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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정활동 자료집

일본 군 위 안부 문 제의 현황 과 해 결 방 안

1997 . 12

국회의원 연구단체

일 본 군 위 안부 문 제 연 구 모 임

발간사

자 료 집을 발간 하 며

피해자들의 용기있는 증언과 민간단체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제2 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50여년이 지난 90 년에 들어와서 잔혹했던 실상이 세계의 주목을 받 기 시작했습니다.

유엔과 국제노동기구, 국제법률가위원회를 비롯한 국제기구와 각국의 수많은 인권단체들 이 일본군이 직접 관여한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들에 대해 일본정부가 진상을 완전히 공개 하며, 피해자들에게 국가차원의 배상을 실시하도록 권고하고 있습니다.

초로의 피해자들과 민간단체들이 세계의 양심을 향해 과거 일본제국주의의 비인도적인 만 행에 대한 단죄를 호소해 왔지만, 정작 우리 국회와 정부는 피해자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제외하고는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을 묻는 대일 외교노력을 게을리 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오히려 직접 피해국이 아닌 미국 등이 일본군 위안부 성노예제도, 73 1부대 생체실험관계 자 등에 대한 입국을 금지하는 조치를 단행하여 우리를 부끄럽게 하였습니다.

범죄의 비인도성과 일본군의 개입이 명확한 위안부 문제는 우리 정부와 국회가 주도적으 로 진상규명과 법적 책임이행을 일본정부에 촉구했어야 했습니다.

이에 다소 늦은 듯 하지만 평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져 온 29 명의 국회의원들 이 모여 이 문제의 조속하고, 올바른 해결을 위해 올해 6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모임 을 결성하였습니다.

연구모임 은 몇 번의 간담회 등을 진행, 그 성과로 제185회 정기국회에 출입국관리법 개 정안을 발의하여 일본군전범에 대한 출입을 금지하도록 법적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법적 책 임 없는 일본의 위로금 지급강행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이 운동의 진로를 개척하는 큰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활동을 통해 한 분의 피해자라도 더 살아 계실 때 일본정부가 진상규명 과 국가배상을 실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위와 같은 활동을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올바른 해결에 뜻을 함께 했던 분들의 옥고를 모아 자료집을 발간하였습니다. 이 자료집의 원고는 각종 토론회 등을 통해 발표되었던 내용입니다. 아무쪼록 관심 있는 많은 분들, 특히 국회의원님들의 의 정활동에 참고가 되길 기대합니다.

1997 . 12

일본군 위안부 문제연구모임 대표

(2)

국회의원 이 미 경

차 례

발간사

조선 식민정책 의 일환으로서 일본군 위안부 윤 정 옥 일본군 위안소 정책의 수립과 전개 정 진 성

중대한 인권침해의 희생자에 대한 배상 테오 반 보 벤 일본 전쟁범죄 처벌 지금도 가능한가 박원 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의 전망

-배상에 관한 국제법적 논의를 중심으로 박원 순

전시 군 성노예 문제에 대한 UN인권위원회 특별보고서 라 디카 쿠 마 라스 와 미

일본이 모르는 전쟁책임

-ILO조약 및 권고적용에 관한 전문가위원회의 입장 도 츠 카 에쯔 로 우

일본군 위안부 문제 관련 고소 ・고발장 일본의 민간기금 에 대한 입장

한국 ・민간위로금을 왜 반대하는가? 김 경희

필 리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당한 고통에 대해 배상하라!

줄 리 아 포 라스

북 한 ・왜 민간모금을 반대하는가? 홍 선 옥

타 이완 ・타이완의 일본군 위안부들은 정의를 원한다 유 팡 샤 우

일본 ・왜 민간모금 구상에 반대하는가 이시 가 와 이쯔 꼬 일본군 위안부 문제관련 주요 성명

국 제 법률 가 위 원 회 국 제 조 정 협 회

대한민국 국회의 활동 국 회 의 원 서 명운 동 성 명서

출 입 국 관 리 법 개 정 내용

일본 군 위 안부 문 제 의 올 바른 해 결 촉 구 결 의 안 일본군 위안부 문제 연구모임 은

(3)

조선 식 민정 책 의 일 환 으 로 서 일 본 군 위 안부 윤정옥

일 본 군 위 안소 정책 의 수 립 과 전 개 정진성

중 대한 인권 침 해의 희 생 자 에 대 한 배상 테오 반 보벤

일 본 전 쟁 범 죄 처 벌 지금 도 가능 한 가 박원순

일 본 군 위 안부 문 제 해 결 의 전 망

-배상에 관한 국제법적 논의를 중심으로 박원순

조 선 식 민정책 의 일 환 으 로 서 일본 군 위 안부

윤 정 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

이 글은 역사비평사에서 출판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상」에

서 발췌한 것입니다. -편집자

1 . 머 리 말

일본국 위안부 문제는 궁극적으로 인권문제이다. 여성이 남성 위주 사회에서 성노예 되 기를 강요당함으로써 인권을 유린당한 문제요. 빈곤층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희생된 계급 문제이기도 하다. 일본이 당시 조선을 강점하고 있던 시기여서 조선인 위안부는 위의 두 가 지 요인뿐 아니라 지배국이 피지배국에서, 지배하는 민족이 피지배 민족에게 가하는 차별도 아울러 받아야 했다. 이 글에서는 이 문제를 피지배국 그리고 피지배 민족으로서 조선 여성 이 계획적으로, 조직적으로, 집단적으로 지배국의 군대에 강간당한 문제로서 다루고자 한 다. 필자는 조선의 일본군 위안부제도를 일본 정부의 조선 지배정책이었던 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본다. 이 점이 나머지 아시아 피해 여성과 다른 점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4)

파악하려면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올바로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이 점에 초점을 맞췄다.

한편 국내에는 이 문제에 관한 당시 관청이나 일본군의 문서가 없다시피 한 것도 이유가 되었거니와 문서에서 파악할 수 없는 피해자의 사사로운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 에 피해자의 증언과 목격자의 증언을 중요한 참고로 삼았다.

2 . 조 선 인 일 본 군 위 안부 의 실 태

일본군이 군위안부 제도를 만든 이유는 첫째로 점령지역에서 일분군의 현지 여성에 대한 강간을 막아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서, 둘째로 성병으로부터 안전한 여성을 제공해 성병 감 염을 예방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오카무라 야스지( 岡村寧次) 대장은 1932 년, 강간사 건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위안부 안을 만들어냈다고1 ) 말하고 있다. 그리고 1942 년에 필리핀 루손섬의 파구나시와 당시 버마 만달레이에서 일분군 중대가 각기 전멸한 일이 있었 다. 이유는 현지 여성들을 강간하고 죽인 일본 군인들에게 현지 남성들이 보복했기 때문이 었다. 일본군은 점령지의 치안을 유지하며 군인의 사기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은 군인의 성 문제 해결에 있다고 생각했다. 두번째 문제는 19 18 년의 시베라아 출병에서 얻은 교훈이라고 생각한다. 당시에 실질적인 위안부 였던 여성은 가라유키 라고 불리던 매춘이 직업인 여 성이었다. 이들에게서 성병에 감염되어 죽은 일본 군인이 싸우다 죽은 군인보다 더 많았다 는 소문이 날 정도로 문제는 심각했다. 일본군은 이 사실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중일전쟁 과 태평양전쟁 때 신경질적으로 위안부 를 검진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볼 때에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렇다고 직업 여성이 아닌 여성을 위안부 로 삼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본 남성의 이중적 성도덕이 작용한 것이다. 직업 여성이 아니면 군인들의 동생 이나 딸이 될 텐데, 이 여성들은 이에( 家) 를 잇기 위해 적자(嫡子) 를 생산해야 하는 존재 이다. 이들 여성이 생산이 목적이 아닌 일본군의 성욕 해결을 위해 불특정 다수의 남성을 상대로 위안부 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동생이나 딸이 위안부가 된다면 군인의 사기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떨어뜨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식민지 조선의 여성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대만도 일본의 식민지였으나 이 글에서는 조선만을 다루도록 한다) .

구체적으로 조선에서 어떤 연령층의 여성이 위안부 가 되었고 어떻게 성 수탈을 당했나 등에 대한 알아보기로 한다. <표1>은 한국 정부의 보건사회부( 이하 보사부) 에 신고한 위안 부 160 명중에서 기억이 비교적 정확하다고 생각되는 56 명을 골라 그들이 끌려갔던 해의 나 이를 조사한 표이다. <표2>는 1992 년 일본 도쿄에서 사흘간 개설한 신고전화에 신고해온 증 언을 모은 『종군위안부 110 번』( 이하 『110 번』) 을 정리해 본 표이다. 단 『110 번』의 제1 장에 수록된 32 명의 증언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표1> 끌려갔을 때의 나이

나이 12 13 14 15 16 17 18 19 20 2 1 22 23 24 25 기억없음 계 사람수 1 0 0 5 10 17 9 3 1 2 0 1 2 1 4 56 참고: 한국 정부 보건사회부에 신고한 피해자의 증언

(5)

<표2> 끌려갔을 때의 나이

나이 12 13 14 15 16 17 18 19 20 2 1 22 23 24 25 26 27 28 기억없음 계

사람수 1 2 0 4 7 8 4 2 1 1 1 1 0 0 0 0 1 5 38 참고: 한국정신문제대책협의회에 신고한 피해자 중 38 명의 증언

<표3> . 일본군이 말하는 조선인 전 일본군 위안부

나 이 사람 수 증언자 수

16- 20 17- 18 18 18- 20 18- 30 19세보다 젊었다.

