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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낙동강변의 병산서원에서 기치기나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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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ademic year: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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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옛길 걷기 33

신정일 | 문화사학자,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새로 쓰는 택리지」 저자(hwang-sji@hanmail.net)

안동 낙동강변의 병산서원에서 기치기나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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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이 피고 또 질 때면 그날이 또 다시 생각나 못 견디겠네.” 노래 가 사가 토막토막 끊어진 채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는 곳이 낙동강을 따라 병 산서원(屛山書院)으로 가는 길이다. 5월의 어느 날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 에 접어들어 낙동강을 따라가 보면 알게 될 것이다. 넓은 평야로 이름이 높은 풍산 벌판을 가로질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태어난 하회(河 回)마을로 가는 길은 포장도로다. 그러나 서애 유성룡을 모신 서원이 있 는 병산서원 쪽으로 접어드는 순간 차 한 대도 비켜가기 힘든 비좁은 비 포장도로가 영화처럼 나타난다.

길은 산모퉁이를 휘돌아가고 그 산 아래로 낙동강이 흐른다. 관광객 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하회마을이나 도산서원(陶山書院)으로 가는 길과 는 판이하게 다른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목에는 어느 곳이든 배낭을 내려 놓으면 나도 꽃이 된 착각에 빠져들 것이다. 길섶마다 장미가 피어나는 5월이면 눈부시게 흰 찔레꽃들이 피어 있을 것이고, 스쳐 지나가는 바람 결에 찔레꽃 향내가 가슴 깊은 곳을 후벼낼 것이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 쪽나라 내 고향”이라는 한 대중가요의 노랫말 때문에 대다수 사람들이 붉 은 꽃이라고 착각하는 찔레꽃 향기가 낙동강 물을 휘감아 돌고서 가슴 속 으로 밀려오는 사이 병산서원 앞에 도착할 것이다.

도처에 서원을 건립했던 영남학파의 거봉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서 원은 성균관이나 향교와 달리 산천 경계가 수려하고 한적한 곳에 있어 환 경의 유독에서 벗어날 수 있고 그만큼 교육적 성과가 크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래서 모든 서원은 경치가 좋거나 한적한 곳에 자리 잡았는데 병 산서원만큼 그 말에 합당한 서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과 함께 퇴계의 양대 제자 중 한 사람인 서애 유성룡과 그의 아들 유전을 모신 병산서원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병 산길에 있다. 낙동강의 물도리가 크게 S자를 그리며 하회 쪽으로 감싸고 돌아가는 위치에 자리 잡은 병산서원의 만대루(晩對褸)에 오르면, 넓게 펼쳐진 누각의 기둥 사이로 조선 소나무들이 강을 따라 가지를 늘어뜨리 고 흐르는 강물 건너에 우뚝 선 병산이 보인다.

“이제 병산서원을 우리나라 내로라하는 다른 서원과 비교해보면 소수 서원(紹修書院)과 도산서원은 그 구조가 복잡하여 명쾌하지 못하며, 회재 신정일 | 문화사학자,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 「새로 쓰는 택리지」 저자(hwang-sji@hanmail.net)

병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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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晦齋) 이언적(李彦迪)의 안강 옥산서원(玉山書院)은 계류에 앉은 자리는 빼어나나 서원의 터가 좁아 공간 운영에 활기가 없고,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덕천서원(德川書院)은 지리산 덕천강의 깊고 호쾌한 기상이 서렸지만 건물 배치 간격이 넓어 허전한 데가 있으며,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의 현풍 도동서원(道 東書院)은 공간 배치와 스케일은 탁월하나 누마루의 건축적 운용이 병산서원에 미치지 못한다는 흠이 있 다. 이에 비하여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혼연히 하나가 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 현된 것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 건축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유홍준 선생의 말이다. 병산서원에 모셔진 서애 유성룡은 누구인가?

유성룡(1542~1607)은 본관이 풍산이고, 자는 이견이며, 호는 서애로 관찰사를 지낸 유중영의 둘째 아 들로 태어났다. 그는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으며, 스물한 살 때 형인 유운룡과 함께 도산으로 퇴계 이황 을 찾아가 “하늘이 내린 인재이니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는 예언과 함께 칭찬을 받았다. 선조는 유성룡을 일컬어 “바라보기만 하여도 저절로 경의가 생긴다”라고 하였고 이항복은 “이 분은 어떤 한 가지 좋은 점만을 꼬집어 말할 수 없다”라고 했으며, 이원익은 “속이려 해도 속일 수가 없다”라고 말하였다.

