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C News, Volume 22, No. 1,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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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순례: Jordan to Israel
❙조 영 민 교수 (경희대학교)
모세와 예수의 흔적을 더듬어 요르단과 이스라엘에 남아있는 聖地들을 巡禮하였다. 별로 감흥도 없고, 神心 도 내재되지 못한 열흘간의 여행이었기에 남겨두지 않기로 했는데, 우리 전망지 편집위원회가 촉박한 시간을 빌미로 보채는 통에 부득불 들춰낼 수밖에 없었다. 엔지니어의 졸필을 하이클래스 공업화학회원들이 과연 눈 길이나 줄까 조마조마하다.
사실 모세(Moses)를 만나기 위해서는 이집트 시나이반도를 거쳐 유대땅으로 진입하는 것이 옳으련만 21세 기가 한참 지난 요즈음도 여전히 불안한 치안으로 국내 관광객들에게 위험지역임을 알리는 경고판이 무서워 (?) 요르단 쪽의 구약에서 신약의 땅인 이스라엘로 진입하는 여정을 선택하였다.
우리 일행은 「인천-두바이-암만-알렌비-사해-갈릴리-예루살렘-베들레헴-쉐펠라-텔아비브-인천」의 경 로를 택하였다. 요르단의 수도인 암만에서는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거대한 페트라 문화유산을 들를 수 있었고, 요르단에서 이스라엘로 진입할 때 통과하는 국경의 삼엄함도 느껴보는 색다름, 갈릴리 바다와 사해 (두 곳 모두 실제로는 넓은 湖水임.)의 럭셔리한 리조트 문화, 나름 성지이고, 유적지여야 할 성경의 명소들이 무슨 소굴처럼 덧칠되어버린 아쉬움... 어쨌든 4천 년 전, 2천 년 전을 떠올리면서 돌아본 성경 속의 여행을 차근차근 풀어보도록 하겠다.
聖經은 이스라엘 민족이 유일신(GOD) 아래 하나가 되어 긴 역사를 이어나가는 과정을 엮은 책이다. 그 작은 나라의 민족사가 어떻게 세계사의 중심축이 될 수 있었는지 의아할 따름이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기독교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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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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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화학 전망, 제22권 제1호, 2019한 보편적인 ‘사랑’이 그 중심 思想이다. 우리가 흔히 일컫는 3대 성인; 예수, 석가, 공자... 그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흠... 나는 이렇게 정의하고 싶다. 言行一致와 實踐躬行 !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내가 과연 언행이 일치하고, 학생들에게 몸소 실천함으로써 교육하고 있는가...
자신이 없다. 아니 어쩌면 이 두 가지를 행하고 있다면 나도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제자들 앞에서 극도로 절제하며, 함부로 말하지 않고, 말과 행동이 일치하였던 분들. 또 제자들에게 말로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진리의 정의(定義)를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소탈함. 낮은 곳으로 임하며, 겸손하고, 지극히 수평적이었 던 인물로 보인다. 예수... JEJUS... 그를 이번 여행 내내 마음에 담아두고 그의 발자취와 함께 해보고자 한다.
요르단은 회교도가 98% 이상이고, 이스라엘은 유대교가 75% 이상이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기독 교나 천주교는 극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스라엘 유대교 신자들은 성경의 모세를 중심으로 한
‘구약’을 신봉하며, 그들만이 신으로부터 선택받았다는 選民思想 속에서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회교는 예수 를 단지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인정하면서, ‘무하마드’라고 하는 선지자가 서 기 580년경 대천사 가브리엘의 예언을 받아 적은 ‘코란’을 기본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한편, 기독교(基督敎)는 christ교의 한자식 발음이며, 유대교에 근본 뿌리를 두고 있다. 이후 서기 330년, 로 마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가 수도를 이전하면서 카톨릭교와 그리스정교로 분파되었고, 1517년 로마 카톨릭교의 면죄부에 대응하는 마틴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다시 개신교가 독립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개신교(改新敎)의 영어명칭은 protestant로서 부패한 교회권력에 저항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어떻게 보면 ‘예수’는 편협된 유대이즘을 비판하며, 병들고 가난한 자들을 포용하는 매우 진보적인 사상을 지닌 랍비(rabbi; 선생님) 가운데 한 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실천하는 양심과 설교는 이스라엘 전역과 그리스, 로마까지 퍼져나갔고, 절대 권력의 정점에 있던 로마 황제들의 박해를 피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국가적 핍박은 풀뿌리 민초들의 저항 을 키우는 반발적 요인이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기독교의 세계적 확장의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교회권력이 비대해진 중세시대의 교황은 제정일치 체제에서의 꼭짓점에 있으면서 교만하고, 도덕적으로 끊 임없이 쇠퇴하여 급기야 면죄부(indulgence) 사태까지 발생하게 되었다. 마침내 루터 신부나 칼빈 학자 등이 새로운 기독교(개신교)를 창시하면서 오늘날의 신교(기독교)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기존의 구교는 천주교라는 명칭으로 구분되고 있다.
