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내란의 시작(1946년-1948년)
4. 제헌의회 선거와 향보단(鄕保團)
폭력을 수립할 국가의 능력이 부족했던 미군정은 대한민국의 탄생 을 위한 제헌의회 선거수행 당시부터 우익 청년단 단원들을 중심으로 구성 된 향보단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대한민국이 그 탄생부터 우 익 청년단체들의 폭력에 의존하였으므로 이들은 이후 군, 경찰로 진출하거 나 직접 국가폭력을 보조하며 근대국가건설에 참여하게 된다. 예컨대, 1948-50년의 국가 형성기에 근대국가건설을 위해서는 무력기구의 국가독 점화가 필요했으나 1948년 8월을 전후한 약 2년이라는 기간은 국가가 폭 력기구를 완전히 독점하여 안정화 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고 두 차례 에 걸친 좌익의 투쟁이 점차 유격전으로 변하여 격렬해졌으므로 우익 청년 단체들이 국가기관인 경찰과 군대의 일부가 되어 편입되어야만 비로소 경 찰과 군대가 유일한 국가 폭력조직으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차례에 걸친 좌익의 투쟁은 민주주의 민족전선과 남로당이 주축
466)이경남, 『경향신문』,1987년 9월 9일「청년운동 반세기: (44)조선민족청년단」.
이 되어 1948년 2월 7일에 일으킨 2.7 구국투쟁과 1948년 5월10일의 선 거를 직접적으로 반대하기 위한 투쟁으로 전개되어졌다. 먼저, 2.7구국 투 쟁은 남로당의 지도 하 에 2월7일부터 20일까지 전국 규모로 벌어졌다.
불과 2주 동안 시위 103건, 봉화 204건, 파업 30건, 동맹휴업 25건, 충돌 55건이 발생했고 총 검거인원만 8,497명에 달했다.467)5.10 선거 반대투쟁 은 선거 사무소, 경찰서 집중 공격 등 보다 직접적인 무장투쟁으로 격화되 었다. ‘남조선 단선반대 투쟁 전국위원회’를 조직한 남로당은 지하조직인 백골대, 유격대, 인민 청년군 등을 조직하여 5월 한 달 동안 경찰, 언론사, 통신. 운수 기관 등을 공격하였으며 시위를 벌였다. 특히, 선거 직전인 5월 8일-10일 까지는 거의 매일 선거인 등록소, 투표소, 경찰서 등을 공격했 고, 이 과정에서 선거진행을 강행하려고 하였던 경찰, 향보단 측과 충돌하 였다.
경무부장 조병옥은 선거사무소 습격사건이 80건이나 발생하는 상황 속에서 3만 5천여 명의 경관만으로는 도저히 13,800개소의 투표소를 지켜 낼 수 없어서 향보단을 조직하였다고 해명하였다.468) 원칙적으로 향보단원 들은 사법권이 없었지만 일부 향보단원들이 기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등 과잉행동으로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469) 이러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향보단 에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국가의 능력부족 때문이었다. 실 제로 구체적인 피해규모와 피해사항을 살펴보면 공권력의 소유자로 치안을 유지해야할 경찰서나 경찰관, 그리고 행정기관이나 철도나 전화, 전신주 등과 같은 행정의 수단의 피해가 컸으며 국립경찰치안사상 초유의 것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표III-8)선거기간 중 피해규모470)
467)김남식,『남로당연구』, (서울: 돌베개, 1984), pp. 306.
468)『조선일보』,1948년 4월17일「조병옥, 향보단 조직에 대해 언명」.
469)『경향신문』,1948년5월18일「대 검찰청장 이인, 향보단의 탈선과 그 임무에 대해 담화 발표」.
470)『서울신문』,1948년 5월 18일「조병옥, 남로당계 총선반대투쟁 진상 발표」.
피습 방화 파괴 피 살 (피탈) 부상 선거사무소 134건 32건
테러 612건
관공서 301건(주로
경찰지서) 16건 11건 47건
경찰서 16건
양민 69건 107건 3 8 7
건
기관차 71건
객화차
철도노선 65건
전화선 5 4 1
건
전신주 5 4 3
건 선거관계서
류 116건
선거공무원 15건 61건
후보의원 2건 4건
경찰관 51건 1 2 8
건
경찰관 가 7건 16건
족
도로 급교
량 48건
따라서, 향보단은 선거 이후에도 민보단(民保團)이라는 이름으로 개 칭하여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민보단 역시 국민들에게 각종 기부금을 징 수하는 등의 폐해와471) 월권행위 등으로 구설수에 올랐지만472)옹진지구 38선 충돌사건 때 인민군과 교전을 벌이던 국군의 전투에 직접 참여하여 공비소탕에 큰 도움을 주는 등 그 역할을 인정받게 되었다.473) 이들 민보 단은 부족한 대한민국의 물리적 폭력을 보완하기 위해 우익청년단원들과 함께 경찰을 도와 좌익세력과의 교전에 직접 참여하게 되는 한편, 군사훈 련을 받고474)경찰과 모의 전투훈련을 실시475)하는 등 준 군사조직으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어 이후 이승만이 구상하는 민병조직의 기초가 된 다.476)
그러나, 우익 청년단체들이 국가의 폭력의 일부가 됨으로써 핸더슨 이 지적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부작용이 발생했다. 첫째, 이들 청년 단체들 이 국가예산의 부족으로 비합법적 자금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들이 모금한 강제적 내지 자발적 기부금이 국가세입의 거의 절반에 달했 다. 둘째, 한국정치가 공식적 조직과 비공식적 조직으로 분리되어 국가가 이중으로 작동하게 되었다.477) 이렇게 비공식적 조직이 국가의 공식적 조 직의 권한을 넘어서게 됨으로써 국정운영에도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하게 되자 이승만은 이범석의 자진 해체 선언 이후에도 여전히 존속하고 있었던 조선민족청년단 계열의 공식해체를 1953년 9월에 지시하게 되었다.
471)『서울신문』,1948년9월12일「각종 기부금 징수의 폐해」.
472)『서울신문』,1949년 2월8일「대검찰청과 경찰수뇌부, 민보단의 월권행위와 관련해 대책 강구」.
473)『연합신문』,1949년 6월 28일「옹진지구 38선 충돌사건에 대한 옹진주민의 지원증대」.
474)『영남신문』,1949년 8월 30일「민보단 경상북도단부, 단원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
475)『국도신문』,1949년 8월10일「서울시경찰국 주최로 경찰·민보단 합동 모의전투훈련을 실시」.
476)『자유신문』,1949년 12월 3일「이승만 대통령, 청년방위대 20만 명 조직 등에 대해 기자와 문답」.
477)핸더슨, 2000. pp. 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