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성립된 토지소유권의 성격 검토*
남기현**
목차 1. 머리말
2. 토지구관에 대한 인식 3. 행정구제 제도의 존재 여부 4. 법령과 재판에서 규정된 원시취득 5. 맺음말
이 글에서는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형성된 토지소유권의 차이점이 어떤 것이었는 지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행정기관의 주도로 토지소유권이 확인된 것, 일 본민법의 적용을 받게 되고 등기제도에 의해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지조 개정과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확인된 토지소유권의 성격은 유사한 점을 보인다.
즉 자본주의적 화폐경제에 적합한 토지소유권으로 확인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토지소유권을 확정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차별적인 요소가 보인다.
첫째 토지구관에 대한 인식이다. 지조개정 결과 확인된 토지소유권은 지조개정 이전 에 형성되었던 토지구관을 반영한 것이었다. 반면 조선토지조사사업 결과 확인된 토 지소유권은 옛 토지관습과는 단절된 것이다. 둘째 행정구제제도, 행정재판에 관한 것 이다. 일본에서와는 달리 식민지 조선에서는 행정처분에 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제도가 적용되지 않았다. 셋째 법령과 재판에서 규정된 원시취득에 관한 것이다. 일 본에서 토지소유권의 원시취득 문제는 국유(관유), 민유를 구분할 때에만 문제가 되었 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국유지, 민유지에 상관없이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를 원 시취득으로 간주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토지소유권 확정은 일본과 달리 다른 관점에
서 시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 확정된 토지소유권은 사법적 재판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는 행정기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행정처분의 결과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식민지적 토지소유권’이 만 들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논문분야 한국근대사, 사회경제사
주 제 어 지조개정, 조선토지조사사업, 토지소유권, 원시취득, 토지관습, 행정재판, 사 정, 조선총독부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위원, [email protected]
** 이 글은 필자의 박사학위논문(「일제하 토지소유권의 원시취득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 위 논문, 2019) 제2장 3절의 내용을 크게 수정하고 보완한 것입니다.
1. 들어가며
이 글의 목적은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형성된 토지소유권의 차이점이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 개괄적으로 살펴보는 데 있다. 일본 및 식민지 조선에서 시행된 정책과 그 결과를 비교함으로써 일제가 시행한 식민지 통치의 성격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한다.1)
메이지유신 이후 정부 인사들은 일본을 ‘유럽적 국민국가’ 형태로 만들기 위 한 방안을 모색했다. 유럽적 국민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달성하는 것 이 우선과제로 제시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외자 도입에 의존하지 않는 자본주의 를 확립한다는 원칙을 세웠다.2) 당시 민간자본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조세 수입을 바탕으로 하는 국가자본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과제로 제시되었다. 하지 만 메이지유신 이전 막번 체제에서 권력이 미치는 범위는 촌락 공동체 수준에 그쳤다. 영주들은 개별 농민이 경작하는 논밭의 면적과 생산량을 정확하게 파악 하지 못했다. 막번 체제 하에서 사용된 일종의 토지대장인 검지장(檢地帳)에는 명청인(明請人)이 게재되어 있다. 하지만 명청인은 개별적으로 공조(貢租)를 납입 하는 농민을 의미하지 않았고, 촌락 전체에 부과된 공조를 공동으로 부담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었다.3)
1873년, 메이지정부는 「지조개정조례(地租改正條例)」를 공포하고 지조개정을 실시하였다. 조세수입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 사업의 목적이었다. 지조개
1)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토지관습과 입법과의 관계, 지조개정 과 등기의 시행에 대해서는 연구를 천착하여 추후 별도의 논문으로 보충할 계획이다.
2) 메이지정부의 ‘유럽식 국민국가’형성을 위한 자립적 자본주의 추진에 대해서는 미타니 타이 치로 지음, 송병권ㆍ오미정 옮김, 2020, 「제2장 왜 자본주의가 형성되었을까?」, 뺷일본근대 는 무엇인가뺸, 평사리, 93~163쪽 참조.
3) 미타니 타이치로, 2020, 앞의 책, 112쪽. 검지장에 대해서는 미야지마 히로시, 2006, 「土地臺 帳의 比較史-量案ㆍ檢地帳ㆍ魚鱗圖冊」, 뺷동아시아 근세사회의 비교뺸, 혜안, 37~40, 45~ 47 쪽 2013, 「4장 사대부와 양반은 왜 토지귀족이 아닌가」, 뺷나의 한국사 공부뺸, 너머북스; 오이균, 2018, 「중ㆍ근세 일본의 검지(檢地)에 관한 연구」, 뺷한국지적학회지뺸 제34권3호 참조.
정 결과 지권이 발행되었고 토지의 소유권자가 확정되었다. 지권을 발행받은 자 들은 지조 납세자가 되었다. 메이지정부는 지방관들의 평가에 근거하여 실질적 지조 수입을 산정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지가가 선정됨으로써 지조개 정 이전보다 더욱 안정적으로 조세수입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4) 결국 메이 지정부는 지조개정을 기반으로 근대 자본주의 국가형성의 근간이 되는 토지제 도를 구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지조개정에 의해 확인된 토지소유권은 1898년 에 최종적으로 확정된 일본민법의 적용을 받았고, 등기제도를 통해 사용ㆍ수익 ㆍ이전할 수 있는 권리로 보장받게 되었다.
한편 제국주의 국가들은 식민지를 통치하기 위해 인민과 토지를 장악하는 작 업을 착수했다.5) 일본 역시 그러했다. 일본제국의 형성과 팽창 과정에서 획득 한 오키나와, 대만, 관동주, 한국, 남양군도에서 토지조사가 실시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토지소유권은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진행된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의해서 확인되었다.6)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 확인된 토지소유권은 일본에서 진행된 지조개정의
4) 지조개정 이전 메이지정부의 지조는 지조개정이 진행된 1872년 세입의 40%에 불과했다고 한다(미타니 타이치로, 2020, 앞의 책, 111쪽).
5) 이영호, 2018, 뺷근대전환기 토지정책과 토지조사뺸,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487쪽.
6) 조선토지조사사업은 ‘한국병합’이후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통치 체제 확립을 위해 가장 적극 적으로 시행했던 사업이었다. 조선토지조사사업에 대해서는 수탈성 여부를 두고 논란이 되어 왔다. 하지만 김해군과 창원군에서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원자료가 발견되면서 조선토지조사 사업의 실체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 자료들을 활용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배 영순, 1988, 「韓末ㆍ日帝初期의 土地調査와 地稅改正에 關한 硏究」,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 (2002, 뺷韓末. 日帝初期의 土地調査와 地稅改正뺸, 영남대학교출판부) ; 조석곤, 1995, 「朝鮮 土地調査事業에 있어서의 近代的 土地所有制度와 地稅制度의 確立」,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 문(2003, 뺷한국근대 토지제도의 형성뺸, 해남) ; 한국역사연구회 토지대장연구반, 2011, 뺷일 제의 창원군 토지조사와 장부뺸, 선인 ; 2013, 뺷일제의 창원군 토지조사사업뺸, 선인. ‘한국병 합’에 대해서는 한성민, 2016, 「乙巳條約 이후 일본의 ‘韓國倂合’ 과정 연구 : 日本人 실무관 료의 활동을 중심으로」, 동국대학교박사학위논문 ; 2018, 「일본정부의 ‘韓國倂合’ 실행계획 수립 과정 - 『구라치 案』과 『아키야마 案』의 비교를 중심으로」, 뺷일본역사연구뺸 47이 참조된 다.
