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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미군정기의 국가건설

3. 재정, 조세기구

361)이경남, 『경향신문』,1987년 1월 28일「청년운동 반세기: (12)서북청년회」.

계 11,80

0 100 19.445 100 35,119 100 표II-12) 미군정기 세출입 구조(1946-1948년)(단위: 백만 원)362)

전술한바 와 같이 제3세계 신생 취약국가들의 경우 국가의 생산과 자본주의 발전을 담당할 부르주아 계급의 형성이 늦어져 국가가 직접 생산 주체로 나서서 스스로 필요한 물적 자원을 충당했다고 지적한 바 있는데 1946-1948년 미군정기의 세출입 구조를 살펴보면 이러한 설명이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1946-48년 미군정의 세출과 세입 품목 중 제일 많은 품목을 차지하고 있는 분야는 관업비로 타 분야에 비해서도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에 비해 과대성장국가론과 수정주의에서 역할을 강조하는 사법경 찰비와 국방비는 행정비 에도 뒤쳐지는 3번째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 에 불과하며 어떤 경우에는 산업비에 뒤쳐지기도 했다. 위의 표II-12)를 통해 알 수 있듯이 1947년 7월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현실로 다가옴에 따라 국방비가 거의 2배로 증가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의 물적, 경제적 자원부족으로 인해 사법, 경찰비의 전 체 비율은 크게 늘어나지 않았고 이를 국가의 관심과 능력부족 탓으로 해 석한 우익 청년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치안업무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제의 수탈로 국가경제가 피폐해지고 극도의 인플레 상태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의 생산과 소비를 담당할 인력과 계층이 전무한 상태가 연출되자 국가가 직접 생산과 소비의 가장 큰 주체로 나서 서 경제를 떠맡았던 것이다. 서주석은 이를 조세수입이 극히 저조했던 시 기에 국가건설의 부담이 주로 조세외적 수단인 통화 증발을 통한 인플레, 관업수입, 원조 등을 통해 부과된 것으로 해석하여 단지 과도적 특수상황 에서 발생한 특이한 사항 정도로 평가하고 있지만,363) 사실 이는 대한민국

362)산업은행 조사부, 『한국산업 경제 10년사』, (서울: 산업은행, 1955) pp. 359-360.

363)서주석, 2008. pp. 260.

1945년 1946년 1947년 1948년 원조수입 4,493천

달러

49,496천 달러

199,899천 달러

175,592천 달러 총수입 4,493천

달러

60,721천 달러

232,615천 달러

208,003천 달러 총 수출입 4,493천

달러

64,262천 달러

259,419천 달러

230,263천 달러 원조수입/

총수입 100% 81.5% 85.9% 84.4%

원조수입/

총 수출입 100% 77% 77.1% 76.3%

과 같은 취약국가 건설의 초기 단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평가하는 것이 보다 적당하다.

그리고, 이는 당시 미국의 대한정책이라는 국제정치적 요소와 각종 자원들의 부족 속에서 근대국가를 건설했었던 신생국가 한국의 상황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함께 고려할 때 이해될 수 있다. 여러 번 전술한 것처럼 일제가 물러간 이후 이를 경제와 산업이 철저히 붕괴되었지만 이를 떠맡 을 부르주아가 없는 한국의 형편 상 당시 한국의 재정은 전적으로 미국의 대외 경제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다음의 표는 총수출입중 미 국의 대외원조 수입의 비중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1945년도 의 경우 원조수입은 총수입과 총 수출입 중 100%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 수치는 1946년 81.5%, 77%→1947년 85.9%, 77.1%→1948년 84.4%, 76.3%를 기록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표II-13) 총수출입 중 원조수입의 비중364)

1945년-48년의 미군정 기간 동안 제공된 미국의 대한경제원조는 미 육군부를 통해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까지 총 409, 394천 달러 가 투입된 점령지역 행정구호 원조(GARIOA: Government and Relief in

364)재정금융 삼십 년 사 편찬위원회 편,『재정금융 삼 십 년사』, (서울: 재정금융 삼 십 년사 편찬위원회 편, 1978), pp. 40.

