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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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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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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걷는수행>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

【 연꽃 필 무렵 】

(2)

]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

번뇌의 불꽃 모두 소멸하신 분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신 분

존귀하옵신 그 분께 예경 올립니다

]

지극한 마음으로 거룩한 님께 귀의합니다 님의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님의 제자들 상가에 귀의합니다 모든 존재들이 행복하기를 기원합니다

(3)

<걷는수행 >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

천막경행

을 하다가 문득

6월에 시작된 장맛비가 8월의 달력장 너머까지 줄창 내리는 바람에 올여름 에는 컨테이너 공양간 앞에 있는 천막(3×6m) 속에서 산책 삼아 걷는 날이 많았습니다. 경행 · 행선 이라 불리는 <걷는수행>을, 때로는 굳이 수행이랄 것까지도 없는 ‘걷기’를 운동 삼아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가며 들어서 가고 놓다 보면 밖은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습니다. 폭우가 쏟아지던 밤에도, 세 번의 태풍이 지나가던 날에도 천막에 부딪히는 빗소리 바람소리를 들으 며 걷고 앉고 걷고 앉곤 하였습니다.

비가 잠시 주춤할 때는 공양간에서 법당까지의 80m 오르막 산길을 발의 들 고 놓음에 주의를 기울여 걸을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걸음걸이 전체를 가볍 게 의식하면서 길에 떨어진 푸른 밤송이를 줍거나 길을 잃고 헤매는 지렁이 를 나뭇잎으로 감싸 풀숲에 옮겨놓으며 걸었습니다. 또 어떤 때는 빨리어 게 송이나 경들을 암송하면서 그 리듬에 발걸음을 맞추어가며 걷기도 하였습니 다.

돌이켜보면, 이 승은 출가 초기부터 <좌선수행>보다는 <걷는수행>을 많이 해온 편입니다. 좌선보다는 주로 <걷는수행>을 통해 삼매의 근력을 길렀고,

<걷는수행>을 통해 더 많은 법들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걷는수행>을 하며 체험했던 희열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편중된 자세 로 수행하는 것을 경계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이 승은 어느덧 ‘경행예찬론자’

가 되어 있었습니다.

유래 없이 긴 장마 덕분에 <천막경행>을 하다 보니 어느날 문득, 수행자들 을 위해 <걷는수행>의 효능과 그 중요성을 다시한번 정리해 보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걷는수행>의 경전적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빨 리어 불전’과 ‘한역 아함경’을 살펴보았고, 인터넷검색을 통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그와 관련된 경들과 법문자료들을 가능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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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병사의 비밀」‘걸음아 나 살려라 10㎝ 더’ 를 보며

최초의 인류를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고 합니다. 그 인류의 특징 가운데 하 나가 ‘직립보행’ 이었습니다. 인류는 수백 만 년 동안 <걸음걸이>라는 걷는 행위와 함께 삶을 영위해 왔습니다. 걷거나 달리는 것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 인 행위였습니다.

<걷기>와 관련된 단어를 가지고 인터넷검색을 해보니 2010년 무렵 ‘기적의 걷기운동’ 열풍이 분 적 있었습니다. 당시 <걸음>을 주제로 한 각종 임상연 구는 걷기운동의 물리적 효능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보였고, 국가에서는 ‘걷 기운동’의 범국민적 확산을 위해 전국적으로 둘레길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현재의 ‘북한산 둘레길’은 걷기 프로잭트를 실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한국 최 초의 둘레길이라고 합니다.

때마침 최근에 「생로병사의 비밀」‘걸음아 나 살려라 10㎝ 더’ 1,2,3편 기획물 이 방영되었습니다. 직종별 연령별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진행된 임상실험은 보폭을 10㎝ 더 넓혀 걷는 운동의 탁월한 효능을 입증해 주었습니다. 세 편이 연속으로 방영되는 동안 유심히 살펴보았던 점 한 가지 는 <걸음>이라는 물리적 행위와 관련하여 마음의 영역에 속하는 각종 심리 나 의도 등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와 관련된 언급은 단 한 차례도 볼 수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걷기의 효능’에 대해 설하신 적이 있습니다. <걷는>것은 음식 물 소화시키고, 근력과 지구력을 향상시키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걸음’은 신체의 건강유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걸음’

이라는 물리적 행위에 ‘알아차림’이라는 심리 요소를 결합하여 집중력을 향 상시키고, 종국에는 걸음이라는 물리적 현상을 통해 그와 연관된 심리현상의 본질을 통찰함으로써 번뇌의 완전한 소멸에 이르게 하는 수행으로 승화되었 습니다.

‘걸음걸이’를 주제로 한 이와 같은 <걷는수행> 방식은 불교 밖에서는 그 어 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걸음걸이 자체를 통찰하는 <걷는수행>은 불 교 안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수행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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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상에 나타난 <걷는수행>의 명칭에 대하여

걸음걸이를 주제로 한 수행 방식이 초기경전에는 어떤 형태로 나타나고 있 으며, 역경사들은 또 어떻게 번역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참고 문헌은

【빨리어3장 PTS본】과 전재성 선생의 『빠알리語辭典』(1994), 최봉수 선생의 번역 율장대품 『마하박가』1·2·3(1998), 『상윳따 니까야』1·2·3·4·5·6(각묵스님 역 주, 2009), 『앙굿따라 니까야』1·2·3·4·5·6(대림스님 역주, 2006~7), 『맛지마 니 까야』합본(전재성 선생 역주), 『담마빠다(법구경)』1·2(거해스님 편역, 1992),

『Visuddhi-magga(淸淨道論)』(범라스님 역, 2003), 『Mahā Buddhavaṃsa』Ⅰ·Ⅱ (범라스님 역, 2009), 빨리어 성전을 통해 본 부처님의 생애 『부처님을 만나 다』(담마간다스님 엮음, 2012)를 【구나발타라 스님의 漢譯 『雜阿含經』】, 동 국역경원에서 간행한 韓譯 『雜阿含經』(1993) 등입니다.

빨리어 3장에 ‘caṅkama’ 혹은 ‘caṅkamana’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새벽녘 노지에서 ‘caṅkama’하고 계셨다” (SN10:8 수닷따경)

“비구들은 부처님 계신 곳에서 ‘caṅkama’하고 있었다” (SN14:15 포행경) 빨리어 한글사전에 ‘caṅkama’ 는 산책, 경행, 경행장소, 사원경내, 경행당(經 行堂)이란 뜻이고, 동사형 ‘caṅkamati’는 거닐다, 산책하다, 경행하다. 그리고

‘caṅkamana’는 거닐음, 경행, 경행당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즉

‘caṅkama’의 1차적 의미는 거닐음, 산책, 포행 정도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경 전의 문맥들을 살펴보면 ‘caṅkama’가 그 1차작 의미를 포함하면서도 ‘걸음걸 이’를 통해 삼매를 기르고 통찰지를 성숙시켜 나가는 수행의 한 방식으로 확 장됩니다.

Atha kho anāthapiņḍiko gahapati yena sītavanaṃ yena bhagavā tenupassaṅkami. Tena kho pana samayena bhagavā rattiyā paccūsasamayaṃ paccuṭṭhāya abbhokāse ti. addasā kho bhagavā anāthapiņḍikaṃ gahapatiṃ dūratava āgacchantaṃ. Disvāna caṅkamā orohitvā paññatte āsane nisīdi. Nisajja kho bhagavā anāthapiņḍikaṃ gahapatiṃ etadavoca:

“ehi, sudattā”ti

Atha kho anāthapiņḍiko gahapati, mānena maṃ bhagavā ālapatīti, haṭṭho udaggo tattheva bhagavato pādesu sirasā nipatitvā bhagavanta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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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adavoca:

“kacci, bhane bhagavā sukhamasayitthā”ti?

