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미군정기의 국가건설
2. 군대
328)HUSAFIK,『주한 미군사』제3권, 1988. pp. 439.와 각각의 Summation은 이길상,『미군정 활동 보고 서』, 1-6권, 1990, 을 G-2 Report는 HQ, HUSAFIK G-2 P/R 1-7권 1988-1989. 참조.; Summation 및 G-2 Report를 참조하여 작성한 서주석, 2008, pp. 215 <도표 V-3>.
329)핸더슨, 2000. pp. 229.
연도 1945년 1946년 1947년 1948년 일반재정 1,868,4
백만원
13,365,2 백만원
19,235.0 백만원
15,263,2 백만원 국방비 금액 0.1백
만원
826.5백 만원
1,991.0백 만원
2,016,8 백만원 비율 0.01% 6.2% 10.4% 13.2%
연도 주한미군 남조선 국방 경비대 합계
1945년 77,643명 77,643명
1946년 37,918명 64,64명 44,382명 1947년 44,390명 14,595명 58,985명 1948년 22,740명 52,752명 75,492명
표II-8) 미군정기의 국방비330)
전술한바와 같이 1947년 7월 제2차 미, 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기 이전까지 미군정의 정책은 소련과의 조속한 협상을 통한 철군에 집중되어 있었고 국가가 생산과 소비 모두를 책임지기 위해 관업 분야에 가장 많은 예산을 투입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위의 표II-8)을 통해 알 수 있 는 것처럼 1945-46년 국방비의 액수와 예산 상 비율 역시 매우 낮았다.
또, 다음의 표 II-9)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대구 폭동 등이 발생하던 1946년 시기에는 병력의 규모 역시 가장 적어 국가의 국방력이 취약한 상 황이었다. 국방비의 액수와 비율은 1947년부터 대폭 늘어나지만 여전히 국가 예산상 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표II-9) 미군정 시기 군대의 규모331)
330)최광, 1989, pp. 119-160.
331)남조선 국방경비대의 수를 파악하기 위한 G-2 Summary는 HQ, USAFIK G-2 weekly summary 1-5
사사끼는 당시 한국 경제가 처하고 있었던 어려움으로 인해 갓 창 설된 국방경비대원들에게 충분한 급여를 제공할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아 울러, 1946년 홍수로 인한 수해와 비료, 농기구 등의 부족으로 인해 일찍 이 없었던 큰 흉작이 발생하여 2,3개의 빵이나 떡을 식량 대신 대용식으로 지급하는 등 기본적인 급식조건 조차 매우 좋지 않아 한창 나이의 젋은 이 들이 견디기 어려운 매우 열악한 조건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영등포의 보급중대에서 차량 2량을 횡령하고 2만족에 가까운 양말을 부정처분한 사 건이 발생하여 좌익계 장교들이 부정, 부패장교 배척운동을 통해 우파장교 축출운동으로 발전시키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332) 실제로 당시 조선국방 경비대원으로 입대햇었던 공국진 역시 국방경비대원들의 봉급이 며칠 생활 비도 안 될 정도였기 때문에 미군정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배급해준 야전 식량을 남대문 시장에 팔아서 생활비에 보태 쓰는 형편이었다고 회고하였 다.333)
한편, 수정주의자들에 깊은 영향을 준 커밍스가 남한 군대가 창설되 기 이전인 1945년 12월에 하지가 국방경비대를 창설하였으며, 창설 당시 6개 사단으로 출발한 국방 경비대의 주요 구성원의 장교는 모두 일본 군 대에 복무했던 경험이 있는 자들로 채워졌다고 주장하면서 일본 군대 복무 경험자 중에서도 악명이 높았던 김석원을 부각시켰기 때문에334) 미군정이 출범시킨 국방경비대와 해안 경비대의 지휘부가 친일 경력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현대사의 신화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강만길은 “해방공간의 상황이 우익세력에 의한 남한만의 단 독정부가 수립될 수 밖에 없었다 해도 그 정부의 상층부는 중국에서 귀국 한 임정요인과 광복군 출신들로 구성되어야 했었다”고 지적한다.335) 만일,
권, 1990. 과 G-2 Summary를 참조하여 작성한 서주석, 2008, pp. 167 <도표 IV-4>. 주한미군의 수는 박찬표,, 2007, pp. 214의 표<4>미 전술군 및 군정 요원 규모 추이와 pp. 216의 <표6> 조선경비대, 해 안경비대 증강 추이를 각각 인용하여 작성하였음.