10 대 후반- 20 대 전반 18- 24

20 20세 정도 20세 전후

22 22- 23

25

위안부 나이에 대해 언급없음

25

위안부 수에 대해 언급 없음 1

20 20 1 많았다.

위안부 수에 대해 언급 없음 3- 4

많다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 18

계 32

참고: 『종군위안부110 번(從軍慰安婦110番) 』( 이하 110番) 32 명의 증언

어떤 증언자는 조선인 위안부 스스로가 말한 나이에 대해서 언급이 없었으나 위안소를 찾아간 일본 군인이 추측한 피해자의 나이. 즉 가해자측의 증언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표를 만들어 보았다.

<표1>과 <표2> 를 보면 제일 많이 끌려간 나이가 17세이다. 조금 넓게 잡으면 두 곳의 경우 가 다 15 , 16 , 17 , 18세이다. <표3>의 경우 어느 증언자는 자기가 만난 위안부 한 사람에 대해서 자기가 정확히 알고 있는 나이를 증언하고, 또 다른 사람은 짐작한 나이를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증언자는 자신이 위안소에서 본 위안부 를 나이와 수를 짐작해서 말하고 있다. 필자의 관심을 끈 사실은 피해 당사자와 가해자의 말이 거의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

표3>의 나이는 증언자인 전 일본 군인이 위안소 안에 조선인 위안부 를 만났을 때의 나이 이다. 피해자가 조선에서 특정한 위안소까지 가는 데 시간이 걸렸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특정한 위안소에 배치된 후 세월이 지난 후에 증언자를 만났을 수 있고, 또한 여러 위안소 를 거쳐 그곳에 왔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고 보면 16세에서 20세까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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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많다고 하는 말이 <표1> , <표2>와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일본군 위안부 . 정확히 말해서 일본군 성노예를 정신대라 고 부른다. 일제 말기에는 정신대 나간다. 처녀공출 당했다고 했다. 이 시대에 14세 이 상의 결혼하지 않은 딸을 둔 부모는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사윗감으로 생각할 수 없는 사람 에게 딸을 시집 보냈다. 15 , 16세의 딸을 40세 바라보는 자식 딸린 홀아비에게 시집 보내는 일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딸의 남편이 될 사람의 건강, 생활정도, 직업 등 상식적으로 혼사 때 조건으로 삼는 것들을 무시하고 상대가 남자이고 아내를 원한다면 딸을 시집보냈 다.

이 결과를 보아 우리는 일본군의 위안소 정책을 알 수 있다. 일본군은 20세기에 들어서 도 남녀칠세부동석 을 고집하고 있던 조선의 가정교육을 알고 있었다. 미혼의 조선 여성은 원칙적으로 성병이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위안부 가 되면 성병에 감염되리 라는 사실, 불임증에 걸리리라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알면서 일본군은 성노예로 조선의 미혼여성을 동원하기로 한 것이다. 검진을 엄격히 하려고 한 것은 조선인 위안부 를 위해 서가 아니라 일본 군인을 위해서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전쟁이 예상 밖으로 길어지고 전쟁터가 넓어지자 위안부 의 수가 모자랐다. 또 위안부 가 현지까지 가는 도중에 공습과 어뢰로 죽고, 현지에서도 죽는 등의 이유로 위안부 가 크 게 모자랐다. 전쟁 말기에 총독부 관리였던 안소홍( 가명) 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서울 에 있던 그는 특명으로 여수훈련소에서 보국대원과 정신대원을 훈련시켰다. 그리고 이들을 관려( 關麗) 연락선편으로 시모노세키로 보냈다. 여성의 경우는 대개 다시 오사카에 보내져 거기서 재배치됐으리라고 했다. 여성 동원은 읍, 면, 리의 장을 시켜 18세쯤에서 25세 가량 의 미혼녀의 소재를 조사해 놓았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사람을 시켜 정신대로 일본 군수공 장에 가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하는 수법으로 유인하거나 폭력으로 동원하는 방법을 썼 다고 한다. 그러나 서류에는 긴급동원령에 의한 징용 이라고 작성했다는 것이다. 영장은 열 명중에 한 사람쯤 받았을까 모르겠다고 한다. 이 동원에는 부지사가 관계했다고 증언했 다. 모든 피해자가 이런 방법으로 동원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관권이 동원되었다는 증언은 참고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서울 등촌동 주공아파트에 사는 황금주 할머니는 딱지 를 받고 나갔다고 하며 대구 근처 에 사는 김복동 할머니는 여자정신대로 도장 찍고 나갔다고 한다. 울산의 윤두리 할머니는 부산에서 일본 순사에게 붙들려 오사카에 갔다가 다시 부산 영도에 있는 위안소에 왔다고 한다. 안소흥 씨의 말은 이런 일들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안씨의 증언에 의하면 배당받은 인원 수가 모자랄 때는 나이가 내려가기도 하고 아기 딸 린 기혼녀도 데려갔다고 한다. 체구가 큰 어린 소녀와 어려 보이는 기혼녀를 잡아 나이를 거짓으로 기입했다는 것이다. 사실 보사부에 신고한 위안부 중에는 11세에 연행했던 피해 자가 한 사람 있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조선 전국에 조혼바람이 불었고 해방 직후에는 이 혼소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북쪽으로는 기차로 유송 하는가 하면, 남쪽 동남아와 태평양의 섬으로는 부산 말고 여수에서도 배가 떠난 사실을 알려주었다. 안소홍 씨의 말에 의하면 조선에서는 전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동원되어 여성의 자질과 일본군의 필요에 따 라 배치되었고 여수에서는 정신대원 이 하루 60~70 명 유송 되었다고 한다. 안씨의 말을 전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많은 참고가 된다.

다음에는 조선인 위안부 한 사람이 하루에 일본 군인 몇 사람을 받아야 했는지 조사해 본다( 대부분의 피해자가 주말에는 더 많은 군인이 찾아왔다고 증언함) .

(7)

<표4> 위안부 1명이 하루에 받아야 했던 군인 수( 보사부 조사)

군인수 4- 5 5- 7 7- 10 10- 15 20 20- 30 30- 40 40- 50 수십명 언급없음 계

증언위안부수 3 3 3 1 4 4 1 1 2 34 56

<표5> 위안부 1명이 하루에 받아야 했던 군인 수( 정대협 조사)

군인수 선택가능 4-5 7-8 10명쯤 15명쯤 20명쯤 25명쯤 30명쯤 35명쯤 45명쯤 많았음 언급없음 증언위

안부수 1 2 3 2 5 3 6 2 4 1 1 1 30

<표6> 위안부 1명이 하루에 받아야 했던 군인 수( 110 번( 番) 32 명)

군인수 7- 8 8- 10 10 20 20- 30 30- 50 35 40 50

증언군인수 1 1 1 1 2 1 1 1 1

비고 셀러베스에서는 해군이

인원수를 제한하고 있었음

이 표들을 보면 20- 30 명이 제일 많다. 관심을 끄는 사실은 종군 위안부 110 번 편집위원 회가 전체 증언을 분석한 결과이다. 이 때의 증언은 제1장에 포함되지 않은 증언까지를 넣 어서 분석한 결과이다. 이에 따르면 군인 수가 적을 때는 7- 8 명이고 평균이 40- 50 명, 가장 많은 수가 134 명이다. 필자가 알기에 지금까지 위안부 가 대했던 군인 수 중에 가장 많은 수이다.

위안소 앞에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진은 널리 알려져 있다. 군인들이 위안소에 들어가서 얼마나 있다 나왔는가 조사해 본다.

<표7> 군이 1명이 위안소에 머문시간( 110番)

군인수 2- 3분 5- 6 분 5- 10 분 10- 15 분 40- 50 분 1시간 조금 못됨 증언

군인수 3 1 1 1 2 오키나와에서 해군이 육군

위안소에 감

일본에서 자신이 위안부 였다는 사실을 세상에 밝힌 사람이 한 사람 있다. 이 사람이 시 로타 스즈코( 城田すす子, 본명 三原好枝)2 )로서 필자가 두 번 만났다. 그는 돈도 벌지만 나 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는 군인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군인이 30 명쯤 지나가게 되면 너무 고통스러워 목을 졸라 죽이고 싶어졌다고 했다. 억지로 일어나 도 걸음을 걸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110 번』에는 위안부 가 일을 마친 후에 헝겊으로 훔쳤는데 너무 많은 사람을 대하니 나 중에는 헝겊을 짜면 물이 똑똑 떨어졌다는 증언이 있다.3 )

아직 여성으로서 발육이 다 되지 않은 어린 미혼처녀들이 많았는데 이와 같이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강간을 매일 되풀이한 것이다. 그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은 당사자가 아니면 상상 을 넘어설 종류의 것이다.