【SN 10:8 <Sudattā-sutta>】

그때 아나타삔디까 장자는 차가운 숲으로 세존께 다가갔다. 그 무렵 세존 께서는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노지에서 포행 (pacing back and forth)을 하고 계셨다. 세존계서는 아나타삔디까 장자가 멀 리서 오는 것을 보셨다. 보시고는 포행단(his meditatioa path: 에서 내려오셔 서 마련된 자리에 앉으신 뒤 아나타삔디까 장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라 수닷따여.”

그러자 아나타삔디까 장자는 ‘세존께서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구나.’라고 [모골이 송연하고 감격하여] 거기서 세존의 두 발에 머리를 대고 엎드려서 세존께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편히 잘 주무셨습니까?” Thanissaro Bhikkhu 【상윳따 니까야 10:8 <수닷따 경>】

“Ekaṃ samayaṃ bhagavā rājagaha viharati veluvane kalandakanivāpe.

bahudevarattiṃ abbhokāse caṅkamitva rattiyā paccūsasamayaṃ pāde pakkhāletva vihāraṃ pavisitva dukkhiņena passena sīhaseyyaṃ kapesi pāde pādaṃ accādhāhyataso sampajāna uṭṭānasaññaṃ manasi karitvā.

Athakho māro pāpimā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SN 4:7 <Suppati-sutta>】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 대나무숲의 다람쥐 보호구역에 머무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밤의 대부분을 노지에서 포행하시다가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었 을 때 신을 벗고 승원으로 들어거서 발로써 발을 포개고 마음챙기고 일어차 리시면서[正念·正知] 일어날 시간을 인식하여 마음에 잡도리하신 뒤, 오른쪽 옆구리로 사자처럼 누우셨다.”

【상윳따 니까야 4:7<잠 경>】

“Ehi tvaṃ bhikkhu jāgariyaṃ anuyutto viharāhi. Divasaṃ caṅkamena nissajjāya avaraņīyehi dhammehi cittaṃ parisodhehi. Rattiyā paṭhamaṃ yāmaṃ caṅkamena nissajjāya avaraņīyehi dhammehi cittaṃ parisodhehi.

Rattiyā majjhimaṃ yāmaṃ dukkhiņena passena sīhaseyyaṃ kappeyyās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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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āde pādaṃ accādhāya sato sampajāno uṭṭhānasaññaṃ manasi karitva tattiyā pacchimaṃ yāmaṃ paccuṭṭhāya caṅkamena nissajjāya avaraņīyehi dhammehi cittaṃ parisodhehi.

【MN 125 <Dantabhūmi-sutta>】

“오라, 수행승이여. 깨어있음에 전념하라. 낮에는 경행과 좌선으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히 하라. 초저녁에도 경행과 좌선으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히 하라. 한밤중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 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정신활동을 기울여 눕는다. 그리고 새벽녘에 는 일어나서 경행과 좌선으로 장애가 되는 것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히 하라.”

【맛지마 니까야 125 <길들임의 단계에 관한 경>】

빨리어 ‘caṅkama’ ‘caṅkamana’를 산스크리트어로 ‘caṅkrama’ ‘caṅkramati’

라고 표기합니다. 현존하고 있는 漢譯 『雜阿含經』은 빨리어 경전 『상윳따 니 까야』의 산스크리트어 번역본을 5세기 무렵 중국 송나라 때의 인도 역경승 삼장법사 구나발타라(宋 天竺三藏 求那跋陀羅, 435~483)가 최초로 한역(漢譯) 한 것입니다. 漢譯 『雜阿含經』에는 산스크리트어 ‘caṅkramati’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나타납니다.

“彼善男子難陀初夜 後夜精勤修業者 彼難陀晝勝則 經行坐禪 除去陰障 以淨其 身 於初夜時 經行坐禪 除去陰障 以淨其身 於中夜時 房外洗足 入於室中 右脅 而臥 屈膝累足 繫念明相 作起覺想 於後夜時 除覺除起 經行坐禪 是名善男子 難陀初夜 後夜精勤修業”

『雜阿含經』卷第十一 <難陀經>

“저 착한 남자 나타카가 초저녁에도 새벽에도 꾸준히 힘써 업을 닦는다는 것 은 저 난타카는 낮에는 거닐고 좌선(坐禪)하여 장애[除障]를 덜어 버려 그 몸 을 깨끗이 하고, 초저녁에도 거닐고 좌선하여 장애를 덜어 버려 그 몸을 깨 끗이 하고, 밤중에는 방 밖에서 발을 씻고 방 안에 들어가 오른쪽으로 누워, 무릎을 굽히고 발을 포개고, 생각을 명상(明想)에 잡아매어 깨어 일어날 생각 을 가진다. 새벽에는 천천히 깨고 천천히 일어나 거닐고 좌선하나니 이것을

「착한 남자 나타카의 초저녁에도 새벽에도 꾸준히 힘써 닦아 익히는 것」이 라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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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함경』권제11 <난타경>

“如是我聞 一時 佛住舍衛國祇樹給孤獨園 爾時 世尊告諸比丘 若於彼處 有比丘 經行於彼處 四沙門果中得一一果者 彼比丘盡其形壽 常念彼處 佛說此經已 諸 比丘聞佛所說 歡喜奉行”

『雜阿含經』卷第四十一 <行住坐臥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때 부처님께서 슈라아바스티이국 제타숲<외로 운 이 돕는 동산에 계시었다. 그때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만 일 어떤 비구가 어떤 곳에서 거닐다가 사문의 네가지 과(果) 중에서 일일이 그 과를 얻었다면 그 비구는 목숨을 마칠 때까지 언제나 그 곳을 생각할 것 이니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 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잡아함경』권제41 <행주좌와경>

그 밖의 몇몇 대승 한역 경전에서는 산스크리트어 ‘caṅkrama’를 ‘經行’이 아 닌 ‘徑行’으로 옮기기도 하였습니다. 중국 진나라 때의 대표적인 인도 역경승 구마라집(344~413)이 번역한 漢譯 『阿彌陀經』에는

“供養他方 十萬億佛 卽以食時 還到本國 飯食徑行”

(다른 세계 다니면서 십만억 부처님께 공양하고 조반전에 돌아와서 식사를 마치고 경행하나니)

또한, 중국 당나라 중종대((705년경) 활동했던 중인도 출신의 바라밀제가 번 역한 漢譯 『首楞嚴經』에는

“世尊如是修心 救正定人 若在道場 及餘徑行 ··· ” (세존이시여.

