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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려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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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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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기려수필의 기록유산적 가치에 관한 고찰

1)

김덕환*2)

Ⅰ. 머리말

Ⅱ. 기려자와 기려도사

Ⅲ. 기록으로 남긴 역사의 승자

Ⅳ. 시대의 변화를 통찰하다

Ⅴ. 맺음말

◁ 목차 ▷

* 경상대학교 인문대학 중어중문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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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Documentary Heritage Value of the KiRyeo Essay

Kim, Dukhwan In 1910 after the forced Japan-Korea Treaty, Song Sang do went all around the country to collect and organize data and wrote the book “KiRyeo Essay” contaning the valuable records of the patriots who sacrificed themselves for the country. The

“KiRyeo Essay”, which gathered and compiled the historical moments of the patriots from the end of Chosun to the Japanese Colonial era, contains the story of Lee Siwon who died for his chastity in 1866 during the French Campaign against Korea, Ahn Joong keun, Yoon Bong gil and 239 other patriots and many big and small anti-Japanese movements including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Korea, 6.10 Independence movement, and KwangJu Student’s movement etc. Hence, “KiRyeo Essay” is a precious record that must be remembered by the humanity and inherit to the future generations, having sufficient storage value. Colonization through intrusion using military force cannot be justified in any ways, and even in such case of colonization, people should not submit themselves but rise and resist protecting the freedom and peace of the humanity. The standards of Memory of the World requested by the Unesco are sincerity, global importance, comparative standards and supplemental require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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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환

<Key Words> KiRyeo Essay, Ki Ryeo za, Song Sang do, an anti-Japanese mindset, an anti-Japanese movement

Ⅰ. 머리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고(Winston Churchill),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하기 마련이다.(George Santayana) 역사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마다 자주 인용되곤 하 는 이 격언은 나라를 잃고 치욕을 당해 본 적이 있는 민족에게 다시는 그러한 전철을 되밟지 않도록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말이 다.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는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 하여 자치통감(資治通鑑)(송대 사마광)과 동국통감(東國通鑑)

(조선 서거정) 등 역사서에 거울 ‘감(鑑)’으로 끝나는 제목을 붙이 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찍이 기려자(騎驢子) 송상도(宋相燾: 1871-1947)는 1910년 대 한제국의 멸망으로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배에 들어가자 수많은 의사와 열사들이 분개를 참지 못하고 절개를 지켜 순절하거나 국 내에서 의거를 일으키거나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에 앞장서는 현 실을 직시하였다. 당시에 그는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조선 왕조사를 집필하고 있었으나 망국이라는 암울한 시대를 당하여 고대사 집필을 잠시 중단하고 눈앞에 닥친 당대의 역사로 방향을 선회하여, 일제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항거하는 의사와 열사들 의 행적을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는 것을 필생의 사명으로 삼았다.

그는 국난의 시기를 당하여 의로운 선비로서 그 책무를 다하고자 하였다. 그는 1910년 강제 한일병합 이후 30여 년간 전국 방방곡 곡을 두발로 찾아다니며 직접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나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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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해 헌신한 애국지사들에 관한 소중한 기록을 기려수필(騎驢隨 筆)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남겼다.

기려수필은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이어 한국 사료총서 제2집(1955년)으로 출간될 정도로 그 사료적 가치를 일 찍부터 인정받았다. 1955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간행되고 있는 한국사료총서는 유실되기 쉬운 국내외 사료를 조사·수집하여 영 구 보존하고, 한국사 연구의 저변을 확대하여 한국사학 발전에 기 여하고자 한국사 연구에 필수적인 자료들을 선정하여 간행한 자 료집이다. 기려수필은 정부에서 독립유공자를 포상할 때 매천 야록과 더불어 주요한 근거자료로 활용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기려수필 원문의 번역과 그에 대한 연구는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하다가 2010년에 이르러 ‘기려수필 번역 및 정본화 사 업’(충남대 한자문화연구소)이 진행되면서, ‘기려수필의 사료적 가 치 재조명’(2010, 충남대), ‘독립지사 송상도 선생의 삶과 저 술’(2012, 충남대)이라는 주제의 학술대회가 개최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2014년에는 기려수필: 망국의 한, 기록으로 꽃피우다라 는 역주본(4권)이 발간되는 커다란 성과가 있었다. 그해에 영주에 서는 송상도 지사를 추모하려는 기념사업회가 결성되고, 2016년에 는 서거 70주년을 맞아 ‘통한의 붓’이라는 뮤지컬이 공연되기도 하였다.