(8)

<표8> 군인이 본 혹은 파악한 위안부 수( 110 번( 番) )

2 , 000 관동군 30 중국 홍안성 하로알샹

2 , 000 신경( 長春) , 여기서 다시 배치 50~60 동안( 東安) 병참야전전화물창

20 무린 80 해남도 삼아

150 이상 하이라루 25 ( 16~20세) 인도네시아 스라바야

20 손오 10 인도네시아( 군이 끌고 옴)

3 악양 12+8=20 트럭섬, 춘도(春島) , 하도( 夏島) 에 각각

20 부금( 富錦 ) 30~40 일본 니지마 ( 신도: 新島) 3~4 무창, 한구의 무한대학 위안소

계: 약4 ,500 명

이런 성적 수탈을 당했으니 지금도 육체적으로 후유증에 시달릴 뿐 아니라 남성을 만나 동 거를 한 경우도 생산을 못해 불행해진 경우가 대다수이다.

참고로 생존 군인의 증언을 들어보아도 당시 위안소가 어떻게 설치 운영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4 )

해 군 징 용 계 군 인 의 증 언 1943~ 1944 년에 10~20세 조선 여성을 배 하나에 60 명 혹은 40 명 씩 태워서 보내도 보내도 배가 침몰했다( 일본군은 1943 년에 재해권과 제공권을 잃었다. )

한 군 인 의 증 언 증언자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때 전 중국과 동남아 각국에서 수비대에 배속되었다. 위안부 수를 10 만~20 만 명이라고 하나 40~50 만 명이 아니겠는가. 어떤 구석 진 곳에도 위안소가 있었다.

또 다른 군 인 의 증 언 전 중국( 해남도 포함) 관동군이 100 만 명. 위안부 는 8 만 명쯤 될 것이다.

<표8>과 군인의 증언을 들어본 것은 실제로 전쟁터에 나갔던 군인 32 명의 머리 속에 위안 부 의 수효가 얼마로 남아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다.

그러면 조선인 위안부 한 사람이 끌려가 얼마 동안 위안부 로 얽매여 있었나 알아본다.

<표9> 위안소에 억류된 기간( 보사부)

6 개월

7 개월

8 개월

9 개월

10 개월

11 개월

12 개월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위안

부수 1 1 1 0 1 0 0 3 6 9 8 5 5 5 3 1 2 0 0 1 4 56

제일 많은 사람이 억류된 기간은 2 , 3 , 4 년간이다. 194 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났을 때부터 대규모로 연행해 간 것을 알 수 있다. 13 년 동안 억류된 위안부 는 1932 년 9월에 나갔다.

이 해는 상해사변이 발발한 해이다. 정대협에 신고한 위안부 중 라비울에 있던 박옥련 할

(9)

머니와 중국에 있던 김순덕 할머니는 각각 3 년 기한이 지난 다음 전쟁이 끝나기 전에 귀국 했다. 나머지 피해자는 전부 종전 후 귀국했다. 일본군은 연행 때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거 나 아예 그런 약속 없이 끌고 갔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정대협에 신고한 위안부 를 조사해 보니 대부분의 피해자는 돈 문제는 생각해보지도 않았 다고 한다. 다만 군인이 선물이나 팁을 주면 받았다고 한다. 위안소에 따라서 위안부 가 보수를 받은 곳이 있는데 그 실태는 다음과 같다.

1. 한달에 한 번 군인 받은 수에 따라 2~3원을 받음

2 . 처음에는 올린 수입의 1할을 받다가 나중에는 군의 지시에 따라 6 할을 받아 적금했음 .5 ) 3 . 1개월에 30 엔을 받음 . 옷과 화장품 값은 본인이 내야 함.

4 . 경영인에게 용돈을 받음.

반면 전 일본 군인의 증언을 보면 다음과 같다.

<표10> 전 일본군의 조선인 위안부 보수에 대한 증언( 110番 32 명)

보 수 증언자의 수 비 고

20 전

1엔 혹은 1엔 50 전 1엔 혹은 1엔 50 전 2 엔

3 엔 8~ 10 엔

2 1 2 1 1 1

면세표를 가지고 간 경우 80%가 포주의 몫

60%가 포주의 몫

1시간

250 엔( 월급) 800 엔( 월급)

1 1

간호원의 월급이 90 엔 이었음 패전 때 규정 불사름 군표 혹은 중국돈

군표 만주돈

일본돈

1 1 1

1

패전과 더불어 휴지가 됨 패전과 더불어 휴지가 됨

성병에 걸리면 강제로 입원되고 치료 비는 본인이 부담 하게 됨

단팥이나 빵 등 먹을 것 아편

1 1

<표 10> 에서 보는 증언은 한 군인이 알고 있는 내용일 것이다. 먹을 것을 갖다주는 경우 는 모르겠으나 나머지 보수는 피해자에게 제대로 갔는지 알 수 없다. 보사부와 정대협에 신 고한 피해자의 증언과 『110 번』에 증언한 전 일본 군인의 증언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열세 살의 어린소녀에서 20 대 전후의 여성이 하루 20 번에서 40 번씩 2 년에서 4 년 동안 성폭 행 당했다. 이들이 어떤 환경에서 이와 같이 혹사당했는지 검토해보기로 한다.

구라하시(倉橋正直) 교수가 쓴 『종군 위안부 문제의 역사적 연구』6 ) 에서는 일본인 위안부 를 매춘부형 조선인 위안부 를 성노예형으로 크게 둘로 나누고 있다. 필자는 구라 하시 교수의 이 구분에 동의한다. 단지 조선의 위안부 를 다시 들여다보면 본인의 의사와 는 상관없이 어디로 배치되느냐에 따라서 다시 둘로 나뉜다고 본다. 첫번째는 민간인 혹은 군속이 경영하는 위안소이며 두번째는 군대 직속 위안소이다. 첫번째는 두번째보다 노예상 태가 조금은 덜했다고 본다. 증언을 종합해보면 첫번째에 속하는 위안소는 위안소에 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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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가 값을 부담해야 하긴 했으나 음식이나 의복이 군대 직속 위안소보다 나았다. 무엇 보다 위안부 한 사람이 대해야 했던 군인 수가 적었고 군대 직속 위안소보다 조금은 덜 잔인하게 취급됐다고 생각된다.

두번째의 군대 직속 위안소는 위안소 자체가 부대 안에서 군인들의 성욕처리의 대상일 뿐 아니라 피해자를 완전히 물건 취급, 소모품 취급했을 뿐 아니라 분풀이의 대상이었다. 첫번 째는 형에는 박옥련 할머니가 있던 파푸아뉴기니의 라바울 위안소와 문옥주 할머니가 있던 당시 버마 만달레이에 있던 위안소 등이 속한다고 하겠다. 군데 직속 위안소로는 황금주 할 머니가 있던 당시 만주 길림의 위안소와 정서운 할머니가 있던 인도네시아 마낭의 위안소를 들 수 있다.

보사부에 신고한 피해자와 『110 번』에 증언한 전 일본 군인들은 환경에 대해 언급을 하 지 않은 사람이 많고 언급을 했다 하더라도 너무나 막연해서 조사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다. 그래서 여기서는 정대협에 신고한 피해자 중 3 1명을 중심으로 알아보기로 한다.

조사한 한에서는 부대를 따라 이동한 위안부 는 두번째의 군대 직속 위안소에 배치됐던 피해자들이다. 첫번째의 민간인 혹은 군속 경영 위안소는 3 1명의 증언 중 12곳이고 첫번째 와 두번째의 절충형이라고 볼 수 있는 곳이 4 곳, 두번째의 군대 직속이 12곳이다. 이 중에 서 9개의 위안소에 배치된 피해자가 부대를 따라 이동했다.

보사부에 신고한 위안부 의 증언과, 『110 번』의 증언, 정대협에 신고한 증언 내용을 종 합해보면 위안부 가 거처했던 방은 대개 다다미 두 장 반에서 석 장 정도의 방이었다. 위 안소 중에는 위안부 가 공동으로 쓰는 방이 있고 군인이 왔을 때 쓰는 작은 방이 따로 있 는 위안소도 있었으나 대개는 자기에게 배당된 작은 방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군인이 없을 때에도 움직이기 귀찮아서였다고 한다.

위안부 는 외출의 자유가 거의 없었다. 『110 번』의 증언을 보면 위안소는 24 시간 경비 를 섰다고 한다. 또한 소등 후에는 건물에 자물쇠를 채웠다고 한다. 필자는 199 1년 마쓰시 로(松代) 위안소 건물의 소유주를 만난 적이 있다. 그곳에는 조선인 위안부 가 네 사람 있 었는데 건물 소유주는 그들이 마당에 나와 있는 것조차 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에 갈 때가 유일하게 외출하는 때인 경우가 많았다. 혹 시 그 외의 목적으로 외출할 때에도 혼자는 못 나가고 동료들과 나가는데 경영인의 허가를 받아야 했고 외출시간도 제한이 있었다. 마쓰시로 위안소에는 피해자들이 필요한 물건을 위 안소에서 함께 살던 요진보 7 ) 가 사준 것으로 안다고 건물 소유주가 증언했다.

