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미군정기의 국가건설
1. 경찰
전술한바와 같이 1947년 7월 제2차 미, 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기 전 까지 소련과의 협상을 통한 조속한 철수에만 집착했던 미군정은 최소한 의 치안만을 유지하려 하였다. 한편, 국가가 생산과 소비 모두를 책임지기 위해 지출을 높이는 과정에서 관업비와 행정비의 비중이 가장 높았고 국가 예산 중에서 경찰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낮을 수 밖에 없었다.
이는 미군정기 지출된 경찰비의 액수와 규모를 도표화 한 다음의 자료 표 II-6)을 통해서도 입증된다. 9월과 10월에 전국적인 파업과 시위가 전개되 던 1946년의 경찰비는 3월부터 시작된 주한미군 철수로 인해 증가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액과 비율 면에서 1945년도에 비해 감소했었 고,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결렬로 인해 남한 단독정부가 현실화 된 1947 과 1948년 역시 금액은 늘어났지만 전체 국가예산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 율은 오히려 1945년보다 감소하고 있었다.
연도 1945년 1946년 1947년 1948년 일반재정 1,868,4
백만원
13,365,2 백만원
19,235.0 백만원
15,263,2 백만원 경찰
비
금액 202.5백 만원
147.0백만 원
2,016.5백 만원
1,269,1백 만원 비율 10.8% 1.1% 10.5% 8.3%
표II-6)미군정기의 경찰비277)
그런데, 커밍스는 남한에 소수 지주계급의 앞잡이로 활동한 경찰국 가가 들어섰다고 주장하였고,278) 서중석 역시 미군정이 경찰을 최대한 활 용하여 중앙집권화를 한층 강화했다고 지적한다.279) 이러한 주장에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다른 국가기구들과 달리 특별한 치안의 기술이 요구되는 경찰의 경우 상위관료에 부일 세력이 배제되고 하위관료에 대거 배치되었던 다른 국가기구들과 반대로 상위간부에 부일 세력이 등용되고 대다수 하위경찰 직들을 일제 시기 경찰 경험이 없었던 인적자원들이 차지 하고 있었다. 실제로, 경찰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경위 이상 치안감 이하 1,173명의 경찰 중 일제경찰 경력자의 비율이 82%에 이르렀고 미군정이 1945년 10월 초 임명한 서울시 내 10개 경찰서장 전원이 일본 경찰이나 관료를 지낸 바 있었으며 경기도 내 경찰 서장들도 절반 이상이 일본경찰 출신인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관선입법의원으로 내무경찰위원장이기도 했 던 원세훈은 1947년 5월 당시에도 서울시의 8구청장이나 경찰서장 자리는 대개 일본 시대의 관리가 차지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280)이렇게 미군정이 일제 시기의 한인 경찰관 등을 중심으로 간부급 경찰력을 복원했기 때문에 경찰은 한국민들 에게 증오와 원망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277)최광,「미군정하의 재정제도와 재정정책」,『재정학연구3』, (한국재정학회, 1989),pp. 119-160.
278)Cumings, 2005. pp. 284-289.
279)서중석,『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한국 근현대사 100년의 재조명』,(서울: 돌베개, 2011).
280)『서울신문』,1947년 5월11일「입법의원, 민족반역자 처단범위 보선법처리 격론」.
그렇다면, 일제 부역 경험이 있는 간부급 경찰들은 친일파 청산론에 도 불구하고 어떻게 살아남았고 이들은 과연 수정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미 군정기 경찰국가 수립에 기여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영향력을 형성하고 있 었던 것일까?
첫째, 해방초기의 정국에서 친일파 청산론이 좌익281)이나 임시정부 세력282) 뿐만 아니라 이승만283)과 한국 민주당284)을 비롯한 거의 모든 정 치 단체에서 제기되고 있었다. 따라서, 일제 부역 경찰들도 정계나 사회, 문화계, 경제계의 일제 부역세력들과 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 행동할 수 밖 에 없었고285) 이들 대다수가 출근을 기피하여 떼 지어 도망쳤으므로 미군 정은 부일 경험이 없는 한인 경찰들의 신규 임용을 서두르게 된다.
