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여곡절 끝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 8월15일에도 평 탄한 미래를 기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먼저, 김구와 김규식은 대한 민국이 오래 지속될 것으로 보지 않았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의장시절 김 규식의 비서실장을 지내고 남북협상에 민족자주연맹 대표로 참여했었던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의 필독서『해방 30년사』의 저자인 중도파 송남헌 의 증언에 따르면 김구과 김규식은 5.10선거를 통해 수립된 대한민국이 며 칠 못가 금방 무너질 것이며,493) 따라서 이승만 정부가 오래가지 못할 것 이라고 생각했다.494) 주한 미국 대사를 지낸 존 무쵸(John J. Muccio)의 보고는 보다 객관적인 외국인의 시각을 반영한다. 1949년 11월 27일 보고 서에서 그는 한국정부가 두 달 전 보다는 보다 강해졌지만 여전히 기본적 으로 취약하고 행정부가 전반적으로 형편없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국가적 차원의 행정은 무능하지만, 지방과 하부 차원은 더욱 열악하며 무능한 행 정이 정부와 국민 간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495)
당시 대한민국의 실체에 대해서는 미군정기에 민정장관을 지냈던 중도 민족주의자 안재홍이 1948년 8월10일에『조선일보』를 통해 밝힌 다음의 진술이 함축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이미 안재홍은 정부 수립직전부 터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외교와 국방, 그리고 재정에 있어서 미국 의존적 인 성격을 보이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신생정부에 대하여 박약체경향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이대통령의 자기 판단에 의한 약간 과단성을 인정한다. 물론 외교 국방 재정 등에는 상당한 제약을 받겠지만 그 외 부명에서는 자주성을 가질 것이다. 내가 민
493)「제2부 송남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편, 2001. pp. 112.
494)「제2부 송남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편, 2001. pp. 107.
495)FRUS 1949, 1949년 11월27일 (1급 비밀, 69호)「무쵸 주한미특별대표부 특사, 한국의 정치·경제·사회 등 각 분야에 대해 미 국무부에 상황보고」, pp. 947~952.
정장관시대에 받은 제약은 없기를 바란다.496)
김동춘은 대한민국이 형식적으로는 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으 나 국민을 먹여 살릴 수 있는 국가의 하부구조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지 않 아 온전한 국가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국가497)였다고 지적 한다. 즉, 물적, 경제적 자원이 취약한 국가가 인적 자원의 부족으로 인해 제대로 행정력을 수립하지 못하고 국가재정의 근원이 될 징세력이 부진함 으로써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초대 국회의원으로 친일파 숙청 에 관한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김인식은 당시의 환경을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나 허허벌판에 비유하고 있다.
그때 허허벌판이야. 황무지에 들어가서 다 만드는 거야. 아무것도 없거든.
황무지에 나라를 만드는 거야.498)
먼저, 전술한 것처럼 물적, 경제적 자원이 부족하여 하부구조적 권 력을 담당할 자본가 계급이 형성되지 못했다. 미군정이 1947년 3월이 되 어서야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의 일부를 불하하기 시작했기 때문 에 그 건수는 기업체 513건, 부동산 839건, 기타 916건에 불과했다. 그 중 소규모 업체만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던 귀속 기업체의 불하는 전체의 10-20%정도에 불과했고 광산, 은행 대규모 업체를 중심으로 한 불하는 제1공화국 성립 이후로 미루어졌다. 그러나,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적산매각대금이 평가절하 되었고 생산시설 미비로 인한 생산성 감퇴로 인 해 불하대금의 체납도 심했다. 따라서, 귀속재산 매각이 정부재정에 주는 효과 역시 대단히 낮을 수 밖에 없었는데, 1949년에서 1955년 까지 귀속 재산을 매각한 수입 중에서 일반재정 세입에 실제로 전입된 금액은 연평균
496)『조선일보』,1948년 8월 10일「김구·조소앙·안재홍, 정부수립 등에 대해 기자회견」.
497)김동춘, 2007. pp. 186.
498)「제2부 김인식, 원장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편, 2001. pp. 178.
1.5%에 지나지 않았다.
