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론
세상에 가장 널리 알려진 화가를 한 사람 꼽으라면, 우리나 라를 포함한 세계인들은 당연히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를 후보에 올릴 것이다.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 에>, <밤의 테라스>를 비롯한 수많은 그의 작품들을 우리 주 변에서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모든 사 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빈센트의 예술적 천재성과 더불어, 늦 은 나이에 독학으로 10년간 미친 듯이 작업하여 1000여 점의 작품을 그렸지만, 공식적인 화랑 전시회를 통해 단 1점만 팔
리고 37세에 자살한 그의 극적인 삶이 한 축을 이룬다.
1890년 빈센트 사후, 그의 그림의 예술적 위대함에 대한 가 치평가 상승과 더불어 빈센트-테오 반 고흐(Theo van Gogh, 빈센트의 남동생)와 주고받은 편지 651통이 테오의 미망인 조(Johanna Gezina van Gogh-Bonger, 본명 요한나 반 고흐 본헤르)에 의해 정리되어, 1914년 네덜란드에서 처음으로 세 상에 알려지게 되면서 빈센트가 바라본 세상, 그가 꿈꾼 세 상, 고민, 감정, 일상사, 주변인들과의 관계가 소상히 드러나 게 되었다. 전기 작가는 물론이고 의사 입장에서도 편지란 한 개인의 일상사는 물론이고 신체적 정신적 상태를 알아보는 REVIEW ARTICLE
J Korean
Neuropsychiatr Assoc 2021;60(2):97-119 Print ISSN 1015-4817 Online ISSN 2289-0963 www.jknpa.org
현대 정신의학에서 바라본 반 고흐의 정신세계와 정신질환에 대한 고찰
중앙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건강의학교실,1 다보스병원 정신건강의학과2
이영식1,2
The Review of Vincent van Gogh’s Mental World
and Mental Illness in the Viewpoint of Modern Psychiatry
Young Sik Lee, MD, PhD1,2
1Department of Psychiatry, Chung Ang University Hospital, Seoul, Korea
2Department of Psychiatry, Davos Hospital, Yeongin, Korea
Received November 13, 2019 Revised October 20, 2020 Accepted February 8, 2021 Address for correspondence Young Sik Lee, MD, PhD Department of Psychiatry, Chung-Ang University Hospital, 102 Heukseok-ro, Dongjak-gu, Seoul 06973, Korea
Tel +82-2-6299-1518 Fax +82-2-6298-1508 E-mail [email protected]
Vincent van Gogh committed suicide at age 37 in July 1890. Although 130 years have passed since his death, his tragic mental illness and dramatic life experience, together with his extraordi- nary artistic achievements, have fascinated many people, and many physicians have proposed diagnostic hypotheses and related evidence continuously. The diagnoses of physical illnesses in- cluded temporal lobe epilepsy, Meniere’s disease, acute intermittent porphyria, tertiary syphilis, absinthe abuse, terpenoid/lead poisoning, glaucoma, cataract, and digitalis intoxication. Possible psychiatric diagnoses include 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mood disorder with depressive- manic episodes, and schizophrenia. This article reviews the current information on Vincent’s life, letters, medical records, insight into his disease, testimonies of acquaintances, and other evi- dence and viewpoints on his illness. In summary, Vincent’s premorbid personality showed signs of 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with continuous conflicts with close people. He had long de- pressive episodes followed by hypomania multiple times throughout his life. Temporal lobe epi- lepsy has been raised as the principal diagnosis to explain his periodic memory loss, auditory/vi- sual hallucinations, persecutory/religious delusions, and self-injurious behavior. On the other hand, bipolar disorder and schizoaffective disorder are also recognized as core diagnoses due to the expanding concept of mania and hypomania in the late 20th century. The aggravating factors to his symptoms could have been events provoking separation anxiety from Theo and neurotoxic substance abuse, including absinthe. Vincent’s psychiatric symptoms are difficult to explain with a single diagnosis, but the author suggests schizoaffective disorder, bipolar type, showing the characteristics of bipolar disorder and schizophrenia.
J Korean Neuropsychiatr Assoc 2021;60(2):97-119
KEY WORDS Gogh · Mental illness · Schizoaffective disorder bipolar type.
귀중한 자료가 된다. Blumer1)는 2002년 현재 150명이 넘는 의사들에 의해 30개 정도의 의학적 진단이 제기되었다고 하 였다. 이 중 상당수는 빈센트가 살던 19세기 후반기의 병록지 기록, 진단방법, 치료법이 미진한 상태에서 편지 내용에 나 타난 증상 기술 한두 개, 혹은 빈센트 작품 분석을 통한 색조 기법 분석을 근거로 질병 가설을 제시한 경우도 있어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빈센트의 이탈적 행동은 종종 있었지만, 응급치료를 필요 로 할 정도의 명백한 정신의학적 이상 행동의 출발 시점은 사 망 2년 전 35세인 188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신의 왼쪽 귓 볼을 면도칼로 잘라 창녀에게 건네는 자해 사건이었다. 이는 아를(Arles) 지역신문에 보도될 정도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하였다. 아를병원 당직의 펠릭스 레이(Fe´lix Rey)는 간질 추 정 하에 입원 치료하였고 곧 회복되었으나 재발하였고, 아를 주민들의 민원에 의해 보다 장기적인 입원 치료를 위해 인근 생레미(Saint-Remy) 정신병원으로 1889년 5월 자진 전원하 여 안과 의사 테오필 페이롱(The´ophile Peyro)에 의해 1년간 치료 후, 1890년 5월 파리 근처 동종요법(homeopathy) 전문 가인 폴 가셰(Paul Gachet) 박사에 맡겨졌지만, 그 해 7월 26 일 가슴에 권총 자살을 시도하여 총상을 입은 후 3일간 적극 적 치료를 거부하고 누워있다가 7월 29일 사망하였다.
빈센트 사후 130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돌이켜볼 때 그간 의무기록, 진단방법, 치료기술, 원인 규명에 의한 질병진단 분류 체계의 괄목할만한 발전이 있었다. 이에 발맞추어 외국 정신의학계에서는 반 고흐에 관한 새로운 사실들과 새로운 정신분류학 체계에 입각한 연구들이 유명 정신의학 잡지에 현재까지도 지속해서 보고되고 있다. 국내 정신과 의사에 의 한 반 고흐에 대한 의학적 연구는 1997년 이무석의 <빈센트 반 고흐의 생애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조명>2) 이후 거의 없는 실정이다.
이에 저자는 빈센트가 살던 19세기 당시부터 현재까지 논 의되고 있는 진단에 대한 논쟁점을 보다 종합적이고 체계적 으로 접근하고자 빈센트 성장배경, 가족력, 병전성격, 발병 전 문제행동, 주요 정신병의 발병 및 치료 경과, 병식, 진단평 가, 치료 순으로 살펴보았으며, 예술적 창조성이냐 정신질환 이냐에 대한 논쟁도 간략히 언급하고자 하였다. 아래 글은
‘반 고흐’ 명칭 대신에 그림에 서명한 필명 ‘빈센트’를 사용하 여 기술하였다.
빈센트의 일생 요약
빈센트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려면 우선 그의 일생에 관한 허구가 아닌 사실에 입각한 객관적 정보를 살펴보는 것이 순
서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박홍규의 1999년 저술 <내 친구 빈 센트>,3) 민길호의 2000년 저술 <빈센트 반 고흐, 내영혼의 자 서전>4)을 참조하였으며, 번역서로는 김소운이 2004년 노무라 아쓰시가 저술한 책을 번역한 <고흐, 37년의 고독>,5) 남경태 가 2004년 주디 선드가 저술한 책을 번역한 <고흐>6)를 참조 하였다. 영문판으로는 네덜란드 정신과 의사인 van Meekeren 이 2003년 저술한 <Starry starry night life and psychiatric history of Vincent van Gogh>7)를 참조하였다. 책자 간에 이 견이 있을 시, 정신과 의사가 기술한 영문판을 우선으로 하 였으며 특히 어린시절, 가족, 질병에 관한 내용은 전적으로 영문판을 참조하여 기술하였다.
출생-교육과정기
이름도 빈센트인 형이 사산된 채 태어난 1년 후인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남부 브라반트 지역 그루트 준데르트(Groot Zundert)에서 빈센트는 출생하였다. 당시 준데르트는 인구 4000명 정도의 교통 요충지였으며, 주로 가톨릭 교인들이 대 다수였고, 빈센트의 부친이 목사인 개신교 신도는 약 100명 남짓 하였다.7) 준데르트 초등학교에 다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아버지와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이후 지베 르겐(Zevenbergen) 기숙학교에 부모와 떨어진 박탈감 속에 2년간 교육을 받았고, 이어 틸뷔르흐(Tilburg) 기숙학교로 옮 긴다. 영어, 불어, 독일어 등 어학에 출중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유없이 학업을 중단한 빈센트는 준데르트로 돌아와 학업 으로의 복귀없이 1년간 특별한 일 없이 지냈다.
- 1853/03/30 Born in Zundert, located in the southern part of Netherlands.
- 1857/05/01 Brother Theo was born.
- 1861 Entered Zundert public elementary school.
- 1864/10~1866/08 Entered Zevenbergen private boarding school.
- 1866/09~1868/03 Dropped out of Tilburg boarding school.