이 기간에 발표된 연구논문으로는 이재숙(2011)의 「기려수필

소재한시(所載漢詩)의 우국과 저항의식 연구」(어문연구 67집, 어문연구학회), 김병건(2012)의 「의열투쟁(義烈鬪爭)의 문학적 형 상화 『기려수필』」(동방한문학 53집), 박민영(2012)의 「송상도 의 『기려수필』에 나타난 의병관」(충청문화연구 9집), 박우훈 (2012)의 「『기려수필』에 나타난 여성의 모습」(충청문화연구 9 집), 이재숙(2013)의 「기려자 송상도의 생애와 저술에 관하여」(대 동한문학」, 39집), 정만호(2013)의 『기려수필』의 안설(按說) 연 구」(한국문학이론과 비평 58집), 이재숙(2014)의 「기려수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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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환

나타나는 여성 항일운동과 의미」(어문연구 42집, 한국어문교육 연구회), 김도훈(2016)의 「『기려수필』 편찬과정과 체재분석 - 원본과 국사편찬위원회 간행본을 중심으로」(한국민족운동사연구

 86집) 등이 있다.

Ⅱ. 기려자(騎驢子)와 기려도사(騎驢道士)

기려자(騎驢子)는 송상도의 호이다. 그는 스승인 탄당(坦堂) 김 영주(金永冑)로부터 명나라가 망한 뒤 성명을 숨긴 채 나귀를 타 고 돌아다니며 순절지사의 사적을 모아 세상에 전한 기려도사(騎 驢道士)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그 기려도사를 흠모하여 자 기의 호를 기려자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명말 청초에 살 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기려도사에 대한 기록은 필자의 과문한 탓 인지는 몰라도 그 자료를 확인하기 어렵다. 원래 ‘기려(騎驢)’라는 말은 나귀를 타고 다닌다는 뜻으로 중국에서 은자나 문인 등을 지칭하던 뜻으로 자주 사용되던 말이다.

나귀는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일을 담당했으며 신화나 옛 이야기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동물이다. 서양권에서는 바보같은 인 간을 부를 때 ‘나귀(Donkey, Ass)같은 놈’이라고 부르기도 하지 만, 순박하고 우직하게 노력하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중국에서도 나귀에 대한 기록은 일찍부터 보인다. 기원전 4 천년 전후 청동기 시대(은나라)에 나귀를 길러 길들이기 시작한 이래로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강하고 성실하며 까다롭지 않은 동 물로 인식되어 왔다. 나귀는 성질이 온순하고 길을 잘 찾으며 등 에 타도 편안하고, 또 주인을 배반하는 일이 없이 충실하고 정확 하게 목적지까지 데려다 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나귀가 들어온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삼국시 대에 나귀를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나귀는 말보다 값이 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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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이도 조금 먹으며 오랫동안 걸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빨 리 달리지 않고 천천히 타고 다니기에 용이하여 말보다 덜 위험 한 동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양반들이 이동수단으 로 자주 이용했다고 한다. 나귀는 사람을 태우기에는 몸집이 다소 작아 적합하지 않은 것 같지만 의외로 선비들은 말보다 나귀를 선호하여 선비의 상징으로 여겼다. 경도잡지(京都雜志)에도 유 생들은 나귀를 타기 좋아하였으며 조관들도 이용하였다고 되어 있다.

중국에서 나귀는 문인들과 밀접한 인연이 있다. 말은 주로 무인 들이 타고 다니면서 전쟁터를 누볐다면, 나귀는 문인들이 즐겨 타 면서 산천을 주유하였다. 말이 우아하고 호방하며 낭만적인 삶을 상징한다면, 나귀는 쇠퇴하고 고된 일을 하며 짐을 옮기는 등의 힘든 삶을 상징한다. 예로부터 중국문인들은 그러한 나귀에게서 동병상련의 느낌을 가졌던 것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특히 과거에 낙방하였을 때 자주 나귀를 타고 산천을 유람하면서 실의로 울적 한 마음을 위로받곤 하였다. 당나라 구양순 등이 칙명을 받고 지 은 예문유취(藝文類聚) 「문인전(文人傳)」에는 건안칠자(建安七 子)의 한 사람인 완적(阮籍)이 동평태수(東平太守)로 부임하면서 나귀를 타고 왔다가 나귀를 타고 떠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문인들이 나귀를 타고 다녔다는 최초의 기록이다. 그 후에는 당나 라의 유명한 시인 가도(賈島)가 나귀를 타고 가다가 자기가 지은 시 중에서 ‘퇴고(推敲)’ 두 글자를 놓고 어떤 것을 선택할지 고심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로부터 고대 중국의 문인들과 나귀의 인연 은 깊어지게 되었다. 당나라의 위대한 시인 이백과 두보, 송나라 의 뛰어난 시인 육유(陸游)도 나귀 등 위에서 시상을 떠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써 고대 중국에서 ‘기려(騎驢)’의 행위는 시인의 상징이 되었다. 또 명나라 때 요재지이(聊齋志异)라는 기이한 소설집을 남긴 포송령(蒲松齡)은 나귀를 타고 남방지역을 유람하 면서 고통 속에 처절한 삶을 살아가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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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환

