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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홍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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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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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무사도 사츠마 헤고니세와 신라 화랑도

대구한의대학교

박 홍 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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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3-03-20) 보도 기사내용1

"17세기 일본 청년단 화랑도 영향받았다"

최슬기 기자 skchoi@kyunghyang.com

<17세기 일본 사츠마(지금의 가고시마)번의 청년단이었던 ‘ 헤고니세(兵兒二才)’가 신라 화랑도의 영향을 받아 생겨났다 는 주장이 일본인 연구가에 의해 제기됐다.

대구한의대 화랑정신문화연구소장 박홍식 교수(일본어과)는 일본 쓰쿠바대 대학원의 니시나카 겐지씨(71)가 자신의 박사 학위 논문인 ‘사츠마 헤고니세와 신라 화랑도의 비교 연구’에 서 이 같이 주장했다고 20일 밝혔다.

박 교수는 “2년 전 대구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에서 겐지씨

를 처음 만나 교류하고 있다”며 “겐지씨가 이 논문으로 25일

박사 학위를 받는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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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13-03-20) 보도 기사내용2

겐지씨는 논문에서 17세기 일본의 대표적 주자학자인 하야시 라잔 (1583~1657)이 동국통감에서 화랑도 정신과 설화 등을 익힌 뒤 제 자들을 지도하는 과정에서 화랑도가 일본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 다고 밝혔다.

그는 1637년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즈미 지역의 지방관 리였던 야마다 슈겐이 시마바라 출전부대에 13세인 자신의 아들 마 츠노스케를 대장으로 삼았던 것을 예로 들었다. 겐지씨는 마츠노스 케가 선두에서 말을 타고 출전하면 젊은 무사들이 “마츠노스케의 면전에서 전사한다면 세상에 미련을 남길 것이 없다”며 뒤를 따랐 다고 밝혔다. 그는 이런 마츠노스케의 용감한 자태야말로 아득히 먼 신라에서 탄생한 화랑도가 천년의 시·공간을 넘어 일본 사츠마 에 전해진 것이라고 논문에 적었다.

대구한의대 박 교수는 “이전에도 일본에서 신라 화랑도에 대한 연 구가 있기는 했지만 화랑도가 일본 문화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은 이 논문이 처음이다”며 “세속오계에 대한 전승 등 논거를 보완·검증 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이 방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지평을 열 었다는 점에 의의가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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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제도의 출발>1

 “37년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일찍이 임금과 신하들 이 인물을 알아볼 방법이 없어서 걱정하다가 무리들이 함께 모여서 놀게 하고 그 행동을 살펴본 후에 발탁해서 쓰려고 하였다. 마침내 미녀 두 사람 즉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을 뽑고 무리 3백여 명을 모았다. 두 여인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였는데,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으로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되자 끌 고 가 강물에 던져서 죽였다. 준정이 사형에 처해지자 무리들은 화 목을 잃고 흩어졌다.

 그 후에 다시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 하고 [그를] 받들었는데,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혹은 도의(

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산 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기니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알게 되어 착한 사람을 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 그러므로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말하기를 “ 어진 보필자와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 졸은 이로부터 생겼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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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제도의 출발>2

 최치원(崔致遠)은 난랑비(鸞郞碑)의 서문에서 말하기를,

“나라에 현묘(玄妙)한 도(道)가 있는데, [이것을] 풍류(風流)라고 한 다. 가르침의 근원에 대해서는 선사(仙史)에 자세하게 갖추어져 있 는데, 실로 이는 삼교(三敎)를 포함하고 뭇 백성들과 접(接)하여 교 화한다. 이를테면 들어와서는 집안에서 효를 행하고 나가서는 나라 에 충성함은 노(魯)나라 사구(司寇) 의 가르침이고, 하였다고 자랑함 이 없는 일을 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은 주(周)나라 주사(柱 史) 의 뜻이며,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는 것 은 축건태자(竺乾太子) 의 교화이다”라고 하였다.

 당(唐)나라의 영호징(令狐澄)은 《신라국기(新羅國記)》에서 말하기 를,

“귀족의 자제 중에서 아름다운 이를 택하여 분을 바르고 곱게 꾸며 서 이름을 화랑이라고 하였는데,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높이 받 들어 섬겼다.”라고 하였다.