정체성 형성기
첫 직장은 파리에 본점을 두고 유럽 여러 나라 여러 도시에 지점을 둔 구필 화랑 헤이그(Hague) 지점(빈센트의 숙부가 설립)의 수습 사원이었다. 1872년 8월은 테오와 668통의 서 신을 교류한 시발점이 되었다. 4년간 헤이그에서의 성실한 근무덕에 런던지점으로 발령이 난다. 산업화된 대도시 런던 은 빈센트에게 빈민, 노동자, 미술관의 명화, 신문 삽화, 동 판화에 눈을 뜨게 한다.
잘 적응하던 빈센트에게 일생의 첫 위기가 찾아온다. 하숙
집 딸 외제니 로예(Eugenie Loyer)에게 일방적으로 청혼을 하였으나, 당시 남자친구가 있던 그녀로부터 거절당하고 우 울증에 빠지게 된다. 여름 휴가 차 네덜란드 집으로 온 빈센 트는 주변 가족이 걱정할 정도로 우울 증상을 보였고, 이를 걱정한 부모는 7월 런던으로 복귀하는 빈센트에게 여동생 안나 코넬리아 반 고흐(Anna Cornelia van Gogh)를 딸려 보 내 한 달간 같이 살게 한다. 하지만 화상으로서의 직분을 망 각하고 점차 종교에 빠지게 되는 빈센트는 파리지점에서 3개 월, 런던지점에서 5개월, 다시 파리지점으로 복귀하였으나, 결국 1876년 3월 직장에서 해고당해 6년 8개월 간의 화상이 라는 직업에 종지부를 찍고 에텐(Etten) 집으로 오게 된다. 이 후 영국 런던 근교 램스게이트(Ramsgate) 기숙학교에서 불 어와 수학 교사를 하였고, 아이슬워시(Isleworth)로 이주하여 사제 토마스 슬레이드 존스(Tomas Slade Jones) 목사의 설교 조수로 일하였으며, 11월 생애 첫 설교를 성공적으로 하고 12월 에텐 집으로 돌아왔으나 향수병에 걸려 영국으로 복귀 하지 않았다. 도르트레히트(Dordrecht)에서 4개월 동안 서점 일을 잠시 하였다. 결국 할아버지, 아버지와 같이 목사가 되려 고 암스테르담의 숙부 요하네스 반 고흐(Johannes van Gogh) 해군 제독, 삼촌 스트리커(Stricker) 목사 후원하에 정식 목사 가 되기 위한 신학 공부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지도선생 멘데 스 다 코스타(Mendes Da Costa)에 의하면 그리스 라틴어 학 습에 어려움을 겪었고, 공부가 안되면 몽둥이로 자신을 구타 하거나 집 밖 찬 바닥에서 맨몸으로 취침하는 신체적 자학 행동을 하였다. 빈센트는 목사 자격증을 따기 위한 쓸데없는 노력, 예를 들면 라틴어 공부에 회의 내지 분노를 느끼고 고 민했던 것 같다. 결국 이를 알아챈 아버지는 자격증이 없어도 목회 활동이 가능한 전도사 길을 알아보았다. 브뤼셀(Brus- sel) 근처 라켄(Laeken)에서 3개월 동안 복음 전도사 교육을 받은 후, 벨기에 남부 탄광 지대인 보리나 주(Borinage)의 전 도사로 일하게 되었다. 갱도가 무너지고 화제가 발생하는 극 한 작업장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광부들과 지나치게 자신 을 동일시하여 그들과 함께 생활하고, 변변한 가재도구조차 없이, 가진 돈은 모두 그들을 위해 쓰며 거의 거지 같은 생활 을 하였다. 결국 전도사의 품위를 훼손한다는 이유로 1879년 7월 해직된다. 8월 빈센트는 130 km 떨어진 브뤼셀까지 걸어 가 과거 보리나주로 보내준 목사를 만나 자신의 그림을 보여 주며 복직을 요청하였는데 종교보다 화가가 되라는 충고를 받는다. 빈센트는 파리에서 온 테오도 만났는데, 너무 변한 형 의 모습에 테오는 놀라 둘이 언쟁을 벌였다. 둘은 1879년 8월 15일 마지막으로 1년간 서신 왕래가 중단된다. 빈센트 아버 지는 아들의 행동이 걱정되어 정신병원 입원도 고려하였다.
빈센트는 해직 후에도 그들을 대변하고 그들을 대상으로 한
그림들을 계속 그렸다. 빈센트는 1880년 1월 농민 화가 쥘 브 르통(Jules Breton)을 만나기 위해 1주일을 걸어갔으나 집만 본 후 만나지 않고 그대로 되돌아 온 적이 있었다. 1880년 7월, 1년 만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보통 사람을 주제 로 한 보통 사람을 위한 예술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 다. 10월 탄광촌을 떠나 화가의 길로 출발하기 전까지 보리나 주의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c¸ois Millet)가 되고자 밀 레 그림을 묘사하였다. 긴 방황 후 27세에 비로소 화가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었고, 죽기 전 10년 간 오로지 화가의 길만 가게 된다.
- 1869/07 Began working in Goupil & Cie, Hague under Tersteeg.
- 1872/08 Began correspondence with Theo.
- 1873/06 Worked in the Hague branch for 4 years. After visiting Paris, he was moved to the London branch.
- 1874/07 Was heartbroken by the landlord’s daughter Eug- enie Loyer and fell into depression.a) Came to the Neth- erland home for the summer vacations. Returned to London with his sister Anna in July.
- 1874/10 Worked in the Paris branch for a while and re- turned to the London branch at December.
- 1875/05 Was moved to the Paris branch. Showed negli- gence of duty and became immersed in religion.
- 1876/03 Was fired from work. Stayed in the Etten home for a while and moved to Ramsgate boarding school to become a teacher.
- 1876/07 Worked as an assistant preacher for Reverend Jones in Isleworth, did his first preaching in November, and returned home to Etten in December.
- 1877/01~04 Worked in a bookshop in Dordrecht.
- 1877/05 Prepared for theology university admission in his uncle Johannes’s home in Amsterdam, but ultimately gave up.
- 1878/08 Received evangelist training in Laken, located near Brussels.
- 1878/12~1879/07 Work as a preacher for Borinage, Bel- gium but was dismisseda) due to conduct unbecoming a preacher.
- 1880/03 Went to home in Etten, but when his father tried to admit him in a psychiatric institute,a) he returned to Cuesmes, Boriange.
a) Precursory of psychiatric illness
- 1880/07 Started correspondence with Theo after a year and began receiving money and started to focus on painting.
- 1880/10 Left the mining village.
네덜란드, 벨기에에서의 화가 수련
빈센트는 본격적 소묘 공부를 하고자 브뤼셀 왕립 회화 아 카데미에 등록한다. 한편 네덜란드 화가 안톤 반 라파르트 (Anton van Rappard)를 따로 만나 그림에 관한 조언도 받고 그의 작업장을 같이 이용하여 그림작업에 몰두한다. 라파르 트가 브뤼셀을 떠나자 빈센트 역시 에텐 부친 집으로 오게 된 다.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묘사하고, 삽질하는 사람 등 주로 농촌 주변의 노동하는 인물 소묘를 많이 그렸다. 그 해 여름 암스테르담에서 신학대학 입시 준비 중 안면이 있었던 사촌 케이 보스 스트리커(Kee Vos-Stricker)를 에텐 집에서 다시 보게 되자 일방적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상대는 아들이 딸린 과부로, 빈센트의 사랑 고백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빈센 트는 테오에게 여러 차례 보낸 편지에 결국은 자기 사랑을 받 아줄 것이라는 스토커 수준의 집착을 보였다. 급기야 가을에 는 암스테르담 스트리커의 집으로 찾아가 만나줄 것을 거부 당하자 등잔불에 손을 들이미는 자해소동을 벌였다. 과거 런 던 하숙집 딸 로예로부터 실연당한 후 우울증에 빠졌던 것과 는 달리, 이번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반항적이고 공격적인 태 도를 보였다. 1881년 크리스마스날 교회 가기를 거부하고 종 교를 비판하며 무신론적 태도로 아버지와 다툰 빈센트는 집 을 나와 매제인 안톤 루돌프 모베(Anton Rudolf Mauve)에게 유화 지도를 받기 위해 헤이그로 떠난다. 1882년 초 클라시나 마리아 호르니크(Clasina Maria Hoornik, 통칭 시엔)라는 3살 연상의 창녀 모델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녀는 이미 5살 난 여자아이가 있고 임신한 상태였다. 급기야 그녀와 결 혼하겠다고 선언한다. 아버지가 빈센트를 법적인 보호조치를 고려 중이라는 소식을 테오로부터 전해 들은 빈센트는, 과거 정신병원에 집어넣겠다는 아버지의 협박을 떠올리며, 이번 에는 나를 지키고자 아버지에게 맞소송을 하겠다고 분노하 였다. 그해 7월 성병(임질)에 걸린 상태에서 시엔과 같이 입 원하여 출산을 돕는다. 시엔을 삶의 역경을 헤쳐나가는 ‘위대 한 여인’으로 간주한 것은, 보리나 주의 빈곤한 광부에게 가 졌던 구원자로서의 자기 삶의 이유와 관계가 있다. 시엔과 동 거 기간 중 그녀와 그녀의 가족을 대상으로 한 많은 스케치를 작업하였으나 결국 생활고 문제로 시엔과 헤어지게 된다. 죄 책감 속에 네덜란드 북부 드렌트(Drenthe)로의 그림 여행은 마을, 농부, 황무지 풍경을 남겼으나 열악한 환경 조건으로 3달 만에 누에넨(Nuenen) 집으로 귀향하게 되었다.