이들의 식생활은 어떠했나. 위안소와 시기에 따라서는 쌀이 귀해서 제대로 밥을 먹을 수 없었고 하루 세 끼를 먹는다 해도 양이 적어서 항상 배가 고팠다는 위안부 도 있다. 이보 다 괴로웠던 일은 긴 밤을 자고 가는 장교에게 밤새 시달리는 것으로, 그리고 나면 만사가 귀찮아서 누워있었다고 한다. 또는 군인을 받기 싫어 꾀병을 하느라 밥을 안 먹기도 했다고 한다.

태평양에 있는 섬에서는 공급배가 폭격을 맞거나 어뢰에 깨지면 다음 배가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먹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배급받은 담배를 원주민에게 주고 바나나나 파파야를 얻 어먹었다고 한다. 전쟁 말기 중국에서는 쌀에 깻묵을 섞어 지은 밥을 맨 소금물하고 먹었고 태평양 어느 섬에서는 물이 귀해 항상 목이 말라 고생했다고 한다. 평상시 잘먹었다는 위 안부 는 3 1명 중 세 사람이다.

16 , 17 , 18세의 위안부 가 제일 많다. 16세 이하의 소녀들도 아주 많다. 발육기에 있는 미혼녀들이 좁은 방에 갇혀 이러한 식생활을 하며 하루에 20~40 명의 일본 군인들을 대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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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중국 동북부8 ) 에서는 추워서 감기에 잘 걸리고 감기에 걸렸다 하면 폐렴, 폐결핵으로 발 전하여 많이 죽었다고 한다. 태평양 섬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이 말라리아로 죽었다고 한다.

정대협에 신고한 증언에 의하면 본인이 탈출을 시도한 경우가 10건인데 이 중 7건이 성공 했다. 동료 탈출시도는 3건 중 2건이 성공했다고 한다. 3 1명이 속했던 위안소에서 다섯 사 람이 자살하고 여섯 사람이 실패했다. 피해자는 “그런 지옥이 어디 있겠어요”, “목숨이 원수지”라고 지금도 끔찍해한다.

가해자 입장에 있던 일본군인 중에는 몇몇 고마웠던 사람도 있다. 주선을 해서 태평양전 쟁이 일어나기 전에 귀국시킨 장교가 있었다. 천황 의 명령이라 어쩔 수 없었다고 울기까 지 한 군인도 있었고, 또한 일본 장교 한 사람과 조선 군인 네 사람은 앉아서 이야기만 하 다 간 경우도 있었다. 이런 군인들을 만났던 피해자들은 고마운 사람들로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좁은 공간에 갇혀 음식이 나쁘고 그나마 부족해서 배고픈 것이 힘들었다. 그러나 더욱 힘 든 것은 군인들의 폭력이었다. 3 1명 중 한사람을 빼고 30 명이 구타당했다. 고문까지 당한 사람이 한사람 있다. 성병에 자주 걸린다고 경영인이 때리고, 일본말을 못한다고 군인이 때 리고, 조선 노래를 부른다고 경영인이 구타했다.

처음 위안소에 들어가 반항했을 때에는 어느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거의 다 폭행을 당했 다. 등촌동에 사는 문필기 할머니는 옛 만주에 있었다. 술을 마시고 온 군인이 너무 괴롭혀 서 발로 찼더니 옷을 찢어 발가벗기고 매질을 했다. 그래도 성이 차지 않는지 칼을 들이댄 후 뛰쳐나가 벌겋게 단 부젓가락을 가지고 들어와 겨드랑이를 지졌다. 할머니는 그렇게 화 상을 입고도 군인을 받아야 했다. 화상은 석 달 갔다고 한다. 그 할머니가 있던 위안소에는 조금이라도 말을 안 들으면 겨울에도 옷을 벗겨 바깥에 세워두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지금 도 폐결핵을 앓고 있고 그 때 동상에 걸렸던 후유증으로 지금도 발이 더우면 스멀거린다고 한다. 문 할머니는 그 때의 악몽에 시달려 지금도 자다가 소스라쳐 깨어나곤 한다. 그런 밤 이면 고스란히 앉아서 담배만 피우며 지샌다. 이와 같이 문할머니가 자다가 소리를 지르기 때문에 다른 할머니들이 문할머니와 함께 자기를 꺼린다. 또한 울산의 윤두리 할머니는 밤 에 자다가 가위에 눌린다.

군인에게 당하고 있을 때 몸도 마음도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끝도 없이 당하고 난 후 몸을 추스를 수 없어 누워 있을 때 그렇게 비참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싫은 눈치를 보이면 “바카야로 센삐노 쿠세니”9 ) 라고 하며 뺨을 때렸다. 자기들이 군림할 수 있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사실이 일본 군인들에게는 위안이 되는 모양이었다. 오죽하면. 조 선인 위안부 들이 “센징 센징 하지 마라. 천황 폐하는 하나가 아니냐”고 했겠는가.10 )

다음으로 해방 후 귀국한 피해자들이 상황을 알아본다. 보사부에 신고해 온 피해자 중 56 명의 증언에 의하면 결혼 신고나 결혼식을 불문하고 남자와 산 경험이 있는 사람이 28 명이 다. 남자와 전혀 살아본 일이 없는 사람이 두 사람, 남자와 살았으나 자식이 없어 헤어진 피해자가 한 사람이다. 나머지 25 명은 대답이 없다. 남자와 산 경험이 있는 28 명 중 자식이 있는 사람이 세 사람이고 자식을 못 낳은 사람이 23명이다. 나머지 두 사람은 또 대답이 없 다. 56 명의 피해자 중 연행될 당시 결혼한 사람은 두 사람이다. 정대협에서 3 1명을 조사한 결과 피해자들이 끌려간 당시 30 명이 미혼이고, 결혼한 사람은 없고, 한 사람이 이혼녀이 다.

처녀공출 이라는 말은 대중간에 누가 시작한 말인지 몰라도 경험에서 나온 말이고,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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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라고 알려진 위안부 , 성노예는 정책적으로 결혼 전 처녀를 대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3 . 속 조 선 인 일 본 군 위 안부 의 실 태

이 글에서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낳은 남성이 여성의 인권을 유린하되, 식민지 였던 조선 여성을 어떻게 희생시켰나 고찰해보고자 한다. 여성 문제와 계급 문제에 지배국 민족이 피 지배국에게 가한 정책적 인권유린을 검토해보고자 함이다.

그 동안 가해국 일본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에 대해 많은 조사가 진행되었다. 앞으로 중 국,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 각 나라는 자기 나라의 일본군 위안부 문 제를 조사해 아시아 침략전쟁에서 일본군이 실시했던 성노예 제도의 진상을 연구할 줄로 안 다. 이런 연구 결과와 우리나라 남북의 연구 결과를 발표해서 아시아에서 행해진 여성에 대 한 성폭력을 피해국과 가해국이 깊이 있게 검토해야 할 줄로 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한 자리에 모여 다시는 이런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누구나 인간다운 존엄성을 지니고 서 로 도우며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지옥 같은 과거사에서 배워야 할 줄로 안다.

야마시타1 1 ) 가 작성한 「위안부 연표」에 의하면 “1930 년 북지나 방면군의 위안설치

요청( 참모총장 수신) , 1932 년 일본 군대의 상해 주둔 증원에 의해 이들 병사의 위안기관으 로 해군위안소를 설치”라고 조사되어 있다. 필자의 주장은 문서로는 이와 같이 조사될 지 모르나 1930 년에 일본군이 위안설비 요청을 참모총장에게 했을 때는 이미 위안소가 중국에 있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19 18 년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병했을 때 이미 가라유키 가 있었다. 19 19 년에 관동군 사령부가 옛 만주에 창립되고 그 전에는 관동도독부( 關東都督府) 육군부12 ) 가 있었고 또 그 전신은 관동총독부13 )였다. 이와 같이 일본군이 중국에 자리잡은 역사는 길다. 그리고 시베리아 출병 다음해에 관동군 사령부가 생긴 것인데 이것은 중국 침 략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때에 관동군 산하에는 본부를 6개소에 둔 대대에 4 개중대 가 있었다. 그리고 1중대는 각기 6개소에 나뉘어 있었다. 일본군 부대가 주둔한 곳은 20개 지구이다. 「위안부 연표」에 1929 년에 장춘에 카페가 네 군데 있었다가 연말에 7 ,8군데로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요리집은 없었을까. 그곳에 여자는 없었을까.