결과와 유사한 점이 있다. 먼저 행정기관이 주도한 것이다. 둘째, 두 사업에 의 해서 확인된 소유권 모두 일본민법의 적용을 받게 된 것이다.7) 셋째, 부동산등 기제도가 도입되어 사용ㆍ수익ㆍ이전이 가능한 권리로 인정되었다.8) 지조개정 과 조선토지조사사업은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자본주의적 상품화폐경제가 정 착하는데 기반이 되는 사업이었다. 하지만 제국주의 본국에서 성립된 소유권과 식민지에서 성립된 소유권의 성격이 동일하다고만 볼 수 있을까? 토지소유권을 확정해 가는 과정을 살펴본다면 식민지 통치 방식을 좀 더 확인해볼 수는 있지 는 않을까? 라는 의문에서 이 글은 출발한다.
지조개정 및 조선토지조사사업 진행 당시 일본 사회와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 는 토지에 소유권과 유사한 권리가 존재한다고 조사되었다. 따라서 메이지정부 와 조선총독부는 토지에 형성되어 있던 권리들을 어떤 방식으로 수용하거나 배 제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이에 이글에서는 먼저 토지구관에 관한 인식의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서 확인해보고자 한다. 지조개정과 조선토지조사사업에서 토지구 관의 반영문제를 비교한 성과로는 이영호의 연구가 선구적이다. 그는 일제가 구 축하려고 한 토지제도는 구관 토지제도의 처리방식과 밀접하게 관련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 하에 각 식민지에서 구관 토지제도가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를 살폈다.9) 이 글 역시 이러한 시각에 동의하고 두 사업의 진행과정에서 차이가 나는 점을 포착하도록 한다.
다음으로 지조개정과 조선토지조사사업을 주도한 주체가 행정기관이었다는
7)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확인된 토지소유권은 「朝鮮民事令」에 의해 ‘依用’되었다. 조선민사 령에 의해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민법이 민사전반을 규정하게 되었다. 조선민사령에 대해서는 이승일, 2008, 뺷조선총독부 법제정책뺸, 역사비평사가 참조된다.
8) 이영호, 2008, 「일제의 한국토지정책과 ‘證明→地券→登記’로의 단계적 전환」, 뺷한국사연구뺸 142(이영호, 2018, 「제5장 토지소유권제도의 단계적 전환 증명→지권→등기」, 앞의 책, 233~275쪽) ; 최원규, 2015, 「일제초기 조선부동산 등기제도의 시행과 그 성격」, 뺷한국문 화뺸56.
9) 이영호, 2008, 앞의 책 제4부 「일본제국의 식민지 토지조사」, 449~525쪽.
것을 주목한다. 두 사업을 통해 확인된 토지소유권은 행정처분이었다. 그리고 행정처분의 결과 토지는 크게 국유지, 민유지로 구분되었다. 하지만 국유지로 확정되는 과정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는지, 즉 행정기관의 침해에 대해 대 응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확인해보려고 한다. 식민지 조선에서 행정제도의 도입 과 적용이 어떠했는지는 하명호의 연구를 참조할 수 있다.10) 마지막으로 조선 총독부의 식민지 조선에서 토지소유권의 방침이었던 ‘원시취득’에 주목한다. 원 시취득이라는 것은 어떤 권리를 타인으로부터 승계하지 않고 독립해서 취득하 는 것이다.11) 즉 이전에는 없었던 새로운 소유관계가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조 선총독부는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인 ‘사정(査定)’을 새로운 토지소유권이 시 작되는 의미인 원시취득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식민지 조선에서 최종 심의기관 이었던 조선총독부고등법원에서는 이것을 인정했다.12) 지조개정 결과 확인된 토지소유권을 일본에서는 원시취득으로 간주했을까? 이것은 토지구관에 대한 인식과도 연결된다. 지조개정의 결과 확인된 토지소유권과 관련된 재판을 다룬 연구로는 심희기의 연구가 있다.13)
10) 하명호, 2018, 「제2장 한국 행정소송법 제정 이전의 상황」, 뺷한국과 일본에서 행정소송법 제의 형성과 발전뺸, 경인문화사, 23~95쪽.(2018, 「제국일본의 행정재판법제와 식민지조선 에의 시행여부」, 뺷고려법학뺸 88)
11)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편, 2016, 뺷한국토지용어사전뺸, 혜안, 704쪽.
12) 식민지 조선에서 ‘사정’을 원시취득으로 인정했는지에 여부에 대해서는 판례의 해석 여부에 따라 입장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는 논하지 않는 것으로 한다.
‘사정’에 대한 조선총독부의 판결에 대해서는 이우석, 2007, 「査定에 의해 확정된 토지소 유권의 성격 -조선고등법원의 판례를 중심으로-」, 뺷법사학연구뺸36 ; 윤진수, 2012, 「土地 및 林野 査定의 法的 性格 -原始取得論 批判-」, 뺷서울대학교법학뺸53권1호 ; 배병일, 2018, 「토지조사사업과 임야조사사업에서의 사정에 관한 법적문제점 검토」, 뺷법학논고」
61 ; 남기현, 2020, 「조선총독부고등법원의 토지소유권판결(1918~1921)과 그 성격」, 뺷사 림뺸72가 참조된다.
13) 심희기, 2021, 「제12장 사정의 법적 성격 : 창설적 효력설 비판」, 뺷판례ㆍ사례로 읽는 한 국법사강의뺸, 경인문화사(2015, 「査定의 법적 성격 : 창설적 효력설 비판」, 뺷토지법학뺸 31). 심희기의 연구에서 지조개정의 결과에 관한 재판 정보를 상당수 얻을 수 있었다. 추후 더 많은 재판 사례를 발굴하여 분석하려고 한다.
이 글은 기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성립된 토지소 유권의 성격 검토하려고 한다.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토지소유권 확정과정을 비교함으로써 일본의 식민지 조선의 통치 방향성이 어떠했는지 파악해볼 수 있 을 것이다.
2. 토지구관에 대한 인식
메이지유신이 이루어진 후 봉건적 영유제를 철폐하는 조치가 진행되었다. 메 이지정부는 막부(幕府)와 번(蕃)의 영주로부터 토지에 대한 지배권을 환수하여 경작하는 사람에게 분배하는 조치를 취하려고 하였다. 토지조사를 진행 한 후 새롭게 분배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영주의 소유를 일단 배제하고, 점 유를 인정하는 것이 방침이었다.14) 이 사업을 지조개정(地租改正)이라고 한다.
메이지정부는 지조개정 과정에서 지주에게 소유권을 부여하고 지권을 발급하 는 정책을 취하였다. 그 결과 지주의 권리가 단일 소유권으로 확정되었고, 소작 인의 권리는 단순한 용익권(用益權)으로 취급되었다. 이와 함께 전답 임의경작의 허가, 전답 영구매매의 해금, 봉건적 신분제의 폐지, 직업자유의 법적승인 등의 조치도 이루어졌다.15)
지권에는 지가(地價)ㆍ지조ㆍ지주(持主)가 기재되었다. 지권을 가진 자는 과거 영주에게 공물과 조세를 부담하던 자였는데, 지조개정을 통해 국가에 지세를 부 담하는 사람으로 인정되었으며, 국가는 이들을 토지소유자로 확인했다. 지권의 뒷면에는 “일본인민으로 이 권장(券狀)을 가진 자는 그 토지의 적의(適意)로 소유 하거나,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자에게 매매(賣買)ㆍ양도(讓渡)ㆍ질
14) 이영호, 2018, 앞의 책, 455∼456쪽.