이렇게 마음을 닦아 正定을 구하는 사람이 도량에 있거나 다른 곳을 경행(徑行)하거나 ··· )

즉, <거니는 곳> <걷는수행하는 곳> <산책> <포행> <거닐음> <걷는수 행>의 의미를 지닌 빨리어 ‘caṅkrama’‘caṅkamana’, 산스크리트어 ‘caṅk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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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ṅkramati’ 가 한문으로는 <經行>으로 번역되었고, 일부 경전에서 <徑行>

으로 옮겨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漢譯 『雜阿含經』에서 구나발타라 스님에 의해 처음 <經行>으로 번역된 이래, 지금까지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caṅkama’ ‘caṅkrama’를 한자로는 <經行> 한글발음으로는 <경행>으로 옮 겨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현대에는 <경행><經行>과 더불어 <행선><行禪>이란 용어를 종종 사용하 고 있습니다. <行禪>이란 용어는 고려시대 나옹스님(1320~1376)이 지은 발 원문의 제목 「行禪祝願(행선축원)」에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行禪>은 ‘걸으 면서 하는 삼매수행’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고요한 소리’의 활성스님과 경주 마하보디선원장 이었던 고 냐나로까스님 등이 <경행> 대신 <행선>이 란 용어를 자주 사용했습니다. 이 승의 경우에도 지금까지 주로 <행선><行 禪>이란 용어를 사용해오고 있습니다만, 사실 ‘caṅkrama’에는 禪(Jhāna)의 의미가 들어있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선불교 전통의 이미지가 강한 탓에 한 국 테라와다불교 스님들은 잘 사용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승이 <행선>이란 용어를 사용했던 이유는 <경행><經行>이란 용어가 漢譯經典의 근거는 가지고 있지만, 한자어 ‘經’자가 1차적으로 ‘경서, 경전’이란 뜻을 지니고 있어 요즘 사람들에게 ‘걸으면서 하는 수행’ 이란 의 미를 곧바로 전달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다, 걷다’ 의미를 지닌 ‘行(행)’자가 들어간 <행선><行禪>이란 용 어를 선택한 것입니다. 또한 대응어 측면에서도 <경행·좌선>보다는<행선·좌 선>이 더 잘 어울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경행>과

<행선>을 구분 없이 혼용해 쓰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한글세대를 배려하면 서도 누구나 쉽게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걷는수행>이란 용어를 시험 삼아 써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역경승들은 왜 <거닐음> <걷는수행>의 의미를 지닌 산스크리트어

‘caṅkrama’ ‘caṅkramati’를 <經行> 혹은 <徑行>으로 번역했을까? 「Daum 漢 韓辭典」을 보면 [經 : 경서, 직물의 날, 경도(經度)의 준말], [徑 : 지름길, 빠 르다, 지나다, 곧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經’자를 ‘경서 경’ 혹은 ‘날 경’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날’ 혹은 ‘직물의 날’이 무슨 뜻일까 하고 인터넷을 검색해보 니, 「실과 관련된 한자어」라는 글에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었습니다.

옷감을 자세히 살펴보면 실이 가로와 세로로 교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 다. 옷감을 짤 때 가로(좌우)실을 씨줄, 세로(위아래)실을 날실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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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씨줄을 한자로 ‘緯’(위)라 하고, 날실을 ‘經’(경)이라 한 것입니다. 또한 베를 짤 때 베틀에 세로(위아래)로 미리 걸쳐놓은 실을 ‘날실’이라고 하며,

‘북’이라고 하는 럭비공 모양의 작은 도구가 실을 풀면서 날실 사이사이를 왔다갔다 합니다. 세계지도에 경도와 위도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때 동서 를 가로지르는 선을 위선(緯線), 남북을 가로지르는 선을 경선(經線)이라고 합 니다.

즉, 한자어 ‘경(經)’이 ‘위에서 아래로 왔다갔다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에 ‘거닐음, 산책, 포행’ 그리고 ‘한정된 공간을 왔다갔다 걷는다’는 뜻을 지닌 산스크리트어(Sanskrit語) ‘caṅkrama’ ‘caṅkramati’를 구나발타라 스님은 漢譯 『雜阿含經』에서 <經行>으로 번역한 것이라 사료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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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불전에 나타난 <걷는수행>의 양상

초기불전에는 <Caṅkama>(경행 ·행선 ·걷는수행)가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바라문이여, 수행승이 식사하는데 분량을 알면, 여래는 그를 다시 이와 같 이 ‘오라 수행승이여, 깨어있음에 전념하라. 낮에는 경행과 좌선으로 모든 장 애에서 마음을 청정히 하라. 밤의 초야에도 경행과 좌선으로 모든 장애에서 마음을 청정히 하라. 밤의 중야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 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리 며 다시 일어남에 정신활동을 기울여 눕는다. 그리고 밤의 후야에는 일어나 서 경행과 좌선으로 모든 장애 마음을 청정히 하라.‘ 라고 길들입니다.”

“바라문이여, 수행승이 깨어있음을 닦으면, 여래는 그를 다시 이와 같이

‘오라 수행승이여, 새김을 확립하고 바로 알아차려라. 앞으로 나아가건 뒤로 돌아오건, 올바로 알아차려라. 앞으로 바라보건 뒤로 바라보건, 올바로 알아 차려라. 몸을 굽히건 몸을 펴건 올바로 알아차려라.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 를 지닐 때에도, 올바로 알아차려라. 대소변을 볼 때에도 올바로 알아차려라.

가거나 서서나 앉거나 눕거나 깨거나 말하거나 침묵할 때도, 올바로 알아차 려라.’ 라고 길들입니다.”

【맛지마 니까야 107 <가나까 목갈라나의 경>】

“꼬살라 국왕 빠쎄나디는 훌륭하고 화려한 수레를 타고 많은 훌륭하고 화 려한 다른 수레를 거느리고 낭가라까를 출발해서 싸끼야족의 마을인 메다룸 빠로 향해서 아직 대낮에 싸끼야 족의 마을인 메다룸빠에 도착했다. 수레로 갈 수 있는 곳까지 가고 그 후에는 수레에서 내려서 승원으로 들어갔다. 그 때 많은 수행승들이 바깥에서 산책하고 있었다.”

【맛지마 니까야 89 <진실에 대한 장엄의 경>】

“마하나마여, 어떻게 고귀한 제자가 항상 깨어 있습니까? 마하나마여, 세상 에서 고귀한 제자는 낮에는 경행과 좌선으로 장애가 되는 것으로부터 마음 을 청정하게 하고, 밤의 초야에도 경행과 좌선으로 장애가 되는 것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밤의 중야에는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12)

형상을 취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고 올바로 알아차 리며 다시 일어남에 정신활동을 기울여 눕습니다. 그리고 밤의 후야에는, 다 시 일어난 뒤에 경행과 좌선으로 장애되는 것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 니다. 마하나마여, 이와 같이 고귀한 제자가 항상 깨어 있습니다.”

【맛지마 니까야 53 <학인의 경>】

“아난다여, 어떤 수행승이 이와 같이 지내면서 그이 마음이 걷는 데로 향 하면, 그는 걸으면서 ‘내가 이와 같이 걷고 있는 동안, 탐욕과 불안과 같은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가 나를 사로잡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 이 그는 그것을 분명히 안다.

【맛지마 니까야 122 <공(空)에 대한 큰 경>(전재성 선생 역)】

“아난다여, 비구가 이렇게 머물 때, 그이 마음이 경행으로 기울면, 그는‘이 와 같이 내가 경행할 때 욕심과 싫어하는 마음이라는 나쁘고 해로운 법[不善 法 ]들이 나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경행한다. 이처럼 그 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린다.”

【맛지마 니까야 122 <공(空)에 대한 긴 경>(대림스님 역)】

“바라문이여, 여기 세 가지 높고 널은 침상이 있다. 나는 지금 바로 그것을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고 어려움 없이 얻을 수 있고 많이 얻을 수 있다.

어떤 것이 셋인가?

바라문이여, 천상의 높고 넓은 침상과 범천의 높고 널은 침상과 성자의 높 고 넓은 침상이다. 바라문이여, 이러한 세 가지 높고 넓은 침상이 있어, 내가 지금 바로 그것을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고 어려움 없이 얻을 수 있고 많이 얻을 수 있다.“

“꼬따마 존자시여, 어떤 것이 천상의 높고 넓은 침상으로서 고따마 존자께 서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고 어려움 없이 얻을 수 있고 많이 얻을 수 있 습니까?”