빈센트가 집으로 돌아왔지만 부모와의 관계는 심각했다.
빈센트는 테오에게, 가족들이 자신을 가출하여 떠돌다 돌아 온 미친개 취급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병든 엄마를 헌신적으 로 돌보는 빈센트에게 아버지는 목사관 창고를 아뜨리에로 사용케 하였다. 누에넨에 머문 1883년 12월~1885년 11월 2년 간 280여 점의 소묘, 수채화와 그만큼의 유화를 그렸다. 10살 연상의 섬유공장 딸인 마르호트 베헤만(Margot Begeman)이 빈센트를 연모하였으나 양쪽 집안이 반대하자 베헤만에 의한 음독 소동이 벌어졌다. 1885년 3월 26일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급사하였고, 5월 생애 최초의 대작인 <감자 먹는 사람들>을 완성하였다. 노동의 진실이 묻어 있는 이 그림에 대해 혹평 한 라파르트에게 빈센트는 분노하고 둘은 결별하게 된다. 그 해 9월 <감자 먹는 사람>에 등장하는 마을 처녀가 임신하자 아이의 아버지로 빈센트가 누명을 쓰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마을 여자들은 절대 빈센트의 모델을 하지 말라는 신부의 지시가 내려졌다. 결국 아이의 아버지가 밝혀짐으로써 빈센 트는 누명을 벗게 된다. 도시풍경과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하려는 희망으로 누에넨을 떠나 벨기에 엔트워프(Ant- werp)로 간다. 항구 도시 풍경에 매료되고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지만, 등록 2개월 만에 그만두고 갑자기 테오가 있는 파리로 떠난다.
- 1880/10 Met Rappard in an art academy in Brussels.
- 1881/04/12 Returned to Etten home. Was heartbroken by his cousin Kee vos in the summer. Showed self-injuri- ous behaviora) in autumn.
- 1881/12/24 After conflicting with his father, he left for Hague and began learning watercolor from Anton Mauve.
- 1882/03 Parted ways with Mouvea) due to issues with liv- ing together with the prostitute Sien, hospitalized for gonorrhea treatment in June, Sien’s son was born in July.
- 1883/09/11 Parted with Sien and left for Drenthe. Re- turned to his parent’s home in Nuenen in December.
- 1884/01~02 Painted weavers and farmers, scenery. Had a romantic relationship with Margot (Suicide attempt in August).
- 1885/03/26 Death of his father, Finished <The potato eaters> in May. Parted ways with Rapparda) due to harsh criticism.
- 1885/09 Was falsely accused of impregnating a women who was featured in <The potato eaters>.
- 1885/11/24 Left for Antwerp, Belgium.
a) Precursory events of psychiatric illness
- 1886/01 Quit Antwerp academy after 2 months. Was fas- cinated by Japanese prints.
파리에서의 화가의 삶
1886년 3월 1일 갑자기 파리에 도착한 빈센트는 2년간 테 오와 동거를 시작한다. 줄리앙 프랑수아 탕기(Julien Francois Tanguy) 영감이 주인인 클로젤(Clauzel) 거리의 화구 상점에 서 앙리 드 툴루즈로트렉(Henri de Toulouse-Lautrec), 루이 앙크탱(Louis Anquetin), 에밀 베르나르(Emile Bernard), 존 피터 러셀(John Peter Russell) 등을 만났다. 이들은 코르몽 (Cormon)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4월에 이들과 합류하였지만 넉 달 만에 화실을 떠났다. 여름에는 아돌프 조 세프 토마 몽티셀리(Adolphe Joseph Thomas Monticelli)의 색 다루는 솜씨에 매료되어 꽃 정물화 연작을 그렸다.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과거 금욕적인 수도자 생활에서 과음 과 퇴폐적인 생활로 바뀌어 여러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한다.
인상파 영향을 받아 밝은 화풍으로 변화가 생겼고, 한때 조르 주-피에르 쇠라(Georges-Pierre Seurat), 폴 빅토르 쥘 시냑 (Paul Victor Jules Signac)의 점묘법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러 나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벵(Beng) 화랑에 전시된 일본 그 림이었다. 일본 그림의 영향으로 원근법과 음영이 파괴되고 단순 선명한 평면 처리 색조가 도입되기 시작한다. 베르나르 와 가깝게 지내던 빈센트는 탬버랭이라는 선술집에서 수집 한 일본 판화 전시회를 열었다. 술집의 주인은 이탈리아(It- aly) 출신의 화가 모델이었던 아고스티나 세가토리(Agostina Segatori)로 한때 빈센트와 사귀었다가 헤어졌다. 11월에는 샬레 레스토랑에서 ‘프티 불르바르의 인상파 화가들’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의 작품과 함께 앙크탱, 베르나르, 드 코닝(Arnold Koning), 로트렉 등의 작품을 전시했다. 이 전시 회를 통해 외젠 앙리 폴 고갱(Euge`ne Henri Paul Gauguin), 장 바티스트 아르망 기요맹(Jean Baptiste Armand Guillau- min), 쇠라 등을 알게 되었다. 파리에 온 지 1년 6개월이 지나 자 이 도시에 대해 염증을 느끼게 된 빈센트는 더 많은 빛과 색을 찾아 남프랑스의 아를로 떠났다. 파리에서 빈센트는 자 화상(36점 중 27점이 파리 시절), 정물화, 몽마르트 풍경 등 2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 1886/03/01 Lived together with Theo in Paris for 2 years.
- 1886/04 Met Russell, Lautrec, Bernard at the cormon atelier. Met Monet, Sisley, De Gas, Signac, Seurat, Guil- laumin and Pissarro due to connections with Theo. De- scended into drinking wine, cognac and absinthe.a)
- 1886/06 Painted Paris by pointage.
- 1886/12 Had acquaintance with Gauguin who came from Pont-Avent.
- 1887/01 Painted a portrait of Tanguy. Met Paul Signac.
Collected Japanese prints from Bing’s print store.
- 1887/03 Held a Japanese print exhibition in Segatori’s le Tambourin. Worked in Asnie`res with Bernard.
- 1887/11 Held a back-alley(Petit boulevard) impression- ist exhibition at Restaurant du Chalet with Bernard, An- quetin, Lautrec, Guillaumin and Gauguin.
아를에서의 화가의 삶과 입원치료
남부 화실이라는 화가 공동체를 만들어 경제적 압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그림 작업을 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품은 빈센트는 1888년 2월 20일 눈 덮인 아를에 도착한다. 일본을 동경하던 빈센트는 남프랑스의 밝은 빛과 따뜻한 느낌을 주 는 색에 매혹되어 3~4월 피어나는 꽃들과 나무, 일본 풍경을 연상시키는 과수원 연작 14점을 그렸다. 5월에는 화가 공동 체를 실현하고자 월세 15프랑을 내고 라마르틴(Lamartine) 광장에 있는 방 네 개 딸린 ‘노란 집’의 오른쪽 부분을 빌렸다.
집에 가구가 갖춰지기를 기다리면서 카페 알카자르에서 잠 을 잤고 식사는 기차역에 있는 마담 지누(Ginoux)의 레스토 랑에서 해결하였다. 6월에는 지중해변 생트 마리 드 라메르 (Saint-Maries-de-la-Mer)에 다녀와서 수채화 몇 점을 그렸 다. 6월 말 장마로 인해 밖으로 못 나가게 되자 초상화를 주로 그렸다. 모델은 그간 아를에서 사귄 사람들로 주아브 장교인
‘밀리에 소위’, 12세 일본 소녀 ‘무스메’, 우체부 ‘조셉 룰랭’
등이다. 아를에서 자신을 포함한 23명의 초상화를 46점이나 그렸다. 8월이 되자 빈센트는 고갱을 맞기 위해, 마치 신부가 신랑을 기다리는 것처럼 고갱의 방을 장식하고자 <해바라기>
연작을 시작한다. 9월 들어 밤에 야외에서 모자 테두리와 이 젤에 촛불을 켜고 그림을 그렸다. 벨기에 시인이자 화가인 외 젠 보흐(Eugene Boch)를 알게 되었고, 노란 집으로 완전히 이사하였다. 10월 초 이사한 방을 화폭에 담아 <아를 화가 침 실>이라 하였다. 고갱을 기다리며 1888년 늦여름부터 가을 사이에 유례없이 격렬하고도 빠르게 그린 약 60여 점의 유화 를 그렸는데 이시기는 <해바라기>, <밤의 카페>, <밤의 카페 테라스>, <아를 화가 침실> 등 빈센트의 대표작이 탄생하는 시기이다.
