화하는 표현을 사용하 기도 하였으나 그에 대해서도 역시 ‘은유적인 표현’이라는 구실로 금지하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사전심의에 의해 금지된 곡은 1970년대가 가장 많았으며, 1980년대에 들 어서도 많은 곡이 정치적인 이유로 금지되었다. 특히 반정부 투쟁에 나서는 운동권에서 불리거나, 정치적 비판의 수단으로 음악이 사용되는 경우 엄격한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음악, 특히 대중음악을 검열을 통한 통제의 대상으로 보는 이러한 시각과 태도는 보수언론을 통해 확산되었으며, 이러한 관계는

1970년대, 80년대 뿐 아니라 1990년대 들어서도 계속되었다. 1980년대 말까

지의 통제가 주로 정치적 함의를 지니는 소위 ‘운동권’ 가요를 그 대상으로

했다면 1990년대 초 문민정부 이후에는 정치 색채와 무관한 ‘대중문화’ 전반

에 대해서도 거의 동일한 논리가 적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치 사 회적 분위기 속에서 생산 및 유통체계에서 철저히 독립적이었던 민중가요들,

소위 ‘운동권 노래’들은 TV나 라디오 방송에 나오지 않았으며, 그런 노래들

을 모여서 부르는 행위 자체도 범죄로 되어 체포되는 사례도 있었다.

자유로운 인디음악 활동은 거의 불가능하였던 1970년대, 1980년대 한국의 정치사회적 분위기에서 1990년대 초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은 한국 대중 음악사에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강헌 1994; 이동연 1999; 이재원

2010). 1992년에 데뷔한 서태지는 철저하게 D.I.Y.의 음악인이었다.8) 그는 소

속사도 없었으며, 작사, 작곡, 녹음, 앨범제작 등에 이르기까지 생산의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내었다. 그렇게 발표하려 했던 곡 중에 4집 앨범에 실렸던

‘시대유감’의 가사 내용이 반사회적이라는 이유로 사전심의에 걸려 발매금지

조처가 내려졌다.

「시대유감」의 가사 (서태지와 아이들, 작사: 서태지, 작곡: 서태지, 편곡 서태지)

왜 기다려왔잖아 모든 삶을 포기하는 소리를 이 세상이 모두 미쳐버릴 일이 벌어질 것 같네 짜식들 거 되게 시끄럽게 구네

그렇게 거만하기만한 주제에 거짓된

너의 가식 때문에 너의 얼굴 가죽은 꿈틀거리고

나이든 유식한 어른들은 예쁜 인형을 들고 거리를 헤매다니네 모두가 은근히 바라고 있는 그런 날이 바로 오늘 올 것만 같아 검게 물든 입술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숱한 가식 속에 오늘은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 왜 기다려왔잖아 모든 삶을 포기하는 소리를 이 세상이 모두 미쳐버릴 일이 벌어질 것 같네

부러져버린 너의 그런 날개로 너는 얼마나 날아갈 수 있다 생각하나 모두를 뒤집어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바라네

너의 심장은 태워버리고 너의 그 날카로운 발톱들은

감추고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이 세상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 검게 물든 입술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숱한 가식 속에 오늘은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 왜 기다려왔잖아 모든 삶을 포기하는 소리를

8) 후에 메이저 중에서도 탑 텐에 드는 그룹으로 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을 과연 인디로 볼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최소한 처음의 시작 이 그러했었다는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세상이 모두 미쳐버릴 일이 벌어질 것 같네 바로 오늘이 두개의 달이 떠오르는 밤이야 네 가슴에 맺힌 한을 풀 수 있기를 .... 오늘이야

서태지는 이에 저항하여 가사를 빼고 공식음반을 내놓음과 동시에 본곡을 다른 경로로 유통하는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사회 적 비판 내용을 담은 ‘교실 이데아’ 등 서태지와 아이들의 곡들은 급속한 속 도로 확산되며 팬덤을 넓혀 갔으며, 일부 층에서 서태지는 ‘문화대통령’으로 추앙되기도 하였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긴장하고 당황한 한국문화예술진흥 원 등에서는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서태지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유포 시키기 시작하였다. 즉 서태지와 이이들이 만들어 내는 음악을 기존의 질서 와 안녕을 해치는 퇴폐적인 것으로 부각시키는 전략이었다. 학벌이 뛰어난 것도 아니며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것도 아닌 그를 ‘오렌지족’으로 매도하는 일도 그러한 부정적 캠페인의 한 예였다. 서태지는 이러한 악의적인 공격들 에 대하여 고등학교 중퇴라는 자신의 학벌과 배경을 공개하며 적극적으로 저항하였다.