바라문이여, 나는 여기 마을이나 성읍을 의지하여 머문다. 오전에 옷매무 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그 마을이나 성읍으로 탁발을 하기 위 해 들어간다. 공양을 마치고는 걸식에서 돌아와 숲으로 들어간다. 나는 [앉기 위해] 풀이나 낙엽을 한곳에 모아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전면 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13)

나는 감각적 욕망을 완전히 떨쳐버리고 해로운 법들을 [不善法]들을 떨쳐 버린 뒤, 일으킨 생각[尋]과 지속적인 고찰[伺]이 있고, 떨쳐버렸음에서 생겼 고, 희열[喜]과 행복[樂]이 있는 초선을 구족하여 머문다. ··· 제2선(二禪)을 ···

제3선(三禪)을 ···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문다.

바라문이여, 내가 이런 상태로 만약 경행을 하면 그때 나의 경행은 천상의 경행이다. 바라문이여, 내가 이런 상태로 만약 서있다면 그때 나의 서있음은 천상의 서있음이다. 바라문이여, 내가 이런 상태로 만약 앉는다면 그때 나의 앉음은 천상의 앉음이다. 바라문이여, 내가 이런 상태로 만약 눕는다면 그때 나의 누움은 천상의 누움이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천상의 높고 넓은 침상으 로서 내가 지금 바로 그것을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고 어려움 없이 얻을 수 있고 많이 얻을 수 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놀랍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고따마 존 자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천상의 높고 넓은 침상으로서 내가 지금 바로 그것 을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고 어려움 없이 얻을 수 있고 많이 얻을 수 있 겠습니까?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어떤 것이 천상의 높고 넓은 침상으로서 고따마 존자께서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고 어려움 없이 얻을 수 있고 많이 얻을 수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나는 여기 마을이나 성읍을 의지하여 머문다. 오전에 옷매무 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그 마을이나 성읍으로 탁발을 하기 위 해 들어간다. 공양을 마치고는 걸식에서 돌아와 숲으로 들어간다. 나는 [앉기 위해] 풀이나 낙엽을 한곳에 모아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전면 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나는 자애[慈]가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문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이와 같이 위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 남하고, 광대하고 ,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평온이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머문다.

나는 연민[悲]이 함께한 마음으로 ··· 더불어 기뻐함[喜]이 함께한 마음으로

··· 평온[捨]이 함께한 마음으로 한 방향을 가득 채우면서 머문다. 그처럼 두 번째 방향을, 그처럼 세 번째 방향을, 그처럼 네 번째 방향을, 이와 같이 위 로, 아래로, 주위로, 모든 곳에서 모두를 자신처럼 여기고, 모든 세상을 풍남 하고, 광대하고 , 무량하고, 원한 없고, 악의 없는 평온ㅇ이 함께한 마음으로 가득 채우고 머문다.

바라문이여, 내가 이런 상태로 만약 경행을 하면 그때 나의 경행은 범천의 경행이다. 바라문이여, 내가 이런 상태로 만약 서있다면 그때 나의 서있음은

(14)

범천의 서있음이다. 바라문이여, 내가 이런 상태로 만약 앉는다면 그때 나의 앉음은 범천의 앉음이다. 바라문이여, 내가 이런 상태로 만약 눕는다면 그때 나의 누움은 범천의 누움이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범천의 높고 넓은 침상으 로서 내가 지금 바로 그것을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고 어려움 없이 얻을 수 있고 많이 얻을 수 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놀랍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고따마 존 자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범천의 높고 넓은 침상으로서 내가 지금 바로 그것 을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고 어려움 없이 얻을 수 있고 많이 얻을 수 있 겠습니까?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어떤 것이 성자의 높고 넓은 침상으로서 고따마 존자께서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고 어려움 없이 얻을 수 있고 많이 얻을 수 있습니까?”

“바라문이여, 나는 여기 마을이나 성읍을 의지하여 머문다. 오전에 옷매무 새를 가다듬고 발우와 가사를 수하고 그 마을이나 성읍으로 탁발을 하기 위 해 들어간다. 공양을 마치고는 걸식에서 돌아와 숲으로 들어간다. 나는 [앉기 위해] 풀이나 낙엽을 한곳에 모아서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추세우고 전면 에 마음챙김을 확립하여 앉는다.

나는 이렇게 꿰뚫어 안다. ‘나의 욕망은 제거 되었고 그 뿌리가 잘렸고 줄 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되었고 멸절되었고 미래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되었다. 나의 성냄도 제거 되었고 그 뿌리가 잘렸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되었고 멸절되었고 미래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되었다. 나의 어리석음도 제거 되었고 그 뿌리가 잘렸고 줄기만 남은 야자수처럼 되었고 멸절되었고 미래는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되었다.’라고.

바라문이여, 내가 이런 상태로 만약 경행을 하면 그때 나의 경행은 성자의 경행이다. 바라문이여, 내가 이런 상태로 만약 서있다면 그때 나의 서있음은 성자의 서있음이다. 바라문이여, 내가 이런 상태로 만약 앉는다면 그때 나의 앉음은 성자의 앉음이다. 바라문이여, 내가 이런 상태로 만약 눕는다면 그때 나의 누움은 성자의 누움이다. 바라문이여, 이것이 성자의 높고 넓은 침상으 로서 내가 지금 바로 그것을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고 어려움 없이 얻을 수 있고 많이 얻을 수 있다.“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놀랍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고따마 존 자를 제외하고는 이러한 성자의 높고 넓은 침상으로서 내가 지금 바로 그것 을 원하기만 하면 얻을 수 있고 어려움 없이 얻을 수 있고 많이 얻을 수 있 겠습니까?

경이롭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놀랍습니다, 고따마 존자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켜 세우시듯, 덮여있는 것을 걷어내 보이시듯, [방향을] 잃어버린

(15)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시듯, 눈 있는 자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들불을 밝히어 주시듯, 고따마 존자께서는 여러 가지 방편으로 법을 설해 주셨습니 다. 저희들은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상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희들을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날까지 귀의하옵니다.“

【앙굿따라 니까야 3:63 <웨나가뿌라 경>】

세존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마하목갈라나 존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목갈라나여, 그대는 졸고 있는가? 목갈라나여, 그대는 졸고 있는가?”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목갈라나여, 그러므로 그대가 어떤 인식을 가져서 머물 때 혼침이 생기면 그런 인식을 그대는 가지지 말라. 그런 인식을 많이 [공부]짓지 말라 그대가 그렇게 머물 때 혼침이 제 될 수 있다.

목갈라나여, 만일 그대가 이와 같이 머물러도 혼침이 제거되지 않으면 그 대는 들은 대로 배운 대로 법을 사유하고 고찰하고 마음으로 숙고해야 한다.

그대가 그렇게 머물 때 혼침이 제거 될 수 있다.

목갈라나여, 만일 그대가 이와 같이 머물러도 혼침이 제거되지 않으면 그 대는 두 귓불을 잡아당기고 손으로 사지를 문질러야 한다. 그대가 그렇게 머 물 때 혼침이 제거 될 수 있다.

목갈라나여, 만일 그대가 이와 같이 머물러도 혼침이 제거되지 않으면 그 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로 눈을 씻고는 사방을 둘러보고, 별자리와 별들을 쳐다보아야 한다. 그대가 그렇게 머물 때 혼침이 제거될 수 있다.

목갈라나여, 만일 그대가 이와 같이 머물러도 혼침이 제거되지 않으면 그 대는 광명상(光明想)을 마음에 잡도리하여 ‘낮이다’라는 인식에 집중하면 된 다. 낮에 [광명을 본 것]처럼 밤에도 [광명을 보고,] 밤에 [광명을 본 것]처럼 낮에도 [광명을 본다.] 이와 같이 열려있고 방해받지 않은 마음으로 그대는 마음을 밝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머물 때 혼침이 제거될 수 있다.

