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시간은 무한하지만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다. 끊임없이 순환하 는 자연과 달리, 한번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인간사에 대한 단선적인 시 간 인식은 유한한 생명을 지닌 인간의 비애를 불러일으킨다. 주이준의 사 또한 그 에게 주어진 시간의 유한성에서 비롯된 비애의 감정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것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무력한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이고 보편 적인 고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나그네의 정서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나그네[客]’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동을 끝내는 것, 즉 ‘고향 으로 돌아가 정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나그네가 이동을 거듭하여 최종적으 로 도착하게 될 종착점은 그가 본래 있어야할 곳, 바로 ‘고향’이다. 이곳으로 돌아
와야 나그네는 ‘객’의 신세에서 벗어나 마침내 길고 긴 ‘이동’을 끝낼 수 있다. 문제는 나그네의 여정이 언제 끝날지는 불분명한데 반해 인간사의 시간은 유한 하다는 점이며, 이 때문에 ‘객’은 시간의 흐름에 대해 공포를 갖게 된다. 자연과 대 비되는 인간 생의 유한함에서 비롯된 고민이라는 점에서 이는 앞에서 보았던 懷古 詞나 사대부적 閑愁를 표출한 사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전의 것들이 인 간의 영역에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及時行樂의 추구나 인간 존 재에 대한 철학적 고민으로 이어진 것과 달리 行旅詞는 ‘귀향’이라는 목표가 뚜렷 하게 존재하며, 行旅詞에서 나타나는 고뇌란 이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다. ‘客愁’가 해소할 수 없는 차원의 슬픔 이나 허무로 넘어가지는 않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적인 시간은 계속되지만 유한한 생의 인간에게 허락된 시간은 극히 일부이다. 이 때문에 늦기 전에 여정의 종착점인 고향에 도착해야하는 ‘객’의 입장 에서 빠른 시간의 흐름은 근심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객’은 다른 이들 보다 민감하게 시간의 흐름에 반응할 수밖에 없다. 특히 시간의 흐름에 대한 민감 한 포착은 시간과 시간 사이에 위치하는 ‘경계적 시간’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1) 시간 흐름의 민감한 포착
臨江仙365)
藥甲齊開更斂, 작약 잎 일제히 열렸다 또 오므려지고 柳綿欲起還沉. 버들개지는 일어나려 하다 또 가라앉는데
一春閒望費愁吟. 봄 내내 한가로이 바라보며 근심스레 읊느라 고생 하였네.
酒旗風著力, 술집 깃발에는 바람이 온 힘을 다하고 花事雨驚心. 꽃에 관한 일은 비가 마음을 놀라게 하네.
365) ≪曝書亭集≫ 卷25 詞(2)에 수록.(朱彝尊 撰, ≪曝書亭集≫, p.316.)
巷窄猧兒不吠, 좁은 골목에는 개가 짖지 않고 樓高燕子難尋. 높은 누대에는 제비 찾기 어려운데
薰爐小篆疊重衾. 향긋한 화로의 돌아드는 연기 겹겹의 이불에 쌓인다. 綠陰猶未滿, 녹음은 아직 가득하지 않은데
庭院已深深. 정원은 이미 깊고 깊어졌구나.
이 작품은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자연의 변화를 민감하게 포착하 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 속 화자는 작약 잎이 열리려고 하고 버들개지가 일어나려 하며, 녹음이 아직 가득하지는 않지만 어느새 정원은 짙어진, 봄과 여름의 ‘경계’ 의 시간에서 그 미묘한 변화를 눈치 채고 있으며 비가 내려 꽃이 질까 걱정하는 등, 계절의 변화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에 대한 예민 한 포착은 ‘客’으로서 느끼는 작자 자신의 고뇌와 종종 연결된다.
采桑子⋅雲州書感366) 운주에서 느낀 것을 쓰다.
去年一丈天山雪, 작년에는 한 길 천산의 눈 있고 凍鵲枝頭. 가지 끝에는 겨울 까치 있었지.
暢好春游. 참으로 봄날에 놀기 좋은데, 到得春來祇是愁. 봄이 오면 그저 근심뿐이라네.