둘째, 미군정은 경찰력을 복원하는 기간 동안에 초대 경기도 경찰청 장과 전라도 경찰국장 등의 경찰 최고 수뇌부의 자리에 광복군에서 활동했 었던 중국군 출신자들을 임명하려고 하였다. 초창기 경찰수립과정에서 미 군정은 한국인 임명이 가능한 경찰 최고위직들에 부일 경찰들을 임명하는 대신 군과 여러 면에서 흡사한 군 경험이 있는 자들을 기용하려고 하였으 며 특히 민족주의적 대의명분이 있는 광복군 출신자들을 임명하려고 하였 다.
미군정은 조병옥을 경무국장에 임명하기 이전에 중국군 출신의 김 응조를 경무국장에 임명할 것을 고려하여 경무국장 리머 아고(Reamer Argo) 대령의 자문역으로 위촉하였다. 1945년 10월 초 남원에서 인민위 원회 등의 좌익세력이 치안을 어지럽히자 다급해진 미군정은 김응조를 초
281)『매일신보』,1945년 10월14일「인공 중앙인민위원회, 아놀드의 발표에 대한 성명 발표」, ;『자유신 문』,1945년 10월31일「박헌영, 민족통전결성에 관한 조공의 견해 피력」.
282)『서울신문』,1945년 12월8일「신익희, 국기 친일파 국내분열 등에 관해 기자회견」, ;『자유신 문』,1945년 12월8일「임정 신익희, 38선 문제 소신 피력」.
283)『매일신보』,1945년 11월6일「이승만, 독촉 결의서에 대한 조공과의 차이점 등에 관해 기자회견」.
284)『전단』,1945년 11월1일「한민당, ‘조선지식계급에게 訴함’이란 담화 발표」.
285)당시 한 단체의 민족반역자 규정 발표에 따르면 8.15이전에 경부급 이상의 경관과 고등경찰에 종사하는 형사급 이상으로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자를 무조건 민족 반역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중앙신 문』,1945년 12월10일「대한독립협회, 민족 반역자 규정 발표」.
대 전라도 경찰청장에 임명하여 남원으로 파견하였다.286) 아울러, 이승만 이 추천한 중국 화북 군 출신 조개옥을 초대 경기도 경찰청장으로 임명하 였다.
하지만, 계급과 경력이 과장된 엉터리 장군으로 드러난 조개옥은 능 력부족과 비상식적인 강압적인 태도로 10여일 만에 스스로 물러날 수 밖 에 없었고287) 기본적 군사상식 마저 결여하고 있었던 김응조 역시 신탁 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사직하였다.288) 그리고, 근본적인 능력이 부족했었던 이들은 나중에 군대에 입대해 자신들이 경찰에서 부리던 일본 군 출신 장교들의 수하로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1945년 10월20 일에 조병옥을 한국인 경찰 책임자로 영입하여 1946년 1월4일 정식으로 경찰국장으로 임명하는 한편 1946년 1월16일에는 장택상을 수도경찰청장 으로 임명하였다.289)
셋째, 전술한 것처럼 9월18일 경부터 황급히 일본인 관리들을 면직 시킨 미군정은 경찰분야 역시 문맹이 아니고 신체에 아무런 이상이 없는 지원자들 중 간단한 채용시험을 통과한 자들을 선발하여 3일-1주일 간 경 찰관 강습소에서 단기교육을 실시한 후 각 경찰서로 급하게 배치하였다.
10월 15일부터는 경찰관 강습소의 명칭을 조선경찰학교로 변경하고 합격 자들에게 4주 간의 교육을 실시하였다.290) 이에 따라, 미군정에 의해 한 달간의 경찰훈련을 받고 졸업한 430명의 조선경찰 학교 제2기생들을 시작 으로291) 점차 미군정이 선발하고 훈련시킨 신규 경찰 인력들이 임용되어 일본인 경찰관들과 한인 경찰관들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286)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국방사 1: (1945.8.15-1950.6.25)』, (서울: 국방부, 1981), pp. 264.