Occupied Area)365)와 1947년 미국 해외청산위원회(OFLC: Office of the Foreign Liquidation Commissioner) 에 의해 차관 형식으로 의료품, 피복 등을 중심으로 총 24,928천 달러 규모로 제공된 유상원조였다.366) 그 중 에서도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던 점령지역 행정구호 원조(GARIOA)는 제2 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점령했던 모든 지역에서 미국이 기아, 질병, 사회 불안 등을 방지하여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마련 된 것으로 한 국에는 1945년 9월부터 제공되었다. 하지만, 이미 살펴본 것처럼 미군정의 목표가 소련과의 협상을 통한 조속한 철군에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경제부 흥보다는 식료품, 의복류, 의료품 등의 긴급 구호품 제공을 통해 당장의 급 선무였던 한국인들의 식량결핍과 질병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사회를 안정시 키는 데 초점이 맞추어질 수 밖에 없었다.367)

이렇게 소련과의 협상을 통해 조기 철군을 우선적인 목표로 설정한 미국의 대한정책으로 인해 미군정의 경제정책 역시 장기적인 경제재건과 자립경제 발전에 초점이 맞추어지기 보다는 임시방편으로 운영되었기 때문 에 문제가 더욱 심화되었다. 실제로도 미군정이 미국 정부로부터 받은 경 제, 재정 운용 정책은 1945년 10월17일에 받은 것이 전부였지만 이 역시 도 전혀 구체적이지 않고 애매모호하기만 했다.368)이러한 미군정의 경제정 책과 재정조세 정책은 세출과 재정적자의 중가, 인플레의 만연으로 표현할 수 있다. 먼저, 일제시기 1인당 국민소득이 1/6에 불과했던 조선의 1인당 조세 부담액은 일본에 비해 거의 뒤지지 않았다.369) 이는 조선인에 대한 일본의 가혹한 수취와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이 경제와 생산 활동을 독점하 면서 조세수입의 상당부분을 책임지고 있었음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일제의 패망과 함께 이들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패전의 경제 피

365)한국은행 조사부,『경제통계연보』(서울: 한국은행, 1962), : 홍성유,『한국경제와 미국원조』, (서울: 박 영사, 1962), pp. 92.

366)산업은행,『한국산업경제 10년사』, (서울: 산업은행, 1955) , pp. 545-547.

367)홍성유, 1962, pp. 19, pp. 48.

368)FRUS 1945, VI ,1945년 10월 17일. pp. 1073-1091.

369)김명윤,『한국재정의 구조』, (서울: 고려대학교 출판부, 1971), pp. 29-33.

해를 입은 한국인들은 이들을 대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가의 조세수입은 크게 줄어들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군정장관과 민정장관 밑에 중앙경제위원회와 재무부장, 차장 을 두고 재무부장과 차장 휘하의 이재국, 사계국, 국고국, 전매국, 회계국 을 국가 재정기구로 두고 있었던 미군정370)이 미국식 세제제도를 도입하 여 여러 차례 세제를 개편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말기 20%수준이었던 조 세수입은 미군정 기간 동안 6.1%(1946년)와 14.4%(1948년)에 머물렀다.

당연히 국가는 이를 보충하기 위해서 세출을 늘릴 수 밖에 없었고 이는 막 대한 재정적자와 인플레의 만연으로 귀결되었다. 위의 표를 보면 미군정기 3년 동안 세출은 1백18억 원에서 3백51억여 원으로 무려 3배 가까이 늘 어났다. 이러한 세출의 증가는 재정적자로 이어져 재정적자 역시 9억9천6 백8십만 원→78억 4천8백만 원→1백62억 3천 5백만 원으로 폭증하고 있 다. 그리고, 이는 인플레 만연으로 귀결되어 당시의 물가 상승률은 125.5%→228.3%→372%로 계속 증가하여 연평균 330%이상의 초 인플레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371)

