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내란의 시작(1946년-1948년)
1. 노동쟁의와 파업
전술한바와 같이 1947년 7월 제2차 미, 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기 전 까지 미군정이 적극적인 국가 건설에 나서지 않음으로써 경제사정이 점
392)박종효, 2010,「소련이 UN 총회에 상정한 조선 문제 결의안: 1947년 10월28일: 소련 대표단에 의해 UN총회 제1위원회에 상정한 “남, 북조선 인민대표 초청결의안”(Dok-A/C 1/229」, 1947년 10월29일 소련 대표단에 의해 UN제1위원회에 상정한 “남,북 조선에서 동시 미, 소군 철수 결의안”(Dok-A/C 1/232)」 pp. 264.
1945 1946 1947 1948 1949 자유시장
미가 10.78 65.67 111.92 176.52 191.08 정부수매
가 1.32 23.84 26.31 49.33 106.88 정부수매
가/자유 12 36 23 28 55
점 어려워졌고 노동자와 농민들의 불만도 커졌다. 실제로 1947년 1월21일 소련군 연해주 군관구 사령부에서 소련 외무성에 보낸 정세 보고서에서도 지난 2년간 미군정이 남조선에서 경제, 정치 어느 문제 하나도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미군정 하에서의 인민의 생활이 과거 일제와 비교해 더욱 어려 운 실정이라고 지적하고 있었다.393)
특히, 당시 한국민들의 가장 큰 불만은 로빈슨이 지적한 것처럼 식 량과 농업문제였다. 먼저 해외로부터 귀국한 사람들과 월남민들로 인한 인 구급증으로 인해 더 많은 식량생산이 요구되었다. 이를 위해서 북한지역에 서 생산되던 화학비료와 농업 물품들이 필요했지만 소련과 협상이 결렬됨 으로써 충분한 공급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 미군정은 당시 한국 농경지 의 12.5%를 차지하고 있었던 가장 비옥한 귀속 농경지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방치하였다. 즉, 미군정이 제2차 미, 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된 1947년 7월까지 생산력이 높은 농경지에 대해 적극적인 불하에 나서지 않음으로 써 식량문제가 악화되었다.
미군정은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의 농부들로부터 수확물을 수집하려고 하였지만 미군정이 책정된 가격이 지나치게 낮았기 때문에 농 부들은 자신들의 수확물을 암시장에 내다팔려고 하였다. 다음의 표II-2)를 살펴보면 미군정이 제시한 가격은 자유시장가격의 절반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20-30%대에 머물고 있었다.
393)박종효 편역, 2010,「1947년 1월21일 연해주 군관구 사령부에서 외무성에 보낸 남, 북조선의 정세 보 고서: 남조선 정세」, pp. 238.
시장미가
표III-2) 1945-49년 자유시장 미가와 정부수매가 비교394)
미군정은 유인책으로 미국으로부터 수입된 화학비료와 곡물들과의 교환을 농민들에게 제시했지만 소용이 없자 국가적 차원에서 경찰과 행정 기구를 총 동원하여 곡물 수집에 나섰다.395) 그 결과 당초 1945년과 46년 각각 목표량의 5.3%와 48%에 불과했던 곡물 수집 량이 82.9%까지 상승 하게 되는 큰 성과를 거두게 된다.396)하지만, 전술한바 와 같이 미국의 행 정력이 충분히 수립되지 못한 시기였기 때문에 지주와 경찰 관료들 중심으 로 구성된 지역위원회에 의해 행해진 곡물 수집은 강제력을 수반하여 농민 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고 이는 이후 1946년 9월의 대규모 파업 과 10월 1일 대구사건의 가장 큰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게 된다. 근본적인 문제는 전술한 것처럼 충분한 국가운영 자금이 투입될 수 없었던 것에 있 었지만 계획대로 1946년부터 주한미군의 철수를 감행했던 미국이 이에 상 응하는 한국인 요원들을 충분히 보충하지 않았으므로 미군정은 기존의 한 국인 요원들에게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전술한 바와 같이 국가 예산 중 에 행정비와 사법 경찰비에 할애된 비중이 작았기 때문에 한국인 관리들과 경찰에게 지급되는 봉급 역 시 적었다. 물론, 이들에게는 특별배급이 실시되어 부족한 봉급을 일부 보 충해주고 있었지만397) 이들 역시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특히 경제가 어 려웠던 1946년과 47년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경찰의 경우 봉급보다 는 이른바 ‘자발적 기부’에 생활을 의존하였는데, 실제로 핸더슨이 지적한 것처럼 경찰의 금품강요는 1946년과 1947년에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로 빈슨 역시 미군정에 고용된 조선인들에게 지불된 봉급으로는 최소한의 생
394)농수산부 편,『한국 농정사』, (서울: 농수산부, 1978).