10월 23일 빈센트의 거듭된 요구 끝에 결국 고갱이 아를로 내려온다. 경제적 위기에 몰렸던 고갱은 자신의 그림을 테오 가 팔아준 보답으로 잠시 아를에 머물려고 내려왔다. 처음에 는 둘이 함께 야외 스케치도 같이 하고 술집 창녀촌을 다니며
a) Precursory events of psychiatric illness
그런대로 잘 지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둘이 붙어있는 시간 이 많아지자 둘 사이에 다툼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다섯살 위인 고갱이 돈 관리와 요리를 맡아서 할 정도로 세련되고 깔끔하였지만, 빈센트는 무절제하고 지저분하고 실생활 면 에서는 무능했다. 기억과 상상력에 의존하여 불완전한 현실 을 수정하여 그려야 한다는 고갱의 주장과, 실물을 관찰하여 현장감 느낌 그대로를 그려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고, 급기야는 서로 존경하는 선배 화가에 대해 비난이 싸움으로 자주 번졌다. 고갱이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과 동생 테오가 약 혼자가 생겨 계속 나를 후원할지에 대한 불안감은 결국 크리 스마스 이브에 터지고 만다.
고갱의 기록에 따르면 12월 23일 빈센트가 면도칼을 가지 고 그를 위협했다고 하였다. 고갱은 서둘러 집을 빠져 나와 여관에서 밤을 보냈고, 같은 날 밤 빈센트는 정신착란 상태 에서 발작하고 왼쪽 귓볼을 잘라내어 그것을 신문지에 싸서 창녀 라셀(Rachel)에게 선물하였다. 다음 날 아침 경찰이 와 서 상처 입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있는 빈센트를 병원으로 데 려갔고, 고갱이 떠나면서 테오에게 형의 상태에 대해 알리자 테오가 즉시 파리에서 아를로 내려오게 된다.
측두엽 간질 진단 하에 당직의사 레이로부터 치료받은 후 1주일이 지나자 놀라울 정도로 회복되어, 1월 7일에는 퇴원 하여 노란 집으로 가게되었다. 하지만 2월 둘째 주, 환청 환시 피해망상에 사로잡혀 1주간 재입원 후 퇴원하였다. 하지만 빈센트의 이상행동에 불안을 느낀 주민들이 시장에게 탄원 서를 제출하여 3월에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야 했으며, 경찰 이 집을 폐쇄하고 외출 시 감시하는 사람이 동반되는 처지가 되었다.7) 4월 17일 테오가 친구 안드레이(Andreis)의 여동생 인 본헤르와 암스테르담에서 결혼을 하였다. 아를에서의 신 체적 자유를 구속 받게 된 빈센트는, 결국 그림을 그릴 수 있 는 장기요양 치료 시설을 알아보고 1889년 5월 8일 아를을 떠난다. 아를에서의 남부 화실에 대한 환상은 그나마 유일하 게 찾아온 고갱과 2달 간의 동거로 끝이 나고 정신병이 발병 하였다. 하지만 15개월 아를에 머문 기간은 가장 빈센트다운 그림이 탄생하기 시작한 시기로, 200점 이상의 유화와 100점 이상의 수채화와 소묘를 그렸다. 또한 가장 많은 200통 이상 의 테오와 편지 교환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 1888/02/20 Arrived at Arles. Painted the series <Or- chards> and <Langlois Bridge> in March and April.
- 1888/05/01 Began living in the Yellow house. Traveled to Saintes-Maries in the Mediterranean in June. Painted
<The Zouave>, <La Mousme´> in July. Started painting the series <Roulin>, <Farmer>, <Sunflowers> in August.
Painted <Portrait d’Eugene Boch>, <The Night cafe´>,
<Terrasse du cafe´ le soir> in September. Finished <The bedroom> in October.
- 1888/10/23 Gaugin arrived. Painted <The Roulin family>
in November.
- 1888/12/23 Cut his ear.b) Discharged from the hospital after 2 weeks at the 7소 of January. Finished <Self-Por- trait>, <Portrait of Madame Roulin>.
- 1889/02/07 Refused meals. Admitted to the hospital due to hallucinations of being poisonedb) and discharge after being treated for 10 days.
- 1889/02/25 Re admitted due to resident complaints.
- 1889/03/23 Signac came to visit in the hospital.
- 1889/04/17 Theo married in Amsterdam.
생레미에서의 화가의 삶과 입원치료
1889년 5월 8일 빈센트는 아를 부근 생레미의 정신병원에 자발적으로 입원했다. 그곳은 아를과 달리 조용한 수도원 분 위기를 풍겼다. 게다가 그가 도착했을 때는 환자가 수용 정 원의 4분의 1밖에 없어서 더 고요했다. 최초 6주는 감금 상태 였다. 식사는 다른 환자와 함께했으나 침실만은 독실을 사용 했고 화실로 사용할 2층의 별실도 부여 받았다. 6월 말부터는 간호인과 함께 병원 밖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어 빈센트 의 여러 대표작을 완성하였다. 7월 중순 야외에서 그림 작업 중 갑자기 발작이 시작되어 9월이 돼서야 회복되었다. 이후 1889년 12월 크리스마스 무렵 1주일간, 1890년 1월 21일부 터 1주일간, 1890년 2월 23일부터 65일간의 가장 긴 정신적 위기상황을 생레미 정신병원에서 맞이한다.7) 정신적 위기 상 황 중간에는 맹렬한 그림 작업이 이루어진다. 9월 앙데팡당 (Inde´pendant) 전에 <별이 빛나는 론강의 밤 풍경>, <붓꽃>
등을 출품했다.
1890년 1월 빈센트의 그림이 브뤼셀에서 개최된 20인(레 벵)전에 폴 세잔(Paul Cezanne),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 sarro), 베르트랑 장 르동(Bertrand Jean Redon), 시냑, 로트 렉 등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었다. 비록 단 한 편이었지만, 빈 센트를 숭고하면서도 그로테스크한 그 생애는 예술과 분리 될 수 없다는 식으로 극 찬양하는 일베르 오리에(Albert Au- rier)의 글이 사회주의 경향의 잡지에 실렸다.
1890년 2월말 빈센트는 다시 발작을 일으켜 2달 만에 겨 우 회복되었다. 테오는 3월 19일 열린 앙데팡당 전에서 빈센 트의 그림이 호평을 받았고 고갱까지도 찬양했다는 소식을 전했으나, 빈센트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빈센트는 <북쪽
b) Appearance of evident psychiatric illness
의 회상>이라는 소묘 연작에 몰두하면서 시골에서 살고 싶다 고 호소했다. 그에게 남쪽(아를, 생레미)은 고통스러운 도시 를 뜻했다. 이제 북쪽 시골로 돌아가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테오와 어머니에게 옛 스케치를 보내 달라고 부 탁했다. 난로 옆에서 머리를 감싸 쥔 노인을 그린 에텐 시절 의 스케치 <영원의 난로>를 유화로 다시 그렸다. 헤이그 시 절의 스케치도 다시 그렸다.
빈센트는 차츰 요양원 생활에 무가치함을 느껴 그곳을 떠 나고 싶어 했다. 테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인상파 원로 화가 피사로를 통해 파리 북쪽 30 km, 기차로 1시간 정 도 걸리는 오베르-쉬르우아즈(Auvers-sur-Oise)에 사는 미술 수집가이자 인상주의 지지자인 의사 가셰를 소개받는다.
생레미병원 측도 빈센트의 오베르 행을 반대하지 않았다.
출발 직전에도 그는 정열적으로 그림을 그려 <실편백나무와 별의 길>을 비롯한 여러 걸작을 제작했다. 생레미 시절은 평 온한 시기였으나, 올리브 나무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꼬인 사 이프러스 배경에는 구름이 휘돌며, 뱀 같은 아라베스크 속에 별이 빛나는 그림들을 그린 시기이다. 평론가들은 이러한 ‘소 용돌이치는’ 표현기법을 단순한 광기라기 보다는 ‘고뇌’의 내 적 이미지를 창조한 것으로 본다. 실제 동 시기에 빈센트는 아를에서 제작한 <해바라기> 등을 다시 모사했으나, 그 그림 들에서는 소용돌이침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단순 광 기가 아님을 증명한다. 아를 시대의 화려한 원색 대비와 보 색의 화려한 사용은 사라지고 색채는 세련되어 조용함과 침 잠의 경지로 나아갔다.
5월 16일 생레미를 떠나 파리로 출발하기까지 약 1년간 생 레미 요양병원에서 빈센트는 150여 점의 유화를 그렸다. 그 것은 질병에 대한 투쟁이자, 자신의 창조력을 추구하고 유지 하려는 투쟁이었다.
- 1889/05/08 Admitted in Saint-Re´my psychiatric institute of his own accord. Finished <Irises>.
- 1889/06 Finished <Wheatfield>, <Olive-trees>, <Starry night>, <Cypress> through his window.
- 1889/07/16 Had a seizureb) while drawing in an outdoor quarry after visiting Arles.
- 1889/09 Submitted <Starry night over the Rhone>, <Iris- es> to the Salon des Inde´pendant exhibition.
- 1889/12 Showed seizuresb) and paint eating behavior.b) - 1890/01/18 Submitted 6 pieces including <Sunflowers>
to the Les XX exhibition and received praise from Al- bert Aurier. <Red Vineyard> was bought by Eugene
Boch’s sister, Anna.
- 1890/01/21 Had a week long seizureb) after meeting the Ginoux couple in Arles.
- 1890/01/31 His nephew was born.
- 1890/02/22 Had a seizureb) while visiting Madame Gi- noux in Arles to give her a portrait, and was depressedb) until late April.