슴 속에 가득 싸인 울분과 감개를 소설로 발출하였다. 명나라가 멸망하자 명나라의 유민들 중에는 나귀를 자기 호로 삼고 망국의 한을 씻고자 한 이들도 많았다. 특히 망국의 한을 그림으로 표현 한 팔대산인(八大山人) 주답(朱耷)은 명왕실의 후손으로 승려가 되었다가 환속하였을 때 호를 개산려(個山驢)라 하고 자기 작품의 직인으로 나귀를 뜻하는 ‘려(驢)’자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송상도가 자신의 호와 책 제목에 사용한 ‘기려(騎驢)’는 명나라 의 유민 ‘기려도사(騎驢道士)’에게서 그 뜻을 취하였다고 한다. 기 려도사는 명나라가 멸망하자 자기의 이름을 감추고 나귀를 타고 천하를 돌아다니며 절개를 지키다 죽은 사람의 사적을 수집하여 세상에 전하였다고 하는데, 송상도는 스승 김영주에게서 이 말을 들은 후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었다가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자기도 기려도사처럼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나는 구국적 의행을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하기 위해 괴나리봇짐을 꾸렸다. 그는 실 제로 나귀를 타고 전국을 누비지는 않았고, 단지 망국의 한을 씻 고 나라를 되찾고자 노력한 충신열사들의 기록을 남긴 기려도사 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그의 호 기려자에는 주인을 절대 배반하지 않는 나귀의 우직한 충성심과 끝까지 포기 하지 않고 임무를 완성하는 불굴의 정신으로 중국의 기려도사처 럼 후손들에게 똑같은 치욕의 역사를 되밟게 하지 않겠다는 고결 하고도 절실한 선비의 의지가 깃들어 있다.

Ⅲ. 기록으로 남긴 역사의 승자

흔히들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하지만 세상의 수많은 역 사 중엔 승자가 아닌 패자의 역사도 많다. 그리고 인류역사에는 영원한 승자도 영원한 패자도 없고 역사는 도도한 흐름의 물결 속에 언제나 항상 현재 진행형 속에 있을 뿐이다. 자연의 생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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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고 한다면, 인류사회의 변천사에서는 역사가 승자의 기록이 역사가 아니라 기록을 남긴 자가 역사의 승자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와 같은 망국의 시대에는 당시의 승자였던 일 본 측의 기록이 심각하게 왜곡되었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남긴 기록이 없었다면 그야말로 우리는 영원히 역사의 패배자로 전락 되어 있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 하에 있던 1919년 3월 1일 전국 적으로 독립 만세운동이 터져 나가자 일제는 총칼에 의한 무단정 치를 중단하고 새로운 문화말살 정책으로 방향을 선회하였다. 즉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불식시키기 위해 과거의 자랑스런 역사 를 전혀 모르게 하거나 축소되게 왜곡하여 한민족의 정기와 혼을 없애고 열등의식을 심어놓아 일제에 스스로 종속되게 하려는 것 이었다. 그들은 이미 1910년부터 조선에 있던 중요한 사서와 역사 자료 이삼십만 권을 은밀히 거두어들여 일본에게 불리한 자료는 소각하거나 일본으로 보내 보관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았으며, 1922년에는 조선총독부 예하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설립하여 노골 적으로 단군 관련 자료 등 상고사와 삼국시대 역사서를 없애고 조선사를 왜곡 축소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일제의 눈을 피해 항일 투쟁의 역사서를 집필한다는 것은 거의 목숨을 건 행위나 다름없 었다. 송상도는 기려수필 발문에서 당시 역사서 집필이 얼마나 위험한 일이었는가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그들의 충절은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해와 달과 빛을 다투겠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모두 꺼리고 싫어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한번 입에 오르거나 붓 으로 써 내면 재앙이 곧바로 찾아든다. 사람들이 만일 재앙을 두려워하여 그 사실을 수집하여 세상에 전하지 않으면, 늠름한 충성과 높디높은 절개는 몇 년 지나지 않아 사라져서 들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어찌 뒤에 죽는 사람 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 이에 감히 옛날 기려도사가 했던 일을 본받아 호남·관서·기호·영남 등지를 돌아다니며 어려움과 수고스러움을 회피하지 않 고, 늙어 죽을 때까지 널리 수집하고 찾아다녀 책을 완성하였다.(강원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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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환

옮김 2014: 392)

其忠節在我 雖與日月爭光 在日賊 皆其所諱惡也 是以一上口滋筆 其禍立至 人如畏禍 無採摭而傳世 凜凜之忠 巍巍之節 不幾年湮沒無聞 此豈非後死者之責 耶 …… 是以敢效古之騎驢道士 湖關畿嶺 不辭艱險 不憚勞苦 積歲窮年 廣搜博 訪(宋相燾: 457)

