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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신탁제도의 기원과 발달에 관한 사적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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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신탁제도의 기원과 발달에 관한 사적 고찰

Evolution of Land Development Trust : Historical Review

鄭 希 男 국토개발연구원 책임연구원

I. 서 론

II. 고대의 신탁제도

1. 신탁의 기원 : 재산의 보전수단 2. 재산권의 의탁 : 신탁의 모형

III. 중세의 신탁제도 1. 유스(USE)제도의 출현 2. 유스제도의 활용 3. 유스제도의 금지와 부활

IV. 근대의 신탁제도 V. 현대의 토지신탁제도

1. 일본의 토지신탁제도 2. 우리 나라의 토지신탁제도

VI. 결 론

목 차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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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서 론

신탁이란 믿을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재산을 맡겨서 관리 또는 처분하게 하는 재산 관리제도이 다. 신탁재산이 토지와 정착물 등 부동산인 신탁을 부동산신탁이라고 한다. 부동산신탁 중 이른바 사 업집행형 신탁을 흔히 토지신탁이라고 하여 기존 의 부동산신탁과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다. 종래의 부동산신탁은 주로 신탁재산의 원형을 그대로 유 지한 채 관리・운용하는 반면에, 토지신탁은 수탁 자가 맡겨진 토지에 어떤 외부적인 행위를 직접 가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부동산신탁을‘정(靜)적’

인 신탁이라고 한다면, 토지신탁은‘동(動)적’인 신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토지신탁은 정치・경제・사회적 여건에 따라 역할을 변모해 왔다. 고대국가 시대에 유산의 관리에서 시작된 신탁은, 봉건시대에는 봉건적인 여러 부담의 회피와 재산의 안전한 보전 수단으로 발전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사유재산제도가 확대된 근대에는 재산의 관리 및 증식 수단으로 변 모하였으며, 최근에는 유한한 도시토지의 이용을 극대화하려는 수단으로까지 발전해 왔다. 이 논문 은 이러한 토지신탁제도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 전해 왔는지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II. 고대의 신탁제도

1. 신탁의 기원 : 재산의 보전수단

오늘날 신탁이 재산의 증식 및 투자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지만, 원래 신탁은 단순히 재산의 보존 과 관리라는 목적에서 출발하였다. 또한 자본주의 경제 체제의 발전과 함께 오늘날 금전신탁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처음에는 부동산 특히 토지가 신탁

대상의 대부분을 차지했었다.

신탁은 사유재산, 즉 사유토지가 사회적으로 인 정된 곳에서 시작되었다. 고고학의 도움으로 역사 적 사실을 추정할 수 있는 기원전 8천년부터 4천 년까지의 초기 사회는 아마도 토지를 자산, 투자 대상 또는 생산 요소로 이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토지가 소유의 대상이었다고 하더라도 그것 은 집단적 소유였다. 기원전 4천년 경 유프라테스 와 티그리스 강 유역에서 대규모 정착과 함께 도시 국가가 형성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우르와 우륵 은 초기 도시국가의 하나였다. 기원전 3천년 경 우 륵의 도시 규모는 약 125ha(38만평)였다. 이 토 지는 그들을 보호해 주는 신의 소유였다. 신은 성 직자를 통해서 토지와 사람에 대한 모든 권한를 행 사했다. 그러나 도시국가 외곽의 촌락 지역에 있던 토지는 개인 소유였다. 이들 소유자는 사원의 간섭 없이 농산물을 생산하고 그 생산물을 처분할 수 있 었다. 이후 도시국가 내의 토지도 사제, 왕, 고급 관리에 의해 점차 사유화되었다. 점토판을 통한 고 대 문헌 정보에 따르면 이러한 사유토지의 매매는 기원전 2700년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일어났을까? 우리는 정 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기원전 1750년대의 함무라 비 법전을 통해서 사유토지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이후 앗시리아와 후기 바빌로니아 시 대를 거쳐 기원전 550년에 건설된 아르캐메니드 제국 이후 서기 651년까지 메소포타미아에서 이 란의 패권 시대가 지속되었다. 이란의 사산 왕조 법에 의하면, 재산에 대한 소유권은 문서로 작성되 어야 했다. 문서로 된 소유권은 시민의 재판관이나 사제로부터 획득될 수 있었고, 반드시 공증한 뒤에 국가에 등록해야 했다. 유언 역시 등록해야 했으며 이때 미망인과 자녀들의 권리가 보호받았다. 토지 소유자는 토지를 매매, 임대, 저당, 상속 및 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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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을 통해 양도할 수 있었다. 사산 왕조 후반부에 가족 소유의 토지는 개인 소유와 가족 공동소유간 의 갈등뿐 아니라, 상속을 통한 분할로 계속 위협 받았다. 이때 토지신탁이 일어났다. 즉 개인 소유 와 가족 공동소유간의 갈등을 완화하고 상속을 통 해 토지가 영세한 필지로 분할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많은 가족이 그들의 토지를 신탁조합에 맡 겼던 것이다.1)

한편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 때문에 로마인들 은 로마 이전에 있었던 사회나 로마 이후 수세기 동안의 어느 사회보다도 더욱 더 현대적인 의미의 소유권 개념을 발전시켰다. 로마제국이 계속 확장 하면서 광대한 영토가 편입되자 각 점령 지역의 토 지를 사유화하는 것이 국가에 유리했다. 개인 소유 토지에 대한 과세가 공공 소유 토지보다 훨씬 쉬웠 기 때문이었다. 토지 소유자는 토지가 없는 사람보 다 덜 이동했기 때문에 군사 노역에 동원하기도 쉬 웠다. 따라서 로마는 소유권 개념이 없는 지역에서 토지소유권 제도를 정착시키려고 애썼다.

서기 296년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칙 령을 발표하여 토지소유권을 확대하고 사유 재산 권을 공인하였다. 이때 이미 토지의 소유권은 이용 권, 수익권 및 처분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제반 권 리로 인식되었다. 소유권의 획득 방법도 다양하여 단순한 인도, 공식적인 취득, 그리고 2년 이상 이 용한 자에게 인정하는 시효에 의한 취득 등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방식이 활용되었다. 이들 사유토지는 개인의 이름으로 등록되었다. 소유권 은 완전히 보호되었으며 자유롭게 양도될 수 있었 다. 소유권은 다른 사람이 이용할 수 있는 지역권

이나 지역사회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만 제한되었 다. 저당권 개념은 초기 로마법에는 없었고 로마 공화정 후기에 와서야 발달되었다. 그 대신 저당 행위와 관련하여 오늘날 담보신탁과 유사한 방식 의 신탁이 사용되었다.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부채 를 완전히 갚은 후에 그 토지를 다시 채무자에게 돌려준다는 약속 하에, 채무자의 토지소유권을 제 3자에게 완전히 이전하는 신탁 방식을 채택하였 다. 아울러 논쟁이 있는 재산에 대해서도 제3자가 일시적으로 압류하여 보관한 뒤, 분쟁이 해결된 후 에 보관자가 승소한 자에게 그 토지를 전달했다.2)

서기 212년에 로마 시민권이 모든 로마제국 주 민에게 확대되었다. 그러나 이 조치가 있기 이전에 유증(遺贈)을 받을 수 있는 자는 로마 시민인 법정 상속인에 한정되었다. 따라서 로마 시민이 아니거 나 아버지의 사망 이후에 출생한 유복자는 유증받 을 자격이 없었다. 이러한 규제를 회피하기 위해서 신탁 방식이 활용되었다. 즉, 증여받을 자격이 있 는 자에게 자기 재산을 양도하고, 양수인으로 하여 금 당해 재산의 이익을 유증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 게 향유케 하는 계약을 체결하여 실질적인 유증의 효과가 발생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계약은 오늘날 신탁유증의 한 형태와 유사했다.3)

2. 재산권의 의탁 : 신탁의 모형

원시공동체와 고대 국가 그리고 중세 동안에 토 지는 정치적 권력, 경제적 부, 사회적 특권의 기초 였다. 따라서 군주, 귀족, 성직자로 구성된 사회 지 배 계층은 가능한 한 토지를 독점하고 토지에서 나

1) Powelson, John P. 1988. The Story of Land (Mass.: the Lincoln Institute of Land Policy) : 3-12.