목갈라나여, 만일 그대가 이와 같이 머물러도 혼침이 제거되지 않으면 그 대는 감각기능들을 안으로 돌이켜 마음이 밖으로 향하지 않도록 한 채, 앞과 뒤를 똑바로 인식하면서 경행에 마음을 확고히 해야 한다. 그대가 그렇게 머 물 때 혼침이 제거될 수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 7:58 <졸고 있음 경>】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떻게 비구는 깨어있음에 전념하는가?

(16)

비구들이여, 비구는 낮 동안에는 경행하거나 앉거나 장애가 되는 법들로 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밤의 초경에는 경행하거나 앉거나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한밤중에는 발에 발을 포개어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正念正知} 일어날 시간을 인식하여 마음에 잡도리하여 오른쪽 옆구리로 사자처럼 눕는다. 밤의 삼경에는 이러나서 경행하거나 앉거나 장애 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깨어있음에 전념한다.“

【앙굿따라 니까야 3:16 <티 없음 경>】

“비구들이여, 경행에는 다섯 가지 이익이 있다. 무엇이 다섯인가?

여행을 감내할 수 있고, 정근을 감내할 수 있고, 병이 적고, 먹고 마시고 씹 고 맛본 것이 잘 소화되고, 경행에 몰두하면 삼매에 오래 머무를 수 있다.

비구들이여, 경행에는 이러한 다섯 가지 이익이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 5:29 <경행 경>】

【AN 5:29 <Caṅkama-sutta>】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대나무 숲의 다람뒤 보호구역에 머무셨다.

그때 세존께서는 밤의 대부분을 노지에서 포행을 하시다가 밤이 지나고 새 벽이 되었을 때 발을 씨고 승원으로 들어가서 발로써 발을 포개고 마음챙기 고 알아차리면서[正念正知] 일어날 시간을 인식하여 마음에 잡도리하신 뒤, 오른쪽 옆구리로 사자처럼 누우셨다.

【상윳따 니까야 4:7 <잠 경>각묵스님 역】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 시의 벨루바나 숲에 있는 깔란다까니바빠 공원 에 계셨다. 기나긴 밤을 바깥에서 산책한 뒤에 아침을 맞이하기 위해 승원으 로 오셨다. 발을 씻은 뒤에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여 사자의 형상을 취 한 채, 한 발을 다른 발에 포개고 새김을 확립하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다시 일어남에 주의를 기울여 누웠다.

【상윳따 니까야 4:7 <잠을 자는가의 경>전재성 선생 역】

한때 세존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독수리봉 산에 머무셨다. 그 무렵 사리뿟따 존자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포행을 하고 있 었다. 마하목갈라나 존자도 ··· 마하깟사빠 존자도 ··· 아누룻다 존자도 ···

(17)

뿐나 만따니뿟따 존자도 ··· 우빨리 존자도 ··· 데와닷따도 많은 비구들과 함 께 세존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포행을 하고 있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불러서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사리뿟따 존자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포행하는 것을 보는가?”

“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저 비구들은 모두 큰 통찰지를 가졌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목갈라나가 많은 비구들과 함께 포행하는 것을 보는가?”

“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저 비구들은 모두 큰 신통을 가졌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깟사빠가 많은 비구들과 함께 포행하는 것을 보는가?”

“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저 비구들은 모두 두타행을 옹호하는 자들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아누룻다 존자는 많은 비구들과 함께 포행하는 것을 보는가?”

“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저 비구들은 모두 천안을 가졌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뿐나 만따니뿟따가 많은 비구들과 함께 포행하는 것을 보는가?”

“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저 비구들은 모두 법을 설하는 자들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우빨리가 많은 비구들과 함께 포행하는 것을 보는가?”

“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저 비구들은 모두 율을 수호하는 자들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아난다 많은 비구들과 함께 포행하는 것을 보는가?”

“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저 비구들은 모두 많이 배운 자들이다.”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데와닷따가 많은 비구들과 함께 포행하는 것을 보는가?”

“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비구들이여, 저 비구들은 모두 악한 원을 가졌다.”

“비구들이여, 중생들은 요소에 따라 함께 모이고 함께 어울린다. 저열한 의

(18)

향을 가진 중생들은 저열한 의향을 가진 자들과 함께 모이고 함께 어울리고, 좋은 의향을 가진 중생들은 좋은 의향을 가진 자들과 어울린다.

비구들이여, 과거에도 중생들은 ··· 비구들이여, 미래에도 중생들은 ···

비구들이여, 현재에도 중생들은 요소에 따라 함께 모이고 함께 어울린다.

저열한 의향을 가진 중생들은 저열한 의향을 가진 자들과 함께 모이고 함께 어울리고, 좋은 의향을 가진 중생들은 좋은 의향을 가진 자들과 어울린다.“

【상윳따 니까야 14:15 <포행 경>】

미얀마 6차결집본에는 【SN 14:15 <Caṅkama-sutta>】

PTS(빠알리성전협회)본에는 【SN 14:15 <kamma-sutta>】

로 되어 있는데, 각묵스님 · 보디스님은 전자를 따르고 있다.

(<포행 경>에 나오는 데바닷따의 경행은 아래의 【Vinaya Pitaka(律藏)

『Mahāvagga(大品)』, 신발관련 계율제정 부분에 등장하는 육군비구의 그 릇된 경행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대부분의 부처님 제자들은 선한 의도(正思 惟)와 바른 견해(正見)를 가지고 수행(경행)하지만, 데바닷따나 육군비구처럼 악한 의도(악한 원)와 삿된 견해를 지진 채 수행하는 자들도 있었다. 부처님 당시에 육군비구, 악비구 6명, 악비구니 6명이 사방으로 몰려다니면서 승단 의 질서를 어지럽혔다 한다.)

어느 때 세존께서는 밖에서 신발을 신지 않은 채 경행하고 계셨다. 그것을 본 장로 비구들은 ‘스승께서 신발을 신지 않고 경행하신다.’고 생각하여 자신 들고 신발을 신지 않은 채 경행하였다. 그런데 육군 비구는 스승과 장로 비 구들이 신발을 신지 않은 채 경행하고 있는데도 자신들은 신발을 신고 경행 하였다.

비구들 가운데 욕심이 적고 스스로 만족하고 부끄러워할 줄 알고 후회할 줄 알고 오로지 법을 배우고자 하는 비구들이 있었는데, 이들이 그들을 못마 땅히 여기고 언짢아하고 불평했다.

“어찌 하여 육군 비구는 스승과 장로 비구들이 신발을 신지 않은 채 경행 하고 있는데, 자신들은 신발을 신고 경행하는가?”

그 비구들이 그 사정을 세존께 아뢰었다. 이에 세존께서는 비구들을 모이 게 하고 온당하고 순조로우며 법도에 맞는 말씀을 베푸신 뒤 그들에게 말씀 하셨다.

“비구들아, 진실로 스승과 장로들이 신발을 신지 않은 채 경행하는데, 육군 비구들은 신발을 신고 경행하였냐?”

“세존이시여, 사실입니다.”

(19)

세존께서는 그들을 질책하셨다.

“비구들아, 어찌하여 그 어리석은 자들은 스승과 장로 비구들이 신발을 신 지 않은 채 경행하고 있는데, 자신들은 신발을 신고 경행할 수 있단 말이냐?

비구들아, 실로 흰 옷을 입은 재가인들 조차도 비록 살기 위해 기술과 직업 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들의 스승을 존중하고 순종하고 예의를 갖춘다.