(이상의 내용은 한국사데이타베이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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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정신 세속오계의 성립>1

(이하의 내용은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삼국사기, 귀산전 참조]

 귀산(貴山) 은 사량(沙梁) 사람이다. 아버지는 아간(阿干)註 126무은 (武殷) 이다. 귀산은 어렸을 때에 같은 부(部) 사람 추항(箒項)註 128 과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교양과 인격이 높은 사람과 더불어 놀기로 기약하였으니,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닦지 않는다면 아마도 치욕을 면하 지 못할 것이다. 어찌 어진 이의 곁에 나아가서 도를 듣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때 원광법사(圓光法師) 가 수(隋)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돌아와 서 가실사(加悉寺)에 있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높이 예우하였다. 귀 산 등이 [그] 문하에 이르러 옷자락을 걷어 잡고 나아가 말하기를, “[저희들] 세속 선비는 미련하여 아는 것이 없습니다. 원컨대 한 말 씀을 주셔서 종신토록 지킬 교훈을 삼도록 하여 주십시오.” 라고 하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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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정신 세속오계의 성립>2

원광법사가,

“불계(佛戒)에는 보살계(菩薩戒)가 있는데, 그 종목이 열 가지이다.

너희들이 남의 신하로서는 아마도 이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지 금 세속오계(世俗五戒)註 132가 있으니, 첫째는 임금 섬기기를 충(

忠)으로써 하고, 둘째는 어버이 섬기기를 효(孝)로써 하며, 셋째는 친구 사귀기를 신(信)으로써 하고, 넷째는 전쟁에 나가서는 물러서 지 말며, 다섯째는 생명있는 것을 죽이되 가려서 할 것이다. 너희들 은 이것을 실행함에 소홀히 하지 말라!”고 말하였다.

귀산 등이, “다른 것은 이미 명을 받은 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나)이 른바 살생유택(殺生有擇)만은 잘 알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 원광법사가

“육재일(六齋日)과 봄철과 여름철에는 살생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때를 가리는 것이다. 부리는 가축을 죽여서는 아니 되니, 말·

소·닭·개를 말한다. 작은 동물은 죽이지 않는 것이니, 고기가 한 점 도 되지 못하는 것을 말함이다. 이것은 물건을 가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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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정신 세속오계의 성립>3

이와 같이 하면 오직 그 쓰이는 바, 많이 죽이는 것을 구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세속(世俗)의 좋은 계율이라고 할 수 있다.” 고 말하 였다.

 귀산 등이,

“지금부터 이후로 받들어 좇아 감히 [명을] 떨어뜨리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 진평왕(眞平王) 건복(建福) 19년 임술(壬戌, 602) 가을 8월에 백제가 크게 군사를 일으켰다. 아막성(阿莫城)을 포위하였다. [진평]왕이 장 군 파진간(波珍干) 건품(乾品)·무리굴(武梨屈)·이리벌(伊梨伐), 급간(

級干)무은(武殷)·비리야(比梨耶) 등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그 것을 막게 하였다. 귀산과 추항은 함께 소감(少監)으로 나갔다.

백제가 패하여 천산(泉山)의 못가로 물러가 군대를 숨기고 신라군 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군사가 진격하다가 힘이 다하여 이끌고 돌아왔다. 그때 무은이 후군이 되어 군대의 맨 뒤에 섰는데, 복병이 갑자기 나와 갈고리로 무은을 떨어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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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정신 세속오계의 성립>4

 귀산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들었는데, 스승이 ‘선비는 군대를 맞아 물러서지 않는 다.’고 하였다. 어찌 감히 패배하여 달아나겠는가!” 라고 하였다. 적 수십 인을 쳐 죽이고 자기 말로 아버지를 보내고 추항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웠다. 모든 군사가 그것을 보고 분발하여 [적을] 쳤 다.

넘어진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였고 한 필의 말, 한 채의 수레도 돌아 간 것이 없었다. 귀산 등도 온 몸에 칼을 맞고 돌아오는 중에 죽었 다.

 [진평]왕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아나(阿那)의 들판에서 맞이하여 시 체 앞에 이르러 통곡하고 예(禮)로써 장례를 치르게 하였다.

