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홍대앞 인디음악씬의 형성기: 1990년대 중~후반
3. 안티테제로의 ‘홍대인디’의 탄생
으로 상업성에 착안한 자본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과는 달리 라이브클럽들에 대해서는 그러한 외부의 관심도 크지 않았다.
독자적인 ‘문화’로 인정되기보다는 일종의 ‘일탈’로 여겨졌다고 한다. 자신의 자녀들이 락카페를 드나들거나 펑크 공연에 가거나 하면 부모의 입장에서는 타락하였다거나 빗나갔다거나 노는 애로 여기거나 하는 부정적 시각이 지배 적이었으며, 그것은 홍대앞에 형성된 인디음악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홍대앞 인디씬의 클럽과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들이 새로이 등장하는
‘문화’로 인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클럽이 여전히 ‘유흥업소’로 등록해야 하며
정식의 공연장으로 등록하는 것이 허가되지 않아 클럽에서 공연하는 것이 불법이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라이브클럽의 합법화 운동은 이러한 모 순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활동에 정당성을 획득해 보고자 한 운동이었으나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으며 소위 주류의 시선을 바꾸는 데 의미있는 정도로 성공하였다고도 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앞서 인용된 신문 기사들에서 홍대앞에 등장하는 인디씬에
대해 “언더그라운드의 반란”이라거나 “기성세대에 대한 저항”이나 “아마츄어
리즘의 승리” 등의 레토릭이 사용되고 있었으나 그것은 인디씬 등장 당시의 홍대앞 부근 주민과 예술인, 음악인의 실제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음 장에서 살펴 보게 될 초기 홍대앞 인디음악씬 주역들의 회고에서도 드러나겠지만 그 당시에 인디음악씬의 주체들은 어떠한 특정의 대상에 대해 의식적으로 저항했다기보다는 오히려 주류문화의 반대편에서 자신들을 해명하고, 자립적으로 자신들만의 취향적 공간을 구축해나갔다고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즉, 단순한 저항의 공간이기보다는 새로운, 대안적 인 사회성을 구축해 가는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적어도 저항이나 반란, 승리, 자유 등을 강조하는 초기 일부 미디어의 표상은 당시 홍대앞 인 디음악씬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에 기초한 서술이었기보다는 자신들의 임의 적인 상상에 의한 일종의 이미지 부여의 측면이 강했다고 보인다. 1990년 초 탈운동권의 분위기에서 홍대앞은 문민정부의 민주화가 실천되는 장소로 상 징되었으며, 그 장소의 주체들은 어떤 사람들이다라고 이미지를 부여하는 맥 락과 배경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홍대앞 인디음악씬을 둘러싼 이와 같은 상황은 계급적 성격을 가진 서구 의 하위문화들이 주류에 포섭되어 가는 과정13)과는 다른 종류의 포섭을 의
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것은 외부로부터 부여되는 이미지, 요구되는 홍대 인디의 역할 등으로 인해 오히려 홍대앞 인디음악씬의 다양성을 억누르고 배제하는 측면을 동시에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대 인디씬의 주역들은 당 시 홍대앞에는 정치이념적 저항의 성격을 전혀 갖지 않은 비정치적 의미의
‘순수한’ 음악 다양성의 실험과도 같은 시도가 많이 있었다고 하며, 그런 의
미에서 그들은 크라잉넛과 같은 단일한 종류의 음악으로 홍대앞 인디음악씬 의 성격을 규정해 버리는 움직임에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홍대 인디음 악씬의 다양한 맥락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의 장에서 보다 상세히 논의 하고자 한다.
13) 서구에서도 물론 그러한 포섭에 대한 저항이 나타나며 최근에 있었던 런던 테임즈강에서 의 “평크장례식”과 같은 이벤트도 그러한 저항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중앙 일보 2016년 11월 26일 24면 “펑트록은 죽었다, 수집품 73억원어치 불태워” 기사 참조).
