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로 읽은 經
이명희 한국식품연구원 시설자재실
밥經
저를 다하여 하냥 온기를 게워 올리는 향처럼 피워 올리는
둥근 지붕부터 헐어 몸 열어주던 거기, 원적외선 담요보다 푹신하고 느른한
寺院 같던, 입으로 읽었던.
-정윤천의 시집『구석』중에서
우리 몸을 열어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보니 우리 몸의 일부가 될 수 있었던 건 자연 그대로의 것이었다. 인류가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먹어온 것의 대부분은 원형질 그대로가 아니 었나 싶다. 세상이 발달하면서 수많은 식재료로 온갖 요리를 만들어내지만 가슴속 깊이 스며 들어 잊히지 않고 슬금슬금 기어 나와 추억에 빠지게 하는 것들은 원재료의 풍미를 최대한 살 린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건강하게 장수하는 사람들은 거칠고 가공하지 않은 것들을 섭생하고 끊임없이 몸을 움직여 노동력을 생산해내는 사람들이었다. 많은 것을 섭취해 끊임없이 소비하지만 원형 그대로의 먹 을거리를 소비하는 일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공존하는 일이니 크게 해가 될 것이 없을 터였 다. 또 땅에서 나는 것들을 거둬 먹으려면 정직한 노동이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했으니 그것이 결국 건강한 신체를 유지하고 정신을 지킬 수 있게 하는 원천이 되었다.
98 입으로 읽은 經
02-2009 겨울내지-수정 2010.1.5 20:54 페이지98 MAC-4
추수가 끝날 무렵에 강화에 있는 한 친구를 찾아갔다. 초등학교 영양사인 친구는 교동에서 나와 외포리 안쪽에 허름한 한옥을 한 채 빌려서 살고 있었다. 일행 중 가장 먼저 도착한 나를 반기는 그 친구는 사랑방에 군불을 때고 있었다. 곁에 앉아 불꽃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 니 한 번도 흔감하게 느껴보지 못한 사치스러운 기분에 빠져들었다. 친구는 고구마 몇 개를 숯 이 되어버린 나무 밑에 묻었다. 잠깐 시간을 놓쳐서 고구마는 껍질이 두꺼운 군고구마가 되어 버렸다. 까만 숯 검댕을 벗겨내고 노란 속살을 먹는 맛이라니…. 고구마를 가지고 별짓을 다 해도 그 맛보다 더한 맛은 내지 못할 듯싶었다.
다들 모여 저녁을 먹고 술 한잔을 길게 이어가다가 한껏 달궈진 사랑방에 모여 밤을 새울 듯 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늘이는 여유를 얼마 만에 누려보았던지. 뜨거운 구들에 몸을 지져가 며 하룻밤을 보내고 아침에 해장하라 끓여준 북엇국은 정말 최고였다. 집 앞 텃밭에서 무 하나 쑤욱 뽑아가지고 굵게 채를 썰어 넣고 북어를 넣어 끓였는데 해장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 입맛에도 딱 맞을 정도로 시원했다. 아무래도 재료가 좋아서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북어 해장국 한 그릇 먹고 망둥어를 잡겠다고 갯벌로 나갔으나 망둥어는 그리 어리바리하지 않았 다. 한 마리도 낚지 못하고 창후리로 가서 막 잡아 내놓은 것 같은 다디단 생새우도 맛보고, 새 우젓을 한가득 쌓아놓고 파는 점포를 기웃거리다 한 친구가 새우하고 말린 망둥어를 샀다.
집으로 돌아와 망둥어도 찌고 새우탕도 끓였는데 망둥어는 아무래도 속아 산 듯 냄새가 나 서 먹을 수가 없었고, 처음 먹어보는 새우탕은 그 맛이 일품이었다. 바닷가에서 산 적이 없고 그런 맛을 꼭꼭 접어가지고 다니지 않았으니 알 턱이 없을 텐데 혀는 익숙하지 않음에도 그 본 래의 맛에 착착 감겨들었다.
얼마 전에는 사람들이 삼합집에 가자고 부추기기에‘그래, 맛있는 음식을 자주 먹어보자 결 심했으니 삼합의 맛은 잘 모르지만 가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종로3가 뒷골목에는 식당 이 무척 많이 늘어서 있었다. 그 집은 허름한 2층집이었는데 들어가기 전부터 냄새가 나는 것 만 같았다. 1층에는 제법 사람들이 들어 차 있어서 2층으로 올라가 앉으니 집 내부에 박혀 있 는 냄새가 밀도 있게 배어 나왔다. 코를 자극하는 홍어 삭은 냄새가 거북한지 일행 중 한 사람 이 창문을 열어젖혔지만 냄새는 우리를 완벽하게 포위했다. 삭힌 홍어의 맛은 좀 약해서 잘 먹 지 못하는 입에도 급이 좀 떨어지는 맛이었다. 대신 서비스 안주로 끓여준 탕 맛은 혀끝을 살 짝 즐겁게 해주었다. 어쨌든 삭힌 홍어 안주에 서로 사는 이야기를 풀어가며 즐길 수 있는 시 간이었다. 집에 돌아와 다음 날, 또 그다음 날에도 옷에서 냄새가 빠지지 않아 결국 한 번밖에 입지 않은 옷을 빨아야 했다. 그러나 그 냄새가 싫지 않았다.
제2권 4호 99
02-2009 겨울내지-수정 2010.1.5 20:54 페이지99 MAC-4
결국 기억이라는 것은 오감에 매달려 있으니 냄새에도 추억이 배어 있는 것이 당연한 일이 겠다. 돌이켜 봐도 오래 기억되는 냄새의 근원은 그 본질이었다.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아도 그 오롯함으로 오래오래 기억되는 향과 맛, 그리고 그리운 이의 손맛을 품은 것들이야말로 우리 에게 지금도 필요하고 또 먼 미래까지 육신을 건강하게 지켜주는 존재가 아닐까. 어쩌면 손 많 이 가고 시간도 많이 들어 회피하는 일들이 사실은 돌아가야 할 시간이고 우리를 돌아볼 수 있 는 여유가 아닐까. 건강한 몸과 아름다운 마음이 함께 기거하게끔 나를 이끌어주는 맛을 찾아 천천히 한 걸음씩 다시 되짚어 걸어보아야 할 것 같다. 바로 지금.
100 입으로 읽은 經
02-2009 겨울내지-수정 2010.1.5 20:54 페이지100 MAC-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