비구들아, 빛을 밝혀라. 그리하여 이처럼 잘 설해진 교법과 율법에서 출가 한 그대들이 아사리(阿闍梨)나 아사리와 동등한 자, 또는 화상(和尙)이나 화상 과 동등한 자를 존중하고 순종하고 예의를 갖추도록 해라.

비구들아, 육군 비구와 같은 짓을 하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을 믿게 하거 나 믿는 사람을 더욱 믿게 하지 못한다. 비구들아, 이러한 행동은 오히려 믿 음 없는 사람을 더욱 믿지 못하게 하고, 믿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일부는 그 믿음을 잃게 한다.“

세존께서는 여러 단계로 질책하셨다. 그리고 비구들에게 법문을 베푸신 뒤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아사리나 아사리와 동등한 자, 또는 화상이나 화상과 동등한 자 가 신발을 신지 않은 채 경행하고 있을 때는 누구도 신발을 신고 경행해서 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자는 악작을 범하는 것이다. 그리고 비구들아, 승원 안에서는 신발을 신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자는 악작을 범하는 것이 다.“

【Vinaya Pitaka(律藏) 『Mahāvagga(大品)』, ‘승원 안에서 신발을 신지 말라’는 계율제정 부분】

어느 때 육군 비구는 밤이 끝나고 새벽이 올 무렵에 일어나 나무신발을 신 고 밖에서 경행하였다. 그리고 높고 크고 자극적인 목소리로 여러 가지 세속 적인 이야기를 해 대었다. 곧 왕 이야기, 도둑 이야기, 대신 이야기, 군대 이 야기, 공포 이야기, 전쟁 이야기, 음식 이야기, 마실 것 이야기, 옷 이야기, 자 마자리 이야기, 화환 이야기, 향 이야기, 친척 이야기, 탈 것 이야기, 마을 이 야기, 읍 이야기, 도시 이야기, 지방 이야기, 여자 이야기, 남자 이야기, 영웅 이야기, 거리 이야기, 우물 이야기, 조상 이야기, 다양한 이야기, 세상에 관한 이야기, 바다에 관한 이야기, 이렇게 되었고 저렇게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 등을 해 대었다.

그들은 그러한 이야기를 크게 하고 다니면서 곤충들을 밟아 죽이고 삼매 에 든 비구들을 방해했다.

【Vinaya Pitaka(律藏) 『Mahāvagga(大品)』, ‘나무 신발을 신지 말라’는 계율제정 부분】

(20)

“도반 사리뿟따여, 저의 제자가 공부지음을 버리고 낮은[재가자의] 삶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도반이여, 감각기능들의 문을 잘 보호하지 않고, 음식에 적당한 양을 알지 못하고, 깨어 있음에 전념하지 못하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도 반이여, 비구가 감각기능들의 문을 잘 보호하지 않고, 음식에 적당한 양을 알지 못하고, 깨어 있음에 전념하지 못하는데도 그는 살아있는 동안 더할 나 위 없이 완벽하고 지극히 청정한 범행(梵行)을 지킬 것이라는 그런 경우는 있지 않습니다. ···

“도반이여, 그러면 어떻게 깨어 있음에 전념합니까?

비구들이여, 비구는 낮 동안에는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 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밤의 초경(初更)에는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한밤중에는 발로써 발을 포개고 마음챙기고 알아차리면서[正念正知] 일어날 시간을 마음에 잡도리하여 오른 쪽 옆구리로 사자처럼 눕습니다. 밤의 말경(末更)에는 일어나서 경행하거나 앉아서 장애가 되는 법들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도반이여, 이와 같이 깨어 있음에 전념합니다.“

【상윳따 니까야 35:120 <사리뿟따 경>】

(Dhammapada(법구경)은 Khuddaka Nikaya(小部經典)에 속하는 423 게송 만으로 이루어진 경전이다. 본래 법구경 자체에는 배경담이 없지만, 경장과 율장을 근거로 후대의 주석가들이 완성한 그 배경담이 현재 빨리어(PāLI語)로 전승되고 있다.)

어느 때 짝꾸빨라 테라는 석 달 동안의 왓사(雨安居)를 무사히 마치고 부 처님을 뵙기 위해 제따와나 수도원에 도착했다. 테라는 이날 밤 자신의 걷는 동작 하나하나에 마음을 잘 집중시키는 걷기 정진(경행)을 했다. 테라의 정진 은 새벽녘까지 계속되었는데, 주위가 어두웠던 탓으로 그만 벌레 몇 마리를 밟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빅쿠 몇 사람이 짝꾸빠라 테라가 머무는 곳에 왔다가 벌레들 이 밟혀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빅쿠들은 짝꾸빠라 테라의 계_행을 의심하 게 되어 이 사실을 부처님께 보고드렸다. 보고를 받으신 부처님께서는 빅쿠 들에게 짝꾸빠라 테라가 벌레를 의도적으로 죽이는 것을 보았는지 여부를 물으시었다. 빅쿠들이 그렇지 않다고 사뢰자,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21)

“짝꾸빠라가 의도적으로 벌레를 죽이는 것을 보지 못했듯이, 앞을 보지 못 하는 그 또한 벌레들이 거기 있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니라. 그는 이미 아라 핫따(아라한) 팔라를 성취한 성자이니라. 그런 그가 무엇 때문에 고의로 생명 을 헤지겠느냐? 또, 설사 그가 벌레를 죽게 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은 고의적 인 행위가 아니었음으로 그의 계행에는 아무런 손상됨이 없느니라.”

【법구경 게송1 배경담 <짝꾸빠라 테라 이야기>】

(『법구경』과 율장 대품『마하박가』에는 비구 앗사지의 탁발 모습을 보 고 감동한 사리뿟따와 목갈라나가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Caṅkama(경행)라고 하는 단어는 실제로 나타나 있지 않지만, 앗 사지 비구가 <걸음걸이> 또는 그 밖의 모든 신체 동작에 대해서 마음을 집 중시켜 주의 깊게 행위하지 않았다면 사리뿟따와 목갈라나는 앗사지 비구로 부터 그토록 위의 있고 단아한 수행자다운 풍모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탁발할 때 앗사지 비구의 걸음걸이는 단순한 발걸음이 아닌 <걷는수행> 혹 은<경행수행>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때 부처님의 최초의 다섯 제자 다섯 사람(5빅쿠) 가운데 막내 격인 앗사 지 빅쿠는 부처님과 여행을 같이 하면서 월루와나 수도원에 도착하여 숙소 를 정하고 아침 일찍이 라자가하 시내로 탁발을 나갔다. 바로 이때 우빠띳사 는 이침 일찍이 일어나 암자에서 수행하는 수행자들을 찾아보기 위하여 라 자가하 시내를 걷다가 앗사지 빅쿠를 만나게 되었다. 우빠띳사는 앗사지 빅 쿠가 탁발을 하기 위해 점잖고 위엄 있게, 자신의 정신을 걸음걸이에 잘 집 중 밀착시키면서 흔들림 없는 태도로 걸어가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고 큰 감 동을 받았다. 그는 아직까지 저렇게 단아하고, 번뇌 없는 태도로, 다만 걸을 뿐 아무런 잡념이 없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우빠띳사는 혼자 중얼거렸 다.

“나는 아직껏 이같이 진정한 수행자다운 태도를 지닌 이를 만난 적이 없 다. 이런 수행자라면 틀림없이 아라핫따 팔라를 성취한 성자일 것이다. 그렇 지 않다면 최소한도 아라핫따 막가에 있는 분일 것이라.”

【법구경 게송11·12 배경담 <사리뿟따와 마하목갈라나 테라 이야기>】

앗사지((Assaji) 비구가 아침에 법의를 입고 발우를 들고서 라자가하로 걸 식하러 갔다. 그는 나아가고 물러서고, 앞을 보고 뒤를 보고, 굽히고 펴는 것

(22)

이 의젓하였고, 눈은 땅을 향하여 훌륭한 몸가짐을 갖추고 있었다.

