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博學 추구와 문학적 능력의 과시

404) ≪曝書亭集≫ 卷30 詞(7)에 수록.(朱彝尊 撰, ≪曝書亭集≫, p.375.)

사는 지인을 만나러 가는 상황에 맞닥뜨리는 풍경’, ‘지인과 오랜만에 만나서 대화 를 나누는 상황’을 구현해낼 만한 시구를 고르는 것이 어렵지 않게 된다. 이러한 전략은 艶詞를 창작하는데도 유리하다.

浣溪沙⋅春閨405) 봄날의 규방

出意挑鬟一尺長(段成式). 신경 써서 틀어 올린 머리 한 척 길이인데

巧勻輕黛約殘妝(施肩吾). 가벼운 눈썹먹 고루 잘 그리고 지워져가는 화장 다 듬어

黃昏獨自立重廊(柯宗). 황혼에 홀로 겹겹의 회랑에 섰네.

蠟照半籠金翡翠(李商隱), 밀랍 촛불 금빛 비취 이불을 반쯤 뒤덮고 羅裙宜著繡鴛鴦(章孝標). 비단치마 원앙을 수놓은 것 곱게 차려입으니 不因風起也聞香(羅虯). 바람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향기가 나는구나.

봄날 정인을 기다리는 규방의 여인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段成式의 <유경이 기녀를 기적에서 빼주니 비경에게 장난으로 보여주다(柔卿解籍戲呈飛卿)>, 施肩吾 의 <기녀의 남은 화장 노래(妓人殘妝詞)>, 柯宗의 <궁인의 원한(宮怨)>, 李商隱의

<무제(無題)>, 章孝標의 <미인에게 주다(貽美人)>, 羅虯의 <홍아를 견주다(比紅兒

詩)>의 시구를 인용하였는데, 인용한 여섯 수의 시 모두 기녀 혹은 미인을 노래하 거나 애정을 주제로 한 것이다.

작자가 ‘春閨’라는 주제의 작품을 창작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무의식적으로 그 와 유사한 주제의 시를 떠올리게 된 것인지, 혹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그러한 주 제의 작품을 선택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것이 자연스러운 시상의 작품을 창 작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한 것은 분명하다. ‘염정’이라는 동일한 주제를 다룬 원시 에서 이미 염정적인 분위기를 구현해 낼만한 여성적이고 화려한 이미지의 사어를 사용하였기에 그 가운데 내용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격률에 맞는 시구들을 골라 배 치하면 되는 것이다.

405) ≪曝書亭集≫ 卷30 詞(7)에 수록.(朱彝尊 撰, ≪曝書亭集≫, pp.379∼380.)

둘째로 의도적인 斷章取義가 있다. 원시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그 시구 자체만을 가져와서 새로운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桂殿秋⋅剡城客夜406) 섬성에서의 나그네의 밤

月漉漉(李賀), 달빛 촉촉이 흐르고

雨微微(張泌). 비가 가늘게 내리는데

故鄉山水路依稀(羅鄴). 고향 산수는 길이 희미하구나.

近來欲睡兼難睡(劉寫), 근래에 잠들려 해도 또 잠들기 어려우니

正是歸時底不歸(葛鴉兒). 참으로 돌아갈 때이건만 어찌 돌아갈 수 없는가.

나그네의 비애를 노래한 이 작품은 초반 2구에서 “달빛[月]”과 “비[雨]”라는 시 각적⋅촉각적 이미지를 통해 나그네의 그리움을 촉발시킨 뒤, 후반 3구에서 직접 적으로 감정을 토로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마지막 구이다. 葛鴉兒의 원시는

<남편을 그리워하다(悔良人)>로 멀리 떠나 있는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怨婦가 화 자인 작품이다. 즉, 주이준의 이 작품과 반대의 상황으로, 부인이 돌아오지 않는 남편에게 “돌아올 때이건만 어째서 돌아오지 않는가!”라고 원망의 말을 하는 것이 다. 작자는 이것을 나그네가 돌아가고 싶지만 돌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상황을 한 탄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歸’가 돌아가는 것일 수도, 돌아오는 것일 수도 있는 양 방향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글자임을 이용한 것이다.