15) 甲斐道太郎 외 지음, 강금실 옮김, 1984, 『소유권 사상의 역사』, 돌베개, 190~196쪽.
입(質入)ㆍ서입(書入)할 수 있다”라고 써져 있다. 토지소유가 가능한 사람을 일본 인민으로 정해졌고, 매매, 양도, 질입, 서입이 가능하다고 함으로써 토지소유권 을 확인해주고 이전할 수 있는 것을 보장해주었다. 지권을 가진 자는 토지를 사 용ㆍ수익ㆍ처분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을 의미했다.16)
지권제도의 형식은 일본 구관과 외국법이 절충된 것이었다. 에도막부는 토지 거래를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하지만 이것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영주들은 실질적으로 이루어지던 토지거래에 대해 영주적 공증과 공인을 통해 토지소유 권을 확인해주었다. 이것을 고권(沽券)이라고 한다. 발행된 지권은 토지소유자가 한부를 가지고, 나머지 한 부는 지권대장으로 철해져 토지가 매매 될 때 교부되 었다. 이것은 남부 호주의 토런스 제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보고 있다.17)
한편 지권에 기재된 토지소유권의 내용은 일본 민법에 반영되게 되었다. 일 본 민법 제정은 프랑스 법전의 영향을 받으며 착수되었다. 일본 사법성은 1876
∼1877년에 걸쳐 전국의 민사관습을 조사하였으며, 그 결과 뺷전국민사관례유 집(全國民事慣例類集)뺸을 편찬하였다. 이 책에서는 메이지유신 이전 구관에서도 토지에 대한 소유권이 존재했던 것으로 기술되었다. 1878년 일본민법 초안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일본의 관습을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에 프랑스 법학자 보아소나드(Gustave Émile Boissonade, 1825.6.7.∼1910.6.27.) 에 의해 새로운 민법 편찬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보나소아드의 민법 역시 구관 을 무시했다는 반대에 부딪혔다. 1893년 법전조사회가 조직되었고 구관을 고려 한 새로운 민법이 기초되었고, 1898년 7월 발표되었다.18)
토지소유권을 규정한 지권제도, 그리고 민법에 일본 구관이 반영된 것을 확 인할 수 있다. 그러면 실제 구관에 의해 판정된 토지소유권 사례를 살펴보자.
16) 질입은 채권자가 담보를 점유하고는 형태이며 서입은 담보를 점유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영호, 2018, 앞의 책, 456, 490쪽).
17) 이영호, 2018, 앞의 책, 457쪽.
18) 이영호, 2018, 앞의 책, 458∼459쪽.
일본의 경우, 지조개정 이전인 에도막부(江戶幕府)시대에도 토지매매 및 가격이 인정되고 있었다. 하지만 일지일주(一地一主) 배타적 소유권은 성립되어 있지 않 았다. 영소작인(永小作人)도 지주와 함께 물권적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토지가 저당이 잡히더라도 채권자와 채무자 모두에게 권리가 있었다. 또한 지역적으로 토지소유에 관한 다양한 관습이 존재했다. 각 번은 독자인 법령을 가지고 있었 고 각자의 방식대로 토지매매가 이루어졌다. 농지에 대해 에도막부는 1643년
「전전영대매매금지령(田畑永代賣買禁止令)」을 발표하여 매매를 금지했다. 하지만, 미토항(水戶蕃)에서는 이 법을 적용하지 않았다. 일부 지역에서는 영대매매를 60 년 등의 기한으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었다.19) 촌락에서 추첨으로 토지를 정기 적으로 교환하는 할지(割地)라는 관행도 전국의 10% 정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 다고 추측되고 있다.20) 개간지(開墾地)의 경우에는 자금주와 개간자가 협력하였 기 때문에 소유권과 유사한 권리를 서로 가지고 있었다.21)
다음으로 후쿠오카 현(福岡縣)의 아리아케(有明) 해안지(海岸地)에 있는 토지에 서 벌어진 소유권 다툼을 살펴보자. 간만의 차가 심한 이곳은 간조(干潮) 때 노 출되는 땅에 갈대를 심어 수익을 얻고 있었는데, 갈대를 심은 곳의 지반(地盤)이 높아지면서 농지로 개간되었다. 이때 자금을 댄 쪽을 지두(地頭), 갈대를 심어 지반이 오르도록 한 쪽을 야주(野主), 농지로 개간할 때 노동력을 제공한 쪽을 초선주(鍬先主)라고 불렸다. 초선주는 경작자이며 지두와 야주에게 그 수익의 일 부를 보냈다. 1872년 11월 지조개정이 진행되면서 지권을 교부하게 되었다. 이 때 문제가 된 것은 지두, 야주, 초선주 중 누구에게 지권을 발급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현측에서는 중앙 정부에 내역을 적어, 지두, 야주, 초선주의 권 리를 밝히고 지두에게는 지권장(地券狀), 야주, 초선주에게는 다른 증서를 주는 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지두에게만 지권을 부여하라고 지시했다.22)
19) 稻本洋之助, 小柳春一郞, 周藤利一, 2009, 뺷日本の土地法 : 歷史と現狀뺸, 成文堂, 3쪽.
20) 이노우에 가쓰오, 뺷막말유신뺸, 어문학사, 2013, 251∼252쪽.
21) 김용덕, 1989, 뺷明治維新의 土地稅制改革뺸, 일조각, 55쪽.
권리가 박탈되자 초선주들은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지두에게는 납부미를 내지 않았다. 지두 측에서 이에 토지몰수와 경작금지라는 수단을 취하려 하였 다. 1876년 5월 경작농민인 초선주 975명은 현청에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이 러한 상황을 인식한 중앙정부의 결정은 기존에 있었던 중층적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지조개정사무국(地租改正事務局)에서는 지두는 소유자, 야주는 일부(一 部) 소유자, 초선주는 점유자라고 하고 각각의 권리를 인정하였다. 이러한 소유 권은 이후 20여 년 간에 걸쳐 경작자였던 초선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소되 어 갔다.23)
저당관계가 설정된 질지(質地)에서 일어난 사건도 있었다. 1878년 10월 16일 가나가와 현(神奈川縣)에서 발생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오스미군(大住郡)에 거주 하던 농민 26명이 이곳의 대지주인 마츠모토(松本) 가(家)를 습격하고 주인을 비 롯한 7명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다. 마츠모토 가는 이 마을 65호(戶)와 토지를 저당으로 한 채권 채무관계를 설정하고 있었다. 마츠모토는 지조개정이 진행되 자 지주로써 자신의 권한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저당 잡은 토지에 대한 지권을 자신의 명의로 받았다. 마츠모토는 기존에 유지되던 질지 관행을 무시하고 철저 히 새로운 법에 의거하여 분쟁 토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24) 이러한 마츠모토의 행동을 농민들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1876년 11월 요코 하마 재판소(橫濱裁判所)에 토지반환소송을 제기하여 승소하였다. 하지만 1878 년 마츠모토는 이에 불복하고 도쿄 상등재판소(東京上等裁判所)에 항소하여 소유 권을 인정받았다. 패소한 농민들은 소송비용 등의 문제로 대심원에 상고할 할 수가 없었다. 대신 대표 3인을 뽑아 사법성(司法省)에 보내어 탄원하기로 결정하 였다. 그러나 농민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분개한 농민들은 결 국 마츠모토 가를 습격하고 7명을 살해하였던 것이다.