사리풋타가 라자가하에서 걸식하는 앗사지 비구를 보았다. 그는 나아가고 물러서고, 앞을 보고 뒤를 보고, 굽히고 펴는 것이 의젓하였고, 눈은 땅을 향 하여 훌륭한 몸가짐을 갖추고 있었다.

사리풋타는 생각했다.

‘세상에 아라한이 있다면, 아라한의 도(道)를 갖춘 자가 있다면, 저 비구야 말로 그들 중 한 분이다. 저 비구에게 가서 물어 봐야겠다. 그는 누구에게 출가하였으며,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있으며, 누구의 법을 따르고 있는가 를.’

【Vinaya Pitaka(律藏) 『Mahāvagga(大品)』,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의 출가’ 부분】

빅쿠 생활에 보람을 느끼지 못하던 빅쿠 하나가 있었는데, 그는 그렇다고 다시 세속으로 돌아간다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여 차라리 목숨 을 끊으리라 결심했다. 그래서 그는 한번은 독사가 들러 있는 항아리에 손을 넣었다. 그러나 독사는 전생에 빅쿵의 하인이었으므로 전생의 주인을 물지 않았다. 이 일 때문에 그는 뱀의 주인이라는 뜻의 삽빠다사라는 이름으로 널 리 알려지게 되었다.

뒤에, 그는 또 이번에는 날카로운 면도칼로 자기 목을 찔러 죽으려고 했 다. 그런데 날카로운 면도날이 자기 목에 닿는 순간 자기가 일생 동안 청정 하게 빅쿠 생활을 해온 것에 대한 환희와 만족감이 전신에 넘쳐 흐르는 것 을 느끼고 크나큰 행복감에 몸을 떨었다. 그는 환희를 체험하고 나서 그는 마음을 자기의 몸과 마음애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에 집중시켰다.

그리하여 그 관찰력에 의해 삼매를 이룰 수 있었고, 곧 아라핫따 팔라에 도 달하였다. 그는 수도원으로 돌아왔다. ···

“처음에 나는 이 칼로 내목을 자르려고 했었소. 그러나 나는 내적 관찰의 지혜라는 칼로써 모든 번뇌를 끊어버렸소.”

그러나 빅쿠들은 그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빅쿠들은 부처님께 가 서 이렇게 말씀드렸다.

“부처님이시여, 이 빅쿠는 생명을 끊으려고 목에 칼을 대었다가 아라핫따 팔라를 성취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짧은 순간에도 아라핬따 팔라를 성취할 수 있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대답하시었다.

“빅쿠들이여, 그러하니라, 그것은 가능한 일이니라. 어느 누구라도 용맹스 럽게 마음을 다잡아 고요하게 하여 내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

(23)

을 예리하게 관찰한다면 그는 어느 한순간에 아라핫따 팔라를 성취하게 되 느니라. 예를 들어 어떤 빅쿠가 걷는 행위에 마음을 집중시킨다고 할 때 그 가 발을 들어올렸다가 그 발을 다사 땅에 닿기 전에 아라한을 이룰 수도 있 느니라.”

【법구경 게송112 배경담 <삽빠다사 테라 이야기>】

경행의 일주일 (Caṅkama Sattāha)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은 후 7주 동안 보리수 주변에서 자신이 깨달은 진리를 반조하며 열반의 기쁨을 누리며 보내십니다. ···

성도 후 셋째 주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보리좌와 그 보리좌를 응시 하신 곳 사이에 천신들이 마련해 준 보배 경행대 위를 경행하셨습니다. 부처 님께서는 그곳에서 법에 대해 반조하고 과에 입정하면서 일주일을 보내셧습 니다.

【빨리어 성전을 통해 본 부처님의 생애 『부처님을 만나다』】

그렇게 태자에게 매우 뜨거운 열이 생겨났을 때, 그는 경행대에서 기절하 여 굴러 넘어졌다. 보기에 흉하도록 굴러서 쓰러진 것이 아니라 알아차림이 크신 분답게 경행하다가 주저앉게 되고 그리고 옆으로 굴러진 것이다. 그렇 게 태자가 기절허여서 굴로 넘어지자 경행대 근처에 있던 천인들이 서로 각 기 의견이 세 가지로 갈라졌다.

어떤 천인들은 “오, 수행자 고따마가 죽었구나.” 라고 했다. 어떤 천인들은

“수행자 고따마가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 죽고 있는 중이다. ”라고 했다. 어 떤 천인들은 수행자 고따마가 죽은 것도 아니고 죽고 있는 중도 아니다. 수 행자 고따마는 아라한이 된 것이다. 지금 저렇게 있는 모습은 아라한이 지내 는 모습이다.“라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세 종류의 천인들 가운데 ‘죽었다’라고 말하는 천인들이 숟 도다나 대왕에게 가서 알려 드렸다.

“오! 대왕이시여, 당신의 아들이 죽었습니다.”

“나의 아들이 붓다가 된 다음에 죽었는가? 붓다가 되기 전에 죽었는가?”

숟도다나 대왕이 물었을 때 그 천인들이 대답하기를

“당신 아들이 붓다가 되지 못하고 기본 수행을 하고 있는 경행대 마당에서 굴러ㅕ 넘어져서 죽었습니다.”라고 말하자 숟도다나 대왕은 확신있게 대답하 였다.

“나는 당신들이 하는 말을 조그만치도 믿지 않는다.

(24)

나의 아들이 삽빈뉴따 냐나를 얻지 못하고,

붓다가 되지 못한 채 죽음이란 법은 있을 수 없다.“

【『Mahā Buddhavaṃsa』 중에서】

(『Mahā Buddhavaṃsa』는 미얀마의 삼장법사 밍곤 사야도가 빨리어 3장을 근거로 하여 엮은 부처님의 일대기다.)

7일이 지나자 ‘마하테라께서 왕궁에서 지내는 것은 그 분에게 고통이다.’라 고 생각이 든 까까윈나띠사 대왕이 꾸란따까(Kurantaka) 동굴로 모셔드렸다.

그 동굴에 돌아가셔서 밤중에 경행대에 오르셔서 조용히 r해9ㅇ을 하시며 집 중 관찰하셨다. 강고 나무에 살던 목신이 횃불을 들고 와서 밝혀 드렸다.

그 때 마하테라께서 ‘왠일인가? 나에게 오늘 수행이 매우 분명하고 깨끗하 게 드러나는구나’하고 생각되자 매우 큰 기쁨이 솟았습니다. 한밤중이 되자 온 산천을 일시에 진동케하며 ‘아라한 과’에 이르셨다.

【『Visuddhi-magga(청정도론)』 <Sīla-niddesa>중에서】

두 형제분 마하테라 중에 한 분께서 보름날 포살(빠띠목카)을 마치고 스님 들을 모두 데리고 자기가 지내던 장소로 사거 경행대에 서서 달빛을 바라보 다가 자기의 수명을(Āyusankharā)을 생각해보신 다음 말씀하시기를

“스님들! 어떠한 모습으로 빠리 닙바나(몸과 마음이 완전한 닙바나)에 드는 비구들을 본 적이 있는가?” 하고 스님들에게 물으셨다.