2) 위의 책 : 35

3) 홍유석・이명수. 1990. 신탁의 이론과 실무 (서울: 경진사) : 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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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소득을 최대로 하고자 했다. 오늘날 토지는 자산으로 인식되고 있지만, 토지가 토지소유자 또 는 경작자에게 자산이 아니라 오히려 부채인 경우 가 허다했다. 근대 이전에 국가, 사제 및 귀족의 수 입 대부분은 토지에서 나온 지대 또는 조세였다.

이들 부담은 대부분의 경우에 토지소유자 및 경작 자에게 지나치게 무거웠다. 토지소유자들은 그러 한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예컨대, 제국 말기에 로마는 왕실의 부패 및 타 락과 게르만 족 등 이민족과의 빈번한 전쟁으로 국 고가 고갈되었다. 토지에 대한 세금이 더욱 무겁게 부과되었다. 그 결과 많은 토지 소유자가 그들의 토지를 포기하였다. 토지의 새로운 소유자를 찾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로마제국은 강제로 사람들을 토지 소유자가 되게 했다. 일부 마을에서는 점유되 지 않는 토지를 강제로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고, 주민들에게 각 필지를 분배하였다. 에피볼레(epi- bole)라고 불렀던 이 제도에 의해 토지 소유자는 토지를 강제로 경작하고서 토지에 대한 세금을 납 부해야 했다. 토지 위에 머물러야 한다는 강제성이 농업뿐만 아니라 모든 직업으로 확대되기까지 하 였다. 직업은 점차 세습적으로 되었다. 아들은 그 아버지가 하던 일을 계속하도록 강요되었고, 이들 이 떠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낙인을 찍기도 하 였다. 4)

이러한 상황에서 공포에 질린 토지소유자는 자 신을 보호하고 과중한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서 그 자신과 그의 토지를 강력한 후원자에게 의탁 (commendation) 하였다. 이들 후원자들은 조세,

부역 및 군역 등의 부담이 대부분 면제되던 국왕의 가족, 사원, 귀족, 고급 관리 등이었다. 토지소유자 들은 이들에게 자기 토지를 의탁하고서 그 의탁한 토지의 관리인이 되었다. 강력한 부자 이웃의 비호 아래 들어감으로써 영세한 토지소유자들은 정부의 폭정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하였다. 이들 에게 있어 대영주 등 강력한 후견인의 보호가 없 는 것은 오늘날 법의 보호가 없다는 것과 같았다.

그렇지만 이들 영세 소유자는 사실상 대영주의 소 작인 또는 농노로 점차 전락했다.

이 같은 현상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 공화정 등 유럽의 고대 국가, 스페인을 포함한 중세의 유럽 전역, 시리아 및 이라크 등 중동, 중국 과 일본 및 한국 등 많은 시기와 많은 지역에서 발 견할 수 있다.5)예컨대 당나라와 송나라(7-12세기) 의 중국과 헤이안 시대 말기(10-12세기)의 일본에 서 기진(寄進)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토지의탁이 성 행하였다.6)한국에서는 이러한 토지의탁을 투탁(投 託)이라고 하였으며, 조선 시대 헌종(1660~1674 년)부터 조선 시대 말까지 성행했다.7)

III. 중세의 신탁제도

1. 유스제도의 출현

오늘날 트러스트(trust)라고 부르는 신탁의 기 원은 중세의 유스(use)였다. 유스는 게르만 관습 법인 잘만(salmann)제도를 이은 것이다.8)잘만은 소유자에게서 재산(주로 부동산)을 양도받고 소유

4) Powelson, John P. 앞의 책 : 40-41.

5) Powelson, John P. 앞의 책

6) 大化銀行土地信託硏究會. 1986. 土地信託のはなし (東京: 有斐閣) : 36.

7) 홍유석・이명수. 앞의 책 : 39-43.

8) 山田昭. 1981. 信託立法過程の硏究 (東京: 勁草書房)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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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지시에 따라 재산을 관리 또는 처분하겠다고 약속한 자를 가리켰다. 중세 초기에 전쟁터에 나간 다든지 또는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려고 하는 자 들은 잘만제도를 이용하여 자기 재산을 신탁하였 다. 신탁 약정을 통해서, 만약 죽어서 돌아올 수 없 을 때는 그 재산을 교회에 기부하게 하였고, 살아 서 돌아왔을 때는 그 재산을 다시 돌려 받고자 했 다. 잘만 제도는 일종의 유언에 따른 재산 처분과 같은 기능을 하였다. 이러한 제도가 점차 유증금지 의 회피, 상속인의 지정 등 유산의 처분에 이용됨 에 따라 잘만은 유언의 집행자 역할을 담당하게 되 었다.

영국에서 발달했던 유스제도는 이러한 게르만 관습인 잘만제도를 이어 받은 것이다. 유스란 형식 적으로는 재산을 양수인에게 양도하지만 실질적으 로는 양도인이 지시하는 특정 목적에 따라 재산을 관리・처분해야 하는 제약이 따르는 양도 계약이 었다. 처음에 유스제도는 오로지 제3자만의 이익 을 위하여 사용되었다. 예컨대, 12세기에 십자군 전쟁에 참여했던 군인들은 자기 가족을 위하여 토 지 등 재산을 제3자에게 신탁 양도하였다. 13세기 초에는 종교적인 목적으로 유스제도가 널리 이용 되었다. 이때 신앙심 깊은 신도들은 유스제도를 이 용하여 자기 토지를 도시 정부에 신탁 양도하여, 도시 정부로 하여금 그 재산의 관리에서 나온 수익 을 종교단체의 재정적 재원으로 사용하도록 하였 다. 14세기에 들어오면서 유스제도는 이러한 종교 적 목적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목적으로, 그리고 제 3자의 이익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하 여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그 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알아보아야 한다.