22) 김용덕, 1989, 앞의 책, 129쪽.
23) 김용덕, 1989, 앞의 책, 130쪽.
24) 김용덕, 1989, 앞의 책, 130∼131쪽.
사건의 시말을 파악한 현령(縣令)은 중앙정부에 주모자를 처벌하는 것을 보류 해달라고 요청했다. 오스미 군을 비롯한 인접한 군에서는 약 200여명이 해당 지역 농민들을 대표하여 탄원서를 제출했다. 정부는 주모자들을 사형시키지 않 았고 관대한 조치를 취했다. 또한 수년간에 걸친 체납소작료나 소송비용도 현 (縣)의 주선으로 해결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토지에 저당권을 가진 사람들이 관 습을 무시하고 지권을 확보하려고 하는 것을 제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메이지 정부는 일률적인 법적용을 통해서 지조개정을 신속하게 마무리하려고 했다. 하 지만 정부의 태도는 관례와 지역적 특성을 내세우는 농민들의 요구에 맞추어서 변칙적으로 수정되었다.25)
결국 지조개정은 조선토지조사업과는 달리 농민들의 관행과 실정을 바탕으로 정부의 목표를 적용시켰다. 설정된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농민들의 요구와 현 (縣)의 보고를 기초로 방침을 수정하고 조절해 나갔다.26) 제국주의 본국인 일본 에서 관습은 계승되어야 할 토대였던 것이다.27)
그러면 식민지 조선의 경우는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지조개정이 진행되고 그 결과 지권이 발급되어 토지에 관한 소유권이 인정되었다는 점에서, 지권은 조선 토지조사사업의 결과인 사정(査定)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28) 하지만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소유권이 성립되는 과정을 보면 차이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 다. 조선총독부는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에 ‘원시취득’효과를 부여한다는 원 칙을 세워놓았다.29) 원시취득이란 어떤 권리를 기존 권리와 관계없이 새로이
25) 김용덕, 1989, 앞의 책, 131쪽.
26) 김용덕, 1989, 앞의 책, 118쪽.
27) 이영호, 2018, 앞의 책, 519∼520쪽; 일제의 구관조사에 관해서는 이영호, 2018, 「제4부 일본제국의 식민지 토지조사」, 앞의 책, 449~525쪽 및 이승일, 2010, 「일제의 동아시아 구관조사와 식민지 법 제정 구상: 대만과 조선의 구관입법을 중심으로」, 뺷한국사연구뺸151 이 참조된다.
28)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인 ‘사정(査定)’은 「토지조사부」와 「지적도」를 기반으로 토지소유 권과 경계를 확정하는 행정처분이었다.
29)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의한 토지소유권의 원시취득에 관해서는 早川保次, 1921, 뺷朝鮮不動
취득하는 것을 뜻한다. 개간, 간척 등과 같이 새롭게 물권이 형성된 토지에서
‘원시취득’이 이루어진다. 반면 물권, 소유관계가 형성되어 있던 토지는 보통 매 매가 진행된다. 매매에 의해 소유권을 취득한 것을 ‘승계취득’이라고 한다. 조선 토지조사사업의 대상이 된 토지는 대부분 이미 소유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 러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총독부는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인 사정을 원시취득 으로 간주했다. 이것은 조선토지조사사업 이전에 토지에 형성된 권리관계, 즉
‘한국병합’이전 토지에 형성되어왔던 모든 권리관계를 부정한다는 원칙을 세우 고 있었음을 의미한다.30)
결국 일본에서 지조개정의 결과 확인된 토지소유권은 옛 토지의 관계를 고려 하면서 확정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민법의 적용을 받는 권리로 규정되었고, 등기제도를 통해 사용ㆍ수익ㆍ이전이 가능한 권리로 확정되게 되었다. 반면 조 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 확인된 토지소유권은 기본적으로 이전 사회에서 형성된 권리관계와 단절한다는 원칙하에 만들어진 것이었다. 식민지 조선에서 원시취 득으로 간주된 토지소유권은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에 의해 ‘의용(依用)’된 일 본민법의 적용을 받는 권리가 되었다.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 확인된 토지소 유권은 옛 토지제도와는 단절된 권리로써 작용되게 된 것이다.31)
産登記ノ沿革뺸; 최원규, 2010, 「일제시기 조선토지조사사업 관계 장부의 내용과 성격 -창 원군 사례-」, 뺷중앙사론뺸32; 2021, 뺷한말 일제초기 국유지 조사와 토지조사사업뺸, 혜안;
윤진수, 2012, 앞의 논문; 남기현, 2019, 「일제하 토지소유권의 원시취득 연구」, 성균관대 학교박사학위논문이 참조된다.
30) 조선총독부는 조선토지조사사업을 통해 새로운 소유관계가 시작된다고 간주하였다. 하지만
‘한국병합’ 이전에 일본인들이 토지에 가지고 있던 권리는 보장한다는 방침을 취했다. ‘한국 병합’ 이전 불안했던 일본인들의 토지소유권은 조선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법적으로 보장받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최원규, 1994, 「韓末 日帝初期 土地調査와 土地法 硏究」, 연세대학 교박사학위논문, 323~338쪽. 남기현, 2019, 「한말 일제 초 토지소유권 법령의 제정과 의미 변화 –조선총독부 고등법원의 해석을 중심으로-」, 뺷역사연구뺸 36, 221~223쪽 참조.
31) ‘한국병합’ 이전 통감부는 토지에 형성되어 있던 물권적 권리를 조사하고 이에 대한 조치를 취했다. 궁방전에 형성되어 있던 導掌의 권리를 조사하고 일부는 금전적으로 보상한 것이 다. 국유지로 산정된 역둔토 일부는 민유지로 불하되었다. 이러한 것은 ‘한국병합’ 이전 형
3. 행정구제 제도의 존재 여부
지조개정과 조선토지조사사업은 모두 행정기관이 주도한 것이었다. 따라서 지조개정의 결과와 조선토지조사사업은 모두 행정처분에 해당했다. 지조개정과 조선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는 크게 국유지(관유지)와 민유지로 구분되었다.
