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까지 우리는 사회주의 정부가 기근의 발생과 관련하여 범한 몇 가지 전형적인 정책실패 사례들을 지적하고, 이러한 실패 사례들
이 1994~2000년 북한기근에도 그대로 반복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매우 흥미롭게도 우리는 이러한 논의를 진행하면서 북한의 정책실패 사례를 찾아내게 된 것이 아니라, 정반대로 북한정부가 기 근에 대응하기 위해 고심한 여러 흔적들을 확인하였다. 보다 정확하 게 표현하면, 북한정부 스스로가 기근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국 가적 차원에서 최선의 대응책을 모색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발견 한 것이다. 그러나 과거 사회주의 기근들 그 어디에서 찾아 볼 수 없
었던 정부가 주도하는 국가적 기근대응전략이 1994~2000년 북한기 근에서만 정말 존재했던 것일까?
국가적 기근대응전략과 슬로우 모션 기근
일단 이러한 국가적 기근대응전략이 존재했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 렇다면 그 내용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이제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이 질문에 대해 답변을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선 기근대응전략의 최우선 목표는 두 가지였을 것이다. 첫째는 기근발생의 근본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식량생산 실패를 가능한 한 만회하는 것이고, 둘째는 기근의 직접적인 피해자였던 非농민층의 사망률 상승현상을 가급적 억제하는 것이다. 기근의 발생이 식량생산 실패에서 시작되었으므로 이를 방지하려는 노력이 기근대응전략의 첫 번째 과제로 등장했을 것임은 매우 당연하다. 그러나 기근의 발생 으로 식량생산을 담당하는 농민층의 정신적 육체적 능력이 피폐해지 고, 종자용 사료용 곡물 등 향후의 식량생산에 소요되는 곡물의 양 또한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한정부는 적어도 식량생산을 책임지는 농가들에 대 해서는 그들의 식용 소비를 포함하여 향후 생산에 필요한 최소한의 곡물 소요량을 최우선적으로 공급하고자 시도했을 것이며, 그 결과 이들에 대한 식량공급량은, 기근 기간 동안의 불확실하고도 가변적인 경제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매우 균등하고 안정적인 형태 를 띠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문제점은 상대적으로 非농 민층의 식량사정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이로 인해 이들이 아주 쉽 게 기근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점으로 인해 기근대응전략의 두 번째 과제는 기근 기 간 동안의 非농민층 사망률 상승현상을 억제하는데 두어졌을 것이다.
이를 위해 크게 세 가지 전략이 구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1) 중앙정 부가 각 지역별 PDS의 식량재고변동에 직접 개입해 그 격차를 완화 시킴으로써 지역별로 非농민층에 상대적으로 균등한 식량배급이 이 루어지도록 유도한다. 2) 앞의 전략에도 불구하고 PDS의 식량재고 절대량이 크게 부족하고, 이로 인해 非농민층에 대한 식량배급 절대 량 역시 크게 부족할 것이기 때문에, 非농민층 스스로가 굶주림에 적 극적으로 대항할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을 개발한다. 이러한 PDS 전 략의 일환으로 우선 식량배급의 ‘여유기’를 설정하여, 이 기간 동안 PDS의 식량재고 거의 모두를 집중 방출함으로써 악화되는 주민들의 건강상태를 잠시나마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전략으로 맞게 되는 식량배급의 ‘곤궁기’에 대항하기 위해서 는 PDS 스스로가 ‘대체 식량’을 제조해 공급하거나 이의 제조법을 확산시키고, 무엇보다 국제사회의 인도적 식량지원 확보에 노력함으 로써 주민들에 대한 식량배급 자체가 끊어지지 않게끔 시도했을 것 이다. 3) 마지막으로 정부는 기존의 식량관련 제도를 완화하여 주민 들로 하여금 추가적인 식량확보의 기회를 갖도록 시도했을 것이다.
지방정부 및 기업에 식량공급 권한과 의무를 부여하고, 非농민층에 영농행위를 보장하며, 불법적인 식량경작과 거래 또한 사실상 묵인했 을 것이다.
우리는 앞의 Ⅲ장에서 북한기근은 매우 조직화된 사회에서 발생했 기 때문에 사람들이 갑자기 굶주림으로 사망하기 보다는 매우 오랜 기간 동안 극심한 건강상의 위험에 노출되는 특징이 있다는 한 구호 운동가의 말을 인용한 바 있다. 이 章에서처럼 1994-2000년 기근 기
간 동안 북한정부가 주도하는 체계적인 국가적 기근대응전략이 존재 했었다고 가정할 경우에 얻게 되는 가장 큰 소득은 바로 이러한 ‘슬 로우 모션 기근’현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북한은 정부를 중심으로 국가가 전면에 나서 기근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는 방법을 모색했으며, 더욱이 북한은 여느 사회와 달리 정부를 중심으로 고도 로 조직화되고 통제된 사회라는 점에서, 비록 기근 기간 동안 사상 유례없는 식량부족을 경험했지만, 그 충격이 단기간의 급격한 사망률 상승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국가적 기근대응전략: 인도주의 정책인가, 비인도주의 정부의 생존책인가?
