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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古 경향과 南北宋 우열론

문학과 사상의 발전은 주로 과거의 것에 대한 회의와 비판에서 출발하는 경향이 있다. 명청 교체기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이 시기 지식인들 사이에서 이와 같은 경 향이 유독 심하였던 것은 이민족 왕조에 의한 국가의 멸망이 초래한 정신적 충격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청초의 지식인 사회는 명조의 멸망의 원인을 찾는 것에 몰 두하였고, 이는 명대 사회의 학술과 사상, 문화 등에 대한 비판과 반성으로 이어졌 다. 그들은 한족 왕조의 멸망을 초래하였다고 여겨지는 명대의 것을 부정하는 대 신, 이민족 왕조에 의해 훼손된 한족의 전통문화를 재건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명 대 이전의 보다 먼 과거의 것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청초에 등장한 경세치용학파 가 명대의 주류 사상이었던 주자학과 양명학에 책임을 묻고 올바른 경전 정신의 재건을 위하여 五經의 연구에 몰두하였던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168)

167) 청 중기에 이르러 周濟(1781∼1839)가 “시에는 역사가 있고 사에도 또한 역사가 있다.(詩 有史, 詞亦有史.)”(≪介存齋論詞雜著≫)라고 하여 詞史說을 주장한 것이 이와 같은 청초 의 사론을 기초로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청대 詞史說의 발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陳 水雲, <淸代的“詞史”意識>, ≪武漢大學學報(人文科學版)≫ 第54卷 第5期, 2001을 참조.

168) 주이준이 바로 이 시기 五經의 가치를 재정립한 대표적인 학자 중 하나이다. 그는 ≪宋 史≫가 성리학에 우위를 두어 <도학전>을 따로 세웠던 것에 대해 지적하고 ≪明史≫가 이러한 체제를 따르는 것에 반대하였으며, 사서를 중심으로 하는 ‘道學’을 ‘儒林’에 포괄 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다른 경전의 가치를 높였다.

“<유림열전>이 司馬遷과 班固로부터 시작된 이래로 사학가는 그를 따라 변하지 않았다.

王偁이 찬한 ≪동도사략≫에 이르러서는 <유학전>이라고 이름을 바꾸고 周敦頤와 張載,

이에 따라 청초의 문단 또한 復古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명말의 문단이 쇠퇴하게 된 원인을 찾고 쇠퇴한 각 문체를 부흥시키는 방법으로 學古를 통해 과 거 그 문체가 가장 빛을 발하였던 시기의 것을 되찾고자 하였다. 즉, 가장 모범이 될 만한 문체가 과연 어느 시대의 것인가를 찾는 것이 주된 고민거리였던 것이다. 그것이 시에 있어서는 당송 우열론으로 나타났고, 사에 있어서는 남북송 우열론으 로 나타나게 되었다.

운간사파의 경우 ‘婉約’을 사 본연의 풍격으로 봄에 따라 남당과 북송의 사를 모 범으로 세웠는데, 이 과정에서 “(남송사는) 거칠고 속되며”169) “사는 남송에 이르 러 번성하였으나 역시 남송에 와서 폐단이 생겼다”170)고 하여 남송사의 폐해를 지 적하고 호방한 풍격을 배격하였다. 운간사파의 영향으로 청초의 이른 시기에는 李

程氏 형제(程顥, 程頤)를 여기 집어넣었다. 원나라에서 편수한 ≪송사≫는 비로소 <儒 林>과 <道學>을 둘로 나누니, 經術을 말하는 자는 유림으로 들어가고 性理를 말하는 자 는 따로 도학을 하는 것이 되었다. 또한 洛學, 閩學과 같은 것은 <도학>에 넣었고 다르 면 <유림>에 두었다. 그것은 마치 경술은 소략하고 성리는 엄밀한 것을 의미하는 것 같 으니 주자를 正學으로 하고 楊時와 陸九淵을 갈림길로 하여 암암리에 우열과 진퇴⋅여 탈의 권한을 주어 ≪춘추≫의 필법에 견주었다. 그러나 六經은 세상을 다스리는 큰 법도 이니 임금을 요순으로 만드는 방법은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없다. 학자가 그것을 따라 익히고 밝히면 도통을 전수하는 요체와 표준을 결집하는 이치, 천지를 본받고 만물을 이 루는 도가 갖추어지지 않은 바가 없는 고로 <유림>은 족히 <도학>을 포함할 수 있으나

