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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391∼413)이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한 데 이어 장수왕(413∼491)은 남진정책을 펴면서 백제와 신라를 치고 죽령(竹嶺) 이북과 남한강 일대까지 세력을 펼치는 전성기를 맞았다. 아들 문자명 왕이 장차 남방진출의 거점이 될 이곳에 기념비를 세웠는데, 이 비를 ‘충주 고구려비’로 추정한다. 가금면 용전 리 입석(선돌배기)마을 어귀에 서 있던 돌기둥은, 1979년 이 지역 예성문화연구회가 당국에 알려 단국대 학 술조사단의 현지조사를 통해 고구려비로 밝혀지며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자연석(화강암)을 갈아 만든 비 석의 높이는 2.03m, 너비 0.55m가량의 두툼한 사각 돌기둥으로, 규모는 작지만 중국 길림성 집안시 통구(通 溝)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와 비슷한 모양이다. 비문은 예서체 글씨로 제1면에 23자씩 10줄, 제2면에는 23 자씩 7줄, 제3면에 6줄, 뒷면은 거의 마모되었으나 9줄 가량으로, 모두 400여 자 정도가 새겨져 있다. 마모된 부분이 많아 비문의 전체 내용을 완전하게 파악할 수는 없으나, 앞부분에서는 고구려와 신라가 사이좋게 지 내던 일이 적혀 있고, 뒷부분은 두 나라 사이가 나빠져 백제 개로왕(455∼475)과 신라가 협력하여 고구려에 대항한 내용으로 해석되고 있다. 비석의 보존관리를 위해 1981년 비각을 세웠으나, 이후 전시관 건립이 추진 되면서 2012년 비석이 서 있던 자리에 고구려비전시관이 문을 열게 되었다. 국보 제205호 ‘충주 고구려비’는 역사와 문화적 가치도 크지만, 우리나라 유일의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시관 주변에 도 당시의 유물유적과 관련명소가 몇 곳 있는데 우선, 충주팔경으로 꼽히는 장미산성, 봉황리 마애불상군, 노 은면 고구려 금동광배, 두정리 고구려고분, 탑평리 온돌유구, 그리고 최근에 건립된 고구려천문과학관도 볼 만하다. 4∼5세기 남방진출의 거점이었던 고구려 국원성(國原城) 충주는 지금 향기로운 금석문화를 자랑하 는 삼국시대를 맞고 있다.
박영순|수필가
충주(忠州) 고구려비(高句麗碑)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마을 삼거리에 자리한 충주 고구려비전시관 외부 탁본(모조)비
우 리 문 화 유 산 의 향 기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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