귀산에게는 나마(奈麻)관등을, 추항에게는 대사(大舍)관등을 추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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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법사, 화랑 귀산 추항에 관한 에피소드 1

(이하의 내용은 『진주소씨대동보』「귀산공 유사」 를 참조한 것이다) “공(귀산)은 화랑(花郞)으로서 혼탁(混濁)하고 어지러운 현실(現實)

을 걱정하고 인간(人間)으로서 정신적 지표(精神的指標)를 삼기 위 하여 평소 교분이 두터운 낭도 추항(郞徒項)과 함께 ‘우리들이 사군 자(士君子)와 교류(交流)하려면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고 몸을 잘닦 지 않는다면 반드시 치욕(恥辱)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현자 를 찾아가서 올바른 도리를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상의하고 진흥왕(眞興王) 三年에 출생하여 중국(당시 陳나라 隋나라)에서 불

경연구와 자신이 통달한 불교(佛敎)의 대가(大家) 원광법사(圓光法 師)를 찾아가 계명(戒名)을 받기로 하고 마침 가실사(嘉悉寺)에서 면 벽수도(面壁修道)중인 원광법사를 찾아갔으나 문전에서 거절당하 자 두 낭도(郞徒)는 문밖 뜰에 꿇어앉아 교훈(敎訓)받기를 간청(懇請 )하던 중 폭설이 내리어 가슴을 덮고 혹한(酷寒)이 몰아쳤을 때 공 은 손가락을 절단하여 법사에게 드리도록 하였으며 단지한 손에서 나온 피가 눈을 적설(赤雪)로 물들이자 원광법사(圓光法師)는 비로 소 이들을 맞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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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법사, 화랑 귀산 추항에 관한 에피소드 2

원광법사(圓光法師)는 ‘그대들은 누구인가? 승려(僧侶)인가?’ 라고 물 었다. 낭도(郞徒)들은“아닙니다. 저희들은 낭도(郞徒)들입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러면 그대들은 무엇 때문에 이곳을 찾아왔는가? 이곳 은 그대들 낭도(郞徒)들이 무예를 닦는 도장(道場)이 아니지 않는가

?’하고 법사는 불법(佛法)을 배우고 도(道)를 닦아 돈오(頓悟)의 경지 (境地)를 찾는 불도(佛徒)가 아니고 화랑도(花郞徒)임에 더욱 의아해 하였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손가락을 잘라 피로 물들였단 말인가?’하고 묻자 공(公)은, ‘일찍이 달마대사(達磨大師)께서 소림사에 가서 구 년간 면벽수도(面壁修道) 하실 때 신광(神光)이 찾아와 법(法)을 청원(請 願)하였으나 아직 때가 이르다고 만나주지를 않아 문밖에서 기다리 고 있을 때 폭설과 한파가 닥쳐오자 신광(神光)은 팔을 잘라 자신의 결의를 표명하였으니 이를 불가(佛家)에서는 단지적설(斷指赤雪)이 라고 이르고 있습니다. 법사(法師)께옵서 저희들의 친견(親見)을 불 허하였던 것은 바로 저희들에게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생각하 였기에 그러하신 것으로 알고 어깨를 벨 수 없어 손가락만을 잘랐 습니다.’하고 대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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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광법사, 화랑 귀산 추항에 관한 에피소드 2

법사(法師)는 다시 ‘그러면 어깨를 벨 것이지 어찌하여 손가락만을 베었단 말인가?’하고 묻자 ‘법사(法師)님을 뵈올 수 있다면 어깨뿐 아니라 팔과 다리도 다 벨 수 있습니다.

다만 손가락만을 벨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저희들은 화랑의 무사로서 앞으로 있을 국난을 맞이하여 싸움터에 나아가 국가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치기 위해서는 팔과 다리가 온전하여야하기 때문입니다.