<도학>은 <유림>을 통합할 수 없다. ‘多文’을 ‘儒’라 하고 우뚝 선 것을 ‘儒’라 하며 도로

써 백성을 얻는 것을 ‘儒’라 하고 고금을 구별하는 것을 ‘儒’라 하며 천지인을 통달한 것 을 ‘儒’라 한다. ‘儒’의 뜻은 위대하니 도학에 겸손하게 양보할 바가 아니다.(傳儒林者, 自司馬氏、班氏以來, 史家循而不改. 逮宋王偁撰東都事略, 更名儒學, 而以周、張、二程子 入之. 元修宋史, 始以儒林、道學析而爲兩, 言經術者入之儒林, 言性理者別之爲道學;又以 同乎洛閩者進之道學, 異者寘之儒林. 其意若以經術爲麁而性理爲密, 朱子爲正學而楊、陸 爲歧塗, 默寓軒輊進退予奪之權, 比於春秋之義. 然六經者, 治世之大法, 致君堯、舜之術, 不外是焉. 學者從而修明之, 傳心之要, 會極之理, 範圍曲成之道, 未嘗不備, 故儒林足以包 道學, 道學不可以統儒林. 夫多文之謂儒, 特立之謂儒, 以道得民之謂儒, 區別古今之謂儒, 通天地人之謂儒. 儒之爲義大矣, 非有遜讓於道學也.)”(≪曝書亭集≫ 卷32 <史館上總裁第 五書>)(朱彝尊 撰, ≪曝書亭集≫, p.406.)

169) 陳子龍, <幽蘭草詞序>(≪安雅堂稿≫ 卷5): “남도 이후로 이러한 소리는 비록 아득하였으 나 개탄을 기탁하는 것이 거칠어 비천한 무인에 가깝고, 세속과 어울린 것이 비천하여 예인에게로 흘러들어갔다.(南渡以還, 此聲雖渺, 寄慨者亢率而近於傖武. 諧俗者鄙淺而入 於優伶.)”

170) 宋徵璧, <論宋詞>: “詞至南宋而繁, 亦至南宋而弊.”(鄒祗謨, ≪倚聲初集≫ 卷2 詞話2에서 원문 인용.)

煜과 李淸照를 대표로 한 남당, 북송사를 추종하는 경향이 이어졌는데, 이러한 운 간사파의 주장에 대항하여 남송사를 재평가하는 시각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주이 준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나는 일찍이 ‘소령은 마땅히 북송을 본받아야 하고 만사는 남도 이후의 것 을 취하여야 한다’는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171)

나는 어릴 때 사 짓는 것을 좋아하지 않다가 중년에 비로소 짓기 시작하였 는데, 사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또 그것을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송원의 사집 을 대략적으로 보니 詞家가 이백 명 정도 되었는데 내가 보기에 남당 북송은 오로지 소령이 뛰어났고, 만사의 경우에는 남송에 이르러 비로소 그 변화가 극에 이르게 되었다. 이를 다른 이들에게 말하면 그들은 바로 비난하며 웃었 는데 오로지 의흥의 진유숭만이 확실한 이론이라 말하니 참으로 동조자를 만 나는 것이 어렵구나.172)

주이준의 이러한 주장은 남송사가 북송사보다 뛰어나다기보다는 북송사는 짧은 길이의 소령이, 남송사는 긴 길이의 장조가 뛰어났다고 하여 양쪽의 가치를 모두 인정하는 절충안에 가깝지만, 사실상 그동안 저평가되었던 남송사의 가치를 재평 가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여기에 姜夔를 비롯하여 雅詞를 추구한 남송사인에 대 한 주이준의 고평가가 이루어지면서173) 기존에 대세를 이루었던 남당⋅북송사 우 위론에 변화가 일어났고 남송사 우위론은 청대 사단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게 되 었다.174)

171) ≪曝書亭集≫ 卷40 <水村琴趣序>: “予嘗持論, 謂小令當法汴京以前, 慢詞則取諸南渡.”(朱

彝尊 撰, ≪曝書亭集≫, p.491.)