이러한 시구의 활용은 원시의 전체적인 흐름과 본래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그 시 구 자체만을 가져와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특히 위의 예와 같이, 같은 시구를 이용하고도 원시와 완전히 반대의 상황을 표현해내는 것은 절묘한 시구의 활용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시구가 사용된 원시의 맥락을 가져와 함축성을 증대시키는 경우다. 동일한 주제의 前人의 작품에서 시구를 선택하는 첫 번째 방법이 그 시구의 분위 기와 표면적인 의미만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이것은 시구 자체의 의미를 넘어 그

406) ≪曝書亭集≫ 卷30 詞(7)에 수록.(朱彝尊 撰, ≪曝書亭集≫, p.375.)

시구가 포함된 원시의 내용까지 활용하는 것이다.

憶王孫⋅後遊407) 후에 노닐다

平田渺渺獨傷春(李嘉祐). 평평한 밭 아득한 곳에서 홀로 봄에 마음 아파하는데 兩岸桃花夾去津(王維). 양 언덕에 핀 복숭아꽃 떠나는 나루터를 끼고 있네. 一種佳遊事也均(張諤). 좋은 노님에 일도 또한 조화로웠지.

草如茵(李賀). 풀은 자리를 깐 듯 무성한데

不見當時勸酒人(曹唐). 당시에 술 권하던 이는 보이지 않는구나.

‘후에 노닐다’라는 부제의 이 작품은 앞서 창작된 <憶王孫⋅봄에 노닐다(春遊)>

와 연결된 것으로, 이전에 봄놀이했던 기억을 떠올리고 과거와 달라져버린 현재에 마음 아파하는 상황을 그렸다. 작자는 첫 구에서부터 “傷春”이라는 감정을 직접적 으로 드러냈다. 바로 이어지는 제2구의 “桃花”는 ‘人面桃花’의 고사를 떠올리게 하 며, 원시인 왕유의 <桃源行>의 맥락이 더해져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이라는

‘桃花源’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이는 시의 첫 구와 연결되어 앞에서 토로한 슬

픔이 그저 봄이 가는 것이 슬프기 때문만은 아니며 다시는 만날 수 없는 누군가에 대한 아쉬움임을 암시한다. 마지막 구에서는 “당시에 술 권하던 이는 보이지 않는 다.”라고 하여 슬픔의 원인을 직접적으로 이야기하였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제4 구에서 인용한 李賀의 시구가 죽음과 관련된 <소소소의 묘(蘇小小墓)>이며, 이어 지는 제5구는 <유씨와 완씨가 천태산에 다시 갔지만 다시는 선녀를 만나지 못하였

다(劉阮再到天台不復見仙子)>로 역시 영원한 이별을 노래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원시가 가지고 있는 맥락은 제2구의 ‘桃花’가 주는 이미지와 연결되어 결 국 ‘예전의 그 사람’과의 이별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 아마도 죽음에 의한 만남의 불발일 것임을 암시하게 된다.

이러한 시구의 사용은 시구가 가진 그 자체의 의미를 넘어 원시가 가지고 있는 맥락까지 가져와서 작품에 함축적인 의미를 담을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 다. 위에 인용한 작품은 ‘後遊’라는 부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작품 창작

407) ≪曝書亭集≫ 卷30 詞(7)에 수록.(朱彝尊 撰, ≪曝書亭集≫, p.376.)

의 자세한 배경을 파악할 수 없다. 작품의 표면적인 내용은 같은 장소에 다시 노닐 게 되었으나 이전에 함께 했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전부일 뿐이다. 그러 나 작품에서 사용된 시구의 원시가 가지고 있던 맥락들이 각각의 시어에 의미를 더함으로써, 이 작품은 ‘정인의 죽음으로 인한 재회의 불발’이라는 의미를 함축하 게 된다.