이 시기에 전북 임실의 유학자 조희제(趙熙濟)도 항일운동을 펼 친 이들의 의행을 수록한 염재야록(念齋野錄)을 저술하였다. 그 는 1931년에 원고를 완성한 다음 1934년에 각각 최병심과 이병은 에게 서문과 발문을 부탁하고, 서울에 사는 김한에게 교정을 의뢰 하여 염재야록 편찬 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런데 1938년 11월  염재야록의 편찬에 관한 사실이 일제에 발각되어 편찬을 주도 했던 조희제는 임실경찰서로 연행되어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혹 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집으로 돌아와서 몸조리를 하던 중 상투를 자르라고 다그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66세)

조희제는 초야에 묻힌 애국지사들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기존에 편찬된 역사서의 내용도 분석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에서 이러한 성격의 책을 편찬하고 있는 상황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 던 것으로 보인다. 황현의 매천야록과 박은식의 한국통사 등 을 입수하여 그 내용을 검토했고, 송상도가 기려수필을 저술하 기 위해 전국을 돌며 밤낮으로 고심하고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요즘 한국역사를 편찬하는 이들은 부분 이미 간행된 대동기년(大東紀年)

을 모방해 5백 년 동안의 조보(朝報)만 엮는 것이 상례다. 김택영(金澤榮)이 지은 한사경(韓史綮)의 경우, 김택영 자신은 직필(直筆)에 견주었지만 취사 선택이 공정하지 못하고 시비가 뒤바뀐 곳이 많다. 그리고 뇌양(賴襄)이 편찬 한 일본외사(日本外史)는 다른 역사책들과 범례가 같지 않고 자세함과 간 략함도 서로 다르다. 다만 초야에 여기저기 있는 실록으로서 영재(寧齋) 이건 창(李建昌)의 당의통략(黨議通略), 승지(承旨) 안종화(安鍾和)의 국조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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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진사 황현의 매천야록, 태백광노(太白狂奴) 박은식(朴殷植)의 대한통 사 등의 편찬서들은 서로 장단이 있다. 그리고 진산(珍山)의 김경중(金暻中), 예천의 선비 송상도, 김제의 선비 강진형(姜震馨) 등 여러 사람의 경우는 다 년간 열심히 편집했으나 아직까지 탈고하지 못했다. (변주승 2009: 437-438)

이와 같이 조희제가 송상도의 기려수필 집필 상황을 익히 알고 있었다면 송상도 역시 조희제의 염재야록 편찬뿐만 아니라 일 제에 고문 받은 사실과 자결하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 었을 것이다.

송상도는 1934년경에 일단 기려수필을 간행하려고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발간을 제때 하지 못하고 뒤로 미루게 되었는데, 이 시기는 조희제가 염재야록의 편찬 작업을 마무리한 때와 정 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일제가 우리 선열들의 독립운동 을 역사에서 지우기 위해 얼마나 엄격하게 감시하고 통제하였는 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겠다. 조희제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 여 염재야록의 다른 한 질을 마루 밑에 땅을 파서 묻어두었고, 송상도 역시 기려수필을 땅 밑에 감춰두고 잘 간직하였기에 나 라를 되찾은 후에 그것들은 바야흐로 세상에 그 빛을 발할 수 있 게 되었던 것이다.

기려수필은 단순히 인물에 관한 열전의 기록이 아니라 일제 강점기]라는 국난의 시기에 비록 일제에게 강토는 빼앗겼지만 한 민족의 정신만은 지켜내야 겠다는 비장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쓴 망국의 역사이며, 영원한 패자가 되지 않겠다는 각오로 쓴 일 종의 항일투쟁사이다.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義親王) 이강 (李堈)은 기려수필을 직접 보고 송상도의 나라에 대한 우국충절 을 칭찬하며 ‘삼한대의 육주고사(三韓大義 六洲高士)’라는 친필을 그에게 내리기도 하였다. 이것은 한민족의 대의를 세계에 밝힌 고 결한 선비라는 뜻으로 그의 기개와 인물됨을 잘 평가한 말이다.

그는 기려수필의 편찬 동기가 바로 그러한 춘추대의를 밝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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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환

데 있다고 하였다.