172) ≪曝書亭集≫ 卷53 <書東田詞卷後>: “予少日不喜作詞, 中年始為之, 為之不已, 且好之. 因 而瀏覽宋元詞集, 幾二百家. 竊謂南唐北宋, 惟小令為工. 若慢詞, 至南宋始極其變. 以是語 人, 人輒非笑. 獨宜興陳其年謂為篤論, 信夫同調之難也.”(朱彝尊 撰, ≪曝書亭集≫, p.630.) 173) ≪曝書亭集≫ 卷40 <黑蝶齋詩餘序>: “사는 강기보다 뛰어난 자가 없는데 그를 종주로

한 장집, 노조고, 사달조, 오문영, 장첩, 왕기손, 장염, 주밀, 진윤평, 장저, 양기 모두 강기 의 한 체식을 갖추었다.(詞莫善於姜夔, 宗之者, 張輯、盧祖皋、史達祖、吳文英、蔣捷、

王沂孫、張炎、周密、陳允平、張翥、楊基, 皆具夔之一體.)”(朱彝尊 撰, ≪曝書亭集≫, p.488.)

남송사에 대한 재평가의 시각은 비단 주이준과 절서사파의 주장만은 아니었다. 주이준은 “만사가 남송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다”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진유숭만 이 동의했다고 말했는데, 진유숭과 양선사파 역시 북송사를 우위에 놓는 시각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양선사파의 입장은 특정 시대나 문호의 사풍을 선호하고 그것을 모방하려는 입 장에 대한 비판이었다. 당시 사인들이 남송과 북송으로 나누어 대립하는 것에 대 해 문제를 제기한 蔣景祈의 주장이 대표적이다.175) 또한 이들은 호방사에 대한 긍 정적인 시각을 드러내었다. 사를 보존하는 것이 곧 “경전과 사서를 보존하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여 사에 가치를 부여한 진유숭의 입장에서 호방사는 ‘눈으로 보고

[目擊]’ ‘몸소 들어[親聞]’ 촉발된 감정, 특히 ‘불공평한 일[不平之事]’에서 비롯된

한을 표현하는데 적합하여 ‘완약’의 범주가 가지고 있었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176)

진유숭을 비롯한 양선사파의 주장 역시 절서사파가 그러했듯 북송사의 가치를 부정하거나 남송사를 절대적인 우위에 두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특정한 시대 의 사를 우위에 두는 시각에 비판을 가하고 남송대 호방사의 가치를 재발견함으로 써, ≪화간집≫과 ≪초당시여≫를 본받아 艶情을 주된 주제로 한 완약 풍격 일변 도의 사단과 북송 이전의 사를 존숭하고 모방하려는 당시 흐름에 제동을 걸며, 사 창작의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결과를 낳았다.

명사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한 운간사파의 성립과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 양선사

174) 陳廷焯, ≪白雨齋詞話≫ 卷3: “국초에 많은 이들이 북송사를 종주로 하였는데, 죽타가 홀 로 남송의 것을 취하고 이부와 이양년이 일찍이 그를 도우니 풍기가 일변하였다.(國初多 宗北宋, 竹垞獨取南宋, 分虎符曾佐之, 而風氣一變.)” 陳廷焯 著, 屈興国 校注, ≪白雨齋詞 話足本校注≫, 濟南: 齊魯書社, 1983, p.244.

175) <刻瑤華集述>:“오늘날의 사가들은 경솔하게 남북송을 두 가지 근본으로 나누어, 방향

을 달리한 자들은 쉽게 대립각을 세운다. 그것을 궁구해보아 그 심오한 곳에 이르면 길 은 달라도 궤도를 같이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는 곡을 논함에 남북을 나누는 것과 같 으니 나는 이 모두가 지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今詞家率分南北宋爲兩宗, 歧趨者易至 角立. 究之臻其堂奧, 鮮不殊途同軌也. 猶論曲, 亦分南浙, 吾皆不謂之知音.)”(朱崇才 編,

≪詞話叢編續編≫, 北京:人民文學出版社, 2010, p.588.) 양선사파의 풍격론에 대해서는 이 석형(2009), 앞의 논문, pp.338∼345를 참조하였다.

176) 진유숭의 호방사풍 선호에 관해서는 위의 논문, pp.342∼344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