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의 쇠퇴란 사가 가진 본연의 성질을 잃는 것을 의미했다. “사가 시와 다르고 곡이 사와 다른 것은 길이 전혀 같지 않다.(詞之異於詩也, 曲之異於詞也, 道迥不相
侔.)136)”고 하였으니 시와 사, 곡은 분명히 분리되어야 하지만, 명대에는 사가 曲化
되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정해진 곡조에 가사를 채워 넣는[塡詞] 방식의 사는 본디 음악과 긴밀한 관계에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남송대에 이미 음악과 분리되기 시작하였고 명대에 이르면 상당수의 곡조가 유실되어 曲譜에 의지하여 가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명 대에는 상대적으로 曲이 성행하였고 詞律에 대한 지식이 적어서 塡詞家들이 당시 유행하는 곡률에 의거해 작사함으로써 명확치 않은 성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 향이 나타났다.137) “무릇 사는 송원대 이후로 명나라 300년 동안 뛰어난 것이 없었 으니 생경한 말[硬語]을 배열하여 매번 곡조와 어긋났고, 새로운 곡조로 그것을 바 꾸어놓으니 곡보와 합치되기 어려웠다.(夫詞自宋元以後, 明三百年, 無擅場者, 排之 以硬語, 每與調乖. 竄之以新腔, 難與譜合.)”138)라는 주이준의 평은 바로 이러한 명
135) 李康化, 앞의 책, 제1장 제3절 ‘明清之際江南詞人文學生態’ 참조.
136) 王驥德, <雜論> 第39下(≪曲律≫ 卷第4, ≪指海≫ 本).
137) 이석형, <陽羨詞派 詞論 硏究>, ≪중국어문학≫ 제54집, 2009, p.19.
138) ≪曝書亭集≫ 卷40 <水村琴趣序>(朱彝尊 撰, ≪曝書亭集≫, p.490).
대 사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사의 曲化 현상이 심해짐에 따라 명대 문인들은 종종 사와 곡을 논함에 있어서 둘을 구분하지 않고 혼동하여 말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李開先(1501∼1568)은 <西 野春遊詞序>에서 “사와 시는 뜻은 같지만 체제가 다르다. 시는 마땅히 아득하고 여운의 맛이 있어야 하지만 사는 명백하고 알기 어렵지 않아야 한다. 사로 시를 지 으면 시가 졸렬해지고 시로 사를 지으면 사가 어그러진다.(詞與詩, 意同而體異. 詩 宜悠遠而有餘味, 詞宜明白而不難知. 以詞爲詩, 詩斯劣矣. 以詩爲詞, 詞斯乖矣.)”139) 라 하였는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사’는 실제로는 ‘곡’을 가리키는 것이다.140)
曲化와 더불어 명대 사의 주요한 특징으로는 俗化를 들 수 있다. “지금 참된 시 는 민간에 있다.(今眞詩乃在民間.)”141)는 李夢陽(1475∼1529) 등의 주장은 俗詩의 창작을 옹호하는 근거가 되는 동시에, 당시 사회에서 세속문화가 흥성하고 있었고 문인들 사이에서 이를 긍정하는 분위기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원대의 혼란 스러운 정국 속에 발전하였던 문인들의 도피 심리는 명대에 들어 情과 性을 중시 하는 사상의 발달과 상업과 도시문화의 유례없는 발전에 따라 ‘玩世’ 심리로 변화 하였고, 이는 곧 사 창작에 영향을 끼쳤다. 여기에 명대 남북곡의 흥성과 더불어 희곡의 부드럽고 느린 음악과 통속적인 극의 분위기가 명대 문인들의 예술적 취향 에 영합하면서, 희곡의 언어구식, 표현수법 등이 대거 사 창작에 영향을 끼쳤고, 내용면에서도 통속 일변도로 흐르게 되었다.142)
이러한 속화 경향은 ≪초당시여≫의 유행에서 잘 드러난다. 명대에는 ≪樂府雅 詞≫⋅≪陽春白雪≫⋅≪絶妙好詞≫ 등의 송대 사선집은 매우 드물게 간행되었지 만, ≪초당시여≫는 유독 명대 간행본이 20여 종에 이를 만큼 자주 간행되었고,
≪花間集≫과 함께 명대에 간행된 사선집의 대부분을 차지했다.143) ≪초당시여≫
의 분류 체계를 보면, 총목을 春景⋅夏景⋅秋景⋅冬景 등 사계절로 분류하였는데
139) 李開先, <西野春遊詞序>(≪李中麓閑居集≫ 文卷6).