8세기경 영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관습 또는 로 마법을 적용하여, 개인이 죽을 때 그의 재산을 자 유롭게 처분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러한 특권이 후

에 폐지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카롤링거 왕조의 기 본적인 이념, 즉 모든 토지가 국왕에게 속한다는 이념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12세기에 이르러 봉토가 다시 자유롭게 매매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토지의 소유권(현대적 의미의 소유권이라기 보다는 점유권을 의미하는 소유권) 이 인정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토지의 사적 소유 권이 인정되었다는 것은 토지의 양도성이 광범위 하게 인식되었다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그러나 영국 국왕은 최종적인 토지소유자로서 의 지위를 확인하고, 또한 실질적으로 국왕 소유 토지를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 일은 13~14세기 의 에드워드 1세(1271~1307년) 때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먼저, 에드워드는 1275년 권리보증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였고, 이 결과 두 개의 법률 즉, 1278년의 글로스터 법(Statute of Gloucester)과 1290년의 권리보증증서법(Statute of Quo Warranto)이 제정되었다. 이 법률에서 에드워드 는 봉건 영주에게 그들이 소유한 토지의 권리를 왕 실의 기록이나 장기 보유의 시효 중 하나의 방법에 의해 입증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 방법으로 입증되 지 않은 토지는 몰수되었다.

또한 에드워드는 봉건영주와 교회가 소유한 토 지에 대한 국왕의 권리에도 관심을 가졌다. 중세의 영국인은 신앙심이 깊었다. 따라서 교회와 종교단 체에 토지와 재산을 기증 또는 유증하는 경우가 많 았다. 교회가 소유한 토지는 면세 대상이었기 때문 에 국왕과 영주로부터 봉건적 의무를 회피하려는 의도에서 기증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 결과 국왕과 봉건영주의 재정과 수입은 타격을 받은 반면, 교회 의 세력은 커졌다. 이에 에드워드는 1279년에 양 도 불능소유권에 관한 법률(Statute of Mort- main)을 제정하여 왕실의 허가 없이 교회에 토지 를 양도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를 통해 토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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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인 정치 영역과 조세 의무로부터 이탈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 국왕 및 영주의 허가 없이 교회에 기증한 토지는 몰수되었다.

한편 봉건적 법률에 따르면 부계(父系)의 직계 상속자가 없는 토지와 재산은 영주나 국왕에게 귀 속되어야 했다. 귀족들은 이에 대해 만약 직계(直 系)의 남자 상속인이 없는 경우에는 방계(傍系)의 남자 상속인이 상속할 수 있는 절차를 합법화해 달 라고 에드워드에게 요구하였다. 1285년에 에드워 드 1세는 이른 바 웨스트민스터의 두 번째 법률이 라고 하는 조건부 상속법(Statute of De Donis Conditionalibus)을 제정하여 조건부 상속을 합법 화시켜 주었다. 이 권리는 후에 한사재산권(限嗣 財産權) : estate of fee tail)으로 알려지게 되었 다. 최종적인 영주로서 재산 복귀권에 관심을 가지 고 있었기에 국왕은 이 요구를 기꺼이 승낙했다.

즉, 직계 및 방계 가족이 모두 죽었다면 그 토지는 영주 및 영주의 후손에게 복귀토록 하였다.

오랜 시간을 거쳐서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 은 이른바 웨스트민스터의 제3법률이라고 하는 봉 토재분양금지법(Statute of Quia Emptores)이었 다. 이 법률은 봉토의 재분양을 종식시켰다. 이 법 의 제정은 사실상 국왕으로부터 직접 봉토를 부여 받았던 봉건영주들이 계속 요구해 왔다. 이들이 봉 토의 재분양 때문에 그들 소작인에 대한 통제권을 잃어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론적으로 보면 봉 토의 재분양이 영주의 통제권을 상실하게 하지 않 지만, 실제로 봉토의 재분양을 통해 봉건적 연결 고리가 길면 길수록 소작인에게서 봉건적 의무를 확보하는 것이 어려웠다. 이 법은 봉토의 재분양 대신에 봉건적 의무자의 대체를 요구했다. 즉 B라 는 소작인이 자기 봉토를 C라는 소작인에게 양도

할 수 있었으나, C의 의무는 B를 거치지 않고서 A 라는 영주에게 직접 귀속하도록 했던 것이다. 봉토 재분양금지법의 의도는 수직적인 연결 고리가 길 어지는 것을 방지하자는 데 있었다. 사실상 이 법 으로 인해 봉건적 연결 고리가 짧아졌다. 그러나 토지 기록이 발견되지 못하는 경우 토지의 소작권 은 국왕에서 귀속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대부분의 토지가 국왕에게 귀속되었다.

2. 유스제도의 활용

귀족과 토지소유자들은 이 모든 정부 조치를 회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하였다. 그 방법의 하 나로 고안된 것이 초기의 신탁제도라고 할 수 있는 유스제도였다. 먼저, 양도불능소유권에 관한 법률 에 의해 토지를 직접 교회에 기증할 수 없으므로, 이를 제3자에게 양도하고 양수인으로 하여금 교회 를 위하여 토지를 관리하게 하였다. 반면에 교회는 토지 소유자가 자기가 살아 있는 동안에 토지를 교 회에 봉헌하되, 자기가 죽을 때까지 그 토지 위에 서 살 수 있는 권리와 토지에서 나오는 수입을 받 을 수 있는 권리를 보유하게 하고, 심지어 이러한 권리를 자기 상속인에게 이전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여 대응하였다.

또한 상속 과정에서 토지의 봉건적 부담을 회피 하고자 유스가 이용되었다. 농민이 토지를 상속할 경우 헤리오트(heriot)라는 공물을 받쳐야 할 뿐만 아니라 피상속인이 성년이면 상속세를, 피상속인 이 미성년이면 후견의 대가로 토지에서 소출한 이 익의 일정 부분을 영주에게 납부해야 했다. 아울러 상속자에게 피상속인이 없을 경우 당해 토지는 영 주에게 귀속되었다. 농민들은 이러한 부담을 회피

9) Powelson, John P. 앞의 책 : 6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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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위해서 토지를 생전에 유스를 통해 제3자에 게 양도하되, 그 토지의 수익을 피상속자 또는 이 해 관계자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아울러 당시의 법률에 의하면 토지는 장남에게만 상속할 수 있었 다. 토지소유자는 생전에는 자신이 수익자가 되지 만 사후에는 차남 이하의 자녀에게 그 토지를 나누 어준다는 조건으로 신뢰할 만한 친지들에게 토지 를 신탁하였다.

토지소유자가 반역죄와 같은 특정한 죄를 범했 을 경우 상속 자격이 상실되었다. 그리하여 토지소 유자의 처단과 동시에 그 토지는 몰수될 수 있었 다. 특히 15세기 장미 전쟁 때 패전군에 가담한 자 들에게 반역죄를 적용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제 재를 받을 가능성이 많았다. 따라서 전쟁에 참가하 기 전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토지를 양도하는 유스를 설정하여, 후에 반역죄를 이유로 토지가 몰 수당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초기에 보통법 법원(普通法 法院)에서 는 이러한 유스의 관행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 지 않았다. 유스가 법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누가 실질적인 소유권자이냐에 있었다. 재산소유자가 수탁자에게 자기 재산을 양도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수익자를 위하여 그 재산을 관리・처분한다고 하 는 유스약정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형식적으로는 수탁자에게 토지소유권이 귀속하고 있으므로 보통 법의 원리에 따라 수탁자가 재산소유자라는 것이 었다. 따라서 수탁자가 당초의 약정과 달리 신의를 배반하고 횡령 등을 통해 자기 자신을 위하여 신탁 재산을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수익자 또는 위탁자 가 수탁자에게 약정했던 의무를 강제할 수 있는 소 송 절차가 보통법에는 없었다.