炎風匹馬黃塵裏, 더운 바람 불 때 누런 먼지 속의 한 마리 말, 又盼清秋. 또 맑은 가을 바라보네.
涼月南樓. 남쪽 누대에 서늘한 달 비추는데, 到得秋來總是愁. 가을 오니 모든 것이 다 근심이로구나.
이 작품은 작자가 ‘운주’라는 타지에서 느낀 바를 읊은 것이다. 상편에서는 봄이 다가오는 상황을, 하편에서는 가을이 다가오는 상황을 그려 시간의 빠른 흐름을 그렸다. 작자는 봄이 오든, 가을이 오든 모두 근심일 뿐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인간사의 시간이 유한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유한한 생의 인간
366) ≪曝書亭集≫ 卷24 詞(1)에 수록.(朱彝尊 撰, ≪曝書亭集≫, p.295.)
에게 허락된 시간은 극히 일부이기에 여정의 종착점인 고향으로 돌아가 이동을 끝 내야 하는 ‘客’의 입장에서 자연적 시간의 빠른 흐름은 고뇌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 때문에 나그네는 시간의 흐름에 유독 민감할 수밖에 없게 된다.
상편의 첫 2구에서는 아직 겨울의 흔적이 남아있는 풍경을 그렸지만 바로 이어 지는 구에서 작자는 봄이 오는 것을 앞서 근심한다. 하편에서 역시 여전히 더운 바 람이 불고 있지만 작품 속 화자는 그 가운데서 맑은 가을의 기운을 먼저 포착하여 가을이 오는 것을 걱정한다. 겨울-봄, 여름-가을이라는 ‘경계’의 시간에서 그 변화 를 앞서 인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계절의 변화에 대한 민감한 포착은 곧 시간의 흐름에 대한 작자의 경계심이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2) 늙음에 대한 공포
세월의 흐름에 대한 객의 민감한 인식과 경계는 시간 흐름의 압축적 제시로 나 타난다. 위에 인용한 <采桑子⋅雲州書感>의 경우 전체 8구의 짧은 편폭의 작품이 지만 거의 매구마다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는 사어들(雪, 凍鵲, 春游, 春, 炎風, 清 秋, 涼月, 秋)을 활용함으로써 겨울에서 봄, 여름에서 가을로 이동하는 빠른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였다.
背郭鵲山村. 성곽을 등진 작산촌에는
客舍雲根. 깊은 산골짜기 구름 일어나는 곳에 객사가 있네.
落花時節正銷魂. 꽃이 지는 때에 마침 넋을 잃었는데 又是東風吹雨過, 또 동풍이 비를 불어오는
燈火黃昏. 등불 밝힌 황혼이로구나.
위에 인용한 작품은 객지에서 맞이한 밤에 느끼는 객수를 표현한 <賣花聲>(背郭 鵲山村)367)의 상편이다. 주목할 부분은 제3,4구로, 작자는 꽃이 지던 지난 늦봄을 떠올리고는 바로 다음 구에서 동풍이 불어오는 상황을 그림으로써 시간의 변화를 압축적으로 묘사하였다.
367) ≪曝書亭集≫ 卷25 詞(2)에 수록.(朱彝尊 撰, ≪曝書亭集≫, p.304.)
清平樂368)
濕雲籠霧. 습기 찬 구름과 자욱하게 덮인 안개에 曉色看成暮. 새벽빛이 저녁이 되었네.
空裏雪花風約住. 허공의 눈꽃은 바람이 붙잡는데 十月薊門飛雨. 시월의 계문에 비가 날리네.
曆頭簡到殘年. 달력이 대략 세모에 이르니 客懷轉覺淒然. 나그네 마음 점차 쓸쓸함을 느끼네.
滿地已無黃葉, 온 땅에는 이미 누런 낙엽 없고
一林惟有蒼煙. 온 숲에는 오로지 어슴푸레한 안개뿐이네.