세신(世臣)이나 옛 벌열(閥閱) 중에 충성과 남다른 절의가 있는 사람, 그 밖에 의열이 늠름하고 우뚝한 사람들의 경우는 틀림없이 나라의 역사서에 실 리고 야사(野史)에 수록되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초야에서 지낸 미천한 무 리들의 경우는 전해줄 집안도 없으며 채록할 사람도 없어서 틀림없이 궁벽진 시골에서 썩어 없어져 눈속 기러기처럼 아무 흔적도 없을 테니 안타깝고 탄 식할 만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런 사람들의 기록을 더욱 수집하여 숨겨진 사실을 밝혀주는 춘추(春秋)의 뜻을 붙인다. (강원모 등 옮김: 23-24)

世臣舊閥之有苦忠殊節 其他義烈之所凜凜卓卓者 必載之國乘 撮之野史 不爲 泯沒 至於草茅遐賤之徒 傳無其家 採無其人 必腐化窮鄕 雪鴻無跡 可不爲嘆惜 乎 是以 此若之人 尤爲收摭 以寓春秋闡幽之意(宋相燾: 15)

그는 망국의 시기에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의로운 일을 하고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의 행적을 찾아내어 후세에 전하는 것이 바로 춘추대의라고 생각하였다. 세상 운수가 쇠퇴하고 도덕 이 미약해져 간사한 학설과 난폭한 행동이 다시 일어나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시해하는 일이 있어 공자는 그 것을 매우 두려워하여 춘추(春秋)를 지었다.(孟子 「滕文公下

」) 즉 난세에 의리와 명분을 바로잡고 인륜의 세태를 바로잡는 것이 바로 춘추대의인 것이다. 따라서 송상도가 이름 없는 시골의 애국지사들의 의로운 행적까지 찾아내어 기록으로 전하겠다는 뜻 은 역사의 주인공이 바로 이 땅에서 묵묵히 살아가다 불의를 위 해 일어서는 민초들이며, 침략자 일본에 끝까지 항거하여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 의리와 명분을 바로잡는 길임을 만천하에 천명한 데 있다.

결국 한민족은 독립을 쟁취하였고 기려수필에 수록된 수많은 인물들이 이를 근거로 독립유공자로 포상되는 영광을 찾았다. 역 사를 기록하면서 악행을 단죄하고 선행을 포상하는 포폄(褒貶)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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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은 춘추필법이라는 이름으로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다. 역사에 기록되는 진실과 정의가 바로 춘추필법이다. 진실과 정의의 힘은 모든 권력과 역사를 뒤엎을 수도 있지만 거짓과 불의에는 무서운 필주(筆誅)를 내리기도 한다. 비록 한 시대에는 강토를 유린당한 패자였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서 춘추의 필법으로 후손들에게 민족적 자긍심을 심어준 송상도의 기려수필은 그야 말로 패자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의 승자인 것이다.

Ⅳ. 시대의 변화를 통찰하다

송상도는 격동하는 시대적 물결 속에서 비교적 냉철하게 현실 을 직시하면서 변화를 통찰하고 수용하고자 노력한 인물이다. 지 금까지 그의 학문적 배경을 소개하는 글에서는 대부분 퇴계학파 를 계승한 유학자의 모습으로만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의 호 기려자는 명나라의 유민 기려도사에서 그 뜻을 취하였다고 하는 데, 이 ‘도사’라는 말에는 도교적 색채가 강하게 풍겨난다. 이는 기려자라는 말에 알게 모르게 도교적 색채가 묻어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호 남명이 장자에서 뜻을 취하였다고 하여 퇴계학파의 성리학자들로부터 이단적이라 는 비판을 받은 점을 상기한다면, 퇴계학맥을 계승하였다고 하는 송상도가 도교적인 색채가 묻어있는 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선 뜻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그는 기려자 외에 연파(蓮坡)라는 호 도 사용하였는데 ‘연꽃이 피어있는 언덕’이라는 뜻의 이 호에는 어딘지 모르게 불교적 향이 배어있다. 실제로 다산 정약용과 친분 이 두터웠던 혜장스님의 호가 바로 연파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 은 송상도의 사유세계가 성리학의 틀에 갇혀있지 않고 다분히 개 방적이면서 열려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된다.

송상도가 퇴계학맥을 계승하였다는 것은 퇴계학맥도에 면우(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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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환

宇)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으로 소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려수필 발문에서 그는 스스로 탄당 김영주에게 수학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24세(1895) 무렵에 김영주의 문인으로 들어가 서 5년 정도 가르침을 받았으며, 기려수필을 편찬하게 된 결정 적인 동기도 김영주로부터 들은 기려도사에 관한 이야기에서 비 롯되었다. 그런데 김영주는 호서지방에서 영주지역으로 이주해 온 화서학파 계열의 유학자였다. 김영주의 스승인 연재(淵齋) 송병선 (宋秉璿)은 기호학파의 대표자인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으 로 이항로(李恒老),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 최익현(崔益 鉉), 기정진(奇正鎭)으로 이어지는 화서학파의 계승자였다. 화서 (華西) 이항로가 창시한 화서학파는 19세기 전반에 형성되어 20세 기 초반까지 한국 근대사의 전개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위정척사 세력이다. 그들은 성리학의 위도론(衛道論), 동기론 및 의리론에 입각하여 세도정치와 개화를 반대하고 상소운동, 항일의 병운동, 왕조복원의 구국운동 등을 펼쳐 우리나라 근대 민족주의 의 태동과 발전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탄당 김영주는 정산(靜 山) 김용하(金溶夏)와 의병을 일으켜 영호남의 유생들에게 격문을 보내며 활동하다가 1900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하였다.