손가락은 없어도 칼과 활은 사용할 수 있는 고로 손가락만을 자른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공과 추항이 법사(法師) 앞에 부복 사례(俯伏謝禮)하고, ‘속(俗)된 저 희들은 어리석고 아는 바 없사오니 원(願)컨대 한 말씀 가르침을 주 시면 죽을 때까지 계명으로 삼고 잘 지키겠습니다.’라고 간절(懇切) 한 소망(所望)을 말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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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츠마 헤고니세와 신라 화랑도의 비교 1

1. 사츠마 헤고니세와 이로하우타(いろは歌)

1539년은 시마즈 다다요시(島津忠良)가 사츠마 三州 통일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해이다. 그러한 상황 아래에서 영내의 결속과 盡忠報國, 勇壯義烈의 병 사 양성은 다다요시에게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1539년 1월 1일 시마즈 다 다요시와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는 ‘忠孝第一’, ‘武經七書의 이수’, ‘무예 단련’, ‘학문장려’ 등을 중심으로 영내의 무사로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 지켜야 할 규정을 정하였다.

이른바 ‘닛신 다카히사코우 렌반노 오키테(日新 貴久公連判の掟’가 이것이다.

시마즈 다다요시는 유소년시절에 眞言宗 海藏院의 교육을 받아 佛法에 대한 신념이 매우 견고하였다. 장년에 이르러서는 게이안 겐주(桂庵玄樹)의 高弟인 순전(舜田)과 순전의 제자인 순유(舜有)에게 유학을 배워 학문의 경 지도 높았다. 그러나 당시 영내의 백성은 물론, 다수의 하급 무사들도 또한 문맹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교화하기 위한 귀중한 책이었던 學‧庸‧論‧孟를 보급시키는 일도 어려웠고,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의 선종을 서민들 에게 널리 포교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시마즈 다다요시는 통독 하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고 藩의 자제교육의 지침이 되는 교재로서 ‘이로하 우타’를 만들었다. 이후 ‘이로하우타’는 에도(江戶) 막부 말기까지 사츠마 무 사들의 聖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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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츠마 헤고니세와 신라 화랑도의 비교 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후방 방위를 명령받은 니이로 다다모토(新納忠元 )는 장기간의 조선출병 상태로 긴장감이 없어지기 시작한 잔류부대의 기강 을 다시 세우기 위해 1596년 정월에 청소년들의 조직을 결성하고 이를 “니 사이 하나시(二才咄)”라고 명명하였다. 여기에서 ‘무예수련’, ‘신체단련’, ‘충 효의 도’, ‘예의’ 등 청소년들의 마음가짐과 훈련 내용을 제시하게 되는데, 이 것이 사츠마 헤고니세의 기원이 된다.

가고시마의 이즈미(出水) 지방은 히고(肥後)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 예로부터 북방 경비의 중책을 담당해왔기 때문에 사츠마 번 내에서도 특히 헤고니세 가 발달하게 되었다. 1629년 야마다 쇼겐(山田昌巖)은 이즈미 지토(地頭)로 취임하자마자 오인조(五人組)제도를 육조(六組)제도로 변경해 명령전달의 신속화를 꾀하는 등 국경 경비에 필요한 조직 확립에 진력하였다.

1637년 시마바라(島原)의 亂이 발발하자 에도 막부는 사츠마 번에 팔천여 명의 병사 파견을 명령했다. 시마바라 출진을 명받은 야마다 쇼겐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美少年이었던 13세의 아들 마츠노스케(松之介)를 아름답게 軍 시겨 이즈미 국경경비의 대장으로 出陣시켰다. 아름답게 傳紛粧飾한 마츠 노스케가 선두에서 말을 몰아 달려가면 젊은 무사들은 마추노스케 앞에서 전사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하며 용감하게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즈미 니사이슈(二才衆)는 미목이 수려한 미소년 을 대장으로 하여 무예단련과 체력단련에 노력했다. 이 미소년을 이즈미 헤 고니세의 ‘토리모치치고(執持兒)’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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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츠마 헤고니세와 신라 화랑도의 비교 3

2. 신라 화랑도와 “世俗五戒”

 북쪽으로는 태백산맥과 서쪽으로는 소백산맥으로 차단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伽倻 의 각국에 막혀있어 중국과의 접촉이 쉽지 않았던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비교하여 150년 정도 국가 체제의 정비가 뒤쳐져 있었다. 신라는 끊임없이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을 받고 있 었기에, 자국의 부국강병은 중요한 과제였었다. 法興王은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남해안으로 진출을 도모하여 532년에 김해의 金官伽倻를 병합하여 낙동강 유역을 제압하였다. 나아가서 眞興王 때인 562년에는 大伽倻 聯盟을 붕괴시키고 한반도 남해안의 동쪽 절반을 自國領으로 하였다. 그 결과 낙동강 유역의 농업, 가야의 철, 남해안의 해산물 등을 차지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염원하던 중국 과의 왕래 루트도 확보하게 되었다.