III. ‘홍대앞’ 인디음악씬의 전성기: 2000년대 초~중반
홍대앞 인디음악씬은 2000년대를 기점으로 급격히 성장하면서 지리적으로 나 인구학적 측면에서 확장되기 시작한다. 본 연구에서 ‘2000년대 초반~중
반’을 ‘전성기’로 구분한 것은 클럽 및 홍대지역의 페스티벌과 공연을 위주
로 하는 인디음악씬의 산업경제적 측면과 음악인, 클럽 수 및 종사자, 그리 고 관객을 포함하는 공간적, 인구학적인 수치를 기준으로 상정한 것이다. 그 리고 여기서 지적해야 할 것은 이 ‘전성기’의 내부적/외부적 변화들은 뒤에
IV장에서 이야기 하게 될 그 이후의 ‘분화기’를 초래하는 분열의 지점들을
동시에 생산하였으며, 전성기와 분화기는 2000년대 중반 이후 겹쳐있다는 것 이다. 이러한 맥락을 염두에 두면서 본 장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홍대 인디’라는 것이 하나의 동네 지역커뮤니티의 소수문화에서 전국적으로 알려 지는 시기에 하나의 ‘상품미학’으로 빚어지는 과정이다. 즉 II장의 내용이 당 시 한국의 정치사회적 변화의 산물로서의 ‘인디’의 등장과 그것이 ‘홍대앞’이 라는 공간과 연결되는 인과적 전개를 분석 정리한 것이라면, 본 장의 내용은
이것이 ‘홍대앞’이 클럽 중심의 음악씬으로 청년문화의 메카로 되어 가는 그
과정에서 ‘홍대인디’라는 상품미학이 탄생하게 되는 현상과 그에 따르는 영 향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이러한 내용을 3개의 절로 나누어 정리하고자 한다. 첫 번째
로 1절인 ‘홍대앞 인디음악씬의 번성과 확장’에서는 음악만이 아닌 다양한
예술가들의 공간이었던 ‘홍대앞’에 ‘음악씬’이라는 확고한 장소성을 부여하게 된 가장 큰 요인이라 할 수 있는 클럽데이와 사운드데이의 전개와 영향을 서술하고, 이 과정에서 급격하게 늘어났던 클럽 및 공연공간, 그리고 인디레 이블의 번성을 다룬다. 2절인 ‘전성기 홍대앞 인디씬의 특성’에서는 음악인 및 예술가를 포함한 인디음악산업의 종사자와 관객 등의 유동인구 및 이주 민이 증가하고, 그들 간에 형성되는 공동체적 유대감과 관계적인 특성들을 다룬다. 이어서 그들이 홍대앞이라는 공간을 어떤 방식으로 전유(appropriate) 하여 인디의 공간으로 만들어 가는가에 대해 논한다. 마지막으로 3절에서는
홍대앞 인디음악씬이 90년대에 비해서 확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상 대적 약자로 (보이게) 만들었던 대형 댄스클럽의 경관 지배와 2002년 월드컵 전후를 기점으로 급속히 전개된 홍대 지역의 상업화 및 젠트리피케이션의 부작용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서서히 홍대 전성기의 막을 암시하
는 2000년대 중반을 다룬다.
2002년도 한일 월드컵을 계기로 홍대앞이 관광객들에게 명소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홍대앞의 문화지구 지정 등의 논의가 나왔으며 당시에는 결국 무산되었으나,14) 부동산 가격의 앙등을 초래 하여 소규모로 운영되던 라이브 클럽에 부담을 가중시켰다. 힙합이나 일레트로닉의 인기를 타고 번영하던 댄 스클럽과 달리 상대적으로 대중화가 덜 되었던 라이브클럽은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계속적인 존재 가능성을 염려하는 경우도 흔히 발견된다.15) 한국의 대중음악 시장과 일명 ‘부비부비’를 유행시킨 대형 댄스클럽의 그늘에서, 경 제적인 생존을 위한 인디음악산업의 조직화 및 상품화의 과정에서 일어났던 분열의 지점들은 IV장에서 다루게 될 홍대앞 인디음악씬의 분화기의 시작을 암시하고 있었다.
1. 홍대앞 인디음악씬의 번성과 확장
1) “황금시대”: 클럽데이와 사운드데이
2001년 3월, 홍대지역 4개의 테크노 클럽이 함께 모여 한 장의 티켓으로 모든 클럽
을 다닐 수 있게 하는 클럽데이를 개최한다. 800여 명의 관객을 모았던 이 행사가 화 제가 되어 주변의 클럽들이 동참하여 제2회 부터는 10개의 클럽이 매월 마지막 주 금
요일 ‘홍대 클럽 하나 되는 날’이라는 슬로건 아래 참여한 댄스클럽에 모두 출입할 수
있는 클럽데이를 탄생시켰다. 클럽데이의 성공과 함께 2003년에는 라이브클럽을 따로 모아 매월 셋째 주 금요일에는 사운드데이가 생겨났다. 음악적 다양성과 소스를 키우
14) 2003년부터 제기되기 시작하였던 홍대앞 문화 지구 지정 논의는 댄스클럽이 현행법상 불 법이라는 이유로 결국 무산되었다(위의 [표 II-1] 참조).