332)사사끼, 1977. pp. 113-114, 144.
333)공국진.『한 노병의 애가』,(서울: 원민, 2001), pp. 42.
334)Cumings, 2001. pp. 299, 347.
그렇다면 최고 지휘관들이 중국에서 귀국한 임정요인과 광복군 출신들로 구성되었던 미군정의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의 경우는 강만길이 주장한 정통성의 최소한의 요건을 채우고 있는 경우라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후술하겠지만 김석원 등의 노련한 일본군대 경험자들이 전면에 부 상하게 되는 것은 1948년 10월 여수, 순천 사건 발생으로 인해 국가안보 의 위기가 극에 달하는 시점이었고 이전까지는 민족주의적 대의명분이 지 배하는 현실 속에서 본인들 스스로가 참여를 기피했었다. 따라서, 미군정 기와 대한민국 정부 출범 초기에는 광복군 출신들이 절대적인 숫자의 열세 에도 불구하고 군의 최고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1946년 2월에 중도파를 지원하라는 방침을 받기 전 까지는 임시정부와 이승만 중심의 정부를 수립 하고 철군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 경찰을 제외한 거의 모든 국가기구 들의 상층부에는 항일 투쟁 등의 경력이 풍부한 인적자원들을 임명하고 있 었다. 따라서, 미군정기의 군대 역시 최고 지휘부 역시 광복군 출신자들이 임명되어졌고 그 이하를 일본군 출신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1946년 1월14일 조선국방경비대를 창설한 미군정은 1월21일 모든 군사단체의 해산을 명령하고, 대다수의 광복군들의 귀국이 지연되고 있었 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광복군 출신 유동렬336)과 송호성, 그리고 임시정 부 의정원 의장 손정도의 아들인 손원일을 경비대의 상징적인 수장인 통위 부장과 총사령관, 해안 경비대337)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조선국방 경비대 조직의 확대, 개편은 1.1946년 6월: 조선경비대 총사령부, 조선해안경비대 총사령부 창설→2.1946년 9월: 한국인 통위부장 유동렬 임명→3.1947년 4 월: 통위부 참모총장 직 설치→4.1948년 6월: 조선해안경비대 총참모장직
335)강만길, 2011, pp. 255-256.
336)『조선일보』,1946년 6월12일「군정청 통위부 설치하고 초대 조선인 부장에 유동렬 임명」.
337) 해군의 모체에 해당하는 해안 경비대는 1946년 1월29일의 해안경비대 설치계획 발표로 인해 시작되었 으며 임무는 주로 국가 법령과 규칙에 의거하여 수역을 경비하여 불법항행과 밀수출입을 취체 할 임무와 권리를 가지는 것이었다. 『경향신문』, 1947년 2월1일「경무 부장 조병옥, 통위부장 유동열, 경찰과 경 비대의 임무한계 발표」.