여기에서 발생한 분쟁의 처리 과정에서 보통법

과 별도로 이른바 형평법(衡平法)의 원칙이 인정 받게 되었다. 형식적인 소유권의 소재를 중시하는 보통법의 원칙과 달리, 형평법은 매매 당사자의 계 약과 약정을 더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 과정에서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초에 토지 관련 분쟁의 법원은 보통법의 원리에 따르던 장원 및 교회 법정에서 형평법의 원리를 중시했던 대법 관의 왕실 재판소로 이전되었다. 대법관 법원은 1472년에 탈타룸 사건을 처리하면서 마침내 유스 를 합법화시켰다.10) 이후 유스는「일반적 회복」

(common recovery)이라고 불렀다. 소송이 토지 를‘회복(recovery)’하기 위해서 제기되었고, 또 한 이 방식이‘보편적으로(commonly)’널리 사용 되었기 때문이었다.

3. 유스제도의 금지와 부활

그러나 유스제도에 대한 대법관의 개입은 유스 설정자와 수익자의 보호만을 반영하는 결과를 초 래했다. 이들이 법적으로 토지소유자가 아니므로 소유권과 관련한 의무나 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여러 가 지 폐해가 생겼다. 예컨대, 채무자가 채권자에게 해를 끼치기 위해 재산의 소유권을 이전해 버린다 거나, 부동산 불법 침탈자나 소송 중인 토지의 점 유자가 유력한 귀족의 보호를 받기 위해서 귀족에 게 소유권을 양도한다거나, 또는 종교 법인에 대한 토지 기증을 허가제로 바꾼 1279년의 법을 회피 하기 위해 유스를 이용하는 것 등을 들 수 있었다.

유스의 남용에 따른 가장 큰 문제는 점유권의 권리 소재가 불명확해진 자산을 선의로 구입한 제 3자의 권리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였다. 즉, 토

10) Powelson, John P. 앞의 책 :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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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양도권의 권원(權源)이 애매해진 상태에서 선의 의 제3자가 누구에게서 정말로 유효한 양도권을 얻느냐 였다. 다시 말해 보통법 상 유스의 권원을 보유하고 있는 수탁자와 형평법 상 실제로 토지를 점유하고 있는 수익자 중 누가 정당한 양도권의 권 원을 갖고 있느냐 였다. 아울러 점유권의 양도는 국왕 및 봉건영주의 권리를 하위 소유자가 침해한 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주는 어느 면에서 국왕의 하위 소유자였던 바, 스스로 유스를 설정하여 부분적으로 손실을 만회할 수 있었다. 결 국 손해를 입는 측은 국왕이었다. 최종적인 토지소 유권자인 국왕은 유스를 설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 었다. 유스가 사실상 각종 봉건적인 부담을 덜기 위해 사용되자 국왕 및 국가의 수입은 줄어들었다.

헨리 8세(1509~1547년)는 유스와 관련한 문 제를 직시하고서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먼저 그 는 1534년 로마 교회와 단절하고 로마교회의 토 지를 몰수했다. 그 다음해인 1535년에 유스(금지) 법(Statute of Use)을 제정하였다. 이 법의 제정 목적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될 수 있었다. 첫째 유 스의 성행에 의해서 잃게 된 국왕의 권리 회복, 둘 째 토지소유자가 형평법에 의해 행사했던 토지유 증의 폐지, 셋째 토지의 양도 사실을 공개하여 선 의의 제3자 보호, 마지막으로 유스의 수익자가 실 제로 토지를 점유하면서 수탁자는 특정한 의무를 지지 않는 이른바“수동(受動 )유스”를 폐지하고 수익자의 형평법상 수익권을 보통법 상 부동산권 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이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목적은 서로간에 연관 되었다. 그리하여 토지유증의 금지는 많은 반대에 부딪쳤다. 토지유증은 관습적인 소작농의 보호와 도 관련되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반란이 일어났다.

특히 유명한 것은 1536년의‘은총의 순례단 (Pilgrims of Grace)’과 1549년의‘켓 형제(Ket Brothers)’의 반란이었다. 헨리 8세는 타협점을 찾고자 하였다. 그는 1540년에 유언법(Statute of Wills)을 제정하여 일정한 제한 하에서 토지유증 을 허용하였다. 이 법을 통해 상속을 공식화 해 주 되 토지가 상속인에게 편법으로 이전되어 국가 수 입이 감소되는 일을 줄이고자 하였다.11)

세 번째와 네 번째 목적 역시 연관되었다. 이 당 시 유스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수동 유스를 보통법 상의 부동산권으로 전환하기만 하면 두 가지 목적 이 동시에 달성될 수 있었다. 그런데 보통법 상 부 동산권의 양도는 반드시 공개 점유라는 인도 방식 을 택해야 했다. 종종 (노인보다 더 오래 살 수 있 는) 젊은이들이 이 의식에 참석하였고, 이 의식을 잊지 말라고 젊은이의 따귀를 때렸다. 이러한 의식 을 거쳐 나온 (소유권과 대비되는) 토지 점유권을 시진(seisin)이라고 하였다. 정당한 점유자가 (꽉 쥔다는 의미의 seize 발음과 같이) 그 토지를 점유 (seises)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점 유권의 양도 절차는 번잡하였다. 다시 말해 급변하 는 사회에서 보다 단순한 방법이 필요했다. 아울러 유스의 법리에 따르면 토지의 양도 계약이 성립하 고 매각 대금을 지급하였다면, 공개적인 점유 인도 가 없어도 매수인에게는 수익권이 발생하고 이러 한 수익권의 발생은 보통법 상 유효한 토지 양도와 같았다. 이것은 토지 양도의 공개성을 방해하였다.

헨리 8세는 두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하고자 하 였다. 그는 양도 사실의 공개를 더욱 활발히 하여 제3자를 보호하면서 동시에 점유권의 양도 절차를 보다 단순하게 만들고자 했다. 1536년에 등록법 (Statute of Enrollment)을 공포하여 모든 매매

11) Powelson, John P. 1988. 앞의 책 : 6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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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과 양도가 서명되고 등록되도록 했다. 등록되 지 않은 매매 계약과 토지 양도는 무효로 했다.

1535년의 유스법과 1536년의 등록법이 초래한 효과 중 하나는 영국 법에서 최초로 자유보유토지 (freeholds)를 구매자가 직접 보지 않고서도 매매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등록하는 일 자체가 번거롭다는 것이 곧 드러났다. 이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도 많았다. 이 중유스의 활용은 그 중 하나였다. 이중유스는 다음 과 같은 논리였다. 토지소유자 A가 수익자 B의 이 익을 위하여 수탁자 C에게, 다시 C의 이익을 위하 여 또 다른 수탁자 D에게 토지를 양도하였다고 하 자. 이때 D의 소유권은 유스(금지)법의 적용을 받 아 인정받지 못하지만, 두 번째 유스 관계인 C의 수익권은 유스법의 적용을 받지 않으므로 수익권 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이때 C의 소유권은 B 의 이익을 위한 것이므로 원래의 수익자 B의 수익 권은 유스법을 적용한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시 말해 첫 번째 유스가 유스법의 적용 을 받아서 보통법 상의 관계로 전환되었다고 하여 도, 두 번째 유스는 전환되지 않고 형평법 상의 관 계로서 계속 살아남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유스법을 빠져나가기 위해 활용된 이중유스의 적법성에 대한 논란이 1575년에 법정 으로 비화되었다. 보통법 법원은 이중유스의 합법 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법관 법원 역시 처음에 는 국왕의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보통법 법원과 동일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에 따 라 봉건제도가 붕괴되면서 결국 1634년에 대법관 법원은 이중유스의 합법성을 공식적으로 인정하 였다.12)