결국, 재정, 조세기구 부분에서 상술하겠지만 정권 성립 2년 째 인 1949년 까지도 정부세출의 60%가 적자였고 통화량 역시 미군정 말기보다 2배나 팽창하여 물가가 2배나 올랐지만 공업 생산량은 일제 강점 말기인 1944년의 18.6%에 지나지 않았다.499) 따라서, 남한 경제는 붕괴직전이었 다. 1948년 당시 산업 생산성은 전쟁 이전의 80%에 불과했고 높은 인플 레와 식료품 부족, 숙련된 기술자와 전력 부족, 그리고 갈수록 늘어나는 피 난민들과 귀국자들로 인해 경제성장의 전망마저 암울했다.
국가가 지니고 있었던 물적, 경제적 자원의 취약성은 다음의 예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난다. 즉, 공무원 비리를 감찰하는 일을 담당했던 감찰 원장의 수장인 정인보가 냉정한 법 집행과 비리감시가 아닌 공무원 최저생 활 보장의 필요성과 공무원 봉급 인상이 물가에 미치는 영향까지를 함께 고려한 응급 해결책을 대통령에게 건의하였던 것은 대한민국의 당시 상황 을 보여준다.500) 이렇게, 대한민국은 국가의 행정을 담당하여 국가권력을 확립시킴으로써 근대국가를 완성시켜야 할 관리에게 충분한 월급을 줄 수 있는 물적, 경제적 자원이 부족 하였다. 따라서, 공무원의 비리를 철저히 감시해야 할 감찰원장 조차도 비리를 저지르는 공무원의 현실을 먼저 인정 할 수 밖에 없었고 비리의 구조를 근절시킬 수 있도록 공무원이 최저생활 이 가능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경제적, 물적 자원이 부족한 상태였으나 북한이 이를 미국의 책임으로 돌리면서 1947년 초부터 시작한 민족주의적 감정을 자극하는 선 전술을 강화하고 있었고 이는 1948년 제주 4.3 사태와 여수, 순천 사건 당시 이미 남한 내부에도 파다하게 퍼져 민신을 동요시키고 있었다. 즉, 북 한은 미 제국주의자들이 남조선에 상륙한 그날부터 한국을 미국의 원자재 공급국과 미국 제품의 소비시장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산업체를 파괴하였기 때문에 남조선 경제가 황폐화 되었으며 미국이 남조선을 노예화하기 위해
499)강만길, 2011. pp. 273-275, pp. 283.
500)『서울신문』,1948년 10월26일「정인보 감찰위원장, 공무원 최저생활 보장 필요성을 대통령에 건의」.
남조선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함으로써 남북을 분단시키고 이승만 괴뢰 정 부를 강화시키려 한다고 주장하였다.501) 나아가, 북한은 미 제국주의자들 이 예전에는 일본에게 속해있던 남조선 경제의 90%에 달하는 물질적 재화 와 천연자원을 장악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재화와 자원을 독점 하고 있는 미국의 기업주들이 미국정부를 통해 남조선을 식민지화 하여 무 역을 장악하고 기업과 인민경제를 파괴하고 있으며 미국이 군사조직과 이 승만 괴뢰정부를 동원하여 원조라는 미명 아래 자신들의 침락 계획을 실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502)
그러므로, 대한민국 역시 1948년 10월 여수, 순천 사건이 발생하여 국가안보에 중대한 위기가 발생하기 전 까지 이들의 선전에 적극적으로 대 응하기 위해서라도 민족주의적 열망을 국가건설 과정에서 충분히 수용하고 있음을 보여주어야만 할 필요성이 급선무의 과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더 나아가 정부는 이를 통해 경제적, 물적 자원의 부족을 민족주의적인 대의 명분에 기초한 이념적 권력자원의 극대화를 통해 보완하려고 시도하였는데 후술할 제헌헌법의 제정과정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이미 제헌국회의 첫 회의부터 이승만이 29년 만에 민국의 부활을 공포한다고 발언했고 제정된 헌법을 실었던 관보에 “대한민국 30년”이라 는 연호를 사용하는 등의 행위들을 의식적으로 행하였다.503) 또, 제1공화 국의 각료들 역시 의식적으로 임시정부의 이념이었던 삼균주의를 정책 상 에서 계승하고 있음을 밝히곤 함으로써 이념적 권력자원을 활용하려고 하 였다. 예를 들어, 초대 상공부 장관 임영신은 “우리 국헌 상 만인공생의 균 등사회건설이 요청되므로 균등분배제도를 한층 강화해야 한다”고 국회 본 회의 보고에서 진술하고 있다.504) 2대 상공부 장관 김훈 역시 “상공행정의
501)이는 북조선 국가계획위원 전준택의 논문을 인용한 것으로 북한과 북한을 추종하는 좌익 세력들의 일관 된 논지 중 하나였다. 박종효 편역, 2010,「1950년 6월10일(민주조선)」, pp. 474-475.