현재의 기준에서 만약 민유지임에도 불구하고 국유지로 결정되었을 경우 행정 기관의 위법한 처분에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행정소송법이 존재하기 때문이 다. 이 절에서는 일본과 식민지 조선에서 개인이 국유지로 확정된 토지에 대해 행정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일본에서는 지조개정 때 잘못하여 국유지로 편입되어진 것을 바로잡기 위한 법령이 발표되었다. 1882년(明治15) 12월 태정관포고(太政官布告) 제58호 「청원 규칙(請願規則)」에 기초하여 부현지사(府県知事)에게 관유(官有)로 편입되어진 토 지의 환급을 신청할 수 있도록 했다. 1890년(明治23)4월에는 농상무성(農商務省) 훈령(訓令) 제23호 「관유삼림원야 환급의 건(官有森林原野引戾ノ件)」32)이 발표되 어, 민유지의 환급에 대한 처리는 농상무성 소관으로 규정되었다. 1897년(明治 30)에는 「관유삼림원야 환급 신청의 건(官有森林原野引戾申請ノ件)」이 발표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 법령을 기반으로 환급에 대한 청원수속 등을 정비하고, 관유지에 편입되는 것으로 잘못 처분된 오류를 바로 잡는 것을 도모했다.33)
성되었던 ‘토지소유의 중층성’에서 기인한다. 조선토지조사사업의 성격을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해 도장에 관한 권리가 최종적으로 일제시기에 어떻게 귀결되었는지, 불하된 역둔토가 조선토지조사사업 이전에 어떤 성격을 가진 토지였는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도장에 대해서는 박성준, 2018, 「통감부시기 황실재정정리기구의 궁방전 導掌정리와 도장권에 대 한 인식」, 뺷역사문제연구뺸39가 참조된다. 역둔토 불하에 관해서는 조석곤, 2003, 뺷한국근 대 토지제도의 형성뺸, 해남, 163~193쪽; 최원규, 2019, 뺷한말 일제초기 국유지 조사와 토지조사사업뺸, 혜안, 261~319쪽 참조.
32) ‘引戾’는 引き戻す(ひきもどす)로 ‘되돌리다’라는 뜻이다. 환급이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33) 毛塚五郞 編, 1984, 뺷近代土地所有權 - 法令ㆍ論說ㆍ判例뺸, 日本加除出版株式會社, 317 쪽.
1899년 4월 17일 법률(法律) 제99호 「국유토지삼림원야환급법(國有土地森林原 野下戻法)」이 발표되었다. 이 법률 제1조에는 “지조개정 또는 사사지(社寺地) 처 분에 의해 관유로 편입되어 현재 국유로 속한 토지, 임야, 원야, 혹은 입목죽(立 木竹) 등은 그 처분 당시에 소유 또는 분수(分收)의34) 사실이 있던 때에는 이 법 률(국유토지삼림원야환급법-필자)에 근거하여 1900년 6월 30일까지 주무대신(主務 大臣)에게 환급 신청을 할 수 있다”라고 규정되었다. 그리고 제4조에는 “신청에 의해 환급된 토지 등은 제3자에 대한 국가의 권리의무를 승계 한다”라고 명시되 었다.35) 지조개정이 1873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생각해보면, 약 30 여 년 간에 걸쳐서 토지소유권을 확정하기 위한 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 이후 행정소송에 대한 법제가 정비되어 갔다.
특히 1889년 메이지 헌법이 제정되면서 행정소송제도가 체계화되었다. 1890년 법률 제48호로 「행정재판법(行政裁判法)」이 발표되어 행정처분에 대해 이의가 있을 경우 행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할 수가 있었다.36) 당시 행정소송의 대상 은 법률이 특별히 정한 것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매우 협소할 수밖에 없었다. 행 정재판의 대상은 1890년 6월 30일 발표된 법률 제106호 「행정청의 위법처분 에 관한 행정재판의 건(行政廳ノ違法處分ニ關スル行政裁判ノ件)」에서 규정되었다.
대상을 살펴보면 ①해관세를 제외한 조사 및 수수료의 부과에 관한 사건, ②조 세체납처분에 관한 사건, ③영업 면허의 거부 또는 취소에 관한 사건, ④수리 및 토목에 관한 사건 ⑤관유지(국유지)와 민유지 구분에 관한 사건이었다.37) 당 시 일본의 행정소송은 제한적 사건에만 적용되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국유지
34) 分收林이란 山林의 主人과 나무를 심어 기른 사람이 서로 달라, 그 收穫을 一定한 比率로 나누어 가지도록 한 山林을 뜻한다.
35) 毛塚五郞 編, 1984, 앞의 책, 318∼319쪽.
36) 明治23年 6月 30日 法律第48號 「行政裁判法」; 행정재판소는 동경에 설치되었으며(제1조) 행정재판소의 판결은 그 사건에 대해 관계된 행정청을 羈束했다(제18조)(毛塚五郞 編, 앞의 책, 1984, 341쪽).
37) 하명호, 2018, 앞의 책, 32쪽.
와 민유지의 경계를 확인하는 행정소송이 가능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자신의 소 유지가 국유로 판정되었을 경우 행정소송을 제기하여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이와 함께 일본에는 행정재판절차 이외에 행정쟁송제도로서 행정심판절차가 존재했다. 행정불복신청제도는 1882년에 시행된 소원규칙에 기반 한 청원제도 에서 비롯되었다. 「행정재판법」이 제정된 1890년(明治23), 법률 제105호 「소원 법」이 제정되었다. 소원법은 행정불복제도에 관한 일반법이었다. 1890년 시점 에서 일본의 행정심판은 소원과 이의신청 2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38)
그러면 식민지 조선에서는 어떠했을까? 일본 정부는 식민지에서 행정쟁송제 도를 적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있었다. 하지만 식민지 각각의 사정에 따라 지역별로 다른 법제를 채택하였다. 사할린에서는 행정재판과 소원이 모두 시행되었고, 대만과 만주국에서는 소원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는 행정구제 자체가 시행되지 않았다.39) 식민지 조선에서 최고재판소 역할을 했던 조선총독부고등법원에서는 “행정과 사법은 서로 대립하고 각각 그 권역을 침범할 수 없으며, 적법한 행정처분에 대해서는 사법재판소가 좌우할 수 없다”
라고 판단하였다.40) 식민지 조선에서 행정기관의 결정에 대해 사법기관이 관여 할 수 없는 것이 원칙이었던 것이다. 또한 조선총독부고등법원은 청원(請願), 소 원(訴願) 등 특별히 구제를 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서는 개인 의 권리를 침해하는 일이 있어도 행정처분은 효력을 가진다고 결정했다.41) 일 제시기에 생산된 조선총독부고등법원의 재판기록을 보면, 사정에 관한 소송이 다수 존재한다. 하지만 민유지와 연관된 재판임이 주목된다. 행정처분의 결과가
38) 하명호, 2018, 앞의 책, 33쪽.
39) 하명호, 2018, 앞의 책, 72∼73쪽.
40) 「土地所有權確認及引渡請求ニ關スル件」 1914年 民上第自445號至449號 1915.2.23(高等 法院書記課, 뺷高等法院民事判決錄뺸제3권, 53쪽).
41) 「妨害排除請求事件」 1929年 民上第146號 1929.5.10(高等法院書記課, 뺷高等法院民事判 決錄뺸제16권, 111쪽).
개인과 개인의 문제에 관련되는 경우에만 민사소송이 가능했던 것이다.42) 결국 식민지 조선에서 국가를 상대로 한 소송은 제도적으로 막혀 있었다고 할 수 있 다.