이후 1660~1890년 사이에 대부분의 봉건적 의무가 폐지되면서 유스법이 무의미해졌다. 이중 유스의 복잡한 절차를 간소화하고 단 한번의 유스 설정만으로도 법적 효과가 발생할 수 있도록 유스 제도를 재구성할 필요가 나타났다. 첫 번째 유스를 생략한 채 직접 신탁을 설정할 수 있도록 개편된 유스를 트러스트(trust), 즉 오늘날 널리 부르는 신탁이라고 하였다. 절차가 보다 단순해지자 신탁 활동이 더욱 일반화되었다.13)

IV. 근대의 신탁제도

중세의 유스가 봉건적인 의무를 회피하기 위하 여 주로 이용되었으나 경제 및 사회구조가 변하면 서 신탁의 이용 목적도 다양해졌다. 신탁은 이제 중세의 유스와 같이 단순히 특정 재산에 대한 손실 을 방지하고자 하는 소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특정 한 목적을 위하여 재산을 관리한다는 보다 적극적 인 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아내에 대한 재산 소유 능력 제한을 회피하고 아내에게 특 정재산을 소유시키기 위하여 신탁이 이용되었다.

또한 가족 재산을 영속적으로 보전하기 위하여 가 족 구성원이 차례로 수익자가 되도록 미리 지정하 는 신탁 사례도 빈번해졌다.

아울러 신탁에 유상(有償) 개념이 싹트기 시작 했다. 중세의 유스는 일반적으로 각 지방의 명망 가들이 수탁하여 재산을 관리했다. 신탁을 수탁하 는 것이 자기 명성을 더하는 것이기 때문에 수탁자 들은 기꺼이 무상으로 신탁 재산을 수탁했다. 그러 나 사회가 점차 자본주의 체제로 발전하면서 모든 거래가 상업적 색채를 띠고 이윤 추구가 모든 사회

12) 장형룡. 1990. 신탁법개론 (서울: 육법사) : 105-108.

13) 천영. 1993. “토지신탁 법리에 관한 연구: 토지 유효 이용을 중심으로.”(박사학위 논문: 전주대학교) : 105-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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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의 원천으로 바뀌어 나갔다. 재산 관리 기법도 점차 복잡해져 신탁재산을 관리하는 데에도 특수 한 전문 기술을 익힌 전문가가 필요했다. 재산관리 전문가들은 재산관리와 관련한 전문 기술을 하나 의 상품으로 팔았다. 이 과정을 통하여 무상(無償) 으로 하였던 중세의 신탁이 대가를 수반하는 근대 적인 신탁으로 탈바꿈해 나아갔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신탁은 이제 재산 관리제도 로 더욱 확고해졌다. 예컨대, 배우자나 자녀에게 자기가 죽은 뒤에 재산이 곧바로 분배 및 분할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유언으로 재산을 신탁하였다.

그리하여 배우자가 생존할 동안에는 배우자에게, 배우자마저 죽은 뒤에는 그 자녀에게 수익이 돌아 가게 하였다. 그 뒤 자녀가 성년이 되었을 때에 신 탁재산이 자녀에게 귀속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유족 생활을 보장하는데 신탁이 이용되면서, 점차 생명보험과 신탁을 결합한 생명보험신탁(insur- ance trust)도 발전했다. 생명보험 그 자체도 유족 의 생활 보장을 위한 것이지만, 일시에 많은 보험 금을 유족에게 지급하는 것이 합리적이지 못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보험금을 신탁 관리하게 하여 유족 이 보험금을 낭비하는 것을 막으면서 유족의 생활 을 보장하고자 했다. 이 외에도 공익사업을 위해 신탁이 이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법인격 없는 사단 (社團)을 위해 재산을 신탁 기관에 귀속시킨 뒤 신 탁 재산의 수익을 사단의 구성원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하였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가 발전해 나가면서 신탁의 기능이 재산 관리를 위한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 가, 이제는 이윤을 추구하는 수단으로 이용되기 시 작했다. 전형적인 사례로 투자신탁(investment trust)을 들 수 있다. 산업혁명과 근대 공업 발전 이 다른 나라 보다 앞섰던 영국에서 자본축적이 팽 배하면서 국내시장이 좁아지게 되었다. 자본 수출

과 외국 투자가 성행하게 되었다. 외국에 관한 정 치・경제적 사정에 정통하지 못한 일반 투자가들 이 외국에 관한 사정과 유가증권 투자 기술에 정통 한 사람에게 투자를 위탁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영국에서 1860~70년대에 신탁과 투자가 결합한 유형, 곧 투자신탁이 나타났다.

신탁이 이윤 추구를 위한 수단으로 바뀌면서 신 탁 객체인 신탁재산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종래에 는 신탁재산이 주로 토지와 같은 부동산이었으나, 현금과 유가증권이 신탁재산으로 등장하게 되었 다. 현금과 유가증권이 부동산보다 더욱 환금성 (換金性)이 높고 편리하기 때문이었다. 신탁재산 의 내용이 변하면서 신탁에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 었다. 신탁의 자본 공급 기능이었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산업자본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신 탁에 투자된 자금은 일반 자금에 비해 장기간에 걸 친 안정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신탁자금이 기업가 들에게 보다 유리했다. 신탁을 통한 자본 공급 기 능은 신탁 대상에 현금과 유가증권이 포함되자 더 욱 효과적으로 발휘되었다.

신탁이 이처럼 이윤 추구 및 자본 공급 수단으 로 활용되면서 신탁에 상업적 성격이 가미된 영업 신탁이 나타나게 되었다. 영업신탁은 특히 미국에 서 발달했다. 이것은 미국이 영국과 달리 봉건제도 를 경험하지 않은 채 급속한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 전했을 뿐 아니라, 국토 개발・인구 증가 등에 따 라 늘어난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신탁에 대한 요구 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끊임없이 변모하고 유 동적인 신대륙 신흥 사회에서는 개인적인 믿음이 쉽게 자랄 수 없었기 때문에, 법인인 수탁회사에게 신탁하려는 추세가 자연스러울 수도 있었다.

18세기 말경에 영업신탁을 업무로 하는 은행이 나타나고, 19세기초에는 일부 보험회사에서 영업 신탁을 담당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853년에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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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을 전문으로 하는 세계 최초의 신탁회사(The United States Trust Company)가 설립되었다.

1865년 남북전쟁의 종식과 함께 미국의 자본주의 적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이와 동시에 영업신탁도 비약적으로 융성・발전하게 되었다.