287)『경향신문』,1977년 3월18일「비화 한 세대 (91) 군정경찰〔22〕조개옥 천하」, 『경향신문』,1977년 3월21일「비화 한 세대 (92) 군정경찰〔23〕조개옥의 퇴진」,『경향신문』, 1977년 3월22일「비화 한 세대 (93) 군정경찰〔24〕조개옥의 이력」,『경향신문』,1977년 3월23일「비화 한 세대 (94) 군정경찰
〔25〕 이승만과 조개옥」.
288)「제4부 백남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편, 2001. pp. 181.
289)HUSAFIK,『주한 미군사』제3권, 1988. pp. 280.
290)서울신문사, 1979, pp. 50-70.
291)『동아일보』,1945년 12월23일「조선경찰학교 제2기생 졸업식 거행 예정」.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 따라 초기 미군정 경찰의 행보를 보면 수정 주의가 조성한 선입견과는 달리 친일 경찰 제거와 경찰개혁에 적극적인 모 습을 보이는 사례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미군정이 1947년 6월에 작성한 집계에 따르면 당시 전체 경찰의 80%이상이 해방 이전에는 경찰에 재직하지 않았다. 즉, 경무부 소속 경찰관의 83%, 수도경찰청의 83%, 각 관구경찰청의 77-88%, 철도관구경찰청의 80%가 일본 경찰 경력이 없는 사람들이었다.292) 한편, 경무과장 조병옥은 1945년 10월26일 군정청 출입 기자단과의 회견에서 조선민족의 의사를 말살시켰거나 인권을 유린한 자 혹은 직책 이상의 권리를 남용한 경관은 점차로 숙청할 것임을 밝혔고,293) 경기도 경찰부 역시 1946년 2월13일에 악질 친일경찰들을 구속하였 다.294) 일제 시대의 분위기를 일신하기 위한 조치들 역시 취해져 일제 경 찰관들의 상징이었던 패검대신 곤봉을 휴대케 하였고,295) 경찰관의 복장과 명칭을 바꾸었다.296) 또, 경찰관의 직권남용을 적발하기 위해 수도경찰청 내에 불심검문제도를 창설하였다.297)
넷째, 그러나, 미군정이 서둘러 충원한 신규 경찰관들의 약 85%가 경찰 업무에 대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일처리가 비능률적이었다.
따라서, 미군정은 1945년 12월 19일부터 경찰관 채용요건을 중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보유한 사람들로 상향 조정했다.298) 하지만, 소련과의 협상 을 통해 조속한 미군 철수를 바랬던 미군정이 근대국가의 기본 과제인 폭 력을 독점하고 치안을 유지하는 데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각종 좌, 우익 단 체들에 의한 테러들이 난무하고 민생 치안 문제 역시 심각한 수준에 이르
292)CINCFE, SKIG Activities No. 21, June 1947, 이길상,『미군정활동보고서』제3권, pp.31-32. ; 서주 석, 2008, pp. 219 각주 21). 서주석은 USAMGIK로 표기하였으나 USAMGIK는 SKIG Activities NO.
23부터 시작하고 있으므로 이는 Commander in Chief, Far East(CINCFE)의 오기임.
293)『자유신문』,1945년 10월27일「경무과장 조병옥, 경찰행정 일신하여 불량경관 숙청언명」.
294)『동아일보』,1946년 2월 13일「경기도 경찰 부, 악질 친일경찰 구속」.
295)『매일신보』,1945년 11월8일「경찰관 패검 대신 곤봉 휴대」.
296)『동아일보』,1946년 1월10일「경찰의 복장과 직명 바꿈」.
297)『서울신문』,1946년 11월7일「수도경찰청, 경찰관 직권남용 적발 목적의 불심검문제도 창설」.
298)HUSAFIK,『주한 미군사』제3권, 1988. pp. 289-2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