위에 인용한 <清平樂>(濕雲籠霧)의 경우, 과편을 통해 상편과 하편 사이에 시간 적 간극을 주어 10월에서 어느새 歲暮로 넘어가는 시간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묘사
하였다. 10월에 이미 세모의 시기에 이르렀다고 느끼는 작자의 태도는 그가 시간
의 흐름을 빠르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이와 같은 시간에 대한 주관적 인식 은 시간의 유한성으로 인한 ‘客’의 경계심과 공포심을 반영한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대한 ‘客’의 주관적 인식은 종종 자신의 늙음에 대한 발견으로 이 어지며 이에 따라 나이 드는 것, 나아가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이어진다.
十六字令369)
繁. 많구나,
一樹丁香花壓闌. 한그루 정향나무 꽃이 난간을 짓누르는 것이.
心憐惜, 마음이 애석하니
不向鬢邊看. 귀밑머리 옆을 보지 않는다네.
16자의 이 짧은 작품에서는 시간의 흐름과 자신의 늙음을 인식하는 것에 대한
368) ≪曝書亭集≫ 卷26 詞(3)에 수록.(朱彝尊 撰, ≪曝書亭集≫, pp.328∼329.) 369) ≪曝書亭集≫ 卷25 詞(2)에 수록.(朱彝尊 撰, ≪曝書亭集≫, p.315.)
두려움이 압축적으로 드러나 있다. 작자는 가득 핀 정향나무 꽃에서 계절의 변화 를 인식하고, 그 화려한 모습과 대비되는 자신의 하얗게 샌 귀밑머리를 애써 보지 않음으로써 늙어버린 자신의 처지를 외면하였다.
歲暮를 배경으로 한 아래의 작품 역시 자신의 늙음을 민감하게 포착함으로써 시 간의 흐름에 대한 경계를 드러내었다.
飛雪滿群山⋅燕京歲暮作370) 연경에서 연말에 짓다
椎髻鴻妻,371) 상투머리의 양홍의 처 蓬頭霸子,372) 쑥대머리의 왕패의 아들.
故園消息誰傳. 고향의 소식은 누가 전해줄까?
雪花如手, 눈꽃은 손같이 크고
同雲萬里, 하나의 색으로 된 구름 만 리에 퍼져있는데 幾回搔首茫然. 몇 번이나 머리를 긁적이며 멍하니 있네.
黑貂裘敝矣,373) 검은담비 갖옷 해졌건만
況兼東郭先生履穿.374) 하물며 동곽 선생의 구멍 난 신발까지 겸하여서는 어떠하랴.
一點孤燭, 한 점의 외로운 촛불,
兩行鄉淚, 두 줄기 고향을 그리워하는 눈물,
惟有影相憐. 오로지 그림자만이 있어 서로를 가여워 하는구나.
370) ≪曝書亭集≫ 卷24 詞(1)에 수록.(朱彝尊 撰, ≪曝書亭集≫, p.300.)
371) 鴻妻: 梁鴻의 아내인 孟光. 여기서는 고향에 있는 아내를 가리킨다.
372) 蓬頭霸子: 王霸의 아들. ≪後漢書⋅列女傳≫에 의하면 왕패가 令狐子伯의 아들을 만나고 는 오랫동안 누워서 일어나지 않자 그의 처가 까닭을 물었다. 그가 말하기를, “내 아들은 봉두머리에 성긴 이를 하고 아직 예절을 모르니 손님을 만나고 부끄러워졌네.(我兒曹蓬 髮歷齒, 未知禮則, 見客而有慚色)”라고 했다. 여기서는 고향에 있는 자식을 가리킨다.
373) 黑貂 구: ≪戰國策≫에 기록된 蘇秦의 일화다. 소진이 일찍이 秦惠王에게 천하를 얻으라 고 유세하였는데, 열 번 상소를 올렸지만 왕이 받지 않았다. 이 때 타향에 나온 지 오래 되어 흑담비 갖옷도 해질 정도였다고 한다.
374) 況兼 구: ≪史記⋅滑稽列傳≫에 기록된 東郭先生의 일화다. 동곽선생이 눈길을 가는데 신발이 닳아 윗면은 있는데 바닥은 없어 발이 지면 위에 있으니 사람들이 그를 비웃었다. 이상 2구는 소진과 동곽선생의 전고를 통해 객지생활의 빈곤함을 이야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