395)로빈슨. 1988. pp. 242-244.
396)조선은행조사부,『조선경제연보』, (서울: 조선은행, 1948), I-242, I-243, I-248.
397)『조선일보』,1944년 3월30일. ; 『동아일보』,1946년 4월7일.
활비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공무원들이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위 해서는 부정한 소득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지적한다.
전술한 랜드 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경찰에게 1인당 국민 소득의 2-3배를 월급으로 지불할 것을 권고하고 있었지만 1945년 9월 당시 한국 의 경찰에게 봉급으로 지불된 금액은 당시 국민평균 소득의 2-3배인 80-120달러가 아니라 3달러에 불과했다. 이에 비해 1946년 1월 경 소련 군정을 위해 일했던 번역원의 월급은 200루블 정도였는데,398) 1949년 3 월 경 스탈린의 환산에 따르면 1달러는 5루블로 계산될 수 있었으므로399) 약 40달러의 월급을 받고 있었다. 또, 1950년 2월 경 소련 고등군사학교 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북한의 위관 급 장교생도들의 경우 소위가 1,300 루블 정도를 받는 것이 타당하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이 역시 약 260달러 정도로 환산될 수 있다.400) 결국, 이러한 자료들은 북한에 비해서 남한의 국가건설자금이 얼마나 부족 했었는지와 함께 소련과 미국의 관심의 차이 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군정이 고용한 최말단의 공무원들과 경찰에 이르기 까지 독 직과 부패가 횡행했다. 특히, 경찰들이 부정을 저지르는 주 수입원 중 하나 는 이들이 암시장에서 거래하는 쌀과 미국산 상품들이었다.401)그런데, 이 들 상품들이 당시 경제난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민중들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물품들이었기 때문에 경찰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질 수 밖에 없었 다. 이렇게, 거의 모든 관공서와 사무실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하였고402)그 와 함께 민중들의 미군정에 대한 혐오감 역시 증폭되었다.403)
특히, 행정이나 치안을 담당할 수 있는 주한미군의 철수가 시작되어
398)박종효, 2010,「1946년 1월26일 소련 외무성 극동2과장 게네날오프가 외무성 인사과에 보낸 문서」, pp. 191.
399)박종효, 2010,「1949년 3월 5일 스딸린과 김일성을 단장으로 한 조선정부 대표단과의 회담」,pp. 311.
400)박종효, 2010,「1950년 2월 2일 소련 외무성에서 소련 주재 북조선 대사관에 보낸 문서」, pp. 466.
401)로빈슨. 1988. pp. 140-141.
402)핸더슨, 2000. pp. 223.
403)핸더슨, 2000. pp. 229.
원인(요구조건)
건수 노동자 수
참가인 원수
임금 인상
공장 폐쇄 반대
해 고 반 대
노동 시간 단축
감독 자의 배척
조 합 승 인
휴일 임금 지불
기 타 19
45 년
1 308 308 19
46 년
170 2,295 57,434 107 1 28 1 16 4 4 9 19
47 년
134 53,402 35,210 16 35 1 4 1 2 75 적은 수의 한국인 인력에 대한 의존도가 증가함으로써 대중들의 미군정에 대한 혐오감이 절정에 이르게 되었던 1946-47년 시기에 노동쟁의의 건 수가 급증하였다. 다음의 표는 미군정 시기 노동쟁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 는데, 이에 따르면 노동쟁의는 1946년에 절정에 이르렀고 이때는 임금인 상이 가장 큰 원인이었으나 1947년에는 해고반대가 가장 큰 원인으로 작 용하고 있었다.
표III-3)미군정기 노동쟁의상황404)
한편, 당시 한국 인구 중 가장 비율을 차지하고 있던 농민들 역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미군정기의 유형별 소요 건수를 집계한 다음의 표III-4)에 따르면 해방직후인 1945년의 소요가 일본인 친일파나 경찰서, 관공서의 관리들 습격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1946년 이후 부터는 점차 양 곡수집반대와 식량요구 등의 생활문제로 전환되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설명과 마찬가지로 미군의 대거 철수가 이루어졌음에도 충분한 한국인 요
404)조선은행조사부 1948, pp. 158.