그러나, 1947년 7월에 제2차 미, 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미국 의 경제정책 역시 근본적인 전환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제2차 미, 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직후인 1947년 7월24일에 미군정에게 남한이 소련이 지원하는 북한정부에 대항하여 자립경제를 건설할 수 있도록 한국 의 경제의 재건과 건전한 발전을 목표로 하는 지침이 전달되었다.372) 또, 1948년 9월에 방한한 윌리엄 드레이퍼(William Draper) 사절단은 남한 단 독정부 수립 가능성을 전제로 하여 미국의 대한경제원조 정책을 마련하여 1947년 11월에 국제연합 감시 하의 남한 총선거 결정이 이루어진 후에 남 한의 정치, 경제적 안정을 위해 경제원조가 확대되어야 함을 지적하는 보 고서를 제출했다.

370)김운태,1992, pp. 250.

371)서주석, 2008. pp. 255 각주 15번).

372)FRUS 1947, VI 1947년 7월 24일, pp. 714-731.

하지만, 여전히 국제연합에 남한 단독정부 수립 안을 상정하여 소련 과의 마지막 협상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었던 미 국무부는 미군정의 경제전문가들이 한국의 장기적인 경제 부흥을 목표로 건의한 경제원조계획 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였다.373)그리고, 이러한 입장은 1949년 중국대 륙이 공산화 될 때 까지 변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트루먼 독트린의 방침 은 유럽 등에 비해 전략적 중요성이 떨어지는 한국에서 남한이 북한에 대 항하여 생존력 있는 정부를 구성함으로써 미군이 자연스럽고 품위 있게 철 수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데 있었다. 즉, 최소한의 경제적 지원이 정 치, 이념상의 효과로 이어짐으로써 미국의 막대한 군사력의 투입을 피하고 자 하는 것이 한국에서의 트루먼 독트린의 방침이었다.

1948년 4월2일에 보고된 미국 NSC 8(National Security Council:

국가안전보장회의) 보고서(Report)는 이러한 방침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주 고 있다. 이 보고서는 소련이 대 한국정책의 주요 목표가 궁극적으로 소련 의 한반도 지배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인력과 자금의 한계를 고려 하여 미군을 철수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면서도 미군 철수 후 초래될지 모르는 남한의 경제적 붕괴를 방지하기 위해 미국의 경제 원조를 확대하여 실행 가능한 한계 내에서 남한의 정부를 지원하기로 결정하고 있었다.374) 그런데, 이미 맥도널드375)와 미국 육군부 관리들이 인정하고 있었 던 것처럼 당시 미국은 부족한 인적자원과 물적 자원을 한국에 투입하여 큰 곤란을 겪고 있었다.376) 실제로 당시 미군정의 점령비용을 60년간 국

373)국회도서관 입법조사국,『선진제국의 대 아시아 경제협력』,(서울: 국회도서관, 1964), pp. 433-471.

374)National Security Council Report 8 3b, 2, April, 1948, DNSA(Declassified National Security Archive), ; FRUS 1948, VI, 1948년 4월2일, pp.1163-1169.

375)맥도널드는 미군정 기간 동안의 자원부족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즉, 그에 따르면 미국이 소련과 한반 도 통치에 대한 합의에 도달할 때 까지 적극적인 프로그램을 수행하려 하지 않아 미국이 자원을 배치할 때 한국의 우선순위가 낮았으므로 한국의 국가형성 기 동안 미국은 자원부족과 정책 및 계획 부족으로 인해 효과적으로 활동할 수 가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맥도널드. 2001. pp 28, pp. 233.

376)이미 전술한 것처럼 1947년 1월 초에 미 육군성 관리들은 주한미군의 인력과 물자부족 문제가 너무나 심각하여 이 상태로는 남한을 계속 점령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FRUS 1947, VI, 1947년 1월 27일「Vincent to Marshall」, pp.60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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