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문학(新文學)의 발아(發芽)
아편전쟁(1840~1842) 이래 서양과의 계속된 충돌로 중국 문 화는 서양의 침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정치·경제·사회 등의 각 방면에 동요를 가져왔다. 특히 청일전쟁(淸日戰爭;1894~1895) 의 패배를 계기로 중국은 열강에게 영토를 분할당하고 각종 이권(利權)을 빼앗기고 국권(國權)을 상실당하여 차식민지적 (次植民地的) 상태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런 중에도 강유위(康 有爲)가 보국회(保國會)를 조직하여 양계초(梁啓超) 등의 등지 를 규합하고 광서제(光緖帝)의 신임을 받아 신문화 운동이라 할 변법 유신운동(變法維新運動;1898)을 단행하였다. 변법이란
전통적인 중국 고유의 정신 문화 즉 유교사상(儒敎思想)을 근 저로 하고 서양의 과학 기술 문명을 이용하여 부국강병책(富 國强兵策)을 꾀하자는 것이었다. 이 운동은 서태후(西太后)를 둘러싼 보수파(保守派)의 반격을 받아 3개월여에 그들의 신 체제는 깨뜨러지고 말았다. 이것이 무술정변(戊戌政變)이었다.
변법 유신운동을 영도한 인물의 하나였던 양계초는 무술 정변 을 전후에서 「시무보(時務報)」·「청의보(淸議報)」 및 「신민총보 (新民叢報)」 등 잡지를 펴내 크게 영향력을 발휘했는데, 심오 한 고문의 의법(義法)을 타파하고 문체 해방을 실행하였다. 때 문에 그의 문장은 어구가 평이하고 조리가 분명하며 속어와 외래어도 많이 섞여 있어 그 시대의 요구에 부합되는 것이었
다. 이는 곧 문학혁명(文學革命)의 선구적 역할을 했다 하겠으 며, 그 자신도 또한 문학 혁명의 필요성을 자주 거론하곤 하 였다는 황준헌(黃遵憲)의 이른바 신파시(新派詩)를 들 수 있 고, 소설로는 양계초의 정치 소설이 그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 다.
황준헌(新派詩; 1848~1905)은 자가 공도(公度), 광동((廣東) 가응(嘉應)사람이다. 그는 변법 운동에도 참가하고 양계초가 1896년 상해(上海)에서 창간한 변법 운동의 선전잡지 「시무보 (時務報)」에 직접 자금을 댔던 사람이다. 또한 외교관으로서 일본·영국·미국을 순력(巡歷)하여 안목을 넓힌 그는 격변하는 시대에 옛 사람만을 따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래서 그의 시에는 방언과 속어가 대담하게 쓰였으며 ‘말 나오 는 대로 쓸(我手寫我口)’ 것을 주장, 구어적(口語的) 발상에 의 한 시작(詩作)을 시도하였다. 이처럼 속어를 시에 써야 한다는 주장은, 훗날 호적(胡適)이 발표한 문학 혁명의 맨첫 정식 선 언서라 할 <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芻議)>에서 밝힌 팔사(八事) 가운데 ‘속자·속어를 피하지 말라(不避俗字俗語)’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바로 언문일치(言文一致)를 부르짖는 문체 개혁 운 동인 것이다.
양계초(梁啓超;1873~1930)는 자가 탁여(卓如), 광동(廣東) 신 회(新會)사람이다. 그는 무술 정변 후 일본에 망명하여 그곳에 서 발간한 「청의보(淸議報)」를 통해 일본의 정치 소설 <가인
기우(佳人奇遇)>와 <경국미담(經國美談)>을 중국에 소개하고, 그 서문으로서 <역인정치소설서(譯印政治小說序)>라는 논문을 써서 소설이 정치적 계몽의 수단이 되고 정치 개혁의 동인(動 因)이 될 수 있다고 그 의의를 밝혔다. 또한 1902년에는 일 본 횡빈(橫濱)에서 시작하여 후에 상해(上海)에서 계속 발간한 중국 최초의 문학 잡지인 「신소설(新小說)」에 직접 작품을 발 표하기도 하는 한편, 소설의 효용(效用)을 논설기서문(論說記 敍文)과 동등하게 보아 <논소설여군치지관계(論小說與群治之 關係)>라는 논문에서 소설과 사회와의 관계를 논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아, 소설이 이토록 사람을 끌어들일 줄이야.
···그러니 오늘날 사회를 개량하려면 반드시 소설계 혁명에
서부터 시작해야 하며, 국민을 혁신하려면 반드시 소설을 혁 신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며, 중국인 뇌리에 박혀 있는 썩어빠진 사상은 모두가 구 소설에서 물든 것이라고 하 였다. 이후 양계초의 뜻은 견책소설(譴責小說)의 작자들에 의 해 계승되었다.
역자로는 사상 영역에선 엄복(嚴復), 소설에선 임서(林紓)의 활동이 제일 컸다.
엄복(嚴復; 1853~1921)은 원명이 종광(宗光), 자가 우릉(又 陵) 또는 기도(幾道), 복건(福建) 민후(閩侯) 사람이다. 그는 영 국 유학 헉슬리의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이라든지 스펜서의 사회유기체설(社會有機體說)을 신봉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는 이러한 학설을 원용(援用)하여, 청일전쟁(淸日戰爭) 후 중 국이 제국주의의 위협을 받을 때, 중국 위기의 원인을 분석하 고 그의 극복을 위하여 변법을 제창했다.
임서(林紓; 1852~1924)는 원명이 군옥(群玉), 자가 금남(琴 南), 복건(福建) 민후(閩侯) 사람이다. 그는 엄복의 《천연론》개 역본(1893)이 간행된 이듬해 듀마피스의 《파려차화녀유사(巴 黎茶花女遺事;La Dameaux Camelias)》를 번역 발표했다. 임 서의 번역소설은 당시의 새 세대들에게 문학에 대한 흥미를 갖게 해주는 데에 있어 간과할 수 없을 만큼 큰 영향을 주었 다.
이밖에 언어·문자 면에서도 새로운 관화 자모 운동(관화자모
운동)의 기운이 조성되었다. 담사동(譚嗣同; 1866~1898)은 그 의 저서 《인학(仁學)》에서 한자의 폐지를 주장했고, 1904년에 왕조(王照; 1860~1923)는 《관화합성자모(官話合聲字母)》를 출 판했으며, 1907년에는 노 내선(勞乃宣;1844~1927)이 《간자보 (簡字譜)》를 펴내 관방(官方)에서 간자학당(簡字學堂)까지 설립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