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메이지정부는 지조개정을 단행했다. 자본주의를 달성하는 것이 목표 였던 메이지정부의 입장에서 조세수입의 안정화를 달성하는 것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지조개정 과정에서 실질적 지조 수입 및 지가가 선정되었다. 그리고 지권에 기재된 사람은 토지소유권자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지조를 담당하게 사 람들이었다. 지권에 기재된 토지소유권은 이후 일본민법의 적용을 받는 권리가 되었으며, 등기제도를 통해 사용ㆍ수익ㆍ처분 할 수 있게 되었다. 메이지정부는 지조개정을 통해 근대 자본주의 국가의 기반이 되는 토지제도를 구축 할 수 있 게 된 것이다.
일본은 제국의 형성과 팽창 과정에서 획득한 지역에서 토지조사를 시행하였 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조선총독부의 주관 하에 조선토지조사사업이 진행되었 다.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 확인된 토지소유권은 「조선민사령」에 의해 ‘의용’
된 일본민법의 적용을 받았으며, 등기제도에 의해 자본주의에 적합한 토지제도 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다. 행정기관의 주도로 토지소유권이 확인된 것, 일본민 법의 적용을 받게 되고 등기제도에 의해 권리를 보장받게 되었다는 점에서 지조
개정과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확인된 토지소유권의 성격은 유사한 점을 보 인다. 자본주의적 화폐경제에 적합한 토지소유권인 것이다. 하지만 일본과 식민 지 조선에서 토지소유권을 확정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차별적인 요소가 보인다.
먼저 토지구관에 대한 인식이다. 일본에서 토지구관은 농민들의 요구와 지방 관리들의 보고를 기초로 수정되고 조절되었다. 관습을 고려하면서 토지소유자 를 확정해 갔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토지구관을 고려하여 일본민법이 만들어졌 다. 결국 지조개정 결과 확인된 토지소유권은 지조개정 이전에 형성되었던 토지 구관을 반영한 것이었다. 반면 조선총독부는 조선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한국 에 형성되어 있던 토지구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즉 조선토 지조사사업의 결과인 ‘사정’을 원시취득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것은 조선토지조 사사업 이전의 토지관계를 부정하고,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에 의해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원시취득으로 간주된 토지소유권은 조선민 사령에 의해 일본민법에 적용을 받게 되는 권리가 되었다. 조선토지조사사업 결 과 확인된 토지소유권은 옛 토지관습과는 단절된 것이다.
두 번째는 행정구제제도, 행정재판에 관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지조개정 결과 잘못되어 국유지(관유지)로 편입된 것을 바로잡기 위한 법령이 발표되었다. 토지 소유자들은 자신의 소유임을 주장할 수 있는 경로가 존재했던 것이다. 또한 메 이지유신 이후 행정소송에 관한 법제가 정비되어 갔다. 당시 행정소송은 특별히 한정된 사항에 대해서만 제기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하지만 관유 지와 민유지 구분에 관한 내용은 소송이 가능했다. 반면 식민지 조선에서는 행 정처분에 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제도가 적용되지 않았다. 조선총독부는 행정처분에 의해서만 토지소유권을 확정하려고 했다. 행정처분의 결과인 ‘사정’
을 절대적인 권리로 인정한 것이다. ‘사정’에 이의가 있을 경우 또 다른 행정기 관인 고등토지조사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하고 재결(裁決)을 요청할 수 있었다. 하 지만 고등토지조사위원회는 한시적 기구였다. 조선총독은 식민지 조선에서 행 정권력을 사법권력으로 부터 침해받지 않겠다는 방침을 식민통치 전 기간에 걸
쳐 고수했다.
마지막으로 법령과 재판에서 규정된 원시취득에 관한 것이다. 법적으로 지권 은 행정기관이 토지소유권을 확인해준 증거이지만, 사정과 재결은 행정기관이 최종적으로 토지소유권을 확정한 것이었다. 이는 조선총독부가 사정과 재결을 원시취득으로 간주한다는 방침이 반영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지조개정에 의 해 성립된 소유권에 관한 재판을 살펴보면 관유지와 민유지를 구분할 때에만 원시취득이라는 법적 개념이 등장한다. 일본에서 토지소유권의 원시취득 문제 는 국유(관유), 민유를 구분할 때에만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 에서는 국유지, 민유지에 상관없이 조선토지조사사업의 결과가 원시취득인 것 으로 간주되었다.
결국 지조개정과 조선토지조사사업에 의해서 확인된 토지소유권은 자본주의 체제에 적합한 ‘근대적 토지소유권’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에서 토지소유권 확정은 일본과 달리 다른 관점에서 시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토지조사사업에 의해 확인된 토지소유권은 법적으로 이전 사회에 형성된 토지 소유관계와의 단절을 의미했다. 식민지 조선에서 확정된 토지소유권은 사법적 재판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는 행정기관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행정처분의 결과 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본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식민지적 토지소유권’이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접수일(2021. 06. 14), 심사 및 수정일(1차 2021. 06. 26, 2차 2021. 06. 29), 게재확정일(2021. 06.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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