일본에 형성되어 있던 행정구제제도는 ‘한국병합’이전부터 한국사회에 소개 되고 있었다. 대한자강회 및 대한협회의 고문이었던 오가키 다케오(大垣丈夫)는 일본의 지방자치제도를 소개하면서 행정재판에 대하여 언급하였다.43) 뺷대한협 회회보뺸, 뺷서우뺸, 뺷기호흥학회월보뺸 등 애국계몽운동단체가 발간했던 잡지들에 서도 일본의 지방자치제도와 함께 행정재판제도가 논의되었다.44) 당시 지식인 들이 행정재판을 비롯한 행정구제제도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병합’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 행정구제제도는 시행되지 않았다. 조선총독 부가 정한 토지소유권 확정 방안은, 행정기관인 임시토지조사국이 주도한 조선 토지조사사업의 결과에 절대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 인 ‘사정’을 절대적으로 판단하고 이것을 등기하게 하여 토지소유권을 확정하려 고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의가 있을 경우 기한 안에 또 다른 행정기관인 고등 토지조사위원회에 재결을 요청할 수 있도록 하였다.45) 고등토지조사위원회는 존속 기한이 존재하는 임시적인 행정기구였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과 같이 국유지로 판정된 토지에 대한 이의제기를 할 수 있는 방안이 부재했다고 할 수
42) 査定과 관련된 재판에 대해서는 남기현, 2019, 앞의 박사학위, 103~241쪽 참조.
43) 大垣丈夫, 「日本의 地方自治制度(續)」, 뺷대한자강회월보뺸제8호, 1907.2.25. ; 「日本의 自治 制度」, 뺷대한자강회월보뺸제11호, 1907.5.25. 오가키 다케오의 활동에 대해서는 남기현, 2017, 「1909년 국민대연설회 전후 대한협회의 행보」, 뺷인문과학연구뺸24, 174~180쪽 참조.
44) 金陵居士, 「國家의 民事責任」, 뺷대한협회회보뺸제3호, 1908.6.25. ; 金陵生, 「地方自治制 度問答」, 뺷대한협회회보뺸제9호, 1908.12.25. ; 金陵生, 「地方自治制度問答」, 뺷대한협회회 보뺸제10호, 1909.1.25. ; 東初 韓光鎬, 「外國人의 公權及公法上義務」, 뺷서우뺸제10호, 1907.9.1. ; 閔丙斗, 「地方自治行政(續)」, 뺷기호흥학회월보뺸제7호, 1909.2.25. ; 閔丙斗,
「地方自治行政(續)」, 뺷기호흥학회월보뺸제11호, 1909.6.25.
45) 조선총독부의 조선토지조사사업 확정 방침에 대해서는 남기현, 2019, 「조선총독부의 토지소 유권 확정방안과 사법판결」, 뺷한국민족운동사연구뺸 101, 111~117쪽; 2020, 「일제하 토지 소유권 확정방침에 대한 식민지 내부기관의 혼선」, 뺷한국근현대사연구뺸 92, 68~82쪽 참조.
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식민지 조선 내에서 행정구제제도의 실행에 대한 요구 가 확산되었다. 전선변호사대회(全鮮辯護士大會)가 개최될 때마다 요구되는 것 중 하나가 소원법 및 행정재판소법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1938년 미나미 지로(南次 郞)와 면담한 변호사 이홍종(李弘鍾)46)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행정재판제도를 실 시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그는 “일본에서는 1890년 행정재판제도가 실시 되었고, 1916년에 개정 된 이래 오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그리고 “민권을 존 중하는 현재의 통치 상 행정재판은 반드시 필요한데, 식민지 조선에서는 아직 까지 행정재판제도가 실시되지 않고 있다”라고 말하였다. 일본에서 행정재판제 도가 실시될 때보다 1938년 현재 식민지 조선이 더욱 진보된 상황임에도 불구 하고 시행되고 있지 않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강조하였다.47) 이홍종이 일본에 서 행정재판법이 시행될 때보다 1938년 현재 식민지 조선의 상황이 좋다고 강 조한 것은 그동안 보여왔던 조선총독부의 태도를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선 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에서 행정재판제도가 시행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것을 강조해왔기 때문이다.48)
행정소송은 위법한 행정작용으로 인하여 권리 또는 법률상 이익을 침해받은 사람이 소송을 제기하여 자신의 권리를 구제 받을 수 있는 방법이다.49) 일본에 서 시행되었던 행정소송제도는 제한을 두었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고 평가받고 있다.50) 하지만 토지소유권 측면에서 보면, 일본에서는 행정재판을 통해 국유
46) 이홍종은 1891년 8월 16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 판사, 대구지방법 원 경주지청 판사, 경성지방법원 개성지청 판사를 엮임 했다. 1939년 조선변호사 협회 이 사,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보도부 참사, 1941년 창씨해설부대 에서 활동하는 등 친일활동을 전개하였다. 현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뺷친일인명사전뺸 에 게재되어 있다.
47) 李弘鍾, 「總督會見記」, 뺷삼천리뺸제10권제5호, 1938.5.1.
48) 「행정재판문제와 당국의 상조설」, 뺷동아일보뺸, 1923.7.21.
49) 하명호, 2018, 앞의 책, 4쪽.
50) 하명호, 2018, 앞의 책, 89쪽.
지 민유지의 구분을 재심의 할 수 있었다. 부당한 행정처분에 대해 항의할 수 있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반면 식민지 조선에서는 행정기관의 결정 에 침해를 받더라도 항의할 수 있는 방안이 존재하지 않았다. 조선총독은 식민 지 조선에서 행정력을 강화하고 침해받지 않겠다는 방침을 식민통치 전 기간에 걸쳐 고수하였던 것이다.
4. 법령과 재판에서 규정된 원시취득
조선총독부는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확인된 소유권자의 권리를 절대적 권 리로 인정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 권리를 등기하게 함으로써 제3자에게도 대항 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반면 일본의 경우, 지조개정사업이 진행될 때에는 지권에 게재된 소유자를 절대적으로 인정한다는 사항이 법적으로 규정 되어 있지 않았다.
1872년 2월 5일 도쿄에서 시작된 지권교부는 지조개정사업이 진행되면서 전 국으로 확산되었다. 지권교부에 의해 배타적인 토지소유권이 설정되어 갔다. 하 지만 지권에 표시된 사적토지소유권의 내용은 매우 애매했다. 1872년 2월에 공 포되고, 7, 8, 9월에 개정 증보된 「지권도방규칙(地券渡方規則)」에 규정된 지권의 사법적 기능은 완벽하지 않았다. 토지에 관한 사법적 규정은 이후 지권 교부의 실시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점차 단행법(單行法)으로 제정, 공포되거나 정부 및 부 현(府縣) 간의 지령(指令)등으로 정해졌다.51)
지권도방규칙에 규정된 지권에 대한 사항과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인 사정 에 대해 규정한 「토지조사령(土地調査令)」의 규정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51) 福島正夫 編, 1982, 뺷日本近代法体制の形成 下卷뺸, 日本評論社, 45∼46쪽.
일본 : 「지권도방규칙(地券渡方規則)」 제6조 “지권은 토지소유자(地所持主)인 확증(確證)이다”
조선 : 「토지조사령(土地調査令)」 제15조 “토지소유자의 권리는 사정 또는 재 결에 의하여 확정(確定)된다”(밑줄과 강조는 필자).