140) 張世斌, ≪明末淸初詞風硏究≫, 天津: 天津古籍出版社, 2008, p.38 참조.
141) 李夢陽, ≪空同集≫ 권50 <詩集自序>.
142) 張世斌, 앞의 책, p.38.
143) 김정희, <명대 ≪草堂詩餘≫의 盛行과 周邦彦詞의 수용 양상 분석>, ≪中國語文論叢≫ 第55輯, 2012, p.163.
이는 연회에서 歌妓들이 상황에 맞추어 노래를 골라 가창하도록 만든 것이다.144) 즉, ≪초당시여≫는 애초부터 오락적 수요를 고려하고 만들어진 것이다. 오락적인 목적이 있었던 ≪초당시여≫의 편찬에는 자연스럽게 대중적 기호가 고려되었다.
平俗한 언어를 사용하고 艶情 제재의 작품을 주로 수록한 것은 이 때문이다. ≪초 당시여≫의 대대적인 유행은 그것이 당시 속적인 것을 선호하는 명대 사회의 취향 에 부합하였기 때문이며, 역으로 ≪초당시여≫의 성행이 사단에 염정적인 풍격을 주로 하는 俗詞의 유행을 유도하는 결과를 낳았다.
명말 이후 ≪초당시여≫는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비판을 받았는데 주이준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詞人의 작품은 ≪초당시여≫로부터 성행했는데 <격초>와 <양아> 등과 같 은 곡은 빼고 <파인>과 같은 노래는 모두 수록하고 있다. 주밀의 ≪절묘호 사≫ 선본은 비록 모두 순수한 것은 아니지만 그중에 뛰어난 말이 많으니
≪초당시여≫에 수록된 것과 견주어 보면 아속이 구분된다.145)
지금 강회(장강과 회하) 이북에서 사를 짓는다 칭하는 자는 번번이 “아사”
를 말한다. 대단하구나, 사가 마땅히 ‘아’에 합치되어야 하는 것이. ≪초당시 여≫ 선본이 성행한 이래로 잘 배우지 못한 자들의 작품이 평범하고 또 속되 어 치료할 수 없었다.146)
144) 宋翔鳳, ≪樂府餘論≫<論令引近慢>條: “≪초당시여≫는 대개 歌妓를 불러 노래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그리하여 별도로 춘경⋅하경 등의 이름으로 제목을 붙여서 수시로 경 치에 맞춰 노래하여 손님을 즐겁게 한 것이다. 혼례나 축수를 제목으로 한 것 또한 이러 한 의미에서다. 그 가운데 詞語는 간혹 집본과 다른데, 다른 것은 늘 평범하고 속되어 또 한 노래 부르기 편하다. 문인이 그것을 보면 마땅히 한번 웃겠지만, 당시 歌妓들은 반드 시 이것이 필요했을 것이다.(草堂一集, 蓋以徵歌而設, 故別題春景夏景等名, 使隨時卽景, 歌以娛客. 題吉席慶壽, 更是此意. 其中詞語, 間與集本不同. 其不同者, 恒平俗, 亦以便歌.
以文人觀之, 適當一笑, 而當時歌伎, 則必需此也.)”(唐圭璋 編, 앞의 책, p.2500.)