1945 1946 1947 1948 소계
상 반 기
하 반 기
소 계
상 반 기
하 반 기
소 계
상 반 기
하 반 기
소 계
총 계
농 업 관 계
양곡수
집반대 2 2 8 10 9 37 46 4 7 11 69 식량요
구 5 5 14 10 24 1 1 2 31
토지개
혁요구 2 1 3 3
지주, 소작인
분쟁
1 1 1
소계 7 17 18 35 12 39 51 4 7 11 104 경찰서습
격 34 4 172 176 25 8 33 13 13 256 일본인
친일파공 격
69 2 2 71
관공서,관
리공격 11 7 7 3 1 4 22
좌 우 시 위 충 돌
좌익에
의한 12 3 25 28 14 5 19 1 1 60 우익에
의한 1 2 1 3 17 2 19 23
좌,우
충돌 3 3 6 9 2 4 6 18
군정,미군, 4 1 5 6 1 1 11
원들의 충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약 1만여 명의 결원이 발생하여 국정운영 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었던 1946년 하반기-1947년 상반기에 소요가 집중 되었다.
기간 건수 참가 인원수
피해
피살 피검 해고
1945.8-1946.8 1,299 266,998 1,090 2,331 1946.9-1946.10(총파업) 472 173,404 25 4,780 7,767 1946.11-1947.2 67 24,434 361 1.553 1947.3(총파업) 550 162,050 1,646 3,883 군속공격
지역,행정
장악기도 6 3 3 9
찬탁시위 1 1 1 2
기타,불명 8 2 11 13 2 3 5 26
총계 156 32 248 280 76 63 13
9 20 7 27 602 표III-4)미군정기 유형별 소요건수)405)
좌익은 이러한 사정을 파고들었다. 실제로, 1945년 12월에 결성된 좌익계열의 조선노동전국평의회(朝鮮勞動組合全國評議會)가 관계된 다음의 파업통계를 보면 파업의 건수와 참가 인원수가 미군정 인원의 대거 철수로 인해 국정 운영에 공백이 발생했던 1946년 9월부터 1947년 3월에 가장 집중되었다. 제 2차 미, 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어 미군정이 본격적인 국 가건설에 착수한 1947년 7월부터는 파업의 건수와 파업 참여인원이 급격 히 감소하다가 북한과 공산당 세력의 지령에 의해 본격적인 투쟁이 발생했 던 1948년 2월에 파업건수는 다시 급증하였지만 파업 인원은 1946년 9월 -1947년 3월 까지 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405)본 연구는 다음의 자료들을 재검토하여 잘못 기입한 1946년도 농업관계의 소계(34→35)와 1946년도 관공서, 관리 공격 소계(11→7)을 바로 잡아서 표를 작성했다.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1-7 권(주한미군정보일지). 1988-1989. HQ, USAFIK G-2 weekly summary 1-5권(주한미군주간정보요 약),1990.; 이혜숙, 2008. pp. 469.
1947.4-1947.7 258 28,908 616 750 1947.8-1948.1 231 26,648 632 1,090 1948.2.7(총파업) 374 80,471 미상 1,607 1,216 계 3,371 722,913 25 10,741 18,599 표III-5)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관계 파업통계406)
2. 1946년 9월과 10월의 좌익의 봉기
1946년 5월에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이 발생하자 미군정은 남조선 로동당을 불법화하고 이에 연루된 인사들에 대한 체포령을 내린다. 그러 자, 박헌영 계열의 공산당 세력들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는 미군정에 대항하기 위해 소련의 자금지원 하에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1946년 9월에 철도, 운송업 노동자들이 중심이 된 전국적인 총파업을 전개한다. 표III-6) 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처럼 좌익에 의한 우익세력의 공격 건수는 1945년 과 46년 각각 12건과 28건을 기록하여 1건과 3건에 그친 우익의 건수를 훨씬 능가하고 있었다. 이렇게, 폭력시위 분야에서 초기의 유력한 지배자 들이었던 공산주의자들은 1946년 까지 폭력의 소유에 있어서도 우파에게 우세를 보이고 있었다.
1948년 9월23일 부산 철도노동자 7,000명의 파업을 신호로 시작된 파업이 시작되었다. 9월24일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소속의 남조선 철도노동동맹 소속 노동자 4만 명이 고용주인 미 군정청 운수국을 상대로 쌀 배급 증가와 점심제공 임금 인상과 감원중지 등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나섰고 이는 당시 악화일로의 인플레이션 증가와 식량 부족으로 고통 받고 있던 많은 노동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다음날인 9월25일 철도 노동 자들이 파업에 돌입함으로써 철도수송이 곧 마비되었고 같은 날에는 출판
406)조선경제사,『조선경제요람』,(서울: 조선경제사, 1947), pp. 1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