서태지에 앞서 사전 심의의 문제를 제기하고 공론화 시킨 최초의 사건은 정태춘과 김은옥이 자신들의 곡이 발매금지 처분을 당한데 대해 소송을 제 기하여 승소하게 되는 과정이었다. 그들은 1990년대 초 ‘’92년 장마, 종로에 서’ 등의 앨범이 사전심의로 금지당하자 이에 소송을 제기하여 공권력과의 싸움을 시작하였다. 정태춘과 김은옥은 소송제기와 더불어 금지된 상태에서

1990년과 92년의 자신의 앨범을 자체적으로 발매하여 불법적으로 유통시켰

다. 그리고 소송 사건은 서태지의 이슈가 계속되고 있던 1996년도에 위헌 판 정을 얻어내는데 성공하였으며, 이 소송사건의 중요한 소득의 하나로 모든 대중음악은 “사전심의를 받아야 한다”로부터 “사전심의를 받을 수 있다”로 바뀌게 되었다.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음악인들이 모여 대대적인 페스티 벌을 주도하게 되며, ‘자유콘서트’라 이름 붙여진 이 행사는 대중음악이 국가 권력에 저항하여 비록 부분적으로나마 자유를 쟁취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상 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콘서트에는 홍대앞에서 활동하던 인디 밴드가 대거 참가하였으며 직접적으로 홍대앞 인디음악씬의 발생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된다.

언더그라운드 “온 더 그라운드”- 대학가 거리-카페서 팬들과 활발한 만남/20,21일 한 대서 공연/

「자유2」 무대 펼치기로 국내 가요계에 언더그라운드의 반란이 본격화하고 있다. 반 홍보와 판매를 둘러싼 기존 질서에 아랑곳하지 않고 대학가의 길거리와 카페에서 이벤트 형식의 콘서트나 소규모 라이브 공연을 통해 「동조자」를 규합하려는 움직임 이 드러나고 있는 것. 언더그라운드 반란의 선두주자는 6월초 음반사전심의 폐지기념

으로 3일간 열렸던 콘서트 「자유」에 참가한 진용. 이 콘서트는 민중가요권 그룹

「조국과 청춘」 「꽃다지」 「천지인」과 장사익 정태춘 박은옥 안치환, 록그룹 「클 래시」 「블랙홀」 「시나위」 등 각각 뿌리가 다른 언더그라운드 성향의 가수와 그 룹이 참가, 1만여 팬들과 축제를 벌였다. 이 콘서트를 기획했던 「음악센터 21세기」

「자유 콘서트」의 성공을 계기로 매년 두어 차례 같은 형식의 무대를 마련한다.

특히 20, 21일에는 한양대 노천극장에서 「자유 2」라는 이름의 무대를 펼칠 예정.

번에는 아예 「언더그라운드시대 선언」을 표방한다. [...중략...] 또 대학가에서 활동하 고 있는 신세대 펑크록밴드는 최근 가장 돌출적인 양상을 보이는 언더그라운드 진영.

「황신혜 밴드」 「어어부」를 비롯해 「크라잉 너트」 「옐로 키친」 「갈매기」가 그들로 미국적 개념의 언더그라운드에 가깝다. 이들의 입장은 고정관념에 구애받지 않 고 아마추어리즘의 순수를 지향한다는 것. [...중략...] 이 같은 언더그라운드의 반란은 가요계의 새로운 물결. 음악평론가 강헌씨는 “다른 뿌리를 가진 언더그라운드의 진영 이 결합하는 등 다양한 시도가 모색되고 있다”며 “이들이 가요계의 주류가 될 수는 없 겠지만 건강한 음악과 메시지를 가진 「얼터너티브」(대안)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말 했다 (동아일보, 1996.09.05.).

이러한 홍대 언더그라운드 음악씬 등장의 정치사회적 배경은 처음부터 홍 대 인디음악씬이 어떠한 방향으로 나갈 것인지를 암시해 주는 측면이 있었 다. 당시 이 자유콘서트를 보도한 한 위의 신문기사에 사용된 언어들로부터 새로이 등장하는 홍대 클럽씬 중심의 인디가 성격규정이 되는 방식을 살필 수 있다. 즉 ‘반란’은 곧 기존질서의 전복을 암시하며, 고정관념에 구애받지

않는 ‘아마추어리즘’이라던가 ‘순수’, ‘얼터너티브’ 등의 표현 등이 이미 홍대

인디가 나아갈 방향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1996년도 당시 ‘언니네 이발관’ 등 수많은 다른 장르의 음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