지권이 토지소유권을 입증한다는 것은 1872년에 발표된 지권도방규칙 제6조 에 규정되었다.52)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의한 사정은 토지조사령 제15조에 명시 되어 있다.53) 지권은 토지소유자의 ‘확증’이며, 사정 및 재결은 토지소유자의
‘확정’이라는 것이 주목된다. 법적으로 지권은 토지소유권을 ‘확인하는 증거’인 반면 사정과 재결은 토지소유권이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지권은 행정기관 이 토지소유권을 확인해준 증거이지만, 사정과 재결은 행정기관이 최종적으로 토지소유권을 확인하고 결정한 것이 된다.54) 조선총독부는 행정처분에 의해 소 유권을 확정하고 이것에 ‘원시취득’을 부여하겠다는 원칙을 토지조사령에서 밝 힌 것이다.55)
일본의 경우 지권에서 보장된 소유권에 ‘원시취득’ 효과가 있는지에 관한 사 항은 지조개정 당시가 아니라 추후에 문제가 되었다. 또한 지권을 통해 확인된
52) 渡瀬正晴 編, 1884, 뺷現行租税法規類纂뺸, 82∼83쪽.
53) 制令 制2號 土地調査令 뺷조선총독부 관보뺸 제12호, 1912.08.13.
54) ‘확정’이라는 법률용어를 개별적으로 정의한 것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확정’이라는 단어 가 사용된 법률용어를 통해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형식적 확정력’이란 상급 법언에 의하여 취소될 가능성이 없어진 것을 의미한다. ‘사법판결’이란 취소 불가능한 ‘형 식적 확정력’을 가진 판결을 뜻한다(뺷법률용어사전뺸, 2015, 현암사, 986쪽). 이러한 것을 통해 생각해보면 「土地調査令」에 사용된 ‘확정’이라는 용어는 ‘취소 될 가능성이 없이 결정 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55) 조선경성지방법원 서기 早川保次는 “사정은 하나의 私權확정의 방법인 행정상의 처분이고, 소유권의 존재가 사정에 의해 시작되어 확인되고 결정된 것이라면 사정과 사정전에 소유권 의 연락관계는 조금도 물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전 소유권을 소멸시켜 새로운 소유권을 취득하는 소위 ‘원시취득’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早川保次, 1921, 뺷朝鮮不動 産登記ノ沿革뺸, 56쪽).
소유권을 ‘원시취득’으로 간주한 주체는 식민지 조선과 달리 사법기관이었다.
지조개정에 의해 성립된 소유권에 관해서 그 성격을 둘러싼 재판이 진행되었 다. 지권이 교부되지 않았던 시점부터 지배(所持)되고 있던 소유권을 주장할 경 우와 지권교부에 의해 정해진 토지의 경계를 다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지조 개정 당시 메이지 정부는 지권에 게재된 소유권의 성격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다. 따라서 지권에 규정된 소유권이 어떤 성격을 가지는지에 대한 법적 해 석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이 중 일본 대심원에서는 1914년 “본래 민유로 인정되어야 할 토지가 행정기 관의 착오로 관유로 편입되었다고 할지라도 국가가 원시적으로 토지소유권을 취득 한다”라는 판결을 하였다.56) 이 판결은 일본의 최고재판소에서 행정처분 인 지조개정의 결과는 소유권의 ‘원시취득’을 의미한다고 결정했기 때문에 주목 된다.57) 일본에서도 지조개정을 통해 확인된 소유권을 ‘원시취득’으로 간주한 것이었다. 하지만 위 판례를 자세히 보면 ‘원시취득’의 대상 토지는 관유지였다 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권은 민유지만 발급되었기 때문에 관유지와 구별되었다. 이것을 ‘관민유구 분처분(官民有區分處分)’이라고 한다. 이 시기 토지소유권의 확정, 특히 관유지와 민유지의 구별이 어떠한 법률상의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크게
56) 심희기, 2015, 「査定의 법적 성격 : 창설적 효력설 비판」, 뺷토지법학뺸제31권제1호, 185∼
186쪽. ; 심희기는 1921년 早川保次가 지은 뺷朝鮮不動産登記ノ沿革뺸을 보면 “저자는 전편 에 걸쳐 일본과 조선의 재판소, 법원이나 행정기관이 發한 공적인 문건들을 편집하였을 뿐 자신의 사견은 단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았음을 지적했다. 때문에 이 책에 언급된 ‘원시취득 론’은 아마도 개조처분(그 중에서도 관유지처분)의 법적 성격에 대한 1914년의 일본대심원 판결과 그 판결의 취지를 따르는 판결들, 그런 판결을 유도한 법령들의 문언적 의미를 기초 로 응용된 논증으로 보인다”라고 하였다.
57) 심희기는 “1914년 일본대심원의 판결은 법령의 명시적 문언(지주임의 확증)에 입각한 판시 가 아니라 ‘법령의 문언’에 특정의 의미를 추가적으로 부여하는 해석론으로 보인다”고 하였 다. 이것은 지권에 ‘원시취득’을 부여한 것이 대심원의 해석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을 강조 한 것으로 매우 의미 있는 지적이라고 생각된다(심희기, 2015, 앞의 논문 190쪽).
‘확인설(確認說)’과 ‘창설설(創設說)’로 나누어지는 것으로 설명 되고 있다. ‘확인 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관유지와 민유지가 구분되어 지권이 발행된 것은 여러 법령에 의해 인정된 소유권을 단순히 확인하는 효력을 가지는데 불과한 것이라 고 이해한다. 에도(江戶)시대에 이미 토지소유권은 존재했고, 해당 토지에 연관 된 많은 권리자, 관계자 중에서 가장 현재와 유사한 권리가 소유권이 된 것이다.
따라서 ‘확인설’에 따른다면, 지권이 교부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토지의 소유권 을 잃은 것은 아니었다.58)
반면 ‘창설설’에서는, ‘관민유구분처분’은 토지소유권의 귀속을 창설적으로 결정하고, 관유지와 민유지의 소유권의 귀속을 확정한 행정처분이라고 이해한 다. 이것은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에 ‘원시취득’효과를 부여한 것과 동일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설설’에 의한다면 지조개정과정에서 토지를 관유로 한 처분이 있게 된다면, 종전에 토지를 지배(支配), 진퇴(進退), 소지(所持) 하고 있던 자가 있어도, 해당 토지는 나라의 소유가 된다.59)
58) 稻本洋之助, 小柳春一郞, 周藤利一, 2009, 뺷日本の土地法 : 歷史と現狀뺸, 成文堂, 7쪽 ; 일 본의 유명한 민법학자였던 我妻榮은 ‘확인설’을 지지했던 사람으로 분류된다. 그는 寺社의 토지처분에 대한 판례평석으로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민법이 시행되고 토지소유권이라고 할 수 있는 실체를 가진 私人의 토지에 대한 지배권은 일반적으로 지권이 발급되어진 후 이것이 토지대장에 등록되어진 것임은 주지하는 바이다. 하지만 가끔씩 걸린 이와 같은 과 정에서 빠진 것의 운명은 어떤가. 이러한 것도 역시 그 실체에 있어서 소유권이 되는 것이 라고 봐도 무방하다. … 생각건대, 당시의 토지제도변혁은, 사적지배권의 실체의 존재를 전 제로 하였고, 이것을 소유권으로 인정했던 것으로, 설령 그것을 인정하기 위해 권리의 성질 이 다소의 변경을 발생했다고 하여도, 반드시 소유권을 創設 賦與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권의 교부라는 수속이 토지소유권인정의 절대적 요건은 아니라고 보는 것을 지당하다”(我妻榮, 1965, 「所有權-民法施行前 寺領地 所有權」 뺷民法判例評釋Ⅰ뺸, 一粒社 (稻本洋之助, 小柳春一郞, 周藤利一, 2009, 앞의 책, 7∼8쪽에서 재인용)).