필자는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군 고위층의 시달에 의해 동원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직간접적으로 군의 지원을 배경으로 여성이 사기로 혹은 폭력으로 모집되 어 일본군에게 강제로 성을 수탈 당했다면 그 여성은 일본군 위안부 라고 본다. 피해자가 있던 건물이 어떤 건물이건 어떤 경로로 어떻게 생긴 곳이건 위안소라고 본다. 나아가 어떤 여성이 속아서, 아니면 폭력으로 끌려가 일본군 한 사람에게만 성폭행을 당했다 하더라도 그 여성은 일본군 위안부 로 본다( 필자는 피해자가 끌려간 시기가 비록 전쟁 전이라 할지 라도 또한 성년이라 할지라도 본인의 의사에 반해서 끌려가 일본군 집단에게 혹은 한 사람 의 군인에게 계획적이고 조직적으로 성폭행을 당했다면 그 피해자를 일본군 위안부 로 본 다. ) .

비록 가라유키 가 성병 때문에 환영을 못 받았다고는 하나 한번 있었던, 군인을 상대한 여성이 없어질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하물며 계속해서 군인이 주둔할 뿐 아니라 그 수가 느는데 사라질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한편에서는 빈곤이 심해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침략전 쟁을 구상해서 젊은 군인을 주둔시키는데 군 간부와 포주 사이에 모종의 암거래가 없을 리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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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전쟁은 진행중이 아니지만 구 만주 주둔 부대 주위에 위안소가 생겨나듯이 조 선과 일본 안에도 부대 주위에 위안소가 있었다고 본다.

또한 군인뿐 아니라 침략전쟁을 위해 세운 군사시설, 광산, 군수공장 등에도 위안소가 있 었다고 본다. 전쟁터가 아니었지만 군인 상대로 부산 영도에, 지하 대본영 건설을 지휘한 일본군 간부 를 위해 일본 나가노현( 長野縣) 마쓰시로에, 조선인과 일본인 광부를 위해 후 쿠오카현(福岡縣) , 지쿠호 탄광 등에 있던 위안소를 예로 들 수 있다. 필자가 이와 같이 주 장하는 이유는 일본 제국주의가 침략전쟁을 벌이거나 준비하고 있을 때 여성들이 강제로 성 을 수탈 당했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에게는 그 시기가 전쟁 중이건, 전쟁 전이건, 눈앞의 가 해자가 군인이건, 광부이건, 일본 남성이건, 조선 남성이건 상관이 없다. 피해자들은 일본 제국주의 침략정책에 의해 강제 연행되어 조직적으로 성폭행을 당한 것이다. 다만, 이 글에 서는 일본군에 속해 있던 위안부 문제를 고찰해보려고 한다.

1992 년 12 월 6 일 『아사히신문』조간에 1932 년 9월에서 33 년 2월까지를 취급한 혼성 14 여 단 사령부가 만든 「위생업순보」34 편 외에 「예창기 작부 건강진단 실태요령」이라는 문서 가 일본 국립공문서에서 발간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가와시마 야스오의 저서 『북풍에 유녀 애가를 들었다( 北風に遊女哀歌 を聽 ぃた) 』14 ) 에는 필자가 읽기에 위안소의 전신같이 보이는 하마고야(濱小屋) 에 대한 내용이 있다. 하마고야 는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훗카이도 에사시( 江差) 를 대표로 서해안에 늘어서 있었다는 것이다. 이곳은 매춘굴 로 정어리를 쫓아서 몰려오는 어부를 상대하는 계절업소 였는데 한 집에 많은 경우 4 ,5 명의 여성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네 평쯤 되는 오두막 안에 병풍으로 칸을 막고 되도록 많은 어부를 받으려 했다는 것이다. 필자에게는 하마고야의 운 영방법이 위안소의 그것과 너무나 흡사하게 생각된다. 공창제도와 더불어 이런 경험이 있었 기 때문에 비록 변질이 되기는 했으나 일본군 위안부 제도 같은 여성의 성 겁탈제도를 생 각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우선, 일본 제국주의는 끌려간 여성을 물건으로 보았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일본 천황 이 그의 적자( 赤子) 에게 내리는 하사품( 下賜品) 으로 보았다. 태평양의 섬으로 가는 배 안에서 “배 안에서는 사용 금지”라는 경고문이 붙은 물건이었다.15 ) 아소 테쓰오( 마생 徹男) 는 「화류병예방법」에서 위안부 를 가르켜 “위생적인 공동변소”16 ) 라고 불렀다.

중국 무린에 있던 일본군인 또한 아무렇지 않게 그렇게 불렀다.17 ) 국내외를 막론하고 위안 소가 있는 모든 곳에서는 모든 국적의 위안부 를 삐 라고 했다. 일본 군인에게는 이들 서 민 출신의 여성이 인격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육체의 일부로만 보인 모양이었다. 이 점에서 는 일본인 위안부 들도 더 나은 대우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국적을 막론하고 모든 위안부 는 사람이 아니라 위안소를 찾는 남성들의 성욕처리 대상일 뿐이었다.

여기서 보태서 조선인 위안부 와 일본인 위안부 사이에는 엄연히 차별이 있었다. 일본 군 위안부 제도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조선인 위안부 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검토해 보기로 한다.

『110 번』에서 한 증언자는 패전 후의 귀국선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고 있다. 조선인 위안 부 를 너무 함부로 대해서 증언자가 항의를 했더니 “사람 취급할 필요가 없다. 소나 말만 도 못하니까, 태워준 것만 해도 고맙게 알아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장교에게 특별한 총애를 받는 등 예외의 경우가 있기는 하나 필자가 만난 모든 피해자는 전부 개 ・돼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이 표현은 과장이 아닌 듯하다. 가장 고 통스러웠던 때가 술을 마시고 들어와 행패를 부리며 모욕스러운 요구를 할 때, “센삐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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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혹은 “센징, 센징”이라고 업신여길 때라고 말한다. 얼마나 조선 사람이라고 업신여겼 으면 조선 사람이라고 업신여기지 말라고, 자기들도 천황폐하 의 자식이라고 했겠는가.

일본군에게 조선인 위안부 는 물건 중에서도 아무렇게 취급해도 되는, 그리고 필요가 없 어지면 버릴 물건이었다. 현재 경상남도 진해에 사는 정서운 할머니는 지금도 양쪽 팔에 작 은 돌 같은 덩어리가 있다. 그의 배에는 커다란 도장 자국 같은 것이 두 개 있다. 할머니는 인도네시아 마낭에 있었는데 하루 평균 50 명 정도의 군인이 들어왔다고 한다. 쉴새없이 들 어오는 군인에게 기진맥진해서 기절을 하면 일본 군인이 주사기로 마약을 팔에 쿡쿡 놓았다 고 한다.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군인이 들어오기 전에 미리 마약주사를 놓았다고 한다. 마약 주사는 위안부 가 싫다 좋다 선택할 여지없이 위안소에서 마음대로 놓았다고 한다. 중독이 된 정할머니는 귀국 후에도 한두 달 주사를 맞았으나 죽을 각오를 하고 혼자 끊었다고 한 다. 배에 있는 자국은 일본 군인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담뱃불로 지진 자국이라고 한다.

정할머니는 군인을 많이 상대한 쪽이고, 조선인 위안부 는 하루 평균 20 명에서 30 명에게 성수탈을 당했다. 군인들도 돌격1번 이라는 콘돔을 쓰게 되어 있었다. 일본군에게는 위안 부 가 돌격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결론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한다.

트럭 섬에 있던 전 군인 두 사람은 조선인 위안부 를 위한 방공호는 없었다고 말했다.

둘 중 한사람이 있던 곳의 위안소는 적이 상륙하면 제일 먼저 당할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 소대장이 위안부 들도 군인들과 함께 군인 방공호에 들어가게 했다는 것이다.18 ) 중국 박흥( 博興) 에 있던 군인은 여학교에 다니다 온 조선 여학생을 만났다. 이 피해자는 감시가 심해서 도망을 할 수 없었으나 도망을 했다 해도 누구나 그 피해자가 위안부 였다 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문신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19 ) 필자는 몸에 새겨진 대만 출신 전 위 안부 의 사진을 본 일이 있다. 손목에서 손등으로 가득하게 위(慰) 자가 문신되어 있었 다.2 0 )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일본군은 조선인 위안부 를 사지에까지 투입했다. 위험한 일선에 내 보낸 것은 거의가 조선인 위안부 였다. 이 사실은 조선인 위안부 . 일선에 나갔던 조선인 군인과 군속이 증언하고 있다. 『110 번』에서도 32 명 중 5 명이 이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현 지 위안부 는 정보가 샐 수도 있으니 안보상 내보낼 수 없었고, 일본인 위안부 는 생명이 위험하니 보낼 수 없었으리라.