그 후 송상도는 안동의 오산(梧山)으로 이사 온 동정(東亭) 이 정호(李正鎬)에게 학문을 배웠다. 이정호는 당대 퇴계학파의 명유 (名儒) 이진상(李震相)에게 가르침을 받고 곽종석·이승희(李承熙) 등과 교유했던 영남의 대표적 유학자였다.

송상도는 기려수필을 완성하고 그 서문을 봉화의 성재(省齋) 권상익(權相翊)과 경남 산청의 후산(厚山) 이도복(李道復)에게 부 탁하였다. 권상익은 김창숙(金昌淑)·곽종석 등 유림 137명과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는 장서(長書)에 서명하여 이의 발송에 참가하였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혔던 인물이고, 이도복은 남명 조식 의 제자 동독 이조의 10세손으로 일찍이 남명 조식의 학문을 가 학으로 이어온 집안의 선비이다. 영남에서 태어나 기호학맥인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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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 송병선의 학문을 계승한 선비로서 단군 조선에서부터 철종 영 효왕(英孝王)까지를 편년 순으로 편찬한 동수절요(東雖節要)의 저자이기도 하다. (이재숙 2013: 393-394)

이상에서 간략히 살펴본 송상도의 사승(師承)과 교우 관계를 통 해 그의 학문적 연원은 화서학파에 있으면서 퇴계학맥을 계승하 였으며, 또 남명학맥을 이어받은 선비들과도 폭넓게 교류함으로써 하나의 학맥에 구속되지 않고 의리와 명분을 지키면서 구국의 뜻 을 가진 선비와 길을 함께 가고자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는 위정척사파의 존화양이(尊華攘夷) 사상을 지지하였기에 망국의 시작을 1866년 병인양요로 보고 기려수필의 첫 번째 인물로 병 인양요 때 강화도에 있다가 순절한 이시원(李是遠)을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근대화과정에서 물밀 듯이 들어오는 신 문물과 신사상을 주의깊게 관찰하면서 비판적으로 수용한 듯하다.

기려수필에 수록된 인물들의 사상적 경향은 보황주의 94명, 무 정부주의 5명, 민족주의 8명, 사회주의 5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민 족주의 성향을 보인다. 이처럼 그는 보황주의 뿐 아니라 사회주의 와 무정부주의까지 포괄 언급하면서 이를 수용하는 태도를 보이 는 등 중세적 틀에 갇히지 않고 근대적 사고까지 갖춘 태도를 보 이고 있다. 특히 단체 세 항목 중 임시정부를 제외한 고려혁명당 과 조선혁명당을 채택한 것 역시 그의 사상적 태도를 잘 반영하 고 있다.

또한 충신과 열사의 행적이 사라지는 것을 염려한 송상도는 신 분의 귀천은 물론 성별도 고려하지 않은 채 기록할 만한 행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수용하였다. 신분·직업을 알 수 있는 178 명의 분포는 유생 62명, 양반관료 40명, 군인 9명, 향리 5명, 학생 8명, 평민·회사원 4명, 목사·농민·공무원 각 3명, 언론인·교사·노동 자·노비·기관사·상인 각 2명 등이다. 이외에도 고원(雇員), 광부, 기관사, 직공, 카페종업원, 포수 등이 있고, 내시, 노비, 무당,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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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환

대, 천인 등도 포함되어 있다. 그 외 여성도 7명이 포함되어 있으 며, 중국인과 일본인도 각 1명씩 있다(김도훈 2016: 26-27).