25세에 문과에 급제한 유성룡은 승정원, 홍문관, 사간원 등 판서를 거쳐 정여립 모반사건 때도 자리를 굳건히 지켰을 뿐만 아니라 동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광국공신의 녹권을 받았고, 1592년에는 영의정의 자리에 올랐다. 정치가로 또는 군사 전략가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그의 학문은 체와 용을 중시한 현실적 인 것이었는데, 파직된 뒤에도 고향에서 저술한 임진왜란의 기록 「징비록」(국보 제132호)과 「서애집」, 「신 종록」, 「영모록」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가 병들어 누워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선조는 궁중의 의원 을 보내어 치료케 하였지만 65세에 생을 마감하였다. 그런데 하회에서 세상을 떠난 유성룡이 집안 살림이 가난해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의 빈집이 있는 서울의 마르 냇가 로 몰려들어 삼베와 돈을 한 푼 두 푼 모아 장례에 보탰다고 한다.

병산서원을 답사한 후 이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또 하나의 행복이 바로 서원에서 낙동강 길을 따라 하 회로 넘어가는 도보 답사 길이다.

「영가지」의 지도에 ‘청천절벽(晴川絶壁: 그토록 맑은 물에 우뚝 솟은 절벽)’이라고 표현된 병산을 바라보 며 걷는 길은 사과 과수원으로 이어진다. 사과 밭에서 길을 찾는 것이 조금 문제다. 용감하게 산속을 비집 고 올라가면 길인 듯 아닌 듯 싶은 길이 이어지고, 그 길이 하회로 가는 산길이 된다. 어쩌다 사람이 지나 갈 것 같은 이 길, 수풀이 우거진 이 길에도 패랭이꽃과 구절초꽃, 쑥부쟁이꽃들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자 랑이라도 하듯 여기저기 피어 있다. 강 건너 마을의 아침 풍경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그렇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다 보면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깎아지른 절벽 위로 희미한 길이 이어지고, 지난 새벽에 내 린 이슬에 신발에서부터 바지까지 흠뻑 젖는다. 어둑어둑한 나무 숲길을 지나자 옛 시절에 닦아둔 신작로 길이 나타난다. 칡넝쿨 우거진 길 옆의 산초나무에 새까만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고, 고갯마루를 넘 어서며 바라본 낙동강은 아침 햇살에 찬연히 빛나고 있다. 숲길을 벗어나자 누렇게 익어 가는 황금들판을 끝으로 하회마을이 나타난다. 멀리 부용대(芙蓉臺)가 한눈에 들어오고 논 사이로 난 길을 걸어가자 하회마 을에 이른다.

우리 옛길 걷기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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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은 학가산(鶴駕山)에서 갈라져 와서 강가에 자리 잡았는데, 모두 석벽이며 돌 빛이 온화하면서 수려하며 조금도 험한 모양 이 전혀 없다. 그 위에 옥연정과 작은 암자가 바위 사이에 점점 이 잇달았고, 소나무와 전나무로 덮여서 참으로 절경이다”라고

「택리지」에 실려 있는 하회의 황강이 곧 낙동강이고 그 일대가 부용대다.

안동 하회마을은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에 있는 지 정 민속마을로, 중요민속자료 1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마을 은 조선 전기 이후 전통적 가옥군의 존재와 영남의 명기(名基)라 는 풍수적 경관과 아울러 역사적 배경, 별신굿과 같은 고려시대 의 맥을 이은 민간전승 등이 현대 공업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위 치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그 전통적 경관과 함께 정신문화의 보 존·발전이라는 차원에서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하회마 을은 풍산(豐山) 유씨(柳氏)의 집성촌이다. 그 터전은 낙동강의 넓은 강류가 마을 전체를 동·남·서 방향으로 감싸 도는 명당 자리라고 하며, 지형은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 라고 한다. 이 마을을 감싸고 도는 낙동강을 이 지역에서는 화천 (花川)이라고 부르는데, 퇴적된 넓은 모래밭이 펼쳐지고, 그 서 북쪽에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들어서 있어 경관이 아름답다. 백 사장이 펼쳐진 강 건너에는 층암절벽이 펼쳐지고, 그 위에 여러 누정이 자리 잡고 있어 승경(勝景)으로서의 면모도 잘 갖추고 있 다. 아름답기로 소문난 부용대의 절벽과 옥연정(玉淵亭), 화천 서당이 있으며, 서북쪽에서 강물이 돌아나가는 부근에는 겸암 정(謙菴亭)과 상봉정(翔鳳亭)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 하회 부근 에서 낙동강의 최대 넓이는 대략 300m이며, 최대 수심은 5m에 이른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속마을인 경주 양동마을과 함께 유네 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인 하회마을은 근간에 변해도 너무 변 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가기 전부터 상업화 바람 에 밀려 예스러움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불이 나도 두루마기