만주에 있던 전 일본 헌병은 소련군이 참전했다는 소문을 듣고 겁이 나서 스파이 혐의를 씌워 위안부 전원과 부락민 전원을 살육했다고 증언했다.2 1 )

해방 직후 동서남북 전쟁터에서 귀국한 장정들은 패전하자 일본군은 위안부 에 관한 문 서를 불사르고 조선인 위안부 를 여러 방법으로 죽였다고 말했다. 하야시는 답사 중에 참 호에 들어가 있는 조선인 위안부 를 지휘관이 폭탄을 던져 살해했고 중병에 걸려 있는 조 선인 위안부 에게 독약주사를 놓았다는 증언2 2 ) 을 들었으며, 구라하시도 “성적 노예형 위안부 였던 조선인 여성이 무참하게 일본군의 손에 걸려, 조직적으로 죽임을 당했다”고 쓰고 있다.2 3 )

일본군은 일본인 위안부 만을 데리고 도주하면서도 조선인 위안부 에게는 패전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이 사실은 신고해온 모든 조선인 위안부 가 한결같이 증언하고 있 다. 특히 구만주의 경우에는 소련군이 바로 진주해 들어오는데도 그랬다. 미처 피하지 못한 조선인 위안부 는 소련 군인에게 제공됐다. 조선인 위안부 는 쓰다 버릴 물건일 뿐만 아 니라 경우에 따라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소모품이었다. 또한 누구에게든지 던져버릴 수 있 는 물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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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위안부 중에도 시로타 스즈코 같은 경험을 한 사람이 적지 않겠지만 그들은 자기 들의 일이 무엇인지 알고 나갔다. 그러나 그들이 창녀가 된 경위를 생각하면 당시의 일본 경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부모가 팔아 실질적으로 자유가 없는 성노예인 상태였다. 유곽 에서 매춘을 해도 빚이 늘어만 가는 형편이어서 어쩔 수 없이 종군 위안부 를 지원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원한 것은 위안부 본인이지만 내용은 강제라는 말이다. 그러나 일본인 위안부 는 대가를 받았다. 적지 않은 전 일본 군인은 일본인 위안부 가 전쟁터에 와서 반 년쯤 되면 많은 돈을 벌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조선인 위안부 의 경우를 생각하면서 일본인 위안부 문제를 검토할 때 중요한 문제는 위안소를 찾아오는 남성과의 관계이다. 일본 여성들에게 일본 군인은 자기나라 남성들이었 다. 우리 눈에 익숙한 사진, 위안소 정문에 걸려 있는 “몸도 마음도 바치는 일본 여성의 서비스( 身 も心 も棒 ぐ大和撫子のサ ヴィス) ”라는 구호는 관제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일본인 위안부 의 심정이 100% 이 구호 같지는 않았겠지만 종군위안부 인 일면이 있었을 것이다. 남성과 나라에 의해서 강제로 성노예가 된 것을 인정하면서도 남성의 성문화에 세 뇌가 되어 돌격 1번 의 참뜻을 모른 채 현실적으로 종군기자 , 종군간호부 와 같이 군인 을 따라 위안 하러 온 종군위안부 의 일면이 있지 않았겠느냐는 말이다. 일본 여성의 입 장에서 자기 나라가 시작한 전쟁이니 이겨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여기에서 일본인 위안부 와 조선인 위안부 가 놓인 입장이 얼마나 다른지 알 수 있다.

조선인 위안부 에게 일본은 우리의 적으로, 전쟁에 패해야 우리에게는 해방이 오는 것이었 다. 조선인 위안부 에게 일본은 우리의 적으로, 전쟁에 패해야 우리에게는 해방이 오는 것 이었다. 조선인 위안부 들은 적국의 남성, 바로 적에게 계속 성폭행을 당한 것이었다.

정서운 할머니의 예를 들자. 아버지가 항일정신이 강해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놋그릇을 공출해야 할 때도 땅을 파고 그릇을 감추었다. 이 사실이 알려져서 아버지가 주재 소에 붙들려갔다. 아버지를 석방시키는 길은 정할머니가 정신대 로 나가는 길밖에 없다고 구장이 알려주었다. 일본에 가서 공장에서 일하면 돈도 벌 수 있고 아버지도 유치장에서 나 올 수 있다고 했다. 정할머니는 정신대 를 지원했는데 보내진 곳은 인도네시아 마낭이었 다. 할머니는 강제로 마약주사를 맞아가면서, 담뱃불로 지짐을 당해가면서 일본 군인들에게 성적 수탈을 당했다.

싱가포르로 말레이시아로 끌려 다닌 김상희 할머니는 죽으려고 방법을 찾았으나 죽을 길 이 없었다.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 크레졸 소독약이었다. 한 병을 전부 마셨다. 이렇 게 하기를 세 번 시도했으나 번번이 죽기 전에 발각되어 살아났다. 고향에서 같이 간 면장 딸은 크레졸을 마시고 죽었다. 도망할 수 없고, 만일 했다가 잡히면 총살이고 고문 감인 것 을 알면서도 피해자들은 도망했다. 또한 얼마나 많은 피해자들이 자살했겠는가. 조선인 피 해자에게 위안부 가 되었다는 것은 적인 일본군인에게 순결을 뺏겼다 는 사실에서부터 시 작한다. 처음 강간한 자가 일본 군인이고, 감금당한 상태에서 조직적으로 계속 당하는 강간 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고 육체적인 고통이었다고 한다.

필자가 아는 한, 1945 년까지 조선 사람은 종군 위안부 라는 낱말을 들어본 일이 없다.

조선에서는 위문대, 위문단, 위문공연이라는 말은 썼다. 그러나 위안부 라는 말을 조선 사 람은 들어본 일이 없다. 조선 사람은 일본군이 한 바와 같이 짐승 이하의 성노예를 만들고 그와 같이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은 상상할 수 없었다. 조혼의 선풍이 분 것은 근로정신대로 나가 노동을 하면서 강간당할 것을 피해서였다.

근래에 와서 1944 년 10월 28 일자 『매일신보』 위안부 모집광고가 실린 사실을 알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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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참고로 여기에 옮겨본다.

군위안부 급모( 急募)

1. 행선( 行先) 부대 위안소

1. 응모자격 , 연령 18세 이상 30세 이하 신체 건강한 자 1. 출발일 11월 10 일경

1. 계약 급( 及) 대우 본인 면담한 후 즉시 결정함 1. 모집인원 수십 명

1. 희망자 좌기( 左記) 장소에 지급 문의할 사( 事)

경성부 종로구 낙원정 195 조선여관 내 광( 光) 3 2645 허씨( 許氏)

『매일신보』는 일제 말기에 『동아일보』 , 『조선일보』가 폐간되어 하나밖에 없는 우리말 신문이었다. 물론 어용신문이었다. 위의 광고( 1944 년) 를 당시 조선 사람이 몇 사람이나 읽 었는지 모르겠고 읽었다면 위안부 의 임무가 무엇인지 알았을지 의심스럽다.

이보다 이른 1944 년 7월 23 . 24 일에 일본어 신문 『경성일보』에 또한 위안부 모집광고 가 났다. 이때는 나이가 17세에서 23세, 근로처는 후방 부대 위안부 이고 월수가 300 엔 이상, 전차( 前借) 가 3 ,000엔 가( 可) 였다. 소개소는 신정( 新町) 에 있는 금정(今井) 소개소이 다. 수입이 분명히 알려져 있는 것이 『매일신보』광고와 크게 다르다. 전차가 3 ,000 엔인 것 등으로 보아 일본 여성을 모집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한다. 시로타 스즈코가 처음 대만 으로 떠날 때 받은 선금은 2 ,500엔이었다.

이 신문광고대로라면 수입이 좋은 편이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매일신보』에 실린 위 안부 모집광고는 위안부 가 될 수 있는 여성은 물론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 낸 광고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감히 조선 여성을 위안부 로 만들 수 있었던 조선인 업자들을 상 대로 낸 광고일 수 있다. 그렇다면 군에서 받았을 돈은 업자에게 갔고 조선 여성은 일본 어 느 군수공장으로 가는 줄 알고 따라나섰다가 영문도 모르게 폭력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4 . 국 외 에 생 존 해 있 는 조 선 인 전 일 본 군 위 안부

1996 년 현재 남한에서 신고한 전 일본군 위안부 는 160 여 명이다. 보사부 부녀복지과,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에 신고된 것들을 합해서 그렇다. 틀림 없이 신고하지 않은 국내 생존자가 있을 터인데, 그 수가 어느 정도인지 추측할 수 없다.

일본 요코하마에 몇 사람, 그 외 일본 여기저기에 몇 사람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확 인된 바 없다. 다만 1993 년 일본 센다이에 있는 송신도 할머니와 1992 년 일본 나가시마에 있는 아이세이엔( 愛生園) 과 가고시마 호시즈카정( 星 町) 제4 센터에 있는 나환자시설에서 조선인 위안부 라는 두 여성을 만났다. 아이세이엔에 있는 한정순( 가명) 할머니는 정신이 상 병동에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신체에 이상이 없고, 정신도 이상한 것 같지 않았다. 필 자가 “한국은 겨울이 추운데 여기는 겨울에도 따뜻해서 좋지요”했을 때 할머니는 길게 한 숨을 쉬었다. 필자는 그 한숨 소리를 잊을 수 없다. 가고시마 호시즈카정의 정주혜( 가명) 할머니는 시력을 잃어 거의 보지 못하고 손가락도 잃어 불편하게 살고 있다. 그러나 사지가 멀쩡한 사람도 할머니와 같이 산다는 사실에 대해 하느님에게 감사할 수 없을 것같이 생각 되었다. 필자가 할머니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천주교 신자인 그는 부모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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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의 안부였다.