59) 稻本洋之助, 小柳春一郞, 周藤利一, 2009, 앞의 책, 2009, 8쪽. ; 창설설에 대하여 寶金敏 明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소유권은 명치정부의 입법정책으로써 창설된 것이다. 관민유 구분, 下戻처분등은 근대적토지소유권창설을 위한 形成的效力을 가진 처분이다. 이 처분에 서 빠진 토지는, 下戻法의 규정을 받아, 모두 국유로 귀속된다”(뺷新訂版 里道ㆍ水路ㆍ海浜 : 法定外公共用物の所有と管理뺸, ぎょうせい, 2003(稻本洋之助, 小柳春一郞, 周藤利一, 2009, 앞의 책, 8쪽에서 재인용).
일본의 판례는 ‘창설설’을 채택한 경우가 대다수이다. 하지만 ‘확인설’과 ‘창 설설’ 하나만을 채택하지 않았다.60) 지조개정에 의해 확인된 소유권이 ‘창설 설’, ‘확인설’로 구분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지조개정 당시 지권을 가진 자가 명 확하게 소유권을 ‘원시취득’한다는 규정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지조개정 당시 규정은 법률적으로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후 문제가 되었고 사법기관의 해석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 하나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관유지와 민유지의 구분에만 ‘창설설’과 ‘확인 설’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확인설’과 ‘창설설’을 분석한 책에서는 “지조개정과 정에서 민유지로 구분된 토지가운데 소유자 확정에 있어서까지 창설적이었다고 는 할 수 없다. 사인 간에 있어서 토지소유권의 귀속에 관해서는, 지권은 확인적 효과 밖에 가지지 않는다. 이것은 등기부상의 소유자가 반드시 진실 된 소유자 여야 한다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이해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61)
결국 일본 지조개정과정에서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토지는 관유지에 대한 것 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관유지로 결정된 토지의 성격을 ‘원시취득’으로 간주 하는 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의 경우, 조선총독부는 조 선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확정된 모든 국유지와 민유지의 소유권에 ‘원시취득’을 부여했다. 반면 일본에서 지권을 발급받은 민유지의 소유자는 지권을 통해 자신
60) ‘확인설’을 따른 재판은 다음과 같다. “國측의 상고 이유의 所論은, 지권의 교부가 있었던 토지 혹은 민유인 것으로 인정행위가 되지 않은 토지는, 민유임이 부정된 것이다. 이러한 토지에 있어서 국민이 소유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下戻法」에 기초한 신청 밖에는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미 그 전제가 부당한 것이다.”(最判 소화44년 12월 18 일 訟務月報 15卷12號13頁) ; ‘창조설’에 따른 최근 재판은 다음과 같다. “산림원야의 소유 권의 귀속은, ‘관민유구분처분’으로 창설적으로 결정되었던 것이다. 민유지로 구분되어야할 것이 관유지로 구분되어졌어도 舊 「訴願法」 1조1항5호의 관민유처분에 관한 사건으로 소 원을 신청하고, 다시 행정재판소에 출소한 것이 아니며, 그대로 확정했던 이상에는 그 소유 권은 국가에 귀속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相當하다”(仙台高判平成9年6月18日 訟務月報 45卷2號282頁) (稻本洋之助, 小柳春一郞, 周藤利一, 2009, 앞의 책, 9쪽에서 재인용).
61) 稻本洋之助, 小柳春一郞, 周藤利一, 2009, 앞의 책, 9쪽.
의 소유권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였을 뿐 절대적으로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 는 것은 아니었다.
한편 최근에는 ‘창설설’을 대표한다고 생각되었던 재판도 지조개정 이전에 형 성된 소유권을 부정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들은 대심원 판례를 분석하여보면 많은 경우 에도시대에 이미 토지소유권과 유사한 토지지배권이 실체적으로 존재하고 있었고, 이것을 바탕으로 지조개정과 ‘관민유구분처분’이 진행된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법원은 토지소유권의 실체적 권리를 확인하고, 토지소유자에 지권을 교부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다만 관민 유처분의 법적성격에 대해서, “판례의 태도는 반드시 명확한 것이 아니었다”라 고 했다. 특히 개인소유지가 잘못 관유지로 편입된 경우 “개인의 소유권은 직접 소멸하는 지, 그래도 존속하는 것인지의 문제에 대해서 판례의 태도는 찬부 양 론으로 나누어 질 수 있다”라고 분석했다.62)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인 사정과 재결은 임시토지조사국과 고등토지조사 국에 의한 행정처분이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는 행정처분에 의한 소유권에 ‘원 시취득’을 부여하였다. 이것은 사법기관에 의해 지조개정 이후 ‘원시취득’이 부 여된 일본의 토지소유권과 구별이 되는 지점이었다. 지조개정이 진행될 당시 일 본 정부는 지권에 기재된 토지소유권에 ‘원시취득’을 부여하지 않았다. 사법판 결에서 문제가 되는 것도 관유지를 해석하는 방식이었다. 민유지에서는 전통적 인 관습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차원에서 지권발급이 되었다고 인정하고 있다. 하 지만 조선총독부는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확정된 모든 토지의 소유권을 ‘원 시취득’으로 간주한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었다. 결국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 과인 사정, 재결은 행정 권력이 ‘원시취득’을 부여한 소유권이었으며, 이것은 조 선토지조사사업 이전에 성립되었던 소유권 이외의 물권적 권리들은 모두 부정
62) 牛尾洋也, 居石正和, 橋本誠一, 三阪佳弘, 矢野達雄, 2006, 뺷近代日本における社會變動と 法뺸, 晃洋書房, 77∼86쪽.
한다는 원칙 하에서 성립된 권리였다.
지조개정과 지권의 발급으로 인해 형성된 소유권이 일본민법의 적용을 받는
‘근대적 소유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식민지 조선에서 성립된 소유권 역시 일본민법의 적용을 받는 사용ㆍ수익ㆍ처분이 가능한 ‘근대적 소유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성립된 토지소유권은 그 과정을 살펴 보면 일본과 철저히 다른 관점에서 시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의해 성립된 소유권은 일본민법의 적용을 받는 ‘식민지적 토지소유권’이라고 할 수 있다.
5. 맺음말
1873년 메이지정부는 지조개정을 단행했다. 자본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목표 였던 메이지정부의 입장에서 조세수입의 안정화를 달성하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지조개정 과정에서 실질적 지조 수입 및 지가가 선정되었다. 그리고 지권에 기재된 사람은 토지소유권자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지조를 담당하게 사 람들이었다. 지권에 기재된 토지소유권은 이후 일본민법의 적용을 받는 권리가 되었으며, 등기제도를 통해 사용ㆍ수익ㆍ처분 할 수 있게 되었다. 메이지정부는 지조개정을 통해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기반이 되는 토지제도를 구축 할 수 있 게 된 것이다.
일본은 제국의 형성과 팽창 과정에서 획득한 지역에서 토지조사를 시행하였 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조선총독부의 주관 하에 조선토지조사사업이 진행되었 다.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 확인된 토지소유권은 「조선민사령」에 의해 ‘의용’
된 일본민법의 적용을 받았으며, 등기제도에 의해 자본주의에 적합한 토지제도 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행정기관의 주도로 토지소유권이 확인된 것, 일본민 법의 적용을 받게 되고 등기제도에 의해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지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