145) ≪曝書亭集≫ 卷43 <書絶妙好詞後>: “詞人之作, 自草堂詩餘盛行, 屏去激楚、陽阿, 而巴 人之唱齊進矣. 周公謹≪絕妙好詞≫選本, 雖未全醇, 然中多俊語. 方諸≪草堂≫所錄, 雅俗 殊分.”(朱彝尊 撰, ≪曝書亭集≫, p.522.)
146) <秋屏詞題辭>: “今江淮以北稱倚聲者輒曰“雅詞”. 甚矣, 詞之當合乎雅矣. 自≪草堂≫選本
行, 不善學者流而俗, 不可醫.”(朱彝尊 著, 王利民 等 校點, ≪曝書亭全集≫, p.967.)
옛 사 선본, 예를 들어 ≪가연집≫, ≪적선집≫, ≪난원집≫, ≪복아가사≫,
≪유분악장≫, ≪군공시여후편≫, ≪오십대곡≫, ≪만곡유편≫, 그리고 주밀 이 선집한 것 모두가 일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오로지 ≪초당시여≫에 수록 된 것은 가장 하급인데도 가장 많이 전해져 삼백년 동안 학자들이 ≪토원 책≫으로 지켜왔으니 사가 부진했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147)
정을 말한 작품은 비속함[穢]으로 흐르기 쉽다. 이 때문에 송대 사람들이 사를 선집함에 ‘아’를 제목으로 삼은 경우가 많았다. 법수도인이 부옹(황정견) 에게 말하기를 “염사를 지으면 이설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 마땅하다”라 하 였으니 참으로 부옹과 같은 사체를 지적하여 말한 것일 따름이다. 사를 지음 에 가장 아한 것은 강기를 뛰어넘은 이가 없는데 ≪초당시여≫에서 한 글자 도 싣지 않고 호호의 <입춘길석>, 밀수의 <영계> 같은 작품을 누차 책 속에 넣은 것을 보면 가히 보는 눈이 없는 자라 하겠다.148)
주이준은 ≪초당시여≫의 유행이 명사의 발전에 악영향을 끼쳤음을 지적하였는 데, 그가 지적하는 ≪초당시여≫의 문제점은 대체로 ‘雅’와 대비되는 ‘俗’적인 부 분에 있으니 당시 지식인들이 명사의 俗化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명말청초의 사단은 바로 이러한 명사의 쇠퇴에 대한 반성과 비판에서 출발하였 다. 그 시작이자, 대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은 陳子龍(1608∼1647)을 영수로 한 雲間 詞派였다. 운간사파는 강남 지역에서 유행한 문인 詩詞 결사를 중심으로 발달하였
다. 崇政 2년(1629)에 幾社가 성립되고 陳子龍⋅李雯⋅宋徵與⋅宋徵璧 등이 古詩
文의 애호를 제창하여 雲間派가 형성되었는데, 宋存標, 宋徵璧 등의 宋氏 가족이
147) <詞綜⋅發凡>: “古詞選本, 若≪家宴集≫、≪謫仙集≫、≪蘭畹集≫、≪復雅歌辭≫、
≪類分樂章≫、≪群公詩餘後編≫、≪五十大曲≫、≪萬曲類編≫及草窗周氏選, 皆軼不 傳. 獨≪草堂詩餘≫所收最下最傳. 三百年來, 學者守為≪兔園冊≫, 無惑乎詞之不振也.”(屈 興國⋅袁李來 點校, ≪朱彝尊詞集≫, p.392.)
148) <詞綜⋅發凡>: “言情之作, 易流於穢, 此宋人選詞, 多以雅為目. 法秀道人語涪翁曰,作艷詞
當墮犁舌地獄, 正指涪翁一等體制而言耳. 填詞最雅無過石帚, ≪草堂詩餘≫不登其隻字, 見 胡浩≪立春吉席≫之作, 蜜殊≪詠桂≫之章, 亟收卷中, 可謂無目者也.”(朱彝尊 著, 屈興 國⋅袁李來 點校, 위의 책, p.396.)