- 1890/03/19 Submitted over 10 pieces to the Inde´pendant exhibition.
- 1890/04~05 Finished <Cypresses>.
- 1890/05/16 Left for Paris alone.
오베르에서의 화가의 삶
혼자 생레미를 떠나 파리에 며칠 머무른 빈센트는 1890년 5월 20일 오베르로 가서 61살의 의사 가셰를 만났다. 그는 처 음부터 빈센트의 병세를 중하다고 보지 않았고, 충분히 휴양 하고 대화 상대만 있으면 곧 치유되리라고 생각했다. 빈센트 역시 처음부터 가셰에 대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가셰도 자신과 같은 우울증 환자로 보았기 때문이다. 가셰는 빈센트 에게 의사로서보다는 슬픔에 잠긴 모델로 공헌했다. 그를 그 린 두 점의 초상화는 빈센트의 초상화 중에서도 걸작으로, 고갱에게 보낸 편지에 ‘우리 시대 슬픔의 표정’이라고 썼다.
빈센트는 도착 이튿날부터 마치 자신이 시한부 생명이라도 되는 듯 시간에 쫓겨 맹렬히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저녁 9시 잠들기까지 하숙집에서 식사 시간 이 외에 모든 시간을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뚜렷한 정신 발작 없이 오베르에 머문 2개월 간 평균 하루 1점 이상, 80점 이상 의 그림을 완성했다. 오베르에서의 특징은 정사각형을 두 개 이은 크기의 긴 장방형 캔버스를 사용하여 파노라마처럼 밀 밭 풍경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반면에 나무, 나무 뿌리, 보리 짚단, 밀 이삭 등을 매우 가깝게 화면 가득 그려 생레미에서 그린 <붓꽃> 이상으로 응축된 느낌을 강조했다. 오베르에서 도 밀레의 영향이 나타나 누에넨 시절 농민 화가의 전통으로 다시 돌아간다. <오베르의 교회>는 빈센트가 누이에게 보낸 편지에 누에넨에서 그렸던 탑과 묘지의 습작과 꼭 같다고 썼 다. <라부의 딸>, <가셰의 딸> 등 초상화를 그렸으나 오베르 에서는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
6월 8일, 가셰의 초대를 받은 테오 부부가 아기를 데리고 오베르를 방문하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나, 6월 30일 테오 의 아들이 아프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걱정이 된 빈센트는 7월 6일 파리의 테오를 방문한다. 갓난아이와 5층 아파트에서 힘 겹게 사는 테오 부부의 집안 분위기를 직접 본 후 실망에 빠 진다. 테오는 여름휴가를 오베르로 오라는 빈센트의 요청 대
b) Appearance of evident psychiatric illness
신 네덜란드로 간다는 편지를 받는다. 테오는 여행에서 돌아 온 직후 편지를 썼으나 빈센트로부터는 답장이 없었다. 점차 테오와의 관계에 불안과 실망이 커졌다.
빈센트는 죽기 5일 전인 1890년 7월 24일 테오에게 보내는 유사한 내용의 편지를 두 번 썼다. 첫 번째 편지는 7월 27일 빈센트가 자살 시도 당시 지니고 있었고, 두 번째 편지는 첫 번째 편지를 수정한 것으로 테오가 파리에서 빈센트로부터 받은 마지막 편지이다. 첫 번째 편지에는 “테오. 너는 단순히 그림을 파는 화상이 아니라 형을 통해 직접 그림을 제작하는 일에 참여하고 있고 최악의 상황에도 그림들은 남는다.”는 결연하고 비장한 내용이어서 일부 사람들은 자살을 암시한 편지라고 주장하였다. 반면 같은 날 테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는 “지금 나는 모든 정신을 집중하여 그림에 몰두하고 있다. 편지에 4점의 스케치(도비니 정원, 초가집, 밀밭 2점) 와 화구 구매 목록을 동봉한다.”는 전혀 자살과는 먼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완성된 밀밭 그림 두 점은 상당히 다른 분위기였다. 하나는 녹색과 황색 대지가 수평으로 놓이고 백색과 청색 하늘이 조 용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었다. 반면 다른 하나는 풍경이 더 욱더 가깝게 그려졌고 세 갈래 길이 나 있으며 하늘에는 불 길한 느낌의 새들이 날아 거친 고뇌의 표정을 담은 것이다.
이 그림이 자살 순간에 그린 그림이라는 주장이 있는데, 사 실은 이 그림 뒤에도 빈센트는 12점을 더 그렸다.
7월 27일 들판에서 자살 시도로 상복부에 총상을 입은 빈 센트는 피를 흘리며 하숙집으로 돌아와 2층 자기 방에 들어 가 누웠다. 가셰가 테오에게 연락해 도착하였지만 빈센트는 더 이상의 처치를 거부한 채 7월 29일 새벽에 사망하였다.
- 1890/5/21 Arrived at Auvers-sur-Oise. Finished <The cottage>, <Road with Cypresses and star>.
- 1890/06/08 The Theo couple visited Auvers-sur-Oise via invitation from Gachet. Finished <L’Eglise d’Auvers- sur-Oise>, <Doctor Gachet>.
- 1890/06 Finished <Wildflowers>, <Ears of Wheat>,
<Landscape with Carriage and Train in the Background>
in mid June.
- 1890/06 Finished <Portrait of Adeline Ravoux>, <Mar- guerite Gachet> in late June.
- 1890/07/06 Visited Theo’s home in Paris. Met Lautrec and Aurier.
- 1890/07/27 Attempted suicide by pistol.b)
- 1890/07/29 Deceased. Was not able to hold a funeral at
church due to the nature of death being suicide (Theo, Andries Bonger, Gachet, Laval, Lauzet, Pissarro, Tanguy and Bernard attended the funeral).
빈센트 사후
가셰가 빈센트의 데스마스크를 스케치했다. 빈센트가 그 림을 그렸던 1층 방에 그의 그림들이 걸려 고별식장이자 회 고전시장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파리에서 베르나르 등 친 구들이 왔다. 자살이라는 이유로 교회에서의 종교적 의식 없 이 그는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테오는 파리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형의 죽음을 알렸다. 그 의 건강은 최악이었으나 형의 작품을 정리하고자 네덜란드 로 갔다. 가족 누구도 빈센트의 그림에 관심이 없어서 테오는 혼자서 그림들을 모두 상속받는다. 테오는 신부전증으로 발 작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다. 사인이 매독 합병증이라고 알 려져 있다.7) 1891년 1월 25일, 33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 는 형이 죽은 지 6개월 뒤였다.
- 1890/08 A memorial exhibition was held at Theo’s house with help from Bernard.
- 1891/01/25 Theo died due to kidney failure by stage 3 syphilis.
- 1892 Jan Toorop and Roland Holst hosted the first ret- rospective exhibition.
- 1914 Theo’s body was moved next to van Gogh.
- 1960 The van Gogh foundation was founded.
- 1973/06/02 Van Gogh museum in Amsterdam was opened.
빈센트가 출생하여 사망까지 거주한 나라 및 도시들은 그 림 1을 참조할 수 있다.
빈센트의 가족력
빈센트의 5대조까지 올라가는 가계를 살펴보면 조각가, 금 세공사, 신학자 출신들이 많은 집안이다.7)
증조부, 조부
증조부 요하네스 반 고흐(Johannes van Gogh, 1763~1840) 는 금세공사로 출발하여 신학교사가 되었다. 조부 빈센트 (Vincent, 1789~1874) 역시 라이덴(Leiden)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유명한 신학자이자 목사였다.
b) Appearance of evident psychiatric illness
부 친
테오도루스 반 고흐(Theodorus van Gogh, 1822~1885)는 1847년 위트레흐트(Utrecht)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1849년 준데르트 교구 목사가 되었다. 그는 교리를 철저히 따지는 정 통파와 새로움을 추구하는 중간쯤에 속한 그로닝겐(Gron- ingen) 파에 속했다. 아버지만큼의 명성은 없으나 점잖고, 성 실하고 모범적이며 책임감 있게 목사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 다. 빈센트와 대립 각을 세웠던 부친은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모 친
안나 카벤투스(Anna Carbentus, 1819~1907)는 9남매 중 장녀로, 그녀의 아버지 빌럼(Willem, 빈센트의 외할아버지) 은 유명한 왕실 재봉사였다. 외조부모는 빈센트가 태어나기 전 사망하여 그에게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87세에 사망한 그녀는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로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고 알 려져 있는바 빈센트의 천재성은 모친으로부터 온 듯하다.
Fig. 1. The flying dutchman.
6형제들
1851년 5월 21일 헤이그에서 결혼한 부모는 1년 후에 사산 된 아이를 출생하고, 이어 6남매를 출산한다.
1) 안나(Anna, 1855~1930)는 빈센트가 영국에 있을 때 프 랑스 교사로 같이 있었는데, 이후 사이가 멀어져 별 교류는 없었다.
2) 테오(1857~1891)는 빈센트의 평생 조력자로 빈센트 사 망 6개월 후 사망한다. 사인은 매독 후유증이었다. 심약하고 우울증을 앓았다고 알려져 있다. 1889년 테오가 작성한 금전 출납부를 보면 당시 14000~15000 프랑의 연간 수입이 있었 고 매달 100~150 프랑을 빈센트에게 송금하였다.