한정순 할머니도 정주혜 할머니도 고향 이야기가 나왔을 때 분명한 반응을 보였다. 어찌 해서 이런 병에 걸리게 된 것인가. 정할머니는 자궁수술을 세 번 받았다고 한다.

필자는 태국 핫짜이의 노수복 할머니를 1988 년에 만났다. 필자가 할머니를 만났을 때는 중국인 남편이 살아있을 때였다. 노할머니는 자기가 생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자 젊은 태국 여인을 맞아들여 두 아들을 낳게 해주었다. 아들은 노할머니를 어머니라 부르고 생모 를 누나라고 불렀다. 한국인 할머니, 중국인 남편, 태국인 둘째 부인, 그리고 두 아들을 다 만났는데, 모두 행복하게 보였다. 노할머니는 진흙에서 피는 연꽃같이 과거를 딛고 살고 싶 다고 했다. 그러나 그의 결벽증과 줄담배가 지금도 필자의 마음에 걸린다. 집안에는 불단이 있었고 태극기가 꽂혀 있었다. 할머니는 손을 모아 기도하며 절을 했다.

송신도 할머니를 제외하고 나머지 세 사람은 필자가 방문했을 때 위안부 였다는 사실을 감추었다. 그래서 귀국을 못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알아볼 길이 없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 었든 고향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극복하기 어려운 듯했다. 일본군은 그 수를 알 수 없는 이 나라의 여성을 고향에서 뿌리를 뽑아 타향에 던져놓고 지금까지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현재 중국 무한에는 9 명의 전 위안부 가 생존해 있다. 이들은 일본군이 패전 후 버린 경 우이다. 버려진 위안부 의 산 증인으로서 그 후 현지에서 어떻게 생활했는가를 알려주는 사례로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해방 후에는 33 명쯤이었다고 한다.2 4 ) 그러나 1994 년 5월에 정신대연구회 회원 세 사람과 필자가 무한을 찾았을 때에는 9 명만이 살아 있었다. 1995 년 1 월에 필자가 다시 찾았을 때에는 9 명 중 한사람이 죽고 명단에 올라 있지 않던 사람이 한 사람 발견되었다. 현재 무안에 있는 전 위안부 수는 그대로 9 명이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동안 무한에 있던 일본군 병참사령부는 위안계를 두어 특수위안소 를 관리하고 경영하였다. 필자가 이 위안소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은 병참사령부 위안계장 야 마다 세이키치가 쓴 『무한병참( 武漢兵站)』2 5 ) 을 읽고서였다. 이 특수위안소는 한구구( 漢 口區) 중산대로( 中山大路) 적경리(積慶里) 에 있다. 이곳에는 조선인과 일본인 위안부 를 둔 위안소가 합해서 20군데, 위안부 가 합해서 280 명이었다고 한다.2 6 ) 따라서 적경리 위안 소는 적경리 위안소촌이라고 해야 그곳의 구조를 제대로 표현했다고 하겠다. 적경리와 같이 병참사령부가 직영하는 특수위안소말고 무한에 주둔해 있던 부대가 관리, 경영하던 위안소 촌이 적경리와 같은 중산대로 동산리( 東山里) 에 있었다. 이 두 곳과 같은 구조의 위안소촌 은 무창에 사문구( 司門區) 호부항(戶部巷) 44호로부터 시작하는 거리였다. 이 외에 해방 전 일본 조계의 한중가( 漢中街) , 현재의 승리로(勝利路) 에 줄지어 서 있는 붉은 벽돌 건물도 위안소였다고 한다. 본시 이 건물들을 일본인 도매상, 아편상 술집이었는데 1938 년부터 위 안소가 되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양자강 강가 길 건너 연강대도( 沿江大道) 에 있는 해군구락부에도 위안부 가 있었고, 무창 두급영( 斗級營) 에도 위안소촌이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이태백이 시를 썼다는 곳에 세운 황학루( 黃鶴樓) 바로 아래이다. 우리 안내인의 말에 의하면 이 외에도 무한에는 민간인이 경영하는 위안소가 많았다고 한다.

우리가 만난 할머니 9 명 중에 적경리에 있던 할머니는 세 사람이다. 나머지는 하얼빈, 봉 천(奉天) , 천진, 상해, 남경, 광수( 廣水) , 십편27 ) , 무창, 장사에 있던 위안소에 있었다.

사람이 여섯인데 지명이 그 이상인 것은 한 사람이 여러 곳에 있기도 했기 때문이다.

패전 후 일본군은 연합군에게 알려지면 수치스럽거나 불리하다고 판단되는 서류는 불사르 거나 파기했다. 이 사실은 전 일본군이 많이 증언하고 있다. 이 서류 중에 위안부 에 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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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가 들어 있었을 것임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다.

일본군이 저지른 또 하나의 중죄는 조선인 위안부 를 학살한 일이다. 오키나와 도카시키 섬( 渡嘉敷島) 에 있었던 배봉기 할머니와 같이 일본군과 함께 항복하고 포로가 된 위안부 도 있으나 일본군에게 학살당한 조선인 위안부 도 적지 않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 보았다. 다만 이 시점에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은 일본은 시간이 지날수록 비인도적이 되었다는 점이다. 1948 년 네덜란드는 바타비아( 현 자카르타) 에서 군사재판을 열었다. 일본 군이 네덜란드 여성을 강제로 성노예로 만든 데 대한 B, C 급 전쟁범죄 재판이었다. 네덜란 드 여성 35 명에 대해 13 명이 피소되었는데 이 중 9 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한 사람은 처형 까지 되었다. 그런데 종전 50 년이 되는 올해에도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국제법으로 볼 때 전쟁범죄였으며 인도에 반하는 중대한 죄였다는 것을 일본 정부는 인정하지 않는다. 피해국 과 국제 여론에 못 이겨 구상한 정책 또 하나의 속임수에 불과하다. 1995 년 현재 일본정부가 계획하고 있는 안은 아시아여성교류우호기금 을 민간기금으로 조성해 그 일부를 전 일본군 위안부 에게 미마이킨(見舞金) 으로 준다는 것이다. 미마이킨 이라면 위로금인데 전쟁범 죄와 같은 죄를 저지른 가해자가 배상금이 아닌 위로금을 낸다는 것도 말이 안 되거니와 죄 를 저지른 자는 정부요 일본군인데 어찌해서 그 죄 값을 국민에게 떠넘기느냐 하는 점이다.

또한 언제까지 범죄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느냐는 점이다.

이제 패전했을 때 일본군이 버린 조선인 위안부 를 만나서 들은 증언을 통해서 일본군의 조선인 위안부 제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무한에 있는 9 명, 홍강림, 홍애진, 하군자, 이봉화, 임금아, 장춘월, 박필연, 역영란, 박 막달 할머니는 일본군에게 버림받은 조선인 위안부 중 생존해 있는 산 증인이다. 전쟁중 에 뿐 아니라 패전 후에도 일본군이 저지른 범죄행위의 산 증인이다. 이봉화 할머니는 적경 리에 있었는데 조선으로 가는 배가 온다고 하면 위안부 들이 아침부터 밥도 안 먹고 배를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배는 오지 않고 계속 미뤄졌다. 그러는 동안 기다림에 지쳐 뿔뿔 이 흩어졌다는 것이다. 장춘월 할머니는 일본에 대해 원망이 많다. “일본이 없었다면”,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자기들이 중국 땅에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비슷한 말을 서울의 김학순 할머니도 했던 적이 있다. “일장기가 내 인생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 다”고.

무한에 있는 할머니들 증언에 의하면 조선 남자들이 무한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던 위안 부 들을 적경리에 모은 것이 분명하다. 일본 여성들을 일본 조계에 모인 모양이다.

아홉 명의 할머니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고향 땅을 밟고 싶어한다. 부모 형제를 못 찾아 도, 고향에 가서 죽어도, 가고 싶다는 것이다.

하군자 할머니의 남편이 만든 명단 33 명중에서 지금 살아 있는 할머니는 8 명이다. 사망한 25 명중에는 마약중독으로 죽은 사람, 독약을 먹고 자살한 사람, 달리는 기차에 뛰어들어 죽 은 정신병자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살아 있는 할머니 중에는 신경에 이상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1/ 3 이다. 박막달 할머니는 한국말을 잊어버린 것은 이상할 것 없다손 치더라도 이름도, 나이도, 고향도 모른 다. 중국말도 잘 안 한다. 이봉화 할머니는 고향이 너무 그리워 정신분열증에 걸렸었고, 홍 감림 할머니는 지금도 때로는 정신이 쑥 빠졌나간다고 한다. 우리가 홍강림 할머니 집을 찾 아갔을 때 할머니는 언제나처럼 담배를 피워 물고 멀리 있는 고향을 생각하다 정신이 멍멍 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그때 우리 일행 네 사람이 나타났다. 할머니는 너무 놀라고 미덥지 가 않아서 “아니 우리를 만나러 일부러 온 거요”하고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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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이 1994 년 5월 무한을 떠날 때 소원이 무엇인지 물으니 고향에 가는 것이었다.