이러한 종교역사지역을 탐방할 수 있는 기회에 첫 발을 들여놓은 요르단의 수도 ‘암만’은 깨끗하지만 어딘지 허전한 느낌의 ‘Queen Alia International Airport’에서 시작하였다. 호텔을 찾아가는 동안 시내 곳곳에 장갑 차와 무장한 군인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시민들의 표정도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고, 도로 또한 비산먼지 가 많은 매캐한 공기가 가득하였다. 여기서 한 가지, 확실하지 않지만 요르단은 아랍연맹에서 이탈하여 친서방 정책을 표명하면서 주변 국가들로부터 난민을 적극 유치하면서 국제사회의 원조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국가의 큰 경제적 버팀목이 되고 있다는 說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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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만에서의 첫 번째 관광길은 로마시대 10개 위성도시의 한 곳인 ‘제라쉬’였다. 페트라와 함께 요르단 여행지로서 유명한 유적지이다. BC 330년경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세워진 후, BC 63년 로마의 장군인 폼페이(Pompey)에게 정 복되어 로마제국의 동방거점으로 3세기까지 전성기를 누리며 번성하다가 이후 비잔틴과 페르시아에 정복당하는 등 숱한 외침을 당한 곳이다. AD 8세기 중반, 지진으로 대부분의 석조 건물들이 무너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19세기 말부터 꾸준히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한때 번성하였던 도시라고 하지만 찬찬히 역사와 함께 둘러보니 그저 토 지만 내주고 외부세력들에게 지배받던 지역이지 않았나 한다. 다만, 요르단의 무엇이 그들에게 매력으로 다가왔길래 이곳에 이렇게 준수한 도시를 세웠을까 하는 호기심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나 터키, 이탈리아에 산재되어 있는 숱한 석조 유적지들과 크게 다르지도 않고, 우리 역사가 아닌 다음에야 크게 깊은 관심을 가지기는 힘들었다. ^^그저 마을 언저리에 머물며 처연하게 덩그러니 놓여있는 지나간 역사문화의 유물로서만 보일 뿐이었다.
2월 해질녘인데도 햇살은 꽤 따가웠다. 우리 일행은 사연 많은 제라쉬 고도를 떠나 다시 암만으로 돌아가 시내의 밤 거리를 경험해보기로 하였다. 낮 시간에 지나쳐온 시내도로나 중심상가들의 저녁 모습을 보고 싶었다. 시내 한편에 원 형극장 형태의 석조 건물이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국가 문화재급으로 보존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이동하는 동안 시내 곳곳에서 다양한 석조건축물들을 지나칠 수 있었다.
한편, 번화가로 들어서자 우리네 ‘미세먼지’ 타령이 이곳에서는 작은 투정으로 밖에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매캐한 거리 공해가 찝찝하게 느껴져 마스크를 벗을 수가 없었다. 연평균 강수량이 한국의 8분의 1 밖에 되지 않는 200 mm 정도의 건조한 기후와 수자원 관리가 미흡한 이유로 늘 물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상태이다. 아울러 도심을 운행하는 자동차들은 배기가스 상태로 보아 저급연료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도로를 청소할 여력이 없으므로 비산먼지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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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화학 전망, 제22권 제1호, 2019꽤 높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래도 우리 일행은 길거리 오렌지나 사탕수수 주스를 쪽쪽 빨아 마시면서 이런저런 기념 품 가게들을 둘러보며 번화가를 산책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