3) 엘리사벳 휘베르타(Elisabeth Huberta, 1859~1936)(=리 스, Liz)는 둘째 여동생으로 변호사의 딸을 몰래 출생하여 은 둔생활을 하였다. 빈센트 생전에 별로 친하지 않았으나 1910 년 빈센트의 회고록을 저술하였다.
4) 빌레미나 야코바(Willemina Jacoba, 1862~1941)(=빌, Wil)는 빈센트와 가장 가까웠던 동생으로 편지 왕래가 잦았 다. 노처녀로 어머니의 분신 역할을 하였다. 1902년 조현병으 로 정신병원에 입원하여 79세에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쳤다.
5) 코르넬리스 빈센트(Cornelis Vincent, 1867~1900)(=코르, Cor)는 결혼 실패 후 남아프리카 보어 전쟁에 자진 참여하였 다가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다.
제수, 조카
테오의 아내 본헤르(1862~1925)는 빈센트 사후에 회고전 을 개최하고, 수백 통의 편지를 정리하여 출간하였다. 테오 사 후 화상에게 재가하여 여러 곳에 흩어진 빈센트의 그림들을 수집하고 편지들을 모아 정리 후 번역하고 편집하는 일을 하였다. 빈센트의 조카이자 테오의 아들인 빈센트 빌럼 반 고 흐(Vincent Willem van Gogh, 1890~1978, 빈센트와 동명)는 공학도로 엔지니어 사업가였다. 1960년 반 고흐재단을 설립 하고, 1973년 암스테르담 고흐 미술관 설립자로의 역할을 하 였다.
친삼촌
3명 모두 화상이다.
1) 핸드릭 빈센트 반 고흐(Hendrik Vincent Van Gogh, 1814~1877)는 브뤼셀에서 화상으로 일하였다.
2) 빈센트 반 고흐(일명 센트, 1820~1888)는 구필 화랑 헤 이그 지점 창시자로 빈센트와 테오 반 고흐를 화랑에 취직시 켰고 후원자 역할을 하였다.
3) 코르넬리스 마리뉘스(Cornelis marinus, 일명 코르, 1824~1908)는 암스테르담에서 화상으로 일하였다.
이외에 외삼촌 요하네스 반 고흐(일명 얀, 1817~1885)는 암스테르담 선박제조회사 운영자로 빈센트가 신학 공부 시 절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매제인 모베는(1838~1888) 헤이그 학파의 거장으로 한때 빈센트에게 그림 지도를 하였다.
가족력 요약
친척 간에 교류가 많은 대가족(18명의 삼촌과 고모)으로 가족 결속력이 좋아 빈센트에게 여러모로 조력해주었다. 가 족 내 빈센트 이름은 여러 명이 등장한다. 이는 네덜란드 전 통으로 가업을 이어가라는 대물림의 의미가 이름에 부여된 다. 빈센트가 살던 시절만 보더라도 조부(목사), 삼촌(화상), 죽은 형, 본인, 테오의 아들인 조카 총 5명에게 ‘빈센트’ 이름 이 주어졌다(그림 2).
가족의 정신 병력은 빈센트의 6형제 중에서 4명(빈센트, 테 오, 빌, 코르)이 정신질환력이 있으므로 유전부하가 높은 기 분장애가 추측된다. 빈센트가 모친의 언니, 즉 이모가 간질이 라는 보고를 빈센트가 주치의 페이롱에게 한 기록이 있고, 빈 센트 친 사촌 중 몇 명이 간질이라는 연구가 있지만, 당시 간 질이란 용어는 의학적 용어라기보다는 일반적 용어로 뇌 경 색, 정신 발작과의 구별이 어려웠던 시기이다.8)
병전 성격
빈센트의 성격을 세상 누구보다도 잘 아는 테오는 누이동 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형에게는 2명의 상반된 사람이 존재 한다. 하나는 경이적인 천재성, 부드럽고 섬세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이기적이고, 강압적인 사람이다”라고 썼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간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빚고 파국을 초래 한 주 원인은 그의 독특한 성격임으로 이를 살펴보는 것은 매 우 중요하다.
의학적 관점에서 빈센트의 성격에 대한 첫 언급은 1950년 대 간질 환자들의 독특한 성격에 대한 연구이다. 측두엽 간질 에 정통한 Gastaut9)는 1956년 빈센트의 진단을 측두엽 간질 로 보았으며, 그 질환 특유의 끊임없는 논쟁으로 상대방을 질 리게 하는 점액질적(viscosity) 성격, 과필증(hypergraphia), 이타적 과사회성(hypersocial), 종교적 과몰입, 극단의 반대 되는 양면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전형적 측두엽 간질 성격들 이 빈센트에게 나타났다고 하였다.
Mehlum10)은 최초로 빈센트 진단에 경계성인격장애를 제 안하였다. 저자 역시 DSM-511) 경계성성격장애 증상 9가지 (① 버림받지 않으려는 필사적 노력, ② 과대평가-과소평가 의 극단, ③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불안, ④ 자신을 손상시킬 충동적 행동, ⑤ 자살/자해, ⑥ 기분의 불안정성, ⑦ 만성적
공허감, ⑧ 분노조절 못함, ⑨ 일시적 피해사고나 해리증상) 중 진단기준인 5개 이상을 충분히 만족시킨다고 판단된다.
Meekren7)은 클로닌저(Cloninger)의 신경전달물질에 의한 기질 특성 분류(temperament and character inventory)12)에 빈센트를 적용해 보면, 새로운 것을 찾으려 끊임없이 노력하 는 점은 높은 Novelity Seeking(도파민)에 해당하고, 장애물 을 피하지 않고 맞서는 점은 낮은 Harm-Avoidance (세로토 닌, GABA)에 해당되고, 타인의 인정이나 현실적 이익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가치에 우선 순위를 두는 점은 낮은 Reward Dependence(노르아드레날린)에 해당되며, 타협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는 점은 높은 Persistence(세로토닌)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이를 좀더 빈센트의 긍정적 성격측면에 서 부연 설명하면, 당장의 보상이 목표가 아닌 예술적 가치 에 대한 순교자적 책임감, 목표에 대한 집중성, 엄청난 독서 량이 말해주듯 자기만의 뭔가 새로운 것을 찾으려 끊임없이 노력하는 면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긍정적 성격 형성의 배경 에는 조부-부로 이어지는 기독 정신과 빈센트라는 이름이 뜻 하는 ‘고흐 가문의 계승자’, 죽은 형의 부활한 대치물로서 세 상에 뭔가 의미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작용했으 리라 여겨진다.
유명인들의 성격을 가장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방법 중 하 나는 그들에 관한 영화를 보는 것이다. 국내에서 상영된 빈 센트에 관한 영화는 6편인데, 이 중 2편의 영화가 빈센트의 성격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 여겨진다. 첫째, 로버트 알트
만(Robert Altman) 감독의 1990년 영화 ‘빈센트와 테오’이 다. 추한 외모에 직설적이고, 이기적이고, 일방적이고 광기 어린 행동으로 주변인들과 끊임없이 분쟁을 초래하는 빈센 트와, 예민하고 날카롭고 심약한 테오와의 갈등 관계를 사실 적으로 그렸다. 둘째, 모리스 피알라(Maurice Pialat) 감독의 1991년 ‘반 고흐’이다. 빈센트가 오베르에 도착하여 사망하기 까지 최후의 67일간 벌어진 소소한 일상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빈센트는 부정적 냉소적 이성의 소유자로 자책 감, 굴욕감, 피해 의식에 휩싸여 충동적으로 주변인들을 공격 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테오는 자신의 그림을 팔지 않고 오 히려 자신을 착취하는 가해자로, 주치의 가셰는 딸과 빈센트 의 사랑을 반대하는 위선자로 간주하여 폭력을 행사하는 인 물로 묘사하였다.
이밖에 빈센트에 관한 4편의 영화를 연도 순으로 간략히 소 개하면 1) 빈센트 미넬리(Vincente Minnelli) 감독의 1956년 작품 ‘삶의 욕망(Lust for Life)’이다. 이 영화는 벨기에 보리나 주 탄광 전도사를 시작으로 죽을 때까지를 다룬 전기적 영 화로, 빈센트를 순수한 열정적 성격의 예술가로 미화하였다.
2) 2013년 상영된 ‘위대한 유산(The van Gogh Legacy)’이다.
테오의 아들이자 빈센트의 조카인 빈센트 빌럼 반 고흐가 여 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반 고흐 재단’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3) 2017년 상영된 ‘러빙 빈센트’라는 애니메 이션 영화이다. 빈센트가 죽은 지 1년 후, 아를 하숙집에서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1통이 발견된다. 이를 평소 Fig. 2. Family tree of Vincent van Gogh.