자리에 앉아서 빠리 닙바나에 드시는 것을 제자가 본 적이 있습니다.“

하늘에 올라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빠리 닙바나에 드시는 것을 제자가 본 적이 있습니다.“ 라고 여러 가지로 대답하자 그 때 아라한 마하테라께서 말 씀하시기를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경행하면서 빠리 닙바나에 드는 것을 보여 주겠다.“

그리고 경행대에 오르시고 나서 땅바닥에 금을 긋고

“내거 저쪽 경행대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여기까지 이르면 빠리 닙 바나에 들리라.” 그리고 천천히 경행하여서 저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 셔서 한 발로 그 금을 밟는 순간에 빠리 닙바나에 드셨다.

【『Visuddhi-magga(淸淨道論)』

<Anussati kammaṭṭhāna-niddesa>중에서】

(25)

부처님의 오랜 시자였던 아난존자는 부처님 생존 당시 오직 수다원과의 위치에 머물러 있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다음 가섭존자에 의 해 오백(五百) 아라한을 모아 부처님의 경전을 결집토록 하였다. 그러나 아난 존자는 경의 결집 전날까지 아라한이 아니었기에 결집에 참석할 자격이 없 었다. 그렇지만 아난존자가 참석하지 못하면 경전의 외워냄이 불가능하여 경 이 결집되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 아난존자는 아라한과의 성 취를 결심하고 정진 노력 중이었으나 경전 결집 전날 밤에 이르도록 깨달음 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초조한 마음으로 경행 정진인 까야가타-사띠 (Kayaghatta-sati, 일정한 장소에서 마음을 걷는데 집중시키며 왔다 갔다 하 는 것)를 계속하는데 경전 결집날의 먼동이 터오고, 이때 스스로 느끼기를

‘정진에는 행주좌와에 균형을 지켜야 하는데 나는 너무 걷기만 했구나,이제 처소에 들어가 누워서 허리를 쉬며 정진하겠다.’라고 마음의 변화를 관찰하 며 마음집중을 시켜 자리에 들었다. 몸의 동작을 예리하게 정확히 관찰하면 서 눕기 시작하여 베개가 머리에 채 닿기 전에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부 담과 무거웠던 짐을 일시에 내려버린 듯 가벼운 몸이 되고,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롭게 됐으며 법에 대한 의심이 없어져 마침내 부처님의 경전을 결집하 는 데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Vinaya Pitaka Khandaka(律藏 犍度) 『Culavagga(小品)』에 나오는 제1차 경전 결집에 대한 내용 중에서 아난다 존자의 경행과 관련된 부분을 요약 정리했다.『깨달음의 길』

(거해스님 엮음, 1989)에서 인용.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서 법을 설하시는 대로 잘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집에서는 원만하고 청정한, 진주처럼 빛나는 범행을 닦기가 쉽지 않을 것입 니다. 저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걸친 뒤 출가하고 싶습니다. 세존이 시여, 세존께서는 저를 출가시켜 주십시오.”

그리하여 소나는 세존께 허락을 받아 구족계를 받았다. 그런 뒤 소나는 시 타 숲에서 지냈다.

그런데 그는 지나치게 정진하여 경행(經行)하던 발이 터졌다. 그가 경행하 던 곳은 피로 덮여 마치 도살장 같았다. ···

세존께서는 수많은 비구들과 함께 앉고 눕는 장소들을 거쳐서 소나가 경 행하는 곳으로 가셨다. 세존께서는 소나가 경행하는 곳이 피로 덮여 있는 것 을 보셨다. 그리하여 비구들을 불러 말씀하셨다.

비구들아, 여기는 누가 경행하던 곳인데 피로 덮여 있느냐? 마치 도살장과 같구나.“

(26)

세존이시여, 소나 비구가 지나치게 열심히 정진하여 경행하던 발이 터져 벼렸습니다. 여기는 그가 경행하던 곳인데 피로 덮여 도살장같이 되었습나 다. ···

“소나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너는 세속에 있을 때 비나를 잘 연주하였느 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비나의 줄이 팽팽하면 비나의 소리가 제대로 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비나의 줄이 느슨하면 비나의 소리가 제대로 나더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소나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비나의 줄이 팽팽하지도 않고 느슨하지도 않 을 때 비나의 소리가 제대로 나더냐?”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그와 같이 소나야, 지나치게 열심히 정진하면 흥분 속에 들끓게 된다. 또 한 지나지게 느슨히 정진하면 나태함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소나야, 너는 정진하는 데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라. 그리고 여러 감관들에 균형을 유지하도록 해라. 그리고 그것에서의 모습을 파악해라.“

“예, 세존이시여.” ···

그후 소나는 정진하는 데 균형을 유지하고 감관에 균형을 유지하며 그곳 에서의 모습을 파악하였다. 소나는 이렇게 홀로 떨어져 게으르지 않게 열심 히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이 올바로 출가할 때 품었던 목적인, 위없는 범행을 이루어 잘 알고 얻어서 모두 갖추게 되었다.

여기서 소나는 다음과 같이 잘 알게 되었다.

나의 괴로운 삶은 끝났다.

청정한 범행을 완성하였다.

해야 할 바를 다 하였다.

다시는 재생의 괴로움을 받지 않는다.

마침내 소나 장로는 아라한(阿羅漢) 중의 한 명이 된 것이다.

【Vinaya Pitaka(律藏) 『Mahāvagga(大品)』

‘소나 콜리비사의 출가’ 중에서】

(27)

좌선에 치우쳤을 때 나타나는 병리현상

<인습적인 개념이나 관념으로 구성되어진 이 세상(일상 현실)> 즉 <각자 의 상(想, saññā)으로써 인식되어진 이 세계>를 일컬어 불교에서는 빤냐띠 (Paññati)라고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인습적인 개념이나 관념이 개입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실재 세계> 즉 <무상(無想, saññā)의 세계>를 빠라마타 (Paramattha)라고 합니다. 닙바나(Nibbhāna, 열반)는 빠라마타(Paramathā)입 니다. 궁극의 실재세계입니다. 닙바나는 고통(번뇌)이 완전히 소멸된 지고(至 高)의 행복이며, 불교의 궁극적 실천목표입니다.

누군가는, 우리가 사는 세상 저 너머, 혹은 수백만 광년 떨어져있는 미지 의 그 어느 우주공간에 궁극의 실재세계, 닙바나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생각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불교인들은 그러한 세계가 바로 자기 마음 안 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많은 수행자들이 마음 안에서 또 다른 마음의 세계, 즉 무상(無想, saññā)의 세계, 빠라마타의 세계, 그 특별한 진리의 세계를 찾아 오랜 세월 이 산사 저 암자를 찾아 헤매기도 합니다.

<관념의 세계 저 너머에 진리의 세계가 있다>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마 음 저 너머에 또 다른 마음의 세계가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가 직장이나 가정 혹은 수행처에서 호흡 · 몸의 동작 · 심리현상 등에 주의를 기울여 알아차림 하는 이유는 <관념의 세계 저 너머에 진리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관념의 세계(일상 현실) 안에 진리의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 입니다. 사실 그 두 세계는 안팎을 구분 지을 경계선마저도 존재하지 않습니 다.

불교를 공부(수행)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마음의 실재를 깨 닫는 것은 5살 아이에서부터 100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누구라도 가능합니다.

왜냐 하면, <지금, 여기>가장 가까운 곳(몸과 마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 을 관찰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 수행자들이 <마음 저 너머에 있는 또 다른 마음의 세계>를 찾아 헤매다 보면 자칫 ‘소의 등에 올라타고서 소를 찾는 목동의 어리석음’을 범하기 쉽상입니다. ’마음 저 너머에 무언가 있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지금 이 순간의 이해‘를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진리의 참성품을 언제 어디서라도 깨달을 수 있다고 하셨습 니다. <걸으면서>도 깨달을 수 있고, <서서>도 깨달을 수 있고, <앉아서>도 깨달을 수 있고, <누워서>도 진리의 참성품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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