그런데 위와 같이 1994~2000년 북한기근 동안 정부가 주도하는 국가적 기근대응전략이 실제로 존재했었다고 가정하는 것이 과연 합 리적일까?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문제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선 쉬운 문제부터 생각해보자. 이러한 가정을 듣게 되는 경우 가 장 먼저 제기될 수 있는 반론은 북한정부가 무엇 때문에 그러한 전략 을 세운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이다. 북한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인권 이 문제가 되는 국가 가운데 하나이며, 북한정부 또한 주민들의 인권 을 가장 고려하지 않는 정부의 하나로 인식되어 있다. 과거 지구상에 존재했던 여러 사회주의 국가들과 비교해도 북한은 인도주의나 인권 의 측면에서 아마 가장 낮은 수준의 국가로 분류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매우 타당한 많은 증거들을 토대로 형성된 것이며, 따라서 그 에 대한 반론 역시, 북한정부 자체의 형식적 반론을 제외하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거 여러 사회주의 정부가 기근과 관련
하여 별다른 주목할 만한 대응책을 세우지 않았는데, 유독 북한정부 만이 이런 전략을 취했다고 가정하는 일이 과연 합리적인 것일까?
물론 북한정부가 이런 전략을 취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도주의 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은 거의 분명할 것이다. 그러나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다. 즉 1994~2000년 기근 이 북한정부에 주었던 타격은 여타 사회주의 기근들이 그들의 정부 에 주었던 타격과는 근본적으로 달랐기 때문에 북한정부는 이에 대 해 다른 사회주의 정부들처럼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는 것이 다. 이제까지 사회주의 사회에서 발생한 기근들은 모두가, 비록 그 피 해는 엄청났지만, 체제 자체의 위협으로까지는 연결되지 않았다. 기 근은 체제 밖의 농민층에서 주로 발생했고, 사회주의 체제를 떠받드 는 도시민의 경우에는 기근 기간 동안에도 정부의 보호아래 상대적 으로 안정되어 있었다. 더욱이 기근의 발생이 농업 집단화 등 농민들 을 대상으로 한 사회주의화 정책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1) 정부는 기근의 발생 자체를 이러한 사회주의화 정책에 대한 일종 의 반발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고, 2)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정부의 사회주의화 정책의 문제점을 자인 하는 것에 소극적인 경향이 있었다. 반면, 1994~2000년 북한기근은 북한 식량지위 체계의 특성으로 인해 주로 도시에서 발생했고, 이로 인해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는 도시민들이 직접적인 피해자가 되었 다. 더욱이 이 기근은 농업 집단화와 같은 사회주의로의 이행 과도기 에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성숙된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일어났 다. 지리적 공간의 개념을 이용하여 조금 과장되게 설명하면, 과거 사 회주의 기근들은 공산당 당사와 멀리 떨어진 농촌에서 사회주의적으 로 개조되지 않은 농민들을 중심으로 일어났지만, 1994~2000년 북
한기근은 공산당 당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도시에서, 이미 사회 주의적으로 개조되었고 또 그래서 체제를 떠받치고 있다고 여겨지는 산업부문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발생한 것이다. 이는 북한기근의 경우 과거 그 어떤 사회주의 기근보다도 더욱 체제의 존립에 위협적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하면, 북한정부 가 체제 자체의 생존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기근에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매우 당연해 보인다. 우리가 앞에서 가정한 북한의 국가적 기근대응전략이란 현재 세계에서 가장 非인도주의적일지도 모르는 북한정부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수립 가능한 전략이라는 의미 이다.
국가적 기근대응전략인가, 국가적 기근확산전략인가?
이제 마지막으로 앞의 가정과 관련하여 가장 어려운 문제를 생각 해 보도록 하자. 이제까지의 논의를 주의 깊게 따라 온 독자라면 누 구나 쉽게 알 수 있겠지만, 현재까지의 우리의 논의에는 한 가지 중 요한 요소가 빠져있다. 그것은 바로 1994~2000년 북한기근동안 발 생한 사회계층별 식량분배 또는 소비에 관한 논의이다. 실제로 우리 는 이제까지의 논의 거의 모두를 북한의 지역별 식량분배 또는 소비 의 차이에 맞추어 왔다. 물론 그 이유는 매우 분명하다. 현 수준에서 북한의 계층별 식량분배와 소비를 검토할 수 있는 데이터가 아예 존 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1994~2000년 북한기근동안 사회계층별로 식량분배와 소비가 엄청난 차이를 보였을 가능성이 있 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