Vincent (1720-1802)
Vincent
Vincent Hein Cor
Cor Vincent
(1789-1874) Vincent (-1746) Johannes
Willem Anna
Vicent Willem
Vicent Willem Still birth
Van Gogh Anna
Anna Theo Lies
Jonna Bonger
Wil Theodorus
Elisabeth Johannes
(1763-1840)
친했던 우체부 조셉 룰랭(Joseph Roulin)의 아들인 아르망 룰랭(Armand Roulin)이 직접 테오에게 편지를 전하려는 과 정에서 만나는 사람들로부터 얻는 빈센트에 관한 평판이 너 무 달라 혼란스러워진다. 특히 주치의 가셰를 위선자로 혹은 빈센트 자살 유발자로 보는 관점과, 빈센트가 자살을 시도한 것이 아니고 르네(Rene´)라는 동네 불량배에 의한 타살이라 는 극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4) 2018년 상영된 ‘영원의 문 (At Eternity’ Gate)’이다. 이 영화는 파리에서 고갱과 만남을 시작으로 죽기까지 빈센트라는 화가의 눈에 비친 세상을 묘 사한 영화이다. 일반인들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빈센트의 그 림 작업으로 인해 주변인들과 다툼, 조롱, 폭력을 당하고, 환 청, 환시와 싸우면서도 자신이 느끼고 본 세상을 그림을 통해 전달하려는 의지를 표현한 가장 빈센트적 관점의 영화이다.
정신병 발병 전 문제행동들
빈센트의 어린 시절 몇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이 있 다. 첫째는 사산된 형이 출생한 지 1년 후, 같은 이름으로 태 어난 빈센트에게 정신분석가들은 교체된 아이(replacement child), 죽음-부활-재탄생, 이중(double), 쌍둥이 등의 숙명 적인 수식어들을 붙인다.13) 어린시절 빈센트가 죽은 형을 어 떻게 받아들였을지? 동생 테오와의 관계도 이런 관점에서 연 결되는 것인지? 교체된 아이를 양육하는 모의 태도는 어땠는 지 확실치 않다. 일각에서는 1872년 통계를 보면 사산되거 나 출생 후 바로 사망한 영아가 25%를 차지할 정도로 흔했 으며, 같은 이름을 가족 내에서 사용하는 일은 네덜란드 가정 에서는 매우 흔한 일로 사산된 형에 대한 의미를 축소하였다.
빈센트 역시 죽은 형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었다. 한편 그가 성장한 지역은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이고 개신교는 소수인 지역으로 ‘아웃사이더’ 감정을 가지고 성장했을 가능성이 높 다.7) 학창 시절 알려진 바에 의하면 사색적이고 어학에 출중 했으며 다양한 분야의 어려운 책을 읽었다고 하였으나 중학 과정을 1년 반만 하고 중퇴하였다. 단순히 집을 떠나 향수병 에 걸렸던 것인지, 학교 부적응 때문인지, 심각한 정신적 위 기상황이 있었는지? 확실치 않다.
20대 초반에 무모하게 짝사랑한 런던 하숙집 딸에게 거절 당한 후 발생한 우울증은 인생의 첫 위기 상황이 된다. 그 일 로 인해 빈센트는 종교에 빠져들고 직장생활에 대한 관심이 사라져 결국 직장에서 해고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후 여러 거 주지와 직업을 전전하며 아버지를 포함한 주변인들과의 문 제를 계속 일으킨다. 보리나 주 탄광 전도사의 품위 손상, 즉 전도사인지 걸인인지 구분이 안되는 행동으로 인한 해직과, 과부 이종사촌 스트리커에게 끈질기게 구혼을 요청하다 거
절당하자 등잔불에 손을 넣는 자해소동을 벌였으며, 이후에 도 스토커 수준의 집착을 계속 보였다. 1880년 전도사 해직 전후 보인 문제행동, 1881년 이종사촌 스트리커에 대한 문 제행동으로 2차례 아버지는 빈센트를 정신병동에 입원 조치 하려고 하였다.14) 빈센트의 아버지가 생각한 정신병 발병은 27세인 것이다. 아버지와 다툰 후 집을 나가 헤이그에 살던 빈센트가 3살 연상의 아이 딸린 임신한 창녀 시엔을 ‘위대한 여인’이라 칭하고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법적 보호조치를 취하려 하였고 빈센트는 이에 강력히 저항하였 다. 빈센트의 그러한 마은은 당시 테오에게 보낸 1882년 6월 1일 편지15)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대인관계에서의 격한 대립은 아버지 외에도 모베, 라파르 트와의 관계에서도 보여진다. 그림 스승이자 친척인 모베와 는 창녀 시엔과의 관계에 대한 격한 논쟁 후 단절되었고, 그 림 친구 라파르트는 <감자 먹는 사람들>에 대한 비평에 분 노한 후 갑작스러운 단절이 발생한다. 자기 징벌적 신체적 자 학행동도 흔했다. 신학대학 입시 준비 중 보인 신체적 자학행 동은 결국 입시를 포기하고 전도사의 길로 전환하게 되었다.
전도사 해직 후에는 100 km 이상을 1주일 넘게 고행하듯 걸 어서 전도사 임명자를 찾아가거나, 존경하는 농민 화가 브르 통 집에 수일간 걸어갔다가 그냥 되돌아오는 적도 있었다.
파리에서의 2년간은 테오와의 동거로 인해 편지 왕래가 없 었기에 객관적 자료는 한정적이다.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 면서 과거 금욕적인 수도자 생활에서 과음과 퇴폐적인 생활 로 바뀌며 감정기복, 경조증, 알코올 행동 문제가 발생한다.
주요정신병 발병 전 이러한 문제행동들은 경계성인격장애 증상으로 잘 설명된다.7)
정신병 발병
빈센트의 정신병 발병 시점을 자해사건이 벌어진 1888년 크리스마스 이브인 12월 23일부터로 보는데 대다수가 동의 할 것이다. 고갱에게 신체적으로 위협 행동을 보였으나, 방어 에 나선 고갱에게 위축된 빈센트는 집으로 돌아와 왼쪽 귓볼 하단부를 잘라 수건에 싸서 라셀이라는 창녀에게 “잘 보관해 라”라고 전해준다. 수건을 펼쳐본 라셀은 놀라서 경찰에 신 고한다. 빈센트는 집을 찾아온 경찰에게 횡설수설하여 병원 에 입원하게 되고 고갱은 바로 떠나버린다. 이 기이한 행동은 지역신문에 보도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자해 행동에 대해 그간 제기된 정신분석학적 위주의 13가지의 가정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테오가 약혼을 하게 되어 자신을 떠날지 모른다는 낙담 상태에서 동거인 고갱마저 떠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대
두되면서 공격적 충동이 고갱에게로 향하게 되고, 이어 자신 에게로 공격 방향이 바뀌어서 귀를 자해한 행동이 일어났다 는 가정이다.16)
2) 독일어로 귀(lel)는 남성의 성기(lul)와 비슷한데 빈센트 가 남성 성기를 의미하는 자신의 귀를 자름으로써 고갱을 향 한 동성애적 충동을 스스로 거세했다는 가정이다.17)
3) 빈센트가 증오했던 아버지를 상징하는 인물인 고갱에 게 향한 분노가 자신에게로 화살을 돌려 성기를 상징하는 귀를 거세했다는 Oedipal theme에 근거를 둔 해석도 가능하 다. 잘린 귀를 창녀에 가져다 주는 행동은 어머니를 차지하 고 싶은 소망을 충족한 것으로 해석된다.18)
4) 승리한 투우사가 상으로 소의 귀를 받아 그가 선택한 여 성에게 주는, 당시 투우 경기의 관습을 빈센트가 보고 모방하 였다는 가정이다. 이 관점은 빈센트가 승리자이자 동시에 희 생된 소가 되어 이를 재현했다는 것이다.16)
5) 당시 매춘부들을 토막살인하여 악명을 떨치던 잭 더 리 퍼(Jack the Ripper)를 모방하였다는 가정이다. 피학적인 빈 센트가 스스로 귀를 자르고, 매춘부에게 이를 가져다 줌으로 써 원래 사건에서의 역할을 반전했다는 주장인데 빈센트가 기사를 읽고 모방했다는 근거는 희박하다.16)
6) 테오가 예년과는 달리 크리스마스 휴가를 그의 약혼녀 와 보낼 것을 알고 관심을 끌기 위한 무의식적인 전략이었 다는 가정이다.19)
7) 룰랭 가족의 관심과 보살핌을 얻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가정이다. 빈센트는 자해사건이 있기 얼마 전부터 룰랭 부인 을 모델로 그림을 그리다 룰랭 가족과의 큰 애정과 관심을 가졌다고 한다.19)
8) 빈센트는 평소 매춘부들과 자신을 사회의 낙오자로 동 일시하였다. 사건 6개월 전 편지에 “매춘부는 정육점의 고기 와 같다”라는 문구를 쓰기도 했는데, 사건 당일 그는 매춘부 와 그의 역할을 반전시켜, 자신의 몸을 정육점의 고기처럼 다 뤘다는 해석이다.16)
9) 자해 동기는 어머니로부터 더 긍정적으로 인식되고 싶 은 소망이라는 가정이다. 빈센트는 어머니가 항상 자신을 거 칠고 나쁜 아이로 여김으로, 정신증적 상태에서 남성적이고 공격적 심볼인 융기된 부분, 즉 귀를 자름으로써 그가 공격 적이지 않고, 약한 존재임을 어머니를 상징하는 창녀에게 보 여주었다는 것이다.16)
10) 환청 때문에 자해했다는 가정이다. 자해 당시에는 귀의 신경 이상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 후 반복되는 환청이 다른 환자들에게서도 나타난다는 사실을 요양원에서 알았 다고 빈센트 자신이 편지에 기술하였기 때문이다.19)
11) 성경에 나오는 겟세메네 동산에서의 장면(예수를 체포
하러 오는 사람의 귀를 자름)을 스스로가 공격자 및 희생자 가 되어 재현했다는 가정이다. 실제로 빈센트는 같은 해 여름, 이 장면을 그리려 했다고 한다.19)
12) 갈보리 언덕에서 성모 마리아가, 예수가 십자가에 희 생된 신체를 애도하는 장면을 상징적으로 재현했다는 가정 이다. 빈센트가 대리모인 창녀 라셀에게 그의 희생된 신체를 전달함으로써 이를 재현했다는 것이다.16)
13) 어머니의 사랑을 쟁취하는 동시에 죽은 아들에 대한 어 머니의 애착을 비웃고자 죽은 형을 상징하는 신체 일부분(귀) 을 제거하여 어머니(창녀)에게 가져다 주는 자해 행동을 하 였다는 가정이다.16)
정신병 발병과 경과
빈센트는 188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귀를 자르는 자해 사 건을 포함하여 대략 6번의 정신적 위기를 심하게 겪는다. 위 기상황이란 혼돈, 의식변화에 따른 기억상실, 환청, 피해망 상, 자살 자해 행동을 지칭한다. 반면에 위기 사이에는 놀랄 정도의 빠른 회복과 명석함을 편지나 그림 그리기를 통해 증 명하였다. 하지만 그 기간에도 기분기복이나 기분부전은 있 었으리라 추정된다. 6번의 큰 위기상황을 정리해보면 아래 와 같다.7)
아 를
1) 1888년 12월 23일부터 1주간: 왼쪽 귓볼을 칼로 자른 빈센트는 다음날 24일 아를병원에 가게 되고, 간질 분야에 경험이 있던 젊은 당직의사 레이를 만나 간질 발작으로 진 단되어, 당시 항경련제로 알려진 칼슘 브로마이드 약제가 투 여된다. 26일 우체부 룰랭은 테오에게 빈센트가 심신이 너무 쇠약해져서 정신요양소에 입원해야 할 것 같다는 편지를 보 냈고, 27일에도 빈센트가 독방에 묶여있고 음식을 거부하며 조용히 있다고 편지를 썼다.