 신라는 우수한 인재와 진충보국‧용장의열의 병사 확보가 더욱 중요 한 과제로 대두 되었다. 신라는 중앙관직인 京位와 지방관직인 外 位, 軍官 등 모든 인사가 엄격한 골품제도에 의해 행해졌기 때문에, 인재의 등용이 곤란했었다. 그래서 진흥왕은 576년 용모가 수려한 귀족자제를 선발하여 아름답게 치장하여 ‘花郞’이라 명명하고 花郞 徒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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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츠마 헤고니세와 신라 화랑도의 비교 4

3. 사츠마 헤고니세와 신라 화라도의 유사성의 의미

시간상으로 천년, 거리로는 오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사츠마와 신라에 이처 럼 유사한 인재 육성의 戰士養成 기관이 존재하였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유사한 사회 환경이 만들어낸 필연일 것인가. 아니면 시간과 공간 을 뛰어넘어 신라로부터 사츠마에 전래된 것인가. 후자라고 한다면 신라의 화랑 도에 관한 사료는 『三國史記』, 『三國遺事』, 『東國通鑑』으로 한정되어 있는 까닭 에 이들 사료 중의 어느 것이 1637년의 시마바라의 난 이전에 일본에 전래되었고 그것이 사츠마에 영향을 주었다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한반도 문화가 사 츠마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으로서는 두 개의 루트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조선 과 일본의 무역 특히 사츠마와 조선의 무역이고 다른 하나는 임진왜란‧정유재란 이다.

(1)日鮮무역 및 薩鮮무역

조선 왕조 초기의『태조실록』, 『태종실록』, 『세종실록』 등을 보면 사츠마 三州의 호족이었던 시마즈(島津) 씨, 이쥬우인(伊集院) 씨 이치키(市來) 씨 등의 이름이 조 공무역의 당사자로 기록되어 있다. 시마즈 씨는 보츠(坊津), 이쥬우인 씨는 사츠마 서북부에 거점을 두고 사츠마의 특산물이었던 화약의 원료인 유황과 동남아시아 산의 적색 원료인 蘇木을 주요수출품으로 하여 조선 왕조와의 조공무역을 행하였 다. 조선 왕조로부터는 면포를 수입하여 국력 확보의 수입원으로 하였다. 이러한 조공무역의 왕래 가운데 한반도의 문화 이를테면 화랑도 관련의 세권의 책도 사 츠마 산슈에 전래되었을 가능성은 부정할 수는 없으나 그 확증을 발견할 수 없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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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츠마 헤고니세와 신라 화랑도의 비교 5

(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592년에 시작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은 명나라도 말려들게 한 큰 전쟁이었다. 임진왜란 때의 시마즈군은 우매키타 봉기(梅北蜂起)에서 보이 듯이 내정이 통일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다른 토요토미군보다 한 달도 더 늦 게 참전하여, 큰 전투 없이 강원도 춘천과 김화에 주둔했을 뿐이다. 전쟁 상황은 명의 참전으로 분위기가 전화되어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평양을 탈환하고 남하하 기 시작하면서 도요토미군의 패색이 짙어져 갔다. 때문에 도요토미군은 급히 화 친교섭을 행하여 한반도 남해안까지 퇴각하고는 해안선을 따라서 矮城을 건설하 여 방어 체제를 강화했다. 이 무렵부터 시마즈군의 동향도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특히 泗川 주둔시기의 시마즈 군의 약탈 모습은 『亂中雜錄』에서 ‘사천의 도적’이 라고 칭할 정도로 극심하였다.