502)박종효 편역, 2010,「1950년 민주산업 제2호」, pp. 457.
503)함재학, “대한민국 헌법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1948년 헌법의 위상과 헌법이론의 빈곤,”, 한국미래 학회 편,『제헌과 건국』,(서울: 나남, 2010), pp. 16-55. pp. 339.
504)『제1회 국회속기록 제83호』,1948년 10월6일「임영신 상공부 장관, 제1회 83차 국회 본회의에서 시정
민주화를 위해 어떠한 소수의 특권계급이나 계급층에 행정을 치중할 것이 아니고 대다수의 상공인이 균형 발전될 수 있도록 기회의 균등과 공존공영 의 사회생활의 이념을 계몽 조장시켜야 한다”고 진술한 바 있었고,505)3대 상공부 장관 이교선은 “건국이상은 만민 공존공영의 균등 사회 건설에 있 다”고 밝히고 있었다.506) 또, 초대 사회부 장관 전진한 역시 “질병 의료행 정에 있어서의 국민 이익 균점의 헌법정신에 부합하는 전 국민의 빈부, 지 방의 차별이 없는 균등의료 향수를 위한 현 의료행정 개선과 국민의 빈부 차별 없는 질병예방과 의료보호의 균등”을 강조하고 있었다.507)
이와 함께, 민족주의적 대의명분에 의해 미군정과 일제 시기 관리들 을 배제하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국회 등을 통해서도 제기되고 있었으므 로508) 제헌국회는 정부 내에 등용된 친일분자 숙청을 국무원에 건의하는 동시에 특별위원회를 만들었다.509) 단적으로 정부 출범 후 10일 만에 상 공부 차관 임문환이 부일협력 행위 관련 여부로 물의를 빚자 사표를 낼 정 도510)로 엄격한 사회적 분위기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행정공백을 우려하여 군정 말기에 수립된 국가행정 체제와 관료들 을 그대로 유지할 것을 원했던 미군정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과장급 이상 상급 공무원들의 94%가 교체되었다.511) 따라서, 이승만은 당시의 상황에 대해 “행정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반민(反民)이라 하니 쓸 수 없고, 신인 을 사용하게 되어 곤란한 일이 많았다.”고 회고하였다.512)
방침 보고」, pp. 512-515.
505)“자유신문”1950년 5월11일「김훈 신임 상공부 장관, 생산의욕을 높이고 무역발전에 힘 쓰겠다는 포부 를 피력」.
506)『한국 전란 2년지』,1952년 5월1일「이교선 상공부 장관의 상공정책」, pp. 128-129.
507)『시정월보 창간호』,1949년 1월6일「전진한 사회부 장관, 제1회 83차 국회 본회의에서 시정방침을 보 고」, pp. 29-42.
508)당시, 제헌국회의원 김효석이 앞으로 수립될 정부에 현 군정 관리를 국무위원 또는 행정 각 부처장에 등 용치 말 것을 대통령에게 건의하자고 제안하여 국회에서 정식으로 안건으로 처리된 상태였다. 『서울신 문』, 1948년 8월2일「제37차 국회 본회의, 조각문제로 격론」.
509)『서울신문』1948년 8월 21일「국회 임시특별위원회, 국무원에 정부 내 친일파 청산을 건의할 예정」.
510)『경향신문』1948년 8월 25일「임문환 상공부차관, 부일협력 관계로 사표 제출」.
511)맥도널드. 2001. pp. 238-2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