하지만 31일 빈센트를 방문한 살레(Salles) 목사는 차분하 고 조리있게 말하는 빈센트를 보고 놀랐다. 1월 첫 주에는 자 유로이 병원 산책이 가능해졌고, 1월 2일에는 테오에게 안심 시키는 편지를 썼다. 1월 3일 룰랭은 테오에게 너무 걱정을 끼치는 편지를 보낸 경솔함을 자책하였다. 1월 7일 빈센트는 퇴원하였다. 1월 9일 테오에게 결혼 축하 편지를 썼고, 1월 17일 테오에게 고갱이 노란 집에 남기고 간 스케치 그림 소 품들과 빈센트의 <해바라기>를 교환하자는 제안에 대해 불 공정함을 비난하는 편지를 썼으며, 1월 22일에는 고갱에게 직접 자신의 잘못이 더 컸다는 편지를 조리있게 써서 보냈다.
붕대를 감은 자화상 그림도 2점 그렸다.
2) 1889년 2월 9일부터 1주간: 2월 둘째 주부터 빈센트는 피해망상에 사로잡혔다. 살레 목사는 빈센트가 3일 전부터 독살범과 독극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보이며, 극도로 불안 하여 담요 밑으로 숨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우는 행동을 보 였다고 하였다. 다시 아를병원으로 간 빈센트에게 칼슘 브로 마이드가 처방되었지만 진정되지 않았다. 이번 발작은 그간 아를에서 보호자 역할을 해오던 친구 룰랭이 마르세이유 (Marseille)로 전근을 가게 되어 홀로 남게 된 불안한 상황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2월 17일에는 의식이 명료한 상 태에서 테오에게 편지를 쓸 정도로 회복되었다.
퇴원하여 집으로 갔지만 주민들은 그를 빨간 머리 미친놈 (fou roux)이라 칭하며 다시 입원시키던지 고향으로 보내라 고 아를 시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한다. 2월 26일 빈센트는 자 진하여 아를병원에 재입원하여 6주를 보낸다. 재입원을 결 정하게 된 경위는 술, 담배를 줄이고, 식사를 잘하라는 의사 레이의 지시가 지켜지지 않았으며, 자주 집 창문을 열고 뭔 가가 보이고 들리는 듯 위협적으로 고함치는 환청, 환시 증 상이 동네 사람들에게 문제가 되었다. 목사 살레가 테오에게 보낸 3월 2일 편지에 의하면, 술 취한 상태에서 동네 아이들 과 부녀자들에게 위협적인 행동과, 여자들에게 신체적 접촉 을 시도했다고 하였다. 3월 18일 목사 살레는 빈센트가 자신 에게 일어난 일을 명확히 설명하지는 못했지만, 놀랍게도 회 복되어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하였다.
3월 23일 빈센트를 방문하였던 화가 시냑은 테오에게 형은 심신이 모두 건강하다는 편지를 썼다. 4월 19일 살레 목사는 자기가 보기에는 빈센트는 정신병 증상은 없어졌으나, 빈센 트 자신은 뭔가 예전과 비교할 때 달라진 것 같고, 자신을 조 정할 수 없는 느낌이 간혹 든다는 말을 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생레미
결국 1989년 5월 8일 생레미 요양원에 자진 입원하게 되는 데 동반자 살레 목사에 의하면 입원 과정에 어려움은 없었고, 빈센트는 차분하게 자신의 증상을 담당 의사에게 설명했다 고 하였다. 담당의 페이롱은 해군 군의관 출신으로 은퇴를 앞둔 안과 의사였다. 정신과 혹은 신경과적 특별한 전문 지 식은 없는바 레이의 간질 진단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치료 는 주당 2회 2시간 목욕요법(hydrotherapy) 이외에 약물 투 여는 하지 않았다. 식사는 다른 환자들과 같이했지만 침실은 독방을 사용했고 화실로 사용할 2층 별실도 부여 받았다. 빈 센트의 가장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별이 빛나는 밤에(The Starry Night)>가 1889년 6월 중순 병실에서 탄생한다. 6월 말 더욱 안정된 빈센트는 간호인과 병원 밖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페이롱이 병록지에 간략히 기술한 기록
에 의하면, 7월 중순부터 생레미에서는 4번의 심각한 발작이 있었는데 그 중 3번은 아를 방문 후였다. 외박 후 상태가 안 좋아진 이유는 무절제한 폭음이 가장 큰 이유가 되고, 현실 적 스트레스에 직면하게 된 이유 또한 추측된다.
1) 1889년 7월 16일부터 45일간: 아를 방문 후 재발하였다.
테오 반 고흐로부터 전시회 기획자인 모스(Moss)가 빈센트의 작품 2점을 출품하려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지 얼마 후, 테오 부인으로부터 자신이 임신하였으며 테오의 건강이 염 려된다는 말을 듣게 된다. 얼마 후 야외에서 그림 작업 중에 발작이 시작되어 5일간 지속하였고 자살을 기도하였다. 병원 에서는 페인트 먹는 것을 우려하여 그림 작업을 8월 말까지 중단시켰다.
2) 1889년 12월 24일부터 1주간: 자해사건 1주년을 맞는 반 응(anniversary reaction)처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뭔가가 이 상하고 혼란스러웠지만 다행히 1주일만에 망상도 사라졌다 고 여동생 빌에게 편지를 썼다. 주치의 페이롱은 테오에게 빈 센트가 페인트를 먹고 발작을 했다고 전하였고, 테오는 빈센트 에게 주변에 있는 페인트가 위험하니 치우라고 편지를 썼다.
3) 1890년 1월 21일부터 1주간: 1월 20일 누이동생 빌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곧 일어날 위기상황에 대해서 예견할 만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다음날 의사 페이롱은 횡설수설 하는 등의 새로운 발작이 아를에 갔다 온 이튿날부터 1주간 있었다고 테오에게 보고하였다. 빈센트는 1월 30일경 테오 부인으로부터 조카가 탄생되었다는 편지를 받게 된다.
4) 1890년 2월 23일부터 65일간: 또 다른 위기가 아를 방문 후 일어난다. 2월 20일에 동생 빌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곧 일어날 위기상황에 대해서 예견할 만한 내용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인 2월 24일 의사 페이롱은 마차와 2명의 사람 을 보내 아를 방문 중 증상이 재발한 빈센트를 병원으로 데려 오게 한다. 4월 1일 의사 페이롱은 이번 발작은 예전과 달리 오래간다고 하였다. 금방 좋아졌다가 갑자기 우울해져 묻는 말에도 전혀 반응을 하지 않았다. 4월 24일까지 편지를 쓰지 않았고 온 편지도 읽지 않았다. 빈센트는 2달 동안 우울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하였다. 5월 16일 빈센트는 보호자 없이 혼자서 생레미병원을 떠나 파리 테오 집에 잠시 머물고, 이어 파리에서 27 km 떨어진 근교 오베르 쉬아즈(Auvers sur oise) 의사 가셰에게로 간다. 오베르 쉬아즈에서 2달 반 정신 적 위기상황을 보이지 않던 빈센트는 7월 말 자살로 결국 생 을 마감한다.
19세기 정신의학, 주치의들의 역할
19세기 말 독일에 주도권을 넘겨주기 전까지 프랑스는 19세