충효당(서애 유성룡의 옛집)

하회마을

병산서원 하회마을

겸암정 부용대

옥연정 화천서원

하회동 탈박물관

낙동강 화산 저우리

구담리

나룻배 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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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입고서야 밖으로 나갔다는 하회양반도, 일만 알고 한평생을 살았던 아랫사람들도 사라진 지 오래다.

하회마을 답사를 끝내고 낙동강 건너에 있는 부용대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풍천면 일대를 돌아가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나룻배를 타고 곧장 건너는 방법인데, 두 가지 중 가장 쉽 고도 운치 있는 방법은 나룻배를 타고 가는 방법이다. 그런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룻배 뱃사공을 2급 정기관사 자격증 취득자에 한한다고 하는 바람에 나룻배가 사라졌었다. 그런 연유로 하회를 제대로 바라 볼 수 있는 장소인 부용대를 가본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영국 여왕도 결국 하회마을만 보았지 부용대에 서 물이 휘돌아가는 장관을 제대로 보지는 못한 것이다. “하회별신굿을 보지 못하면 죽어서도 좋은 곳에 가지 못한다”라는 말이 있는 별신굿과 함께 이름난 것이 이곳 부용대 밑의 시회(詩會)와 강상유화(江上流 花)의 줄불놀이다. 이 놀이는 하회별신굿과 함께 이 고장의 오랜 민간전승놀이다.

부용대는 저우리 동쪽 낙동강가에 있는 대로서, 높이가 60m가 넘는 기이한 바위가 깎아지른 듯 병풍 같이 서 있고, 그 밑에 달관대(達觀臺), 운송대(雲松臺), 형제암이란 이름의 기이한 바위가 서 있다. 그 사 이 사이에 여러 종류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으며, 서쪽 기슭에 겸암정(謙岩亭), 봉상정(鳳翔亭), 동쪽 기슭에 옥연정사(玉淵精舍)가 있다.

낙동강이 이곳에 이르러 옥 같이 맑은 못을 이루었다는 뜻을 따서 이름 지은 옥연서당(玉淵書堂)에서 유성룡이 「징비록」을 비롯 「신종록」, 「영모록」 등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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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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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로 건너가는 광덕나루는 텅 비어 있다. 제방둑 길에 늘어선 갈대들은 미세한 바람에 서걱거리고 어느새 하늘엔 하얀 구름들이 떠다닌다.

강 건너 시루봉(169m)은 시루 또는 비파처럼 생겨서 시루봉이라 한다. 강 건너 구담리(九潭里)는 위아 래에 아홉 개의 소가 있어 구담리라고 부른다. 구담리에서 기산리, 신성리로 건너가는 나루가 구담나리였 으며, 안골 앞 배나들마을은 옛날 배가 드나들어 배나들이라 한다. 구담리에는 70만 평 규모의 구담리 습 지가 펼쳐져 있다. 경상남도 창녕의 우포늪이 낙동강에 동떨어진 배후습지인 것과 달리 구담습지는 낙동 강 한가운데 형성된 자연 습지다.

낙동강변에 늘어진 왕버들과 내버들 그리고 버드나무 꽃은 저리도 푸르고, 구담교를 지나며 바라본 낙 동강은 넓고도 넓다.

산의 모양이 치(키)처럼 생겼기 때문에 치미 또는 기산이라 부르는 기산리 섬마을은 온통 비닐하우스와 과수원 일색이다. 제방이 끝나는 지점에 다리가 있을까 생각하였는데 다리는 없고 돌아가야 해서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 신성교를 지난다. 신성교 아래를 흐르는 광산천 물은 거울처럼 맑고, 늘어진 버드나무는 바람에 하늘거린다. 고갯마루를 넘어서자 구담 일대에 낙동 강이 한눈에 들어오고 옛 시절 나루가 있던 기치기나루에 이 른다. 유유히 가고 오는 강물 사이로 안도현 시인의 ‘다시 낙 동강’이라는 시 한 편이 흐른다.