토요토미군은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의 수군에 해상권을 빼앗겼으나 이순신이 권력분쟁에 휘말려 백의종군하게 된 정유재란 때에는 첫 전투에서 조선 수군에 큰 타격을 가하고 모든 해상권을 제압하여 일본과의 왕래도 안전하게 되었다. 시 마즈군도 그 덕분에 사츠마와의 왕래가 활발하여 많은 조선인 피랍인을 사츠마에 연행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金海, 朴平意, 沈當吉 등의 陶工도 포함되어 있어 사츠 마 도자기의 원조가 되었다. 또 약탈품 안에는 시마즈 타다츠네(島津忠恒)가 조선 에서 빼앗아 온 서적 603권이 있었다는 것도 『漢學紀源』御書物入日記에 기재되 어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지만 화랑도 관련의 세권의 책 이름은 목록 가운데 보이 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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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츠마 헤고니세와 신라 화랑도의 비교 6

4. 화랑도 정신의 변천

(1) 한반도에서의 화랑도 정신의 변천

원래 신라의 화랑도에 관한 것은 704년경에 金大問이 저술한 『花郞世紀』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그 후 1145년 金富軾 등이 조선최고의 正史인 『三國史記』

를 편찬했다. 그 가운데 『화랑세기』를 참고로 한 화랑과 화랑도의 기원, 열전, 설 화 등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1260년 李仁老가 간행한 『破閑集』에는 ‘화랑도 무리 들 가운데서 우수한 인재를 등용한 이야기’와 ‘화랑과 그를 따르는 무리가 산천 유람을 통하여 신체단련과 협동심을 기르는 노력을 한 이야기’ 등이 수록되어 있 다. 13세기 말에 一然이 편집한 『三國遺事』에는 화랑을 미륵 신앙과 관련시켜 불 교적 색채가 농후한 설화가 많이 기재되어 있다. 1394년의 『삼국사기』 간행으로 부터 250년을 경과하여 판목 복각의 牒文이 내려져 金居斗 등이 『삼국사기』慶州 本을 복각하였다. 시대가 흘러 1485년에 『삼국사기』에 쓰여 있는 내용을 삼국과 동일한 편년체로 편집한 『東國通鑑』이 徐居正 등에 의해서 간행되었다. 화랑도 관련 내용도 당연히 그대로 계승하여 기재되어 있다. 1512년에는 조선 왕조의 정 사 계승의 필요성에 따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李繼福 등에 의해 복각되었 다. 이것이 소위 正德本이다. 한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후의 1633년에는 李晬 光의 『芝峰類說』이 간행 되었는데, ‘新羅 加恩의 法’이나 ‘四仙의 설화’ 등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볼 때 이수광도 『동국통감』과 『파한집』을 참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로 시작된 신라의 화랑도 정 신은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는지 아닌지에 관계없이 정사 계승이라고 하는 대의명분 안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이후에도 여전히 한반도에서 연면히 계승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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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츠마 헤고니세와 신라 화랑도의 비교 7

(2) 일본에서의 화랑도 정신의 계승

화랑도 정신의 일본에의 전래는 『大日本史』 편찬의 자료로서 『동국통감』을 찾고 있던 도쿠가와 미츠쿠니(德川光圀)가 이것을 시중에서 우연히 입수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도쿠가와 미쓰쿠니는 이 稀世의 珍本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1666년 하야시 가호(林鵞峯)에게 서문을 의뢰하고 미토(水戶) 번의 유학자 츠지 료태키(

辻了的)에게 訓點을 붙이도록 한 후, 1667년 교토의 쇼하쿠도(松柏堂)로부터 和刻 本『東國通鑑』을 출판하였다. 1667년의 이 출판이 『동국통감』 즉 ‘화랑도정신’이 일본 전국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된다.

그러나 이즈미(出水) 헤고니세의 토리모치치고(執持兒)의 출발은 시마바라의 난 이 있었던 1637년으로서, 화각본『동국통감』출판으로부터 30년 이상의 시대를 거 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林羅山文集』에 『동국통감』과 『동문선』에 의거하여 일본 관계 사항을 뽑아 쓴