특히 그는 김마리아에 대해서 애국부인회를 분수에 맞지 않는 걱정을 하는 아녀자라고 기롱하는 사람도 있지만 세상 남자들의 애국심이 김마리아와 같았다면 나라를 빼앗기는 일이 없었을 것 이니 부인이라는 이유로 그 공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 하였다. 이런 생각을 가진 송상도는 여자로서 폭탄을 투척한 안경 신, 을사조약에 찬성한 주인 이근택을 꾸짖은 여종, 순국한 주인 을 따라 자결한 송병선의 여종 공임 등을 수록하여 신분의 귀천 과 남녀의 차별을 뛰어넘는 개방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이러 한 사상과 태도는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질서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적 변화를 수용하려는 지식인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Ⅴ. 맺음말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을 하나 들면 삶과 행동을 기록한다는 점이다. 기록은 몇 만 년 전의 석기시대를 재현할 수 있게 하며 몇 년 전의 사건을 상세히 조사할 수 있게 해준다. 기록을 통해 비로소 인간은 과거를 기억할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기록유산이란 전 세계인의 ‘기록된 총체적인 기억’이라고 기술 된다. 기록유산은 인간사회의 사상과 가치, 그리고 문화적 성과들 의 전개과정을 묘사한 유산으로 해석된다.(Joie Springer 2015) 인 류는 기록을 통해 문화를 계승해 왔다. 다양한 민족과 언어, 삶의 기록이 담긴 소중한 자산이 없었다면 인류의 문화는 현재의 수준 에 크게 미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물들은 대부 분 자연적, 인위적 훼손, 또는 무관심 등으로 인해 보존 상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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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취약한 실정이다. 종이에 쓰거나 인쇄한 기록물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산화되었고, 그 밖의 각종 기록 유산 역시 그 중요성 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상당 부분 손실되거나 파기되어 왔다. 뿐 만 아니라 기술의 발달과 함께 등장한 전자 형태의 자료 유산 역 시 기술적 문제로 인해 손실될 우려가 적지 않은 상황이다.

유네스코(UNESCO)는 인류문화의 주요 전승 수단인 기록물들 이 훼손 및 소멸 위기에 처해 있음에 주목하여 1992년부터 세계 기록유산사업을 추진해 왔다. 이것은 주로 고서, 지도, 필름과 같 이 우리 인류가 반드시 기억해서 후세에 물려주어야 하는 소중한 기록물들을 선정하는 일종의 인증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 업은 우선 2년마다 개최되는 국제자문위원회(IAC) 회의를 통해 세계적인 가치가 있는 기록물을 선정, 그 목록을 작성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세계기록유산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 다른 중요한 계기 로는 1993년 보스니아 내전의 와중에서 사라예보가 무차별 폭격 을 당할 때에 유서 깊은 국립도서관이 불길에 휩싸이면서 13세기 부터 집적되어 온 소장도서가 모두 잿더미로 변해 버린 사건이었 다. 이 사건을 목격한 세계의 지식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 를 계기로 인류의 정신적 자산인 기록유산을 보존하는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각성에 이르렀다.(서경호 2014) 그리고 유네스코는 1995년부터 위험에 처한 기록물과 컬렉션들을 지정하여 보존함으 로써 전 세계에 있는 기록유산의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세계기 록유산의 목록화 사업을 시작하였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대중적인 기록유산에는 구텐베르그 성경이나 안네의 일기 등이 있으며, 우리나라는 세계기록유산 사업에 초창기부터 참여하여 꾸준히 등재를 해온 결과, 현재 아시 아에서는 가장 많은 13점의 세계기록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사업 초창기에는 조선왕조실록, 훈민정음 해례본과 같은 고문서가 등재되었으며 2011년 5.18 민주화기록물의 등재를 계기로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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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환

기록물의 등재가 늘어나고 있다.3)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항일독립운동가들의 사적을 수 집하여 편찬한 기려수필에는 1866년 병인양요 당시 강화에서 순절한 이시원(李是遠)으로부터 시작하여 한말의 의병활동 및 안 중근·김지섭·윤봉길 등 항일운동가 239명의 행적은 물론이고, 대 한민국임시정부, 고려혁명당사건과 6.10만세운동, 1929년 광주학생 운동 등의 각종 단체 및 항일운동에 대한 사적, 그리고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지방의 항일운동 상황까지도 수록되어 있다. 그 래서 기려수필은 인류가 반드시 기억해서 후세에 물려주어야 할 소중한 기록물로서 그 보존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할 수 있겠 다. 어떤 민족이든 타 민족을 무력으로 침탈하여 지배해서는 안되 고, 또 설령 그러한 일을 당하더라도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인류 의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저항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려수필은 그 제목만 놓고 보았을 때는 그것이 항일 독립운동의 투쟁사라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 비슷한 시기에 쓴 책 으로 황현의 매천야록이나 조희제의 염재야록은 ‘야록(野錄)’

이란 글자를 통해 그것이 야사(野史)라는 사실을 한눈에 알 수 있 다. 그러나 기려수필은 ‘수필(隨筆)’이라는 말 때문에 역사서라 기보다 에세이(essay)를 연상하게 한다.