박필연 할머니는 다리가 썩어 들어가는데도 치료비가 아니라 고향 방문을 원했다. 올해 1995 년 1월에 다시 가보니 박필연 할머니는 그 동안 세상을 떠났다.

홍강림 할머니는 우리가 떠난 후 바로 여권 사진을 찍어놓고 한 갑 피우던 담배를 두 갑 으로 늘렸다. 이제는 담배와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처음 우리가 만난 단계에서는 할머니가 애타게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체념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국 방문을 못해도 할 수 없지 ,

팔자가 사나워서 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를 만나고는 아무리 우리가 “고향 방문이 된다고 약속할 수는 없다. ”다만 “최선을 다해보겠다. ” “허가를 못 받을 수도 있 다. ”고 경고해도 이제는 고향 땅을 밟는 날을 초조히 기다리게 되었다. 고향 방문을 못하 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정말로 한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제부터 무한에 생존해 있는 조선인 위안부 가 일본 패전 직후 어떻게 버려졌는지 그들 의 증언을 정리해본다. 장사에 있었던 홍강림 할머니는 주인이 보따리를 싸 달아나 버려서 일본이 전쟁에 진 것을 알았다고 한다. 장사에 있던 모든 일본 사람들도 도망했다. 중국 사 람들은 조선인 위안부 를 일본 여자인 줄 알고 때리고 옷을 뺏고 갖은 행패를 부렸다. 그 러나 조선인 위안부 는 자기들이 강제로 위안부 가 되었다는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중 국말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위안부 들은 닥치는 대로 차에 올라타거나 강으로 달려가 배를 타고 제각기 흩어졌다.

홍할머니는 조선인 운전기사가 무한의 적경리를 찾아가라고 해서 다른 위안부 세 사람 과 장사에서 배를 타고 무한으로 향했다. 오는 도중 중병을 앓고 있던 한 여성은 배 안에서 죽었다. 뱃사공은 그 동료를 물 속에 던졌다고 한다.

무한에 도착한 홍할머니는 적경리에 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는 여자를 방에 가 두고 때려서 여자들의 비명이 들린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매는 지금까지도 너무 많이 맞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봉화 할머니의 말에 의하면 적경리에서 전쟁 중 아편중 독이 된 위안부 들을 격리하여 엄격하게 관리했던 것이 그렇게 소문이 난 모양이라고 했 다.

하군자 할머니와 이봉화 할머니는 적경리에 있었기 때문에 버려지기는 했으나 다른 위안 소에 비해 비교적 조용히 해방을 맞았다. 1945 년 8월 어느 날 군인들은 나타나지 않고 옆집 일본 여자들이 울고 있어서 하군자 할머니가 알아보니 일본이 졌다는 것이다. 미국 비행기 때문에 일본이 항복을 했다는 사실을 일본인 위안부 들에게서 들었다. 그들이 12시 방송을 들어보라고 해서 조선인 위안부 가 방송을 들어보니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것이었다.

하군자 할머니 증언에 의하면 적경리에 있던 위안부 는 12시 방송 이전에 일본군이 항복한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하할머니는 “그때 나는 열여덟 살이었다. 그 지역의 조선 사람은 모두 적경리에 모였다. 일본 사람은 일본 조계에 모이라고 했다”며 50 년 전 기억을 더듬었다. 조선인 전 일본 군인이 조선인 위안부 를 적경리까지 데려다주기도 했다는 증언 이 있다. 해방 직후 무한에서는 비교적 조직적으로 일본군 소속 조선 군인이 조선인 위안 부 와 일본군에 끌려간 조선 남성들의 뒷바라지를 한 모양이다. 이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 람은 정재협에 연락해주었으면 감사하겠다.

임금아 할머니가 있던 위안소 경영자는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버렸다. 중국 사람이 일본의 패전을 가르쳐주어서 알았다. 그때 임할머니는 스물 세 살이었다.

인물이 좋아서 위안소 안에서 인기가 있었던 홍애진 할머니는 일본군 항복 전에 위안소에 서 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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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춘월 할머니는 극히 드문 경우이다. 그는 광수, 십편, 무창에 있었다. 세 곳의 경영인 모두 조선 사람이었는데 정직하게 위안부 수입을 계산해주었다. 그래서 장할머니는 무한 에 있던 세 번째 위안소에서 빚을 청산하고 할머니에게 친절했던 중위가 준 500 엔으로 작은 가게를 내고 있었다.

박필연 할머니는 중국인 부부가 경영하던 위안소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중국 여성이 많고 조선 여성이 약간 있었는데 일본 여성은 없었다.2 8 ) 할머니는 이곳에서 해방을 맞은 것이다.

중국인 경영인이 위안소에서 두 시간쯤 걸리는 다른 집에 위안부 를 데려다 놓고 귀국시키 겠다고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그 집에서 도망 나왔다. 할머니는 언제 조선으로 보내줄 지 몰라서였다고 우리에게 말했다.

적경리에 모인 조선인 위안부 중 원하는 사람은 귀국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군 자 할머니와 같이 귀국을 단념한 사람도 많았다. 하할머니는 필자에게 “이런 몸을 가지고 어떻게…”라며 말을 맺지 못했다. 위안소에 있게 된 것이 결코 자신들의 죄가 아닌데 지금 까지 자신들의 수치로 깊이 믿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 때문에 귀국을 포기하고, 그 이유를 말하지 않고 부모형제를 찾을 수도 없을 테니까 라고 핑계를 대면서 자존심을 살려왔다. 부 모 형제를 찾을 수 없게된 것은 세월이 훨씬 지난 후의 일이고 1945 년쯤에는 찾을 확률이 높지 않았던가.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는데 스스로 포기한 경우의 증언을 들어본다. 필자는 김지영씨를 199 1년에 만났다. 김지영씨는 일제 말기 징병되어 중국에 배치됐던 또 다른 피해자이다. 김 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일본이 항복한 후 상해에서 귀국선을 기다렸다. 그곳에는 조선 사 람이 많이 살던 지역에 술집이 열 곳쯤 있었고 한 집에 위안부 가 3~4 명씩 있었다. 석 달 쯤 기다려서 귀국선을 타게 되었을 때에 거의 모든 위안부 가 귀국을 포기했다. 다만 네댓 명만이 배에 올랐다. 30 ~ 40 명 중 5 명 정도만이 귀국을 결심했다는 말이다. 막상 부산에 도착했을 때는 상륙 수속 관계로 하룻밤을 배에서 묵어야 했다. 상륙 예정이던 날 새벽에 두 여성은 갑판에서 투신자살했다.

패전과 더불어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 를 어디서 얼마나 학살했는지 이 단계에서는 알 길이 없다. 버려진 사람도 어디에 얼마나 살아 있는지 거의 조사되어 있지 않다. 버려진 사 람 중에서 또 얼마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르고 있다.

버려진 위안부 들은 좋아서가 아니라 죽지를 못해서 사는 것이 그 길밖에 없어서 중국 남성과 같이 살았다. 말을 모르고 풍속을 모르고, 아이도 못 낳아서 구박이 심했다고 한다.

중국 사회에서 말을 못하고 알아듣지 못하니 바보였고 어떻게 해서 위안부 가 되었는지 몰 랐기 때문에 매춘녀로만 생각하고 심하게 천시했던 모양이었다. 당사자들도 강제로 성노예 가 되었는데 뭇 남성을 상대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매춘녀가 되어버린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 다. 때문에 문제는 피해자에게 불리하게만 작용한 모양이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피해자들의 고통은 본인이 아니면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위안소도 아닌데, 해방이 되었는데 집에도 못 가고 천시 당하면서 죽지도 못하면서 중국 땅에서 살아 가야 했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겠다. 박필연 할머니가 첫 번째 남편을 만났을 때는 30세 였고 남편은 40세의 농부였다. 2 년쯤 살았는데도 아이가 없었다. 병원에 가보지도 못했다.

박할머니는 남편이 달갑지 않기도 해서 집을 나왔다. 두 번째 남편은 효감(孝感)2 9 ) 에서 농 사를 짓는 사람이었다. 그는 병을 앓고 있어서 생활도 힘든데 병수발까지 들어야 했다. 남 자는 결국 죽었다. 세 번째 남자를 만나 시집에 들어가던 첫날 시집 식구가 박할머니에게 돌을 던졌다. 창녀를 집에 데려온다고 반대한 것이었다. 그 돌이 박할머니 왼쪽 눈에 맞아 그 눈은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 집도 농사짓는 집이어서 밭일을 하던 어느 날 독벌레한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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