아마도 이 작품은 이전에 ≪정지거금취≫ 등에서 주로 다루었던 주이준의 실제 愛情事를 노래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회적 금기를 범한 애정 경험과 그것의 실패 로 인한 비애의 표현은 앞의 절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함축적이고 암시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전인의 시구를 가져와 함축성을 증대시키는 집구 는 이와 같은 주제를 구현하는 데 효과적인 방식이었고, 그에 따라 ≪번금집≫에 는 작자의 애정 경험을 다룬 애정사가 다수 포함된 것이다.

작자 주이준의 시구의 교묘한 선택과 배치는 비록 서로 다른 작품의 시구를 모 은 것이지만 작품 전체적으로 동일한 분위기와 정서를 유지할 수 있게 하며 시상 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한다. 또한 이를 통해 작자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효과 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된다.

≪번금집≫에 수록된 109수의 작품들은 대체로 작자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촉발된 감정을 노래한 것이다. 이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어떤 상황에서 쓴 것인 지를 밝히고 있는 작품의 부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작자가 상상을 통 해 ‘그럴 듯한 상황’을 구현해낸 일부 閨怨詞를 제외하면 대체로 작품 속 화자는 곧 작자 자신이며, 작자 개인의 客愁나 閑愁, 실제의 애정 경험에서 비롯된 相思의 정, 혹은 사대부적인 교유에서 느끼는 감정을 노래하였다. 다음의 작품은 이전의 사집인 ≪강호재주집≫과 유사한 ‘客’으로서의 비애를 노래한 작품이다.

減蘭⋅落葉408) 낙엽

蕭其森矣(蕭穎士). 쓸쓸한 수풀,

客舍秋風今又起(岑參). 객사에 가을바람이 지금 또 일어나네.

408) ≪曝書亭集≫ 卷30 詞(7)에 수록.(朱彝尊 撰, ≪曝書亭集≫, p.380.)

千樹山家(王起). 천 그루의 나무 자란 산가,

村映寒原日已斜(郎士元). 마을은 차디찬 들판에 드러났는데 해는 이미 기울 어졌구나.

客無所託(李白). 객은 의탁할 데 없는데

五夜颼飀枕前覺(劉禹錫). 밤에 비바람 소리 들려 베갯머리에서 깨어났네.

覺坐而思(韓愈). 일어나 앉아서 생각하니

不為愁人住少時(戴叔倫). 근심스런 사람 위해 잠시도 머물러주지 않는구나.

이 작품은 “가을바람[秋風]”을 인식하고 “해가 저무는 것[日已斜]”에 주목하며,

“비바람 소리[颼飀]”에 깨어나 낙엽을 원망하는 모습을 통하여 시간의 흐름에 대 한 화자의 민감한 인식을 드러낸다. 인간 세계의 시간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그로 인하여 세월의 흐름을 경계하는 ‘객’의 태도는 ≪강호재주집≫에서와 동일한 정서 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가을밤 낙엽이 지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지만 낙엽을 직접 언급하 거나 그것이 떨어지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보다는 주변의 다른 요소, 즉

“시든 숲”과 “가을바람”, “객사”, “석양”이 갖는 이미지를 통해 낙엽이 떨어지는 상

황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 상편 제3구의 “千樹山家”는 원시409)에서는 꽃이 가 득 피어있는 아름다운 정경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 시구이지만, 가을바람 부는 객 사를 묘사한 제2구와 차디찬 들판에 해가 저무는 풍경을 그린 제4구 사이에 놓임 으로써 시든 잎이 가득한 처량한 그림으로 변모하였다.

상편에서 하편으로 넘어가면서 자연의 풍경에서 인간에게로 시선이 이동하는데, 상편에서 이미 객사에 가을바람 부는 광경을 언급하였기에 근심에 차 있는 나그네 에게로의 시선의 이동이 자연스럽다. 마지막 “不為愁人住少時”는 원시410)에서는 본디 흐르는 湘水에게 하는 말이지만 여기에서는 맥락상 낙엽에게 하는 말인 동시 에, 빠르게 흐르는 세월에게 하는 말로 바뀌었다. 대신 원시가 가지고 있었던 ‘客 愁’의 이미지는 그대로 가져 와서 낙엽에 객수를 효과적으로 기탁하였다.

409) 王起, <賦花>.

410) 戴叔倫, <湘南即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