사 창작을 시작하여 이 풍조를 幾社에 확장시키고 이에 진자룡 등이 호응하여 창 화하면서 운간사파가 결성된 것이다.149)
운간사파의 기본적인 주장은 사는 사다워야 한다는 것으로, 그들이 말하는 사의 본연의 성질은 곧 서정성이다. 사는 기본적으로 言情的인 특징을 갖춘 문체이며 婉麗함을 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50) 사실 ‘婉弱’을 사의 本色이며 정격으로 보는 것은 송대 이후 대세를 이룬 시각이라 할 수 이다. 그러나 운간사파가 강조한 것은 사에 작자의 ‘情’과 뜻을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風騷의 뜻은 모두 정을 말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였다. 言情을 다룬 작품은 반드시 규방 여인에 기탁 해야 한다.(夫風騷之旨, 皆本言情. 言情之作, 必託於閨襜之際.)”151), “詞의 뜻은 ‘나 스스로를 가련히 여기는 것’을 근본으로 하는 것으로, ‘나 스스로를 가련히 여기는 것’은 규방의 미인의 심정과 비슷하다.(詞之旨本於私自憐, 而私自憐近於閨房婉 孌.)”152)라고 하여 여인의 아름다운 언어에 뜻을 기탁하여 “슬픔을 쏟아내고 뜻을 펼칠(寫哀而宣志)”153) 것을 강조하였다. 운간사파가 “송대 사람들은 시를 알지 못 하고 억지로 지었다.(宋人不知詩而强作詩.)”라고 하여 송시를 비판하고 사의 ‘言情’ 을 강조한 것은 理學의 제약에서 벗어나 문학을 통해 참된 性情을 표현하려는 당 시의 사회문화적 흐름을 반영한 것이며,154) 동시에 이른바 ‘風騷之旨’의 기탁을 강 조하여 뜻을 담아낼 것을 주장함으로써 淫靡한 풍격으로 흘렀던 明詞의 폐단을 극
149) 운간사파의 성립 과정에 대해서는 신현석, <명말청초의 사론 연구>, ≪人文科學≫ 第51 輯, 2012, p.237을 참고하였다.
150) 陳子龍, <玉介人詩餘序>(≪安雅堂稿≫ 卷3): “송대 사람들은 시를 알지 못하고 억지로 지었으니 그들의 시는 이치를 말하고 정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결국 송대에는 시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송대 사람들 또한 정이 있을 수밖에 없으니 그리하여 기쁨과 근 심, 원망의 마음이 마음속에서 동요되어 억제할 수 없으면 사로 표현하였다. 그리하여 그 지어진 것이 유독 공교하니 후세에 이를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중략) 사체는 또한 섬 약하여 이른바 고운 구슬과 비취 깃털 같은 것이라 오히려 중후한 것을 싫어하는데 하 물며 용과 난새는 어떠하겠는가.(宋人不知詩而强作詩, 其爲詩也, 言理而不言情, 故終宋 之世無詩焉. 然宋人亦不免於有情也. 故凡其懽愉愁怨之致, 動於中而不能抑者, 類發於詩 餘. 故其所造獨工, 非後世可及. … 其爲體也纖弱, 所謂明珠翠羽, 尙嫌其重, 何況龍鸞.)”
151) 陳子龍, <三子詩餘序>(≪安雅堂稿≫ 卷3).
152) 宋徵璧, <詞序> 鄒祗謨, ≪倚聲初集≫ 卷2 詞話2에서 원문을 인용하였다. 153) 陳子龍, <三子詩餘序>(≪安雅堂稿≫ 卷3).
154) 명말의 사회적 흐름과 운간사파의 ‘言情’ 추구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신현석, 앞의 논문, p.241을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