신탁은 은행・보험 등과 함께 주요한 금융업무의 하나로 자리잡았다.14)

이와 같이 신탁업이 발전하면서 현금과 유가증 권 등 동산이 신탁의 주된 대상으로 전환되어 갔 다. 그렇지만 재산의 보존과 증식이라는 원래의 신 탁목적이 살아진 것은 아니었다. 부동산신탁이 여 전히 존재했다. 이러한 부동산신탁은 대개가 부동 산의 관리를 목적으로 하는 관리신탁, 건물의 건설 자금 등의 조달을 목적으로 하는 처분신탁 및 건물 신탁, 그리고 담보신탁 위주로 운영되었다. 부동산 개발과 관련된 신탁도 대개의 경우는 토지소유자 가 건물을 직접 건설한 뒤 수탁자는 토지와 건물의 임대와 관리만을 맡아 주는 사실상 관리신탁이었 다. 사업 집행형 부동산신탁, 즉 토지(개발)신탁이 신탁의 영역에 추가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또한 토지신탁은 일본 및 프랑스 등 일부 국가에서만 활 용되고 있다. 토지신탁이 우리보다 앞서 도입된 일 본에서 토지신탁이 어떠한 역사적 배경을 갖고 발 전되었는지를 다음에서 살펴본다.

V. 현대의 토지신탁제도

1. 일본의 토지신탁제도

일본에서도 신탁법과 신탁업법이 제정된 1922 년 당시부터 사업집행형 신탁이 제도적으로는 가

능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까지 실제 부동 산의 직접 개발과 관련한 신탁 사례는 없었다.15) 토지개발신탁은 1969년 도시재개발 사업과 관련 하여 최초로 검토되었다. 또한 일본신탁협회는 도 시의 주택난을 해소하고 양질의 저렴한 임대주택 을 공급하기 위해 토지신탁을 활용하자고 제안하 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이 민간 부문의 주택 공급 방안으로서 각계의 주목을 받았으나 실 제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렇게 토지신탁이 아직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사회・경제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토지소유자는 일본국토개조론 등의 여파로 지가가 계속 상승하 자 임대소득보다는 지가 상승 차이에서 나오는 자 본이익을 더욱 선호하게 되고, 따라서 저효율로 이 용해서 나중에 처분을 어렵게 하기보다는 처분이 보다 용이한 나대지 상태로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 이라고 생각했다. 토지이용자 역시 여전히 토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고, 비록 지가가 높이 상승하고 있었지만 아직 구입이 가능한 가격이었 다. 아울러 신탁사업으로 제안된 대상 주택이 주택 공단의 저렴한 주택을 주로 상정했기 때문에 민간 건설업자의 입장에서 보면 채산성이 맞지 않았다.

수탁기관의 측면에서는 부동산시장이 매매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임대시장이 아 직 성숙하지 못하는 등 개발신탁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울러 신탁은행의 업무 가 기업의 설비 투자에 대한 장기자금 공급을 지원 하기 위한 대출신탁 등 금전신탁 중심으로 운영되 었다. 따라서 장시간이 소요되는 개발신탁에 관심 을 덜 기울인 반면, 부동산신탁은 금융 업무의 보 완 수단이나 관리 수단에 한정되는 경향이 강했다.

14) 장형룡. 앞의 책 : 45-49.

15) 土地信託實務硏究會. 1993. 土地信託實務ハントフツク(東京: 第一法規出版株式會社) : 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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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1970년대 두 번의 석유 파동을 계기로 일본 경제가 안정 성장으로 진행되었다. 이와 병행 하여 토지신탁과 관련 있는 경제・사회적 여건에 도 변화가 일어났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 가가 1970년대와 달리 높은 수준에서 안정을 유 지하게 되자 토지소유자와 이용자 모두의 의식이 크게 변했다.

우선 토지소유자에게는 지가가 안정되자 과거 와 같은 토지의 자본이득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 다. 반면에 토지의 양도 및 상속 등에 대한 부담뿐 만 아니라 매년 납부해야 하는 고정자산세의 과세 부담이 지속적으로 상승하였다. 토지의 보유 비용 이 오히려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지가 상 승에 의한 자본이득을 희망했던 토지소유자들도 토지의 유효한 고도 이용을 통해 장기적이고 안정 적인 사업 이익의 확보에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

토지이용자의 의식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지가 가 높은 수준에서 안정을 유지하고 주택 가격 역시 안정을 유지하자 집에 대한 구매 수요는 줄어들었 다. 그 결과 비록 종래와 같은 저렴한 임대주택은 매력을 갖지 못했다고 하여도 고급 임대주택에 대 한 수요는 늘어 났다. 기업 역시 오피스 빌딩, 상업 용 빌딩, 주택 등 각종 시설의 용지 취득 비용과 금 리 부담이 증가하자 채산성이나 환금성을 고려하 여 토지를 구입하는 대신 임대를 통해 비용을 절감 하려는 경향이 강해졌다.

더구나 수탁자인 신탁은행에서도 변화가 발생 하였다. 국내외에서 급속하게 진전되고 있던 금융 자유화와 자금 수요 구조의 변화에 직면하자, 신탁 은행은 이때까지의 장기금융 중심의 업무에서 변 신을 모색하게 되었다. 신탁은행은 이미 부동산 중 개・감정・개발 상담 등 매우 포괄적인 기능을 갖 추고 있었다. 자금 조달과 사업 추진 능력이 부족 했던 토지소유자가 자금 동원과 전문적인 사업 수

행 능력을 갖춘 신탁은행이나 신탁회사에 토지를 위탁하여 재산 증식을 도모하려 하자, 신탁을 이용 한 재산관리 부문이 다시 조명을 받았고 부동산신 탁의 발전에 커다란 기대를 걸게 되었다. 토지신탁 이 활성화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성숙해졌다.

공공사업의 추진에 민간 활력의 도입 역시 필요 하였다. 1983년 이후 정부 재정이 어렵게 되자 공공 사업비가 대폭 축소되었다. 정부의 재정 부담을 증 가시키지 않으면서 공공 사업을 추진해야 하는 여건 속에서 민간의 풍부한 자금과 우수한 기술 및 경영 능력의 활용 필요성이 증대되었다. 더욱이 무역 흑 자가 늘어나자 해외로부터의 국내시장 개방 압력 역 시 늘어났다. 이러한 개방 압력에 효과적으로 대처 하고 내수 중심의 안정적 경제 성장을 실현하기 위 한 유효한 수단으로 토지신탁이 주목받았다.

먼저 1982년 7월 산업구조심의회의 중간 답신 중「금후의 주택산업 및 시책의 방식」부문에서, 토 지신탁에 의해 토지의 신탁 수익을 증권화하고 수 익증권을 통해 사실상 토지를 유동화 시키며 궁극 적으로 택지 공급을 촉진하자고 제안하였다. 토지 신탁이 행정 및 정책 부문에서 거론된 효시였다.