수필의 사전적 의미는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

3)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①조선왕조실록(서울대 규장각, 1997) ②훈민정음

(간송미술관, 1997) ③불조직지심체요절 하권(프랑스국립도서관, 2001) ④승 정원일기(서울대 규장각, 2001) ⑤고려대장경판 및 제경판(해인사, 2007) ⑥조 선왕조 의궤(儀軌)(서울대 규장각, 2007) ⑦동의보감(국립중앙도서관 및 장서각, 2009) ⑧1980년 인권기록유산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록물(한국국가 기록원 외 여러 정부기관 부처 및 관련 단체, 2011) ⑨일성록(서울대 규장 각, 2011) ⑩난중일기(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2013) ⑪새마을운동 기록물(새 마을운동중앙회, 2013) ⑫한국의 유교책판(한국국학진흥원, 2015) ⑬KBS특별 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기록물(한국방송공사, 국가기록원, 한국갤럽조사 연구소,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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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로서 작가의 개성이나 인간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유머·위트·기지가 들어 있다. 수필은 중국에서는 남송(南宋)의 홍 매(洪邁)가 쓴 용재수필(容齋隨筆)에서 비롯되고, 서양에서는 1595년 몽테뉴(Montaigne,M.E.de)의 수상록(Essais)으로부터 비 롯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고려 때부터 서설(書說)·증서(贈書)·잡 기(雜記)·찬송(贊頌)·논변(論辨) 등의 문장 형식으로 전해 내려온 다.

고려에서 조선말에 이르는 한문으로 된 모든 수필류를 말하는 한문수필은 대체로 잡기(雜記)나 필기(筆記) 등의 기(記), 야록(野 錄)이나 쇄록(鎖錄) 등의 녹(錄), 전문(傳聞)이나 야문(野聞)의 문 (聞), 총화(叢話)·야화(野話) 등의 화(話), 쇄담(鎖談)·야담(野談) 등의 담(談), 수필(隨筆)·만필(漫筆) 등의 필(筆)의 문장이 수필적 인 양식을 보여준다. 따라서 엄밀한 의미에서 기려수필도 ‘야록’

에 속하는 만큼 수필류라고 해도 문제는 없지만, 그래도 여전히 거기에는 붓 가는대로 쓴 자유롭고 개성적인 문학양식이라는 인 상이 강하게 남아있다.

그러면 송상도는 책의 제목에 왜 ‘야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수필’이라 하였을까? 아마도 당시에 일제의 검열과 통제가 아주 심하여 감시의 눈을 피하려고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염재야록의 저자 조희제는 원고를 권6으로 완성해 건(乾)·곤(坤) 두 책으로 편집했는데, 책의 표지에는 덕촌 수록(悳村隨隨)이라는 이름을 붙여두었다. ‘덕’은 조희제가 살던

‘덕치(德峙)’를 가리키는데, 이 역시 ‘덕치, 곧 덕촌에서 그때그때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다’는 뜻으로 남의 이목을 피하기 해 붙인 것으로 보인다(변주승 2009: 441).

송상도는 기려수필 발문에서, “나는 못나서 순절하고자 해도 마땅한 곳이 없고, 의병을 일으키고자 해도 지략이 없고, 해외로 나가 광복을 도모하고자 해도 자금이 없으니 다 할 수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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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덕환

의(義)를 좋아하는 마음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그는 당시 유인석(柳麟錫)이 내세운 선비들의 ‘처변삼사(處變三 事)’ 중에서 자신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판단하고, 춘추대의를 좇아 의로운 선비로서 민족정기를 바로 찾겠다는 일 념으로 항일의 다른 길을 찾았던 것이다.

사단법인 기려자 송상도지사 기념사업회는 그의 그러한 뜻을 선양하고 계승하기 위해 2015년부터 기려수필을 세계기록유산 에 등재하는 데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기념사업회에 서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목표로 추진하고 있는 기려수필 친필 필사본은 총 8권으로 송상도가 직접 정리한 5권과 미정고본(未正 稿本) 1권은 독립기념관에 소장되어 있고, 최근에 기려수필의 부록으로 밝혀진 부효(附孝) 1권과 부열(附烈) 1권은 한국국학진 흥원에 소장되어 있다.

유네스코가 요구하는 세계기록유산의 등재기준은 진정성, 세계 적 중요성, 비교기준, 보조요건이다. 따라서 기려수필을 세계기 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서는 송상도의 항일정신과 기려수필

의 내용을 더욱 심도있게 연구하여 그 가치를 널리 알리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기려수필과  매천야록, 염재야록의 비교 연구를 병행하면서 그것들을 함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도록 하는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앞으로 세계 어느 민족도 그들의 생존권을 이민족에게 부당 하게 침해받는 일이 없이 공동의 평화와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일깨워주는 빛나는 기록유산으로 남겨주어야 할 것이다.

<주요어> 송상도, 기려자, 기려수필, 항일운동, 항일독립운동, 독립운동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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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e Kim, Dukhwan

Belong Gyeongsang National University E-mail mugam20@hanmail.net

투고일 2018/12/08 심사일 2018/12/11 게재확정일 2018/12/1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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