『朝鮮考』라고 하는 책이 1657년 메이레키(明曆)의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하는 기 재가 보인다. 『朝鮮考』의 완성 시기와 『동국통감』의 입수 경로는 불분명하지만, 이것으로 볼 때 1657년 이전에 하야시 라잔이 이미 『동국통감』을 읽고 있던 것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1643년 제5회 조선 통신사의 방일 때, 하야시 라잔의 아들인 하야시 가호는 朴 安期 에게 “자신이 젊었을 때 『동국통감』이 일본에 있다고 들었다. 조선에도 있는 것인가” 라고 그 존부를 확인하고 있다. 하야시 가(林家)는 『동국통감』을 소장하 고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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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츠마 헤고니세와 신라 화랑도의 비교 8

 1636년 제 4회 조선 통신사 방일 때, 하야시 라잔은 ‘檀君의 수명이 천여 년인 이유’ 와 ‘기자조선 때에 따라온 사람들의 수가 오천 명이 었다고 하는 근거’에 관하여 질문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는 『 동국통감』에만 쓰여 있는 사항임을 고려한다면, 1636년 즉 시마바 라의 난의 1년 전에 하야시 라잔은 이미 『동국통감』의 내용을 숙지 하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하야시 라잔은 1608년에 도쿠가와 이에야 스(德川家康)의 초빙으로 슨푸(駿府)에 있었고 1616년 이에야스가 사망할 때까지 8년간 스루가 문고(駿河文庫)를 관리하였다.

 하야시 라잔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出仕하기 이전에 이미 『동국통 감』을 숙지하고 있었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슨푸 문고(駿府文庫) 에 있던 『동문선』을 읽고 『朝鮮考』를 저술했던 것이다.

하야시 라잔은 1608년 이전에 이미 화랑도 정신을 숙지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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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츠마 헤고니세와 신라 화랑도의 비교 9

(3)화랑도 정신의 하야시 라잔으로부터 사츠마 번으로의 전래

다음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하야시 라잔과 사츠마 번과의 관계이다.

화랑도 정신은 어떤 통로로 하야시 라잔으로부터 사츠마 번까지 전해졌 는가 하는 문제이다.

 실은 사츠마 번의 에도가로 (江戶家老)였던 이세 사다마사 (伊勢貞 昌)는 하야시 라잔의 제자였다. 하야시 라잔과 이세 사다마사의 교 우 관계는 1627년의 連句會로부터 시작되어 1641년 이세 사다마사 가 사망할 때까지 『林羅山詩集』, 『林羅山文集』 『年譜』, 『行狀』 등 의 사료에 이세 사다마사의 이름이 도처에 등장한다.

 예를 들면 『林羅山詩集』에서는 이세 사다마사에 대하여 “사츠마 번 의 가로(家老)이며 에도에 근무하고 있다. 그는 라잔과 친분이 두터 웠고 라잔의 강의에는 항상 참석하며 라잔이 주최하는 聯句會에도 늘 참석한다”고 소개되어 있다. 또 하야시 라잔의 장남이 1629년에 사망했을 때, 이세 사다마사가 하야시 라잔에게 보낸 弔文에 대하 여 하야시 라잔은 자신의 깊은 슬픔과 이세 사다마사의 후의에 감 사를 담은 답장과 한시를 보내고 있다. 이와 같이 두 사람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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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츠마 헤고니세와 신라 화랑도의 비교 10

 많은 다이묘(大名)와 그들 가신 그리고 하타모토(旗本)을 제자로 두 었던 하야시 라잔은 자신이 숙지하고 있던 신라의 무사도인 화랑도 정신과 구체적 설화를 평상시의 교제나 강의, 詩會를 통해서 기회 에 있을 때마다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지도했을 것이다.

 1637년 시마바라의 난이 발발했을 때 이즈미(出水) 지토(地頭)였던 야마다 슈겐(山田昌巖)은 시마바라 출진 전에 자신의 아들인 마츠 노스케(松之介)를 대장으로 하는 국경 경비대를 국경에 파견했다.

 이때 마츠노스케는 약관 13세로 보기 드문 미소년이었다. 아름답게 치장한 마츠노스케가 선두에서 말을 타고 출진하면 헤고니세의 젊 은 무사들은 마츠노스케의 면전에서 전사한다면 이 세상에 미련을 남길 것도 없다고 하며 용감하게 뒤를 따랐다.

 이 마츠노스케의 용감한 자태야말로 아득히 먼 신라에서 탄생한 화랑도가 천년의 시공간을 넘어 일본의 사츠마에까지 전해진 모습 이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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