이러한 생각은 1983년 10월 자민당 정무조사회의

「민간활력도입을 위한 방책」및 정부의「종합경제 대책」에 반영되었다. 예컨대「민간활력도입을 위 한 방책」가운데에는, 토지개발신탁이 공동 사업 이나 재개발사업 등 많은 토지소유자가 관련된 사 업에서 소유자와 사업시행자간의 갈등을 줄일 수 있고, 아울러 고지가를 현재화시키지 않으면서 토 지를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으 므로 재개발사업에 활용하자는 정책 건의가 포함 되어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84년 3월에 마침내 토지신 탁이 최초로 이루어졌다. 이후 1993년까지 1,947 건의 신탁개발이 이루어지는 등 비약적인 신장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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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나타냈다. 민간 부문의 토지개발신탁을 촉진한 다는 차원에서 주택 공급, 도시 재개발사업 등 공 공 사업 분야에서도 개발신탁을 활용할 수 있도록 1986년 국・공유지 관계 법령도 개정되었다. 이 후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의해 국・공유지의 토 지개발신탁이 이루어졌고 국철청산사업단 등 공공 기관에서도 토지신탁을 활용하기에 이르렀다.16)

2. 우리 나라의 토지신탁제도

현재 우리 나라에서 활용되고 있는 신탁제도는 한일합방 이후 일본에 의하여 도입되었지만, 우리 의 고유한 신탁 현상이 그 이전에 이미 존재했었 다. 우리 나라 신탁제도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투 탁제도(投託制度)는 토지제도가 극히 문란하였던 조선시대 현종(1650년대) 무렵에 발생하였다. 이 제도는 무력한 지주들이 관리나 권문호족들로부터 불법으로 토지를 침탈 당하지 않기 위하여 자기의 토지를 궁방소유의 토지(宮房田)로 편입시키는 것 을 말한다. 궁방전으로 편입되면 이들은 그 토지의 관리원(導掌) 신분이 되었으며, 이 신분은 세습할 수 있었다. 도장은 궁세(宮稅) 외에는 큰 부담과 위협 없이 그 토지를 사용하거나 수익을 처분할 수 있었다. 이러한 투탁제도는 어느 면에서 보면 영국 의 유스제도와 유사했다.

투탁제도 외에도 신탁 유사현상이 있었다. 예컨 대, 상전이 자신의 토지를 노복(奴僕)의 명의로 소 유・관리・처분한 사례, 또는 노복이 상전의 금전 을 맡아 자기의 능력껏 증식한 뒤 주인에게 원본과 수익을 되돌려 주는 사례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투탁제도 및 사회적 신탁 유사현상은 오늘

날의 신탁제도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투탁제도는 1894년 광무개혁으로 면세 혜택이 철폐됨에 따라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다가 1907년 6월 폐지 되었다. 사회적 신탁 유사현상 역시 우리 나라를 강점한 일본인에 의하여 신탁제도가 도입되자 그 자취를 감추었다.

우리 나라에 신탁업이 법령으로 규정된 것은 1918년 3월「조선은행법」의 개정과 6월「조선식 산은행령」의 제정에서「신탁 업무」라는 영업 과목 이 추가된 것이 시초이다. 신탁업의 영업은 이보다 다소 앞서 1910년 3월에 등본(藤本)합자회사가 투자신탁, 농업 개간 및 부동산 관리업무를 개시하 였고, 뒤이어 남조선상사신탁회사, 인천신탁회사 등이 설립되었다. 그러나 신탁회사들이 허가 없이 마구 설립되어 80여 개의 회사가 난립하고, 이들 회사가 금전신탁의 명목으로 금융업을 영위하였지 만, 수탁된 자금의 운용 방법에 대해서 명확한 규 제가 없는 등의 문제가 일어났다. 총독부 당국은 신탁업 규제를 위한 법제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이 에 1931년 6월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일본의 신 탁법을 차용하게 하는 동시에「조선신탁업령」을 제정하였다. 같은 해 9월에 조선신탁업령 시행 세 칙 및 부속 법령을 공포하여 1932년 12월부터 시 행되게 하였다. 이로써 우리 나라의 근대 신탁제도 가 새로운 장을 열었다.

1930년대는 만주사변 발발부터 중일 전쟁, 태 평양 전쟁까지 일본의 침략전쟁이 가속화된 시기 로 전시 통제경제 체제가 강화되었다. 신탁업도 이 와 같은 환경 여건에 따라 반강제적 저축 유치와 전비 조달을 위한 국채 인수, 군수산업 자금 공급 을 위한 금전신탁의 수탁활동이 강화되었다. 그 결

16) 總合硏究開發機構. 1986. 信託開發による土地の流動化に關する基礎硏究 (東京) : 24-26. 천영. 1993. “토지신탁 법리에 관한 연구: 토지 유효 이용을 중심으로.”(박사학위 논문: 전주대학교) : 140-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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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부동산신탁의 고유 활동은 부진하였다.

해방 직후 정치・경제 질서의 혼란으로 신탁업 역시 존폐의 위기에 처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신탁업은 명맥만 유지하였다. 5.16이후 경제개발계획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자 내자 조달의 극대화 및 다변화가 요구되었다. 신탁업의 필요성 이 다시 대두되었다. 재무부는 1961년 11월 한일 은행에게 신탁업을 재개하도록 허가하였다. 또한 신탁업 발전을 위하여 1961년 12월에 신탁법과 신탁업법을, 그리고 1962년 1월에 담보부사채신 탁법을 각각 공포하여 신탁 관련 기본 법령을 정비 하였다. 이후 1962년 6월부터 신탁업은 5개 시중 은행 모두가 겸영하는 시대로 진입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신탁업은 은행업의 부수 업무로 운 영되었다. 게다가 몇 가지 문제점도 노출되었다. 먼 저 신탁업무가 금전신탁에만 지나치게 편중되어 유 가증권 및 부동산신탁 등 다른 신탁업무가 경시되었 다. 또한 신탁자금이 신탁의 취지에 따라 독자적으로 운용되지 못하고 은행 여신 업무에서 필요로 하는 자 금의 조달 및 제공 성격으로 전락되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정부는 신탁업 본연의 독자적인 발전과 신 탁업의 특성에서 나오는 중장기 산업 자금의 안정적 조달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개선 방안을 모색하였 다. 경제개발계획의 성공적 수행과 함께 국민의 소득 수준이 향상되면서 저축 수단의 다원화, 고액화 및 장기화에 부응할 정책적 필요도 있었다.

이를 위하여 신탁 전담은행 즉, 신탁은행을 1968년 10월에 창립하고 동시에 타 은행에서는 신탁업을 영위할 수 없게 하였다. 그러나 신탁 전 업은행으로서의 경영상의 문제와 정부의 금융정책 의 변화에 의해 한국신탁은행은 1976년 서울은행

과 합병하여 서울신탁은행으로 변신하였다. 그 뒤 1983년에 정부는 다시 지방은행에게, 그리고 1984년에는 모든 시중은행에게 신탁업의 겸업을 허용하기에 이르렀다.17)

<그림 1>은 신탁업을 주업으로 하여 창설되었 던 서울신탁은행이 1976년부터 1988년까지 수탁 하였던 신탁 실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탁 업무 중 대부분은 금전신탁 및 증권투자신탁 이었다. 여전히 부동산신탁이 전체 신탁업에서 차 지하는 비중이 극히 낮았다. 부동산신탁이 전체 신 탁 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율 역시 <그림 2>가 보여 주고 있는 것과 같이 1976년의 0.14%에서 1988 년의 0.001%로 계속 낮아지고 있었다.18)

이처럼 부동산신탁이 사회적 호응을 받지 못했 던 이유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토지의 소유 권을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소유권과 이용권을 분 리하여 자기 토지를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이용하 게 한다는 것이 우리의 정서 상 잘 받아들여지지 않 았다. 아울러 지난 60년대이래 토지 가격이 다른 어 떤 경제 요소보다도 급격히 상승하였기 때문에 토 지를 이용한 대가(지대)를 받기보다는 토지 가치의 변화에서 발생하는 자본이득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컸을 수도 있었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1988년 토지공개념제도를 도입하면서 정부는 부동산신탁제도의 도입을 검토 하였다. 유한한 토지 자원을 토지소유자가 누구인 지를 떠나서 최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고, 도시용 토지의 수요에 만성적으로 부족했던 토지 공급을 늘리는 데 민간의 활력을 이용할 수 있으며, 토지 공급이 늘어나면서도 지가는 안정시킬 수 있는 방 안의 하나라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17) 서울신탁은행. 1989. 서울신탁은행 30년사 : 114-134.