설치의 순으로 전개되어졌다.338)
당시, 미군정당국과 광복군이 협력적인 군대편입을 통해 정규 국방 군을 편성할 예정이라는 기사가 보도339)되고 있었고 임시정부 봉대론을 부르짖던 한국 민주당 역시 국방과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광복군의 급속정 비 강화를 주장하고 있었다.340) 따라서, 미군정 초기에는 광복군을 모체로 국군을 편성해야 한다 는 명분론이 팽배했으므로 미군정의 교섭을 받았던 이응준, 원용덕, 김석원 등의 일본군 출신자들 역시 근신을 이유로 미군의 권유를 사양하고 광복군 출신들을 적극 추천하였다.341) 미군정은 진주 직 후부터 사설 군사단체의 해산을 명령하였고 1945년 12월30일 ‘국자(國 字)’ 1, 2호를 발표하여 정권 장악을 시도하였던 임시정부 측과 갈등을 빚 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된 인가단체가 아닌 광복군을 존속시키고 있 었는데 이것이 후술할 오광선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던 우익 청년단체인
“한국광복청년회”였다. 이후에도 “조선민족 청년단”의 경우처럼 이범석과 같은 임시정부 광복군의 지도부들을 중심으로 조직한 청년단체가 미군정의 공식후원을 받게 되었으며 이들은 후일 대한민국 국군의 간부로 대거 임용 되어 국군 창설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실제로, 1946년 6월3일 에 500여명의 광복군과 함께 귀국한 광복군 참모장 이범석과342)1946년 5 월21일 경 5 천여 명의 광복군과 함께 귀국한 343) 광복군 사령관 이청천 이 조직한 대동 청년단과 조선민족청년단 조직원들은 제1공화국 성립 초 기 광복군 정통론이 여론화되고 군 내부의 좌익색출로 인해 군 간부의 결 원이 대규모로 발생함에 따라 군 간부로 발탁된다.
한편, 미군정은 군사영어 학교 개설 당시부터 광복군, 일본군 만주 군 출신 간 균형을 맞추려고 하여 광복군 출신은 조개옥, 일본군 출신은
338)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1, pp. 264.
339)『동아일보』,1945년 12월 4일「정규 국방군 편성예정」.
340)『동아일보』,1945년 12월 7일「한민당, 임정지지 국민운동 전개 결의」.
341)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1. pp. 306-307.
342)『조선일보』,1946년 6월 5일「광복군참모장 이범석 귀국」.
343)『조선일보』,1946년 5월 18일「이청천 이하 오천 여 명의 광복군이 개인자격으로 귀국 예정」.
구분 일본 육사
일본 학병
일본 지원
병
만주 군
광복
군 합계
인원 13명 68
명 6명 21명 2명 110
명 백분
율
11.8
%
61.8
%
5.5
%
19.1
%
1.8
%
100
%
대한제국 무관 출신 독립운동가 이갑의 사위로 임시정부의 군 창설 계획에 관여하기도 했었던 이응준344), 만주군 출신은 원용덕에게 추천을 의뢰하였 다. 그러나, 미군정이 1945년 12월15일에 최초로 개설한 군 간부 양성기 관인 군사영어 학교에 당시 귀국이 늦어지고 있었던 대다수의 광복군들은 지원할 수가 없었고 먼저 귀국해 있었던 소수의 광복군 출신들 역시 법통 성을 내세워 입교를 외면하였으므로 일본군 출신 지원자가 절대 다수를 이 루었다. 1946년 4월30일 까지 110명의 임관자를 배출한 군사 영어 학교 출신자들 중 일본군 출신은 87명으로 80%를 차지하고 있었다.345)
표II-10) 군사영어학교의 출신현황346)
한편, 미군정이 진행한 조선국국방경비대의 창설과 증강은 미국과 소련의 협상과 갈등 이라는 국제정치적 요인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1946년 1월 11일에 이미 소련군의 직접적인 지도 하에 최초의 북한 군대
344)이응준의 장인 이갑은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한국무관학교, 일본 육군사관학교 동기였던 통위부장 유동열 에게 자신의 딸을 맡긴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이갑이 자신의 여동생을 유동열에게 시집보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인척이 유동열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장인 이갑의 죽음이후 아내의 고모부였던 유동 열은 이응준에게 친 장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1981. pp. 264. 308. 한편, 이응준 의 사위는 한국군 군번 1번을 받고 초대 합참의장과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이형근 이었다. 이는 임시정부 의 정통성이 중시되었으나 인적자원이 부족했던 초창기 군대가 인적 관계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음을 보 여준다.
345)한용원,「남북한 군대창설과정 비교」, 이철순 편,『남북한 정부수립과정 비교: 1945-1948』, (서울: 인 간사랑, 2010) pp. 302.
346)이는 한용원. 1984. pp. 74를 참조하여 작성한 서주석의 연구에 따른 것이다. 서주석. 2008. pp. 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