아우야 / 우리가 흰 모래밭 사금파리 반짝이는 소년이 었을 때 / 앞서거니 뒤서거니 땅으로만 기어 흐르던 낙동 강이 / 오늘은 저무는 경상도 하늘 한 끝을 적시며 흐르 는구나 / 아무도 모를 것이다 정말로 / 강물이 하나의 회 초리라는 것을 / … / 먼 훗날 / 다시 낙동강에 나갈 때 아우야 / 강물이 스스로 깊어진만큼 우리도 / 나이가 부 끄럽지 않고 서글프지 않은 물줄기 이루었을까 / … / 아 우야.

기치기나루로 가는 길의 낙동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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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군위군(軍威郡) 고로면 화북리 화산(華山, 828m) 자락에는 ‘인각사(麟角寺)’가 있다. 절 입구에는 학 암계곡의 맑은 물이 흐르고 깎아지른 듯 거대한 바위절벽 이 병풍을 두른 듯 절경을 이루는데, 정상에 학들이 산다 하여 이 일대를 ‘학소대’라고 한다. 옛 사람들은 이곳 지형 을 기린의 형상에 비유하고, 절의 위치가 기린의 뿔에 해 당한다 해서 ‘인각사’라고 부른다. 사적 제374호인 군위 인 각사지는 신라 선덕여왕 시절에 창건된 것으로, 주 불전인 극락전 앞에는 전형적인 신라양식을 이어받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7호 군위인각사삼층석탑과 석등이 서 있 다. 극락전 옆에는 산령각, 조촐한 요사채, 「삼국유사(三國 遺事)」로 유명한 일연(一然, 1206~1289) 선사의 진영을 봉 안한 국사전, 생애관(기념관) 등이 있다. 일연 선사는 고려 충렬왕 7년(1281년)에 청도군 운문사에서부터 「삼국유사」

를 저술하기 시작하여, 충렬왕 10년(1284년)에 이곳 인각 사로 자리를 옮겨 임종 때까지 5년간 계속 저술하였다. 기 원전 2333년 단군의 고조선 건국 때부터 삼한, 부여, 고구 려, 신라, 백제 등 시대별 역사와 신화, 전설과 민담 등을 기록함으로써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쌍벽을 이 루는 훌륭한 역사서를 저술한 것이다. 일연 선사는 「삼국

유사」 외에도 「어록(語錄)」을 비롯하여 「게송잡저(偈頌雜 著)」, 「중편조동오위(重篇曹洞五位)」, 「조파도(祖波圖)」, 「제 승법수(諸乘法數)」,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조정사원 (祖庭事苑)」, 「선문염송(禪門念頌)」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오랜 역사 못지않게 소박하고 다소곳한 인각사 경내에는 일연의 행적을 기록한 보각국사비와 부도인 정조지탑이 남아 있는데, 1965년에 보물 제428호로 지정되었다. 비는 고려 충렬왕 21년(1295년)에 조성된 것으로, 점판암에 중 국의 명필 왕희지체를 집자하여 새겼으며, 일제강점기 이 후 무리한 탁본으로 심각하게 손상되고 마모된 상태다. 또 한 정조지탑은 팔각탑신석으로, 오랜 세월 동안 모진 풍상 을 겪으며 비석조각을 갈아 마시면 과거에 급제한다는 뜬 소문으로 많이 훼손되고 닳았으나 아직은 당당한 모습이 다. 이 탑 역시 비의 건립시기와 비슷한 것으로 추정한다.

최근 보각국사 일연의 비명과 귀부 등이 인각사 주변에 복 원되었으며, 군위댐 하류에 일연(폭포)공원이 잘 꾸며져 있다. 군위에는 삼존석굴, 지보사 삼층석탑, 양산서원, 장 사진의병장유적, 화산산성 등 유명 문화재와 역사유적이 많다.

박영순│수필가(zooc0929@hanmail.net)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화산 자락에 위치한 인각사(극락전과 삼층석탑) 우리 문화유산의 향기 19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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