18) 위의 책 : 793-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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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4.13 부동산투기억제대책”을 마련하면서 부동산신탁업을 전문업으로 육성시킬 수 있는 방안 을 구체적으로 검토하였다. 1991년 5월 10일 재무 부는 마침내“부동산신탁 업무운용 요강”을 제정하 였다.

부동산에 대한 국민의 인식을 소유에서 이용으 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토지개발을 전담할 전문 기관의 설립이 우선적으로 필요하였다. 토지소유 자가 개발자금・전문지식 및 개발 경험이 없어서

자기 토지를 개발・이용하고자 하여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동 산개발에는 상당한 전문지식이 필요하고 부동산신 탁업은 또한 상당한 공적(公的) 신용을 필요로 한 다. 부동산신탁 전업회사는 이러한 두 가지 전제조 건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어야 했다. 이미 오랫 동안 부동산 관련 업무를 담당해 온 재무부 산하 정부출자기관인 대한성업공사와 한국감정원이 재 발견되었다. 이 두 기관의 자회사인 대한부동산신 탁주식회사와 한국부동산신탁주식회사가 1991년 4월 13일에 설립을 인가 받았고, 1991년 5월 15 일부터 부동산신탁 업무를 개시하였다. 다만 토지 신탁의 실시는 부동산 경기의 과열을 우려하여 일 시 유보되었다. 마침내 1992년 11월 16일에 토지 신탁이, 그리고 1993년 2월 1일에 담보신탁이 시 행 인가를 받아 토지신탁이 본격적으로 도입・운 영되게 되었다. 19)

이후 토지신탁에 대한 늘어나는 수요를 대응하 고, 아울러 토지신탁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을 확 대하고자 하는 정책들이 채택되었다. 무엇보다도 부동산신탁회사가 늘어났다. 1996년에 한국토지 공사의 자회사로 한국토지신탁회사가, 그리고 한 국주택은행의 자회사로 주은부동산신탁회사가 설 립되었다. 또한 부동산신탁의 영역 역시 지속적으 로 확대되어, 당초 민간의 보유 토지에서 국유지까 지, 일반 토지에서 공장 용지 및 재개발 사업지까 지 늘어났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토지신탁에 대 한 사회적 관심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우리 나라 에서 토지신탁회사가 최초로 인가된 1991년에 총 17건의 신탁 관련 업무가 수탁되었다. 이후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 1995년에는 16배가 성장하였 고, 1996년 8월까지 총 856건의 업무가 수탁되었

<그림 2> 부동산신탁의 수탁 추이(1976~1988)

<그림 1> 신탁계정의 변화 추이(1976~1988)

80 %

70 60 50 40 30 20 10

0 1976 77 78 79 80 81 82 83 84 85 86 87 1988

금전신탁 유가증권 금전채권

토지건물 증권투자

% 0.14

0.12

0.1

0.08

0.06

0.04

0.02

0

1976 77 78 79 80 81 82 83 84 85 86 87 1988

19) 좌담회“토지신탁제도는 정착될 수 있는가?”1994. 국토와 건설 5월호 : 23-26.

(16)

다. 초기에 신탁회사의 업무는 개발신탁보다는 부 수적 업무, 예컨대 컨설팅, 대리 사무 및 중개 사무 등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1992년에 토지신탁 업 무가 인가된 이후 개발신탁이 점차 급증하여 1993년에 4건, 1994년에 8건, 1995년에 25건, 1996년에 82건 등 총 119건의 개발신탁이 수탁되 기에 이르렀다.20)

VI. 결 론

이 논문은 최근 우리 사회에서 관심을 끌고 있 는 토지신탁제도가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를 역사 적으로 고찰하였다.

신탁 활동이 처음 관찰되는 고대국가 시대에는 신탁이 주로 유산을 관리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 다. 봉건시대에는 신탁이 봉건적인 부담을 회피하 면서 동시에 가족의 재산을 안전하게 보전하는 수 단으로 활용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가 발 달하고 동시에 프랑스 혁명 이후 사유재산제도가 정착하게 되자 신탁의 역할은 다시 한 번 변모하게 되었다. 신탁이 소극적인 재산의 관리 수단에서 적 극적인 재산의 증식 수단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 다. 이 모든 과정에서 신탁재산인 토지와 건물은 원형 그대로가 유지된 채 관리・운용되었다. 이것 을 흔히 부동산신탁이라고 하였다. 위탁자의 재산 을 관리만 하는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휴 지 상태로 방치된 도시토지를 보다 더 효율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이 1980년대 이후 나타났다.

이처럼 수탁기관이 신탁토지에 외부적인 행위, 다 시 말하면 신탁토지를 개발한 후 관리 및 처분하는 신탁 활동을 토지신탁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토지신탁은 여러 가지 장점을 가지고 있 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선 공공의 직접적인 개입이 없어도 타협과 협상을 통해 민간이 토지 개

발 및 공급을 늘릴 수 있다. 또한 토지신탁은 규제 일변도로 추진해 왔던 유휴토지 또는 비업무용토 지 관련 정책을 보완할 수 있다. 아울러 제한된 토 지 자원의 효율적 이용을 도모할 수 있다. 끝으로 토지 시장에 민간의 활력을 유인하여 공공의 인적 및 재정적 부담을 줄일 수도 있다. 이러한 장점을 인식하고서 1990년대 이후 우리 나라에서도 토지 신탁제도가 도입된 바 있다. 그러나 토지신탁제도 가 도입된지 일천하여 아직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 타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추후 토지신탁을 활성 화시킬 수 있는 정책적 방안의 모색이 요구된다고 말할 수 있다.

좌담회“토지신탁제도는 정착될 수 있는가?”국토와 건설.

1994. 5월호: 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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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7)

Land development trust(LDT) is a kind of trust, in which landowner or truster transfers his ownership to a trust company or trustee, while trustee uses land to construct buildings and deliv- ers profits thereof to beneficiary designated by truster. After trust contract is terminated, trustee returns the land and buildings thereon to truster.

LDT has a long history. Trust activity appeared in the society where private ownership was rec- ognized. It began with a purpose for securing property in the ancient states, including Mesopotamia, Egypt and Rome. The typical form of trust in this era was commendation;

landowner brought himself and his land under the shield of power men in order to escape from the state's heavy taxation and burdens. In the medieval era, it was reformulated with a use sys- tem, which evolved into trust after emerging capitalism. In the late twentieth century, another form of trust which is called LDT evolved in some countries including Japan, France and Korea.

The basic purpose of LDT policy in these countries are to enhance the efficiency of land use, pre- vent the rise in land price, and allow the private sector to enter the land development market.

This paper describes why and how trust and LDT has evolved from the ancient time to the pre- sent.

ABSTRACT

Evolution of Land Development Trust : Historical Review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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