15) 라이브클럽들이 처한 어려움은 음악의 소비양식이 점차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변화되 면서 더욱 심화된다. 이에 대해서는 IV장에서 상세히 논할 것이다.
자는 취지 하에 라이브클럽 주체들이 함께 모인 것이다. 클럽데이와 사운드데이 양 축 을 통해 ‘클럽’은 홍대앞 문화의 대표 브랜드가 되었고, 2000년 무렵 10여 개에 불과 했던 클럽 수가 90개로 늘어나는 양적 성장을 거두었다. 주간지, 방송국, 대학언론까지 홍대 클럽데이를 취재하였고, 언론 마케팅은 6월에 열린 2002년 한일월드컵과 맞물려 돌아갔다. 1천 명을 밑돌던 클럽데이 참가자가 당일 티켓 구매자를 1만 명 이내로 제 한해야 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천호균 외 2013).
2000년을 전후해 한국담배인삼공사 KT&G가 홍대앞에 진출하여 인디 음 악가들을 지원하는 문화사업을 시작하고 홍대앞 놀이터 건너편에 공연기획 사무실을 두어 지원금을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2001년 3월 그 지원금의 일부 로 클럽데이가 개최되었다. 클럽데이란 한 장의 티켓으로 참가한 모든 클럽 을 다닐 수 있게 한 행사였다. 이 행사는 예상했던 것 보다 더 큰 호응을 얻 었으며 하루에 800여 명의 관객을 끌어 모으는 성황을 보였다. 항상 관객의 기근에 시달려 왔던 홍대앞의 클럽들에게는 크게 환영할 만한 일이었으며, 회를 거듭 할수록 참가하는 클럽의 수가 늘어났다. 2003년에는 라이브클럽만 을 대상으로 하는 사운드데이가 시작되었으며, 클럽데이와 사운드데이의 성 공을 통하여 ‘클럽문화’는 홍대앞 인디씬의 대표적 브랜드가 되었고 클럽의 폭발적인 증가로 이어졌다.
사운드 데이 하던 때... 그거 재밌었지. 그리고 되게 브라이트 했어. 좋은 영향력을 끼쳤어, 음악 하는 사람들에게, 관객들에게, 동네 사람들 그 씬에 좋은걸. 사람들 많이 오지, 대기업에서 개런티를, 지원을 해주니깐. 음악 하는 사람들도 재밌고... 그 때
KT&G에서 2억을 줬거든. 그 때 놀고먹기가 좋았지, 그게 결국 클럽들의 월세였어, 한
달 월세를 낼 수 있는 거잖아.. 그러면서 이런저런 뭐 클럽데이 협회, 서교자치회 이런 식으로 모여서 했지. 서교자치회는 그나마 잘 돌아갔지, 이거는 자본유치를 위한 툴이 었거든. 외부 개입자본을 몰고 오기 위한 거. 그래서 그나마 수지가 한때 좋은 편이었 었지... 2004년이 전성기였어 그 때 포장마차에 막 50명씩 들어가던, 자리 없어서 서서 먹고 그럴 때. 그 때가 KT&G의 시대야. 허허. KT&G가 이 동네에 담배랑 돈을 뿌릴 때야... 출연을 하면 대기실에 박스가 와, 담배박스가. KT&G에서 새로 나온 담배들이 막 보루로 들어와. 막 펴. 담배 피는 사람들이 막 챙겨. 그리고 공연 끝나면 막 봉투, 당일 개런티가 나와. 그럼 KT&G 짱!(엄지손가락 치켜들며) 그래서 우린 KT&G가 공 연 기획 한다 그러면 언제든지 갈 생각 있어, 이랬지. (웃음) KT&G도 뭐 문화행사라 하면 세금을 까줘. 2억을 내도 차감을 해줘. 